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핫지의 종말론”
(A Reconsideration of Charles Hodge’s Eschatology)
박응규 교수(ACTS/역사신학)
들어가는 말
찰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는 구프린스톤 신학자들 중에 조직신학자로 당대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물이다. 핫지는 “19세기의 가장 탁월한 미국 장로교 신학자”로 인정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지금까지 배출한 위대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의 신학적 업적은 16세기의 종교개혁과 17세기에 발전한 개혁신학을 계승하여 소위 “프린스톤 신학”(Princeton Theology)을 형성하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1) 프린스톤 신학은 “미국의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가늠하는 신학적 잣대”가 되었으며, 조직신학의 모든 분야에서처럼 종말론에 있어서도 핫지의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는 그 핵심적인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2)
우리는 흔히 찰스 핫지를 조직신학자로 그리고 그의 신학을 그가 저술한 세 권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과 동일시 하지만, 대부분의 당대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핫지는 당시의 주요한 신학적 주제들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논문을 주로 쓰는 사람”과 “변증적인 신학자”로 각인되어 있었다. 또한 핫지가 저술한 「조직신학」을 비롯한 글들 속에는 당시의 문화적이고 교회적 상황에 대한 반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3) 그런 면에서 핫지의 종말사상을 그가 살았던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서 재고찰하는 것은 그의 신학 세계를 새롭게 조명해 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구프린스톤 신학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어네스트 샌딘(Ernest Sandeen)은 프린스톤 신학과 세대주의와의 연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두 신학조류가 결국 근본주의의 기원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4)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두 신학체계 사이의 상이성 보다는 현대주의와의 논쟁으로 인하여 맺어진 협력과 제휴의 현상을 과도하게 강조한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핫지의 종말론, 특히 후천년설에 대한 재고찰은 구프린스톤의 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뿐만 아니라 세대주의와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에 귀한 안목을 제공할 것이다.5) 핫지를 비롯한 상당수의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신봉했던 후천년설은 19세기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하다가 20세기 초에 이르게 되면서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연구는 드문 것이 사실이고, 한국장로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구프린스톤 신학의 종말론을 찰스 핫지를 중심으로 고찰하는 것은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다.6)
I. 찰스 핫지의 시대와 신학적 배경
A. 핫지의 시대적 배경
찰스 핫지는 1797년 12월 27일, 필라델피아에서 휴 핫지(Hugh Hodge, 1755-1798)와 메어리 블랜차드(Mary Blanchard Hunt, 1765-1832) 사이에서 출생하였다.7) 그의 조부 앤드류 핫지(Andrew Hodge)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북부 아일란드에서 거주하다가 18세기 초에 필라델피아로 이주하였다. 그의 부친 휴 핫지는 1773년에 프린스톤 대학을 졸업한 후, 외과의사로서 활동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장로로서 개혁신앙의 유산을 계승하고 미국의 독립을 쟁취하는 데에 매우 열성적이었다. 핫지의 식구들은 필라델피아 제 2장로교회에 출석하면서 애쉬벨 그린(Ashbel Green) 목사의 신앙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핫지가 태어난지 7개월도 못되어 그의 부친이 세상을 떠났지만 평생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을 간직하였다. 그의 모친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두 아들, 휴 레녹스와 찰스의 교육을 위해 갖은 희생과 헌신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1812년은 미국 장로교회 역사나 핫지의 생애에 매우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바로 이 해에 애쉬벨 그린과 사무엘 밀러(Samuel Miller) 목사가 주동이 되어 장로교 목회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육의 염원이 결실을 맺어 프린스톤 신학교가 설립되었으며, 두 아들의 교육을 위해 메어리 핫지는 프린스톤으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훗날 핫지의 생애와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프린스톤 신학교의 초대 교수인 아키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가 버지니아로부터 프린스톤으로 이주하였다. 1812년 가을에, 핫지는 프린스톤 대학에 입학하였고, 1815년 프린스톤에 불어 닥친 부흥의 영향으로 핫지를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이 목회사역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알렉산더와 그린의 강한 영향력과 그의 어머니의 권유로 핫지는 신학을 공부하기로 작정하였다.
이렇게 핫지가(家)의 프린스톤 이주는 장로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핫지의 생애와 사역의 중심지가 될 프린스톤 신학교와의 인연은 이렇게 맺어졌다. 뿐만 아니라 핫지가 알렉산더로부터 받은 신학적인 영향과 유대관계는 평생동안 이어졌으며,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부를만큼 깊었으며, 자신의 첫 아들의 이름을 “아키발드 알렉산더” 핫지라고 지을만큼 가까왔다. 또한 1819년 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알렉산더의 권유로 모교에서 교수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으며, 그의 평생 사역이 그 곳에서 펼쳐지게 되었다.8)
그러나 핫지의 시대였던 19세기는 그 초반부터 미국은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었다. 1730-40 년대에 동부 지역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대각성운동 이후 50년간은 미국교회의 전반적인 상황은 성장이 둔화되고 쇠퇴일로에 있었다. 이 기간에 미국교회는 위대한 목회자들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었고,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시대를 특징지웠던 부흥의 열기, 회개, 변화 그리고 환희의 장면은 다시 반복되지 않았고 단지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거의 동시에 계몽주의 사상들이 홍수처럼 미국에 밀려 들어왔고, 독립혁명은 미국에 다양한 합리주의가 유입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주었고, 교리적인 이완과 부도덕한 윤리의식이 방방곡곡으로 번져 나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9)
불경건과 부도덕이 가시적인 수준으로 성장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서 이탈한 불신의 형태가 다양하게 미국 사회에 팽배하였다. “불신앙의 유령이 자신을 조직화하고, 사회주의를 지지하기 위하여 경제적인 무질서를 이용하고, 공동체를 조성하고, 그리고 파괴적인 아이디어들을 실행하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과장하고 있던 기독교 지도자들을 대단히 놀라게 만들었다.”10) 이와 함께 신학적으로는 자유주의에서 유니테리안주의로의 변천이 1805년부터 1819년 사이에 발생하였다. 특히 하바드 대학교의 신학적 변질은 앤도버 신학교가 1807년에 설립되는 주요한 동기가 되었다. 점차로 정통주의와 기독교 “불(不)신앙”은 이제 전쟁의 반대편에 서서 서로의 지반을 굳혀 가면서 논쟁의 불이 점화되었다.
