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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회심

by 【고동엽】 2009. 4. 19.

1. 브레이너드(1718~1747)에 대한 간략한 소개

 

브레이너드는 18세기 최고의 미국 청교도인 조나단 에드워즈에 의해 알려진 인디언 선교사이다. 그는 1718년 4월 20일 미국 동부 코네티컷(Connecticut)의 헤이담(Haddam)에서 5남 4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9살 때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목사의 딸이었던 어머니도 14살 때 세상을 떠나셨다. 어릴적 양친을 잃은 그는 온순했지만, 우울해지는 경향이 있었는데, 때로 우울(melancholy)과 경건한 슬픔(godly sorrow)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를 그의 장인인 에드워즈와 대화를 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우울증 덕택에 풍부한 감정의 소유자가 되었다. 그의 우울증은 일기에서도 나타나는 그의 특징적 내면성이다.1)

그가 1739년에 회심할 때까지 구원에 대한 두려움에 늘 사로잡혔다. 그의 회심은 그가 예일대학에 있었을 때에 일어났다. 그 후 브레이너드는 대각성의 여정에 빨리 들어갔다. 그런데 당시 예일 대학 담당 교수였던 위틀레시(Whittlesey)가 기도모임 때마다 분위기를 썰렁하게 하자 그를 가리켜 “이 의자만큼도 은혜가 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하였다.2) 그런데 이 말이 오해의 소지가 되어 예일대학에서 퇴학을 당하게 되었다.3) 게다가 그 지역의 목회자들에게 미움을 사고 말았다. 1743년에 그는 학위를 받기 위해서 확실한 사과를 하겠다고 제안했으나 그의 제안은 거절되었다.4) 이 사건은 그의 연약한 심성에 많은 상처를 주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세상의 명예와 학위에 대한 애착을 끊고 경건생활을 하는 가운데 ‘이교도의 구원’을 위하여 선교를 해야 할 사명을 느꼈다. 1742년에 브레이너드는 인디안들에게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단지 수백 명의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29세라는 꽃다운 청춘에 폐결핵과 지나친 과로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2. 브레이너드의 회심

 

브레이너드의 회심에 대해서 그의 일기에 나타난 회심의 과정을 요약해 본다.

1) 하나님 없이 우울하게 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온순한 편이었지만, 우울해 지는 경향이 있었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시던 때에 나는 나의 영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죽음은 생각만 해도 무서웠다. 그러면서 나는 신앙생활에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의 나의 신앙생활이란 놀고 싶은 충동을 망가뜨리는 우울한 일로 여겨지기만 했다. 슬프게도 이런 신앙생활이 일시적인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가끔 은밀한 기도회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13살이 되기까지는 별관심도 없었고 세상에서 하나님이 없이 살았다.

 

2) 회심인줄 알았으나

1732년 겨울에 나는 안일하게 살아오던 육신적인 나태에서 처음으로 깨어났다. 당시에 내가 살던 헤이담(Haddam)에는 무서운 전염병이 맹렬한 기세로 휩쓸고 있었다. 나는 여러 번 반복해서 열심히 기도했다. 그리고 나는 독서에도 취미를 붙였는데, 특히 『아이들의 회심 이야기』(Token for Children)5)이란 책을 읽었다. 나는 신앙생활에 조금씩 젖어 들어갔다. 예배드리는 일이 상당히 즐거웠다. 나는 가끔 회개하고 싶었고, 적어도 천국과 행복의 길에 들어가기를 소원하기도 했다. 회개가 뭔지도 몰랐으면서 말이다. 이때 성령께서는 나보다 훨씬 앞서 일하시고 계셨다. 나는 세상에 대하여 놀랄 만큼 냉담해졌다. 내 생각은 내 영혼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기독교인이 된 것이 틀림없어” 라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1732년 3월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후로, 나는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우울함에 빠져 들었다. 이후로 나의 신앙생활을 침체되기 시작했다. 기도생활은 여전히 하고 있었지만 매우 안일한 생활에 빠져들었다.6)

 

3) 원위치로

나는 동부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 4년을 지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았다. 대부분 예배당 근처를 맴돌고 있기는 했지만, 나는 젊은 애들과 패거리를 짓기도 하고, 그들의 즐거움에 그렇게 심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참여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만남을 가지고 난 후 돌아올 때는 갈 때 만큼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항상 죄책감만 늘어갔다.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기가 두려웠으며, 방종할 때 가끔 일어났던 기쁨까지 망쳐버렸다. 참 기쁨이란 자기 도취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는 의욕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어늘, 얼마나 서글픈 일이었던가~!