19세기 첫 반세기 동안에, 제 2차 대각성운동의 여파도 상당히 강하였다. 회심을 어떻게 제시하는가? 합법적인 설득의 사용이란 무엇인가? 소위 뜨겁게 은혜를 받은 금좌석이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이 다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닥치는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찰스 피니(Charles Finney)와 그의 “새로운 수단들”(new measures)에 의해 제시된 문제들이었다. 피니가 개발한 해답들은 나다니엘 테일러(Nathaniel Taylor)가 예일에서 설명하였던 방법들과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하였다.11) 핫지는 현대판 펠라기우스주의에서 회심이란 단순히 인간의 작품이라는 주장을 간파했기에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은 핫지의 신학의 형태와 방향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프린스톤 신학자들도 유니테리안과의 논쟁에 참여하면서, 신학파와 구학파 신학자들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깊은 골이 생기게 되었다. 핫지도 테일러와 논쟁에 연루되었으며, 장로교회와 회중교회 사이의 전선도 형성되었다. 미국 내의 이러한 일련의 상황으로 말미암아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기독교를 전체적이고도 철저하게 변호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프린스톤 신학자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프란시스 패턴과 워필드가 자신들의 작품을 시작할 때에야 절정에 달하였지만, 그 출발은 핫지에게서 시작되었다. 변증학이 주변의 학문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중심적인 관심사로 부상하여 19세기 인들에게 흥미를 끌었다.”12) 또한 과격한 천년왕국사상과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에 대해 핫지는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13) 이렇게 핫지의 신학생애의 배경은 쓰라린 신학논쟁과 뒤틀린 교회분열의 상황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B. 핫지의 신학적 배경
1. 알렉산더와 핫지의 종말론
찰스 핫지가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는 아픔을 겪었기에, 그에게 아키발드 알렉산더는 학문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특별한 의미에서의 아버지 같은 인물이었다.14) 알렉산더와 맺은 인연과 영향력은 핫지의 생애 전체에 걸쳐 지속되었으며, 그 어느 누구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영향력을 합친 것보다 더 강하였다.15) 핫지는 종말론에 있어서도, 알렉산더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알렉산더의 천년왕국 사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는 그의 “마지막 날의 영광”(the latter day glory)에 대한 개념이다. “마지막 날의 영광”에 대한 알렉산더의 견해는 주류 후천년설주의자들과는 두 가지 면에서 확연하게 다르다: 1. 교회의 영광스러운 미래의 상태는 전적으로 영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며, 2. 알렉산더는 이 축복의 기간을 천년왕국과 동일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6) 알렉산더는 마지막 날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수단은 바로 첫째도 전도요, 마지막도 전도라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또한 알렉산더의 종말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전 세계의 복음으로의 회심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을 “마지막 날의 영광”라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이 마지막 날의 영광을 천년왕국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매우 강했고, 영적으로 규정하였다. 사실상 알렉산더의 종말사상은 “천년왕국이 배제된 후천년설”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17) 프린스톤신학교를 설립한 초대 신학자들은 “천년왕국의 시기”에 대해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했음이 분명하였다. 그리고 프린스톤 신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그들의 종말론을 형성하는 데에 있어서 가능한 한 요한계시록의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18)
2. 튜레틴과 핫지의 종말론
알렉산더의 지대한 신학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핫지의 신학은 스코틀랜드 철학과 프랜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 1623-1687)의 영향을 받았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앤드류 호펙커(W. Andrew Hoffecker)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찰스 핫지는 아취발트 알렉산더가 시작한 전승을 그대로 이어받아 한편으로는 합리주의자들과 사변철학자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비주의자들과 부흥운동가들에 대한 필연적인 양면공격을 부단하게 감행하였다. 강조점은 약간 달랐지만 본질적인 공격의 양상은 동일한 것이었다. 그의 양면공격을 통해 슐라이레마허의 신학이 훨씬 더 강력한 적이었음이 입증되었다. 핫지와 알렉산더의 부흥운동가들에 대해 보인 입장은 동일한 것이었는데 핫지의 입장이 더 강력했다. 핫지의 글 속에는 스코틀랜드 철학과 터러틴[Turretin]의 신학에 좀 더 의존하고 있다는 공식적인 언급이 알렉산더보다 더 많이 발견된다.19)
핫지의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주요한 인물은 17세기 제네바의 개혁신학자 튜레틴이었다. 튜레틴은 그의 저서 「변증신학강요」(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를 통하여 칼빈 이후의 정통주의 개혁신학을 집대성하였다.20) 튜레틴의 신학적 공헌은 정교한 신학적 진술들로 개혁신학의 진수를 마무리했다는 데에 있다. 칼빈이 신학적 틀을 제공했다면, 튜레틴은 그것을 토대로 성경적 근거들과 가장 정교하고 완전한 형태의 논리적이고 연역적 방법들을 통하여 개혁신학적 입장을 탁월하게 발전시켰다. 그의 신학적 관심은 성경적이면서도 완전한 형태의 개혁신학을 확립함으로 비정통적인 해석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21) 유스토 곤잘레스(Justo L. Gonzalez)에 의하면, “튜레틴의 「변증신학강요」야말로 칼빈의 「기독교강요」 이후 아마도 가장 체계적이고 철저한 개혁신학의 교리적 입장을 훌륭하게 정리한 역저”라고 평가하였다.22)
라틴어로 기록된 튜레틴의 저서는 미국 내의 개혁신학을 신봉하는 여러 신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되었으며, 프린스톤신학교에서도 1872년 핫지의 「조직신학」이 출판되기까지 초기부터 반세기 이상동안 신학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핫지는 그의 조직신학을 구성하고 확립해 나가는 데에 튜레틴에게 상당히 많이 의존하였고, 어거스틴, 칼빈,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비롯한 원리들을 인용하고 재해석했지만, 그를 비롯한 구프린스톤에 미친 튜레틴의 영향이 매우 지대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23) 그런데 「변증신학강요」에 반영된 튜레틴의 종말론적인 입장은 “다소 염세적인 무천년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24) 핫지의 입장은 그렇지 않은 것은 흥미 있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와 함께 핫지나 프린스톤 신학을 논함에 있어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사실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 개혁주의 고백주의, 종교적 체험, 그리고 성경적 기반주의 중에서, 어느 한 요소도 분리시키지 않은 채, 역동적이며 상호적인 영향을 주면서 발전했다는 사실이다.25) 이러한 영향을 받아 구프린스톤 신학은 핫지를 통해 신학적 골격을 완성하게 되는데, 그 가치와 의미는 상당히 높게 평가되었다.
핫지의 계승자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는 핫지의 신학과 「조직신학」을 비롯한 업적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조직신학 저서를 저술하지 않았으며, 그의 신학작업은 스승의 신학을 변호하고, 보완하며, 그리고 확장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왜냐하면 핫지야말로 프린스톤 신학의 입장을 가장 철저하고도 분명하게 진술하고 설명할 뿐만 아니라 변증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26) 핫지의 주된 신학적 관심은 “아담의 원죄의 유전설, 원죄, 무능력과 중생의 교리”에 보다 집중되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27) 핫지는 구원론적 결론이 인간론의 전제에서 발전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구속관의 결여는 부당한 죄관이 정정되기 전에는 시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의 뿌리이며 확고한 원리임을 인식하였다.
C. 프린스톤신학교와 후천년설
프린스톤신학교가 설립되었던 시기에 미국은 전례 없는 문화적인 위기를 경험하고 있었다. 다니엘 워커 호웨(Daniel Walker Howe)에 의하면, “빅토리안 시대(the Victorian Age, 1837-1901)는 미국의 역사에서 아마도 가장 심한 격변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 시대야말로 산업화, 지식의 폭발, 이민과 급격한 인구증가, 도시화, 지리적 확장, 인종간의 관계변화, 그리고 미국 내에서의 무력이 동반된 갈등 등으로 얼룩졌다.”28) 이러한 변화는 교회와 신앙의 양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시드니 알스트롬(Sydney Ahlstrom)이 지적하듯이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은 “민주적 복음주의의 황금시대”로 특징지을 수 있다.29)
식민지 시대의 후반부에 이르게 되면, 소위 자발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는 교회의 형태가 고개를 들게 되었다. 이러한 특성은 다양한 자원단체들의 설립에 영향을 미쳤으며, 남북전쟁 이전에 시민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많은 초교파적 단체들이 결성되었다. 이렇게 복음주의적인 종교인들이 미국 내에 자신들의 가치를 알리고 주입시키기 위해 협력하였다.30) 이러한 자발주의적인 정신은 인간 개인에 대한 가치와 자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근거로 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개인주의의 신장(伸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프린스톤신학교 설립자들인 에쉬빌 그린, 사무엘 밀러, 그리고 아키발드 알렉산더는 이러한 상황을 효과적으로 극복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설립 목표를 갖고 있었다: “문화적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알맞은 목회자들을 배출하는 것과 미국을 휩쓸고 있는 반종교적인 물결을 퇴치하는 것,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기독교를, 구체적으로는 성경을 학적으로 변호하는 목회자를 배출하는 데 있었다.”31) 복음주의적인 부흥과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한 교단의식의 결과는 자연스럽게 교단신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대체적으로1808년까지는 목회자 교육은 대학교의 학부과정과 훌륭한 목회자들에 의한 개인지도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린스톤 신학교도 아키발드 알렉산더, 사무엘 밀러, 그리고 찰스 핫지의 세 교수들에 의해 구칼빈주의(Old Calvinism)를 새로운 시대에 적합하게 적용할 수 있는 소위 “구프린스톤 신학”을 표방하며 시작되었다.32)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된 프린스톤 신학은 일관성과 함께 전국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프린스톤의 칼빈주의는 1812년부터 한 세기 이상 상당히 강력하였다.33)
19세기 초반 반세기 동안 미국 지성계에서 가장 주요한 논의는 인간성에 대한 주제였다. 칼빈주의와 낙관적인 개인주의에 대한 신념이 공존하고 있는 복음주의 안에서 이 주제에 대한 토론은 매우 강렬하였다. 인간의 자연적 능력이 과연 선을 행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1830년대에 신학파 장로교인들을 구학파로부터 분리시키는 주요한 요소였다. 대체적으로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칼빈주의적 강조에서 인간성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로 입장이 바뀌고 있었다. 부흥주의자들이 강조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수용능력과 개인의 도덕성에 대한 높은 기준, 그리고 미국의 전반적인 여론에 호소력을 발휘했던 개인주의에 대한 교리는 결국 이러한 추세가 자리 잡게 하는 불가피한 요인들이었다.34) 이와 같은 복음주의적인 주도적인 입장에 대해 보수적이고 신앙고백적인 학자들은 “복음주의의 순박성에 대해 비판하였다.”35)