 

4) 다시금 꿈틀거리는 회심의 기운 (humiliation)

1738년 4월. 나는 Fiske 목사님의 권면에 따라 나보다 품위있고 나이가 좀 있는 자들과 교제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서 나의 생활 태도는 과거와는 달리 신앙심이 넘쳤으며, 이제는 아주 규모있게 되었다. 예컨대, 1년이 채 가기도 전에 성경을 2독했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일에 매일 대부분의 시간을 사용하였다.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큰 관심을 기울이며,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쏟았다. 나는 신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주일 저녁이면 젊은 몇 사람과 만나 예배를 드렸는데, 이러한 일은 매우 중요한 일로 생각되곤 했다. 우리의 모임이 끝난 뒤에는 그 날의 설교를 스스로 묵상하곤 했는데, 그 시간이 끝나면 깊은 밤이 되는 것은 흔했다. 어떤 때는 월요일 아침에도 그 설교를 회상하곤 하였다. 때로는 예배가 즐거움을 주었다.

1738년 겨울 어느 주일 아침. 그 날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날이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길을 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진노와 위기의식이 갑작스럽게 나를 휩쌌다. 이제껏 좋은 기분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내가 지은 죄와 더러운 행실이 온종일 나를 괴롭혔다. 줄곧 엄습하고 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느꼈다.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나를 사로잡았다. 날이 갈수록 큰 비탄에 빠져드는 때가 빈번해졌다. 내 앞에는 긍휼을 바라는 나의 희망을 가로막는 산들이 첩첩이 나타났다. 회개할 일이 너무 많아서 그 제목만이라도 헤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듯 했다. 그렇지만 나는 하나님 앞에서 울며 기도하곤 했다.

기도 중에 상당한 선량한 모습을 느꼈다. 나는 죄를 원통해 하는 듯했다. 내 생각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상당히 의탁하는 것 같았다. 이 강렬한 인상으로, 내 마음에 심어진 선량한 모습은 희망의 기반이 되었다. 그것은 기도할 때에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게 하였고, 기도를 굉장히 넓혀주었다. 하나님께서는 감정을 가지고 계시므로 내가 부르짖을 때 중요한 간구는 들으시리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가끔 큰 비탄에 빠질 적에도 은밀한 기도를 드리고자 엎드리면 나는 다시 평안을 찾을 수 있었고 나의 일에 정상적으로 임하게 되었다.

1739년 2월, 은밀히 기도하기 위한 날을 정했다. 내 눈을 열어 죄악을 보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길을 열어주십사고 거의 온종일,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기 위해 끊임없이 울부짖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 내 마음에 놀라운 깨달음을 기꺼이 허락하셨다. 나는 여지껏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선한 태도가 없었으면서도 그걸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하는 일에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려는 관심도 없었다. 그 날 하나님께서는 나의 무력함을 어느 정도 보여주시기 위하여 홀로 애쓰는 것을 허용해 두신 것 같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며 마음에 들어 하신다는 생각을 해보고, 때로는 내가 하나님을 온전히 만족시켜 드리는 것으로 생각도 하며 크게 용기를 얻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잘 되어가고, 감정이 뜨겁게 고조되며, 행실을 고치려는 결심 같은 일들이 일어날 때 흔히 있는 순전한 추측에 불과한 것이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하는 나 자신의 비열함과 무능을 생각하면 큰 괴로움이 생겼다. 이 괴로움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런 생각을 지워버리곤 했다.

그러나 내가 가진 더럽고 사악한 마음을 발견하였을 때, 그 광경은 너무도 무시무시하여 지옥에서 버둥거리는 나의 모습이 선명히 보이는 것 같았다. 그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 나를 의탁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이 이미 갖추었으리라 생각되는 모든 자격을 갖추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때로는 마음이 완고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를 영접하시기 전에 그 완고한 마음은 반드시 부드러워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내 마음이 어느 정도 녹아졌다고 생각될 때면, 이젠 그 일이 거의 다 이루어졌기를 바랐다. 그런데도 나의 비통한 괴로움이 여전히 남아 있을 때면,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도록 소곤거리며 기도하곤 했다. 사람의 마음이 녹아지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시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뇌에 찬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별다른 죄의식을 갖지 않은 채, 꽤 오랜 동안을 게으르고 굼뜬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지나면, 죄의식은 더욱 강렬히 밀려오곤 하였다. 어느 날, 유독히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집 밖을 홀로 거닐고 있을 때, 내 죄에 대한 끔찍스런 생각이 들었다. 발 밑의 땅이 갈라졌다 합쳐지는 것 같더니 내 무덤이 되는 것 같았다. 너무나 두려웠다. 내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내 영혼은 지옥을 향해 곤두박칠치고 있었다. 나의 번민에 잠긴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침대에 억지로 갔지만, 두렵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만일 아침에 지옥에 있게 된다면......... 큰 일 일것만 같아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렇게 커다란 비통함이 엄습하곤 했지만, 내 자신이 회개하지 않고 있음을 염려하지는 않았다. 안일한 육신의 생활에 빠져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무감각했던 것이다. 내 안에 성령님이 역사하시기 위해서는 회개가 절실히 요청되었다. 내가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내 죄가 심각한 정도에 있음을 생각하고, 주 안에서 늘 의지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무감각했고, 태만하게 되었다. 죄에 대한 의식이 거의 나를 떠나 있었다.