이러한 상황에 대한 핫지를 비롯한 구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신앙고백을 중시하는 자들과 미국 문화에 부합하고자 하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구학파와 신학파 중간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였다.36) 브루스 쿠클릭(Bruce Kuklick)도 처음에는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예일의 테일러 신학사조에 대항하기 위해 중도적 입장을 유지하다가, 1837년 이후부터는 구학파의 입장을 지지했다고 주장하였다.37) 찰스 핫지를 비롯한 “구프린스톤 신학자들은 개인경건과 회심의 경험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기독교 신학의 이성적이고 교리적인 표현을 중시하였다.”38)
그렇기 때문에 찰스 존스(Charles Jones)는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 교회의 신학을 고백주의자들과 경건주의자들로 대조시키면서, 핫지의 신학을 단순히 고백주의자로 간주할 수 없다고 언급하였다. 핫지가 믿음의 객관적인 특성과 이성을 강조했지만, 그의 기독교 신앙에는 경건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39) 기독교 신학의 인지적이고 경험적인 측면을 동시에 강조하고, 고백적인 정통신앙과 “삶의 방식”으로서의 신앙을 구분하지 않는 믿음의 통전성(totality)을 중시하였다. 구프린스톤 신학자들은 결코 마음과 가슴을 분리하거나, 생각과 감정을 다른 영역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이러한 특성들은 그들의 설교나 “주일 오후강화”(Sabbath Afternoon lectures), 그리고 다양한 저작물들에서 발견되어진다.40)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크 놀은 핫지의 종교적 체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진정한 종교는… 극단적인 감정을 경험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주관적인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객관적으로 역사(役事)하신 결과이다… 핫지는 감정주의의 함정을 피하기 위하여, 하나님 말씀의 객관적인 진리들과 정제된 칼빈주의 전통을 효과적으로 제시하였다.”41)
핫지와 구프린스톤 신학자들이 칼빈주의를 이해하고 정의하는 데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중시하였고, 당시의 미국 장로교회에서 공식적인 신앙문서로 채택하였다.4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종말사상의 초점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사역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실된 종말론적 목적을 회복시키는 데에 있다고 간주한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 여자의 후손”으로 언급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은 이러한 승리가 미래에 이루어질 종말론적 현상이 아니라, 결정적인 의미에서 이미 이루어진 사건으로 간주하고 있다.4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종말론적 입장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가능하면 분열이나 오해를 불러 일으키지 않으려고 대체적으로 포괄적인 용어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천년설적 견해를 표방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전천년설을 비판하는 데에 있어서도 상당히 온건하였다.44) 그러나 우리가 숙지해야 할 것은 17세기에는 무천년설과 후천년설의 구분이 확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리차드 개핀(Richard B. Gaffin)은 “20세기의 신학용어라고 할 수 있는 무천년설은, 그 전 세기에는 후천년설이라고 알려졌던 견해를 신봉했던 자들의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45)
II. 핫지의 후천년설의 형성배경, 구조 그리고 특성
A. 핫지의 후천년설의 형성배경
찰스 핫지는 후천년설을 신봉했던 탁월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왔다. 다니엘 휫비(Daniel Whitby, 1638-1726)의 저술에 근거한 후천년설은 상당수의 후기 영국과 미국 청교도들이 선호했으며, 대각성운동이 이후 19세기까지도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신봉했던 종말론적 견해였다. 핫지 뿐만 아니라 당시의 많은 신학자들은 복음의 선포와 효과에 대해 매우 낙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이러한 특성은 대각성운동의 주역이었던 조나단 에드워즈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46)
19세기와 20세기 초반까지 후천년설은 알렉산더, 핫지, 그리고 워필드 등의 구프린스톤 신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고, 당시의 낙관적인 시대적 분위기와도 부합되었다.47) 마지막 사악한 제도라고 여겨졌던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세계선교의 확장에 대한 열기가 강해질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개혁 운동들을 목격하면서 기대하던 황금시대가 곧 이루어질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었다.48) 이러한 문화적 상황 속에서 낙관주의는 일종의 시대정신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고,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품었던 이상(理想)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미국이라는 나라에게 부여하신 신적사명을 통해 이루신다고 하는 확신으로 계승되었다. 핫지를 비롯한 프린스톤의 신학자들도 종말론 형성에 있어서는 이러한 시대나 문화의 영향으로부터 배제될 수는 없었다.49) 그러나 분명하게 인지해야 할 것은 핫지의 후천년설의 배후에는 문화적 요소뿐만 아니라, 성경적 근거도 분명히 작용했다는 사실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핫지의 「조직신학」이라는 저서가 출간되기까지 프린스톤 신학교의 대표적인 신학저서는 프랜시스 튜레틴이 저술한 「변증신학강요」였다. 핫지가 프린스톤신학교에는 새로운 신학이 전혀 창출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종말론 분야에서는 예외였다. 프린스톤신학교에서 거의 40여년 동안 신학교재로 사용된 「변증신학강요」에서는 결코 후천년설을 옹호하지 않고, 무천년설의 입장을 지지하였다.50) 튜레틴이나 핫지는 개혁신학을 신봉하면서도 다른 신학세계와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서로 다른 종말론적 입장을 추구하였다. 결국 핫지는 튜레틴의 종말론적 염세주의로부터 떠나 낙관주의를 선호하였다.
이러한 실례를 핫지가 경험했던 링컨의 암살사건에 대한 그의 견해에서 그 일면을 읽을 수 있다. 노예제 폐지를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며,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간주되고 있는 아브라함 링컨이 암살 된 직후인 1865년 4월 16일에 프린스톤신학교에서 히브리서 2:10을 본문으로 행한 설교에서 핫지는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이러한 상황에서조차 소망의 메시지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온전케 하심은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온전케 하실 것임을 일깨워준다. 결국 창조, 섭리, 그리고 구속은 궁극적인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으로 연결되어진다.51)
이렇게 국가적인 비극을 맞으면서, 핫지는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을 통해서 소망의 낙관적인 메시지를 선포했으며, 이러한 신앙의 배후에는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표방하고 있는 섭리신학을 자신의 시대와 상황에 적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52) 핫지는 자신이 살던 시대의 문제들에 대해서 적지 않은 글들을 남기며 고민했던 인물이었다. 특히 미국의 노예제도나 남북전쟁에 대한 입장을 밝히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문화변혁”의 견지를 확고하게 지지하였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구원뿐만 아니라, 자연세계와 인류역사 전반에 미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며,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본성에 대한 인식과 함께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다스림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다.53)
또한 핫지의 종말론적 낙관주의는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이라는 확신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인간의 지혜가 아닌 십자가의 도를 선포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십자가의 교리를 선포하는 것만으로도 효과적인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54) 그리고 복음은 하나님의 소유(롬 1:16)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기에 그 능력은 세상의 어떤 세력도 장애가 될 수 없으며, 인간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복음은 그 자체가 능력이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기에” 구원과 영생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막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55)
핫지의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은 이방인들에게 선교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프린스톤 신학 특히 종말론의 특성을 형성하는 데에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복음전도와 선교에 대한 열정이 종말론과 함께 연결되면서 프린스톤 신학은 역동성을 내포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선교적 열정과 후천년설적인 낙관주의는 핫지와 함께 동행하였다.”56)
B. 핫지의 후천년설의 구조
핫지의 후천년설의 구조는 그의 저서 「조직신학」에서 그 윤곽과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기본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이고 가시적이며 영광스러운 재림이 있을 것이고, 둘째로는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세 사건들이 선행될 것이다: 1) 복음의 우주적인 선포/확산, 즉 선택된 자들을 끌어 모으는 기독교회의 사명수행; 2) 민족적 차원의 유대인들의 회심; 3) 적그리스도의 도래. 셋째로는 다음의 네 사건들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발생할 것이다: 1)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 2) 보편적 심판; 3) 세상의 종말; 4) 그리스도 왕국의 완성.57)
1. 복음의 우주적 선포/확산
핫지의 후천년설의 근간이 되는 것은 복음의 능력과 확산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서 첫 번 째로 일어날 위대한 사건”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리고 호세아 2:23과 이사야 45:22-23을 인용하면서 “진정한 종교인 기독교 복음이 전 세계에 편만해질 것이며, 여호와는 모든 지역에서 유일하신 참된 하나님으로 인식되고 경배되어 질 것이다. 이와 유사한 성경의 내용들이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인용하고 적용하였다”고 주장하였다.58)
핫지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제일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어지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음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그가 살던 시대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으로 복음을 전 세계적으로 선포할 수 있는 전성기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 복음을 확산시켜가는 유일한 기관은 교회를 통해서라고 주장하였다.59) 이러한 성경적 근거들과 종말론적 전망을 소유한 핫지와 프린스톤신학교는 19세기 미국의 복음주의적 선교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으며, 선교학과가 최초로 신학교에 개설되고 졸업생 중에서 선교사로 헌신하는 숫자가 점증하였다.60)
2. 민족적 차원의 유대인들의 회심