내가 경험했던 무수한 실망과 큰 바탄과 착잡함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무서운 마음을 불러 일으켰다. 격렬하고도 악랄하게 하나님께서 인간을 취급하시는 것에 불평하고 있었다. 사악한 내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다른 구원의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볼 때, 내 마음이 그렇게까지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으로 꽉차 있다는 사실이 비참하기 그지 없었다. 이러한 것들이 반복되었다.

 

5) 참된 회심체험

그런데 이러한 나의 심정이 하나님의 긍휼 앞에 무너지게 되었다. 비탄과 시행착오로 상당한 시간을 소모해 버린 후의 어느 날 아침이었다. 나는 평상시대로 한적한 장소를 따라 산보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나는 자신이 스스로 구원을 얻고 자유로워지려던 계획과 구상이 완전히 헛된 것이었음을 일시에 깨닫게 되었다. 나의 모든 기능은 망연자실한 채 멈추어 버렸다. 전에도 여러번 나의 방법으로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제 나는 다른 어떤 관점에서도 나 자신을 돕고 구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나는 온갖 구실을 만들어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나의 구실이 부질없는 것이 되었다. 예전에 남아있던 내 마음 속의 혼란도 이제 평온해졌다. 내 자신의 모습과 하나님에 대해 갈등하는 동안에 느끼곤 하였던 그 비탈도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영원히 부질없는 것일 뿐이라는 확신이 강렬하게 밀려왔다. 전에 왜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는지 의아스럽기까지 했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나의 일에 대한 견해도 과거에 품어온 것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이전에는 내가 맡은 일에 열중은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실 것 같아서 더욱 열심을 내었다. 그러나 내가 한 일에는 선이나 어떤 공로도 없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할수록, 긍휼이 필요한 내 자신과 은혜를 입고 있는 내 자신을 깨닫게 된다. 나는 자신의 관심거리만 가지고 기도했을 뿐,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둔 기도는 거의 한번도 해 본적이 없었음을 알았다. 이제야 나는 나의 기도와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심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러한 심정의 상태가 금요일 아침부터 다음 주일의 저녁(1739년 7월 12일)까지 계속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무력하고 망연자실해 있던 자신을 발견하고 정신 차린 그 한적한 장소를 또 산보하고 있을 때였다. 비록 침통한 우울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지만, 여기서 기도를 해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기도나 어떤 다른 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이 아주 나를 떠나버리셨나보다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직 절망적 상태까지 빠져있지는 않았다.

나는 이전에 한 번도 이런 체험을 해 본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조금 비슷한 일조차 겪어보지 못했었다. 나는 경이로움과 탄복할 밖에 없는 그 영광에 압도당한 채 잠잠히 서 있었다. 이렇게 특이하고 아름다운 일에 비견할만한 것을 나는 본적이 없었다. 이제껏 하나님께 대해서도 성스러운 일에 대하여 내가 품어왔던 관념과는 너무나 달랐다. 이때 본 체험은 하나님께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령한 영광처럼 느껴졌다. 이 빛나고 성스러우신 분, 하나님을 뵈온 듯한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영혼 속에서 넘쳤다. 나는 영원히 우리 가운데 왕노릇하신 분을 뵈온 듯한 만족감으로 차 있었다. 하나님의 탁월하시고 위대하시고 아름다우시고, 또 완전무결하신 품에 내 영혼은 황홀히 안겨 있는 듯했다. 나는 자신의 구원에 대한 생각까지 처음으로 잊어버릴 정도였다.

온 우주의 왕으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궁극적 목적은 모든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한 몸에 받으시기 위함이로구나! 이 내밀한 기쁨과 평화는 밤이 깊어가도 감동깊게 가슴 속에서 부풀고 있었다. 이 때 내 앞에 열린 구원의 길은 이제껏 내 머리 속에 그려온 여러 가지 다른 구원의 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지혜롭고 합당하고 탁월한 것이었다. 내가 이전에 궁리했던 어떤 다른 길이나 혹은 내 자신의 직분을 감당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으니 그렇게 하라고 한다면, 지금 나의 모든 영혼은 거절할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이 구원의 길을 알지도 못하고 따르지도 않는 이 세상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때 내가 느꼈던 달콤한 향기는 다소간 정도 차이는 있었지만, 거의 끊임없이 며칠 동안 계속 이어졌다. 자나 깨나 하나님 안에서 달콤한 기쁨 밖에 없었다.

9월 초 예일대학에 입한 이후에 더 분명한 일들이 일어났다.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와 존재를 좀 더 명백히 나타내셔서 나의 영혼을 찾아주시기를 원하고 있었다. 얼마 동안 회개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주님은 그 은혜로 내 마음 속을 매우 강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그 시간은 주의 은혜에 대한 확신이 넘쳤다. 그리고 나의 영혼은 천국의 기쁨과 성스러움으로 다시 말할 수 없이 새롭게 되었다. 이 때는 특별히 다른 이들에게와 같이 하나님 말씀 몇 구절이 신령한 명쾌함과 능력과 향기로움으로 내 영혼을 열었다.

1740년 6월 어느 날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대학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벌판을 한 낮에 홀로 걷고 있었다. 기도를 하는 중에 하나님 안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향기로움과 기쁨을 맛보았다. 만일 이 죄많은 세상에서 살아가야만 한다면, 항상 거기 머물고 싶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뵈옵고 싶었다.

1740년 11월 28일 저녁, 나는 히브리서 12장 22-24절의 말씀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이 말씀을 통해 나는 하나님에 대해 매우 놀라운 발견을 하였고, 말할 수 없는 새로움을 누렸다. 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위로받기를 기대했다. 하루 이틀을 지나며 나는 종일 하나님 얼굴의 영광을 많이 누렸다. 그리고 나의 영혼은 하나님 안에 쉼을 얻었다.

1740년 12월 9일, 오늘 내 심령은 매우 만족스러운 기분에 잠겨 있었다. 특히 저녁 헌신의 시간에 하나님은 놀라웁게 나를 주장해 주시고 압도해 주셨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어느 것도 끊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은 이 비천한 세상의 모든 기쁨과 즐거움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어늘!

 

 

3. 브레이너드에 대한 평가

 

브레이너드는 냉철한 지성과 함께 바른 신앙적 정서(A Religious Affection)를 균형있게 조화시킨 사람이었다. 이에 대해서 딸의 약혼자였던 브레이너드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 보았으며, 신앙적 정서에 대한 큰 관심을 갖고 있던 에드워즈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의 서문에서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그는 통찰력을 지닌 인재였고, 명쾌한 사고력과 정확한 판단을 할줄 아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 보았다. 그는 분별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사려도 깊었다. 그래서 그는 신학부 성적이 뛰었났다. ... 그는 바르고 경건한 신앙과 광신을 철두철미하게 분별했다. 어떤 사람이 감동을 받았다고 할 때 그것이 사리에 맞고 분명한 데 기초를 두고 이루어진 것인가, 성경적이고 합리적인가, 아니면 원기가 왕성한 나머지 해괴망측한 상상을 한 결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닌가하는 문제에서 인간의 감정을 예리하게 파헤쳤다.”

한국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관심7)과 함께 알려지고 있으며, 그의 일기는 조지 휫필드의 일기, 로버트 맥체인의 일기와 더불어 3대 일기로 알려져 있다. 윌리엄 캐리는 1년에 3번은 읽어야 한다고 했고, 웨슬리는 설교자라면 누구나 읽어야 한다고 했고, 김남준 목사는 4번 사서 6번 읽었다고 했다.

그의 일기는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에 수록되어 있고, 국내에서는 1984년에 크리스챤다이제스트에서 출판되었고, 2008년에 “복있는 사람”에서 완역되었다.

 

 

 


1) 그의 우울증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신앙적인 갈등과 관련한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성도라면 영적 우울증이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것이다.

 

2) 브레이너드가 이러한 비판을 하게 된 것은 예일대학의 신학적 변질과 관련된 것이다.

 

3) 교수를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브레이너드를 퇴학시킨 것은 예일대학의 당시 영적 수준을 알 수 있다. 브레이너드의 퇴학 이후에 예일대학의 신학에 반대하는 자들에 의해 ‘프린스톤 신학교’(이른바 통나무 대학, log college)가 세워지게 된다.

 

4) 퇴학당한 후 브레이너드는 여러 목사들로부터 신학을 공부했다. 이 경험은 그로서는 예일 대학에 다니는 것보다 더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5) 담임목사 추천도서에 소개된 책으로, 청교도들 사이에서는 회심과 관련하여 아주 일반화되었던 책이다.

 

6) 처음에는 스스로 회심이라고 생각했지만 참된 회심은 아니었던 것이다.

 

7) 에드워즈의 탄생 300주년(2003년)을 기념하여 에드워즈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의 모교인 예일대학교에서 그의 전집을 발간함에 따라 국내에서는 ‘부흥과 개혁사’에서 그의 전집을 번역해서 국내에 보급하고 있다.

 

손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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