핫지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일어날 두 번 째로 위대한 사건은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들의 돌아 옴”이다. 특별히 유대인들의 민족적 차원의 회심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는 로마서 11장을 들고 있다. 핫지는 로마서11장 26절을 설명하면서, “이스라엘”이 “모든 유대인”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민족 차원에서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지만, 그들의 위치는 다시 회복되어진다고 믿었다. 물론 모든 유대인들 개개인이 다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선택의 은총이 유대인이라는 민족 전체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61) 그렇다고 해서 핫지의 이와같은 주장이 세대주의자들처럼 이스라엘의 회복이 성지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았고, 민족적(racial)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62)
3. 적그리스도의 도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일어날 사건 중의 세번 째는 바로 적그리스도의 도래이다. 당시의 대부분의 개신교도와 마찬가지로, 핫지도 적그리스도로 한 특정 인물을 지목하기 보다는 “교황제”라고 확신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교황제도는 비기독교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로만 카톨릭 교회는 그야말로 세속적인 권력으로 얼룩진 배교적 교회였다.63) 또한 회심치 않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생길 환란의 주된 원천이 되리라고 간주했다.64)
핫지의 종말론적 구조를 정리해 보면, 오순절 이후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시기까지를 천년왕국시대(The Millennial Age)로 명명하였다. 그런데 이 천년왕국시대를 교회시대 혹은 복음의 확산(The Church Age or “Gospel Dispensation”)과 거의 동일시했고, 배교와 환란(The Apostasy &Tribulation) 직후에 그리스도의 재림(The Second Advent)이 임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간단한 도표로 그려본다면 다음과 같다:
오순절--------------천년왕국시대---------------그리스도의 재림
교회시대 혹은 배교와 환란
복음의 확산
교회시대에는 복음이 온 세계로 확산되고 편만해지고,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오며, 민족적 차원의 유대인의 회심이 일어날 것이다. 천년왕국시대에는 복음의 능력이 더욱 더 확산되고 전 세계가 복음화 될 것이며, 전 세계인구의 대다수가 기독교인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재림 전에는 배교한 교회와 세속 권력으로 인하여 환란이 일어남으로 천년왕국시대가 끝이 나고 교회가 극심한 환란을 당하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모든 적(敵)그리스도적이고 비(非)기독교적인 세력들이 파괴될 것이다.65) 이러한 종말론적 구조를 통하여, 찰스 핫지는 프린스톤신학의 후천년설적인 견해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복음의 진보, 천년왕국시대, 배교와 환란,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핫지의 이해는 미국 복음주의자들에게 선호되었던 후천년설의 기본적인 골격을 제공하였다.
C. 핫지의 후천년설의 특징들
1. 선교적이며 영적인 특성
핫지의 종말사상에 나타나는 주요한 특성은 바로 선교적이며 영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승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특히 교회의 선교적 노력에 의하여 마지막 영광의 시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확신하였다.66) 핫지에 의하면 19세기 초반까지도 복음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적 관심이 매우 미흡했었으며 “거의 잊혀진” 주제였다.67) 그런 면에서 핫지의 종말사상을 “선교적 후천년설”로 지칭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68) 핫지에 의해 후천년설에 근거한 선교적 열기가 19세기에 프린스톤신학교와 미국 장로교회 안에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다는 면에서 그 의미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핫지의 주도적인 후원으로 장로교 총회는 1835년에 실천신학 및 선교학 교수직을 미국 내에서는 최초로 프린스톤신학교에 창설하여 임명하였다.69)
핫지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교회가 복음을 만방에 전하는 선교적 과업에 충실함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70) 그의 종말론은 알렉산더와 마찬가지로 선교적 열정을 동반하는 후천년설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이 세대의 교회에 의한 선교사역을 통해 거의 모든 이방인들이 회심하는 기독교의 우주적 승리에 대하여 확신하고 있었다. 이러한 핫지의 후천년설적 낙관주의는 성경으로부터 귀결된 결과라기 보다는 그의 시대적 상황과 “그의 타고난 낙천적인 기질”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71) 알렉산더와 마찬가지로 핫지도 요한계시록의 천년왕국을 전 세계의 회심과 연결시켜 이해하였다. 천년왕국적 영광의 시대가 분명히 이 지상에 도래할 것을 확고하게 신봉하고 있었고, 이것을 “교회의 천년왕국적 전성시대”라고 간주하였다.72)
핫지에게 천년왕국이란 교회의 선교적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기독교로의 세상의 보편적 회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핫지의 천년왕국 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특징은 철저하게 영적인 차원과 용어들로 정의되고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에로의 회심, 그리고 세상이 아닌 교회가 그 주된 초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후천년설을 신봉하는 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사회개혁과 과학과 문명의 진보에 대한 긍정적인 소망이라든지, 미국의 신적 사명에 대한 확신이 핫지에게서는 분명하게 발견되고 있지 않다.
2. 천년왕국의 비(非) 중심성
핫지의 종말사상에서는 천년왕국이 중심적이지 않다. 그가 마지막 영광의 시대와 천년왕국을 연결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천년왕국이라는 용어나 개념을 그다지 강조하지 않았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조직신학」의 종말론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도 하나의 독립된 장으로 천년왕국을 다루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사용 빈도수도 매우 희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핫지의 종말론의 입장에 있어서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천년왕국”은 주요한 요인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은 초기의 구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종말사상에는 계시록의 중요성이 반영되고 있지 않음을 반증하고 있다. 물론 20세기 초반에 이르게 되면 세대주의의 영향으로 계시록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증대되었지만 19세기에는 예언서와 계시록에 대한 비중이 약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핫지의 후천년설 견해를 형성하는 데에 요한계시록의 비중보다는 종말론에 관하여 보다 명확한 성경의 다른 부분들이 보다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핫지를 비롯한 초기의 프린스톤 신학자들에게는 성경전체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해석하기에 난해한 예언서를 이해하는 데에 적지 않은 긴장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해석학적 긴장을 해결하는 원리로서 요한계시록을 다른 성경의 내용과 주요한 교리적 체계에 종속시켰음을 알 수 있다.73)
3. 예언서 해석원리들과의 상관성
핫지의 종말사상은 그의 성경해석, 특히 예언서 해석원리들과 상관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유기적이고 완전하게 기록된 정확무오한 말씀임을 전제하였고, 이러한 성경관은 그의 신학과 해석학에 지속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그런데 튜레틴의 신학적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핫지를 비롯한 구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성경의 예언서들과 계시록을 해석하는 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성경의 궁극적인 권위를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예언을 해석하는 과정에는 신학적 특성과 문화적 배경이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침을 부인할 수 없다. 튜레틴과 핫지도 성경의 영감에 대한 입장이 같으면서도, 종말론에 대해서는 현격한 차이가 존재하였다. 이러한 배후에는 그들의 다양한 상황, 개인적인 기질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함을 배제할 수 없다.74) 그런 면에서 핫지의 예언서를 해석하는 원리들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핫지에 의하면, 예언서는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제공하기 보다는, 역사가 과거에 대해 설명하는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75) 그에게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의 가치는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예언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믿음을 보존케 하는 능력에 있다고 하였다. 또한 핫지는 예언서가 내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모호성 때문에, 그 신학적 우선성을 성경의 나머지 부분보다 낮게 간주하였고, 성취되기까지 예언서는 특성상 명확하게 해석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6) 이러한 입장을 취하면서, 핫지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들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대체적으로 다섯 가지의 원리들을 적용하였다.77)
그 첫째 원리는 성취되지 않은 예언은 이미 성취된 예언의 방식과 조화를 이루며 설명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문자적이 아닌 영적으로 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핫지에게 요한계시록을 포함하여 성취되지 않은 예언을 해석하는 데에 모델이 된 것은 바로 성취된 구약예언에 대한 신약의 영적해석이었다.
예언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둘째 원리는 모든 시대를 염두에 둔 예언서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핫지는 예언서의 주된 의도는 역사적 사건에 적용시키거나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예견하는 것이 아닌,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을 유지하고 소망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세 번 째 원리는 예언적인 상징들은 단지 하나의 기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러한 상징들을 임의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네 번째 원리는 아직 성취되지 예언에는 성경의 다른 부분과 동일한 해석상의 우선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성경의 교리적 입장이 예언서들을 해석하는 조절적 기능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 핫지의 견해이다.78) 이러한 원리는 성경 전체의 지속성과 명료성을 고려해 볼 때, 성경의 교리적 입장이 예언서를 이해하는 데에 일종의 해석적 틀이 될 뿐만 아니라, 우선순위를 점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언서를 해석하는 다섯 번째 원리는 문자적이든 비유적이든 지속적이며 고정된 해석학적 입장에 따라 이루어져 한다는 것이다. 핫지에게 있어서 예언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에 중요한 것은 “해석학적 우선순위라는 개념”이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낙관적인 그의 견해가 예언서를 해석하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79)
III. 핫지의 후천년설에 대한 재고찰
A. 프린스톤의 구학파 신학, 요한계시록, 그리고 후천년설
프린스톤신학교가 지향했던 구학파 신학의 특성들이 핫지의 종말사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즉, 문화와 문화의 업적에 대한 다소 비관적인 평가, 교회와 국가의 분리개념에 대한 확고한 입장,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도덕적 활동보다는 바른 교리에 대한 우월적 강조 등이 핫지를 비롯한 구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종말론에도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신학적 입장 때문에 사회개혁이나 문화변혁을 통한 천년왕국 건설이라는 과제에는 소극적이었고, 대신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한편으로 전천년설의 견해에 대응하면서, 자신들의 후천년설적 견해를 이렇게 마지막 날의 영광을 선교와 연결시키며, 자신들의 교리적 입장에 충실하면서도 당시 시대적 상황과 적절하게 조우시켜 나갔다.80) 19세기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후천년설은 당시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종말신앙을 견지하면서도 자신들의 보수적인 교리적 입장과도 배치되지 않는 차원에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신학적 적응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지만, 핫지가 튜레틴의 정통주의 개혁신학으로부터 벗어난 배후에는 그가 기독교 교리의 역사적 발전에 대해 충분히 주목하지 않은 면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81)
후천년설은 교회를 통해 기독교가 세상을 다스리는 다가 올 영광스러운 시기를 요한계시록 20장에 언급되어 있는 천년왕국으로 간주하는 소망과 확신을 매우 중요시 한다. 그런데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후천년설 견해를 고찰해 보면 요한계시록이나 천년왕국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주목된다.82) 아키발드 알렉산더도 후천년설을 신봉하고 온 세상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마지막 영광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을 확신했지만, 그 기간을 “천년왕국”이라고 명명하지 않았다. 그의 천년왕국에 대한 불가지론은 해석하기에 매우 난해하다고 간주했던 요한계시록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알렉산더는 계시록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언급을 남겼다:
수많은 탁월한 학자들이 요한계시록을 오랫동안 연구하고 해석해 왔지만, 주석상에는 폭넓은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우리는 그렇게 중요한 교리를 형성하는 데에 특정적인 한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지 자문해 보지 않을 수밖에 없다.83)
핫지도 알렉산더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승리의 시대가 오리라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천년왕국으로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그의 「조직신학」 저서에서 종말론을 논의하는 데에 요한계시록은 부차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천년왕국”이라는 용어도 최소한도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종말론을 논하는 데에 요한계시록을 상대적으로 낮게 인용하고 있는 배후에는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전천년설주의자들의 과도한 관심과는 매우 대조되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핫지도 전천년주의자들의 성경의 예언서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사실이지만, 후천년설주의자들이 예언서들을 경시하는 풍조에 대해서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8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핫지를 비롯한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성경전체에 대한 정경적 위치와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예언서와 묵시록적 기록에 대해서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했다.85) 이러한 결과, 종말론에 있어서 계시록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요인이 1865년 이후에 미국에서 후천년설이 퇴조하는 것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를 고찰할 필요가 존재한다. 또한 요한계시록을 종말론에 있어서 중요하게 부각시키지 않은 프린스톤 신학자들과 전천년설을 신봉하는 자들의 해석학 사이에 갈등을 야기 시키는 주요한 원인이 되지는 않았는지를 규명할 필요성이 대두된다.86) 제임스 무어헤드(James Moorhead)는 후천년설이야말로 점진적인 진보라는 개념과 묵시적인 요소가 불완전하게 결합된 견해이며 결국은 신학적인 보수나 진보 진영으로부터 경원시 되었다고 주장한다.87) 이러한 배후에는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으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르게 되면 후천년설은 상당히 약화되는 반면에 전천년설, 특히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확고하게 부상하게 되었다. 진화론을 비롯한 현대사조의 거센 도전 속에서 구프린스톤 신학자들과 세대주의 자들 간에는 일종의 “편의상 결혼관계”(marriage de convenance)가 성립되기도 했지만, 결국은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다.88)
전천년설주의자들은 후천년설주의자들보다 요한계시록을 보다 중요하게 인식하고, 그들의 종말론에 연결시키면서 영향력을 확장시켜 나갔는데, 이러한 특성은 당시에 불어 닥쳤던 고등성경비판을 주장하는 현대주의자들과의 논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복음주의자들의 입장과 부합되면서 적지 않은 호응을 얻게 되었다.89)
B. 핫지 이후: 프린스톤의 후천년설에서 웨스트민스터의 무천년설로
후천년설은 신대륙에 청교도들이 이주할 때부터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시기까지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종말론이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거치면서, 미국교회의 종말론적 성향은 여러 가지 면에서 격변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구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종말론적 입장을 고찰해 보면 이러한 변화의 단면도를 반영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929년 프린스톤 신학교의 재개편에 항의하여 그레스엠 메이첸(J. Gresham Machen, 1881-1937)을 비롯한 여러 명의 교수진과 학생들은 필라델피아에 구프린스톤의 신학적 입장을 계승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우게 된다.
초기 웨스트민스터 교수진들의 종말론을 일괄해 보면, 메이첸과 구약학 교수였던 로버트 윌슨(Robert Dick Wilson, 1856-1930)은 강력한 후천년설 신봉자들이었고, 조직신학자였던 존 머레이(John Murray)도 적어도 그의 생애 후반에는 후천년설을 선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90) 칼 맥킨타이어(Carl MacIntire)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신봉하고 있었으며, 오스왈드 엘리스(Oswald T. Allis, 1880-1973)와 코넬리우스 밴틸(Cornelius Van Til, 1895-1987)은 무천년설의 입장을 따르고 있었다. 1930년과 1937년에 윌슨과 메이첸이 세상을 떠나고, 1939년에는 맥킨타이어가 성경장로교단(Bible Presbyterian Church)을 세워 결별함으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종말론적 입장은 무천년설이 우세한 입장으로 자리매김을 하였고, 미국 복음주의 내의 후천년설의 영향력은 현저하게 입지가 약화되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의 여파와 후천년설과 사회복음과의 연관성도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91)
구프린스톤 신학을 계승하기 위하여 세워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미국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 및 정통장로교회(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는 “종말론적 자유”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입장은 철저한 개혁주의적 입장과는 양립할 수 없음을 인식하였다. 그런 면에서 웨스트민스터의 종말론적 입장을 무천년설로만 국한 할 수는 없지만, 튜레틴의 개혁신학적 전통으로 근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핫지의 후천년설은 19세기의 시대적 상황에 적합하게 적응된 종말론적 견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나가는 말
전술한 바와 같이, 후천년설을 신봉하는 자들 간에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후천년설을 따르는 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회개혁적이고 국가적 신앙을 토대로 한 특성보다는, 상당히 영적이고 전도와 선교에 역점을 두는 특징이 핫지에게서 발견되었다. 핫지는 프렌시스 튜레틴의 지대한 신학적 영향을 받으면서도 종말론에 있어서는 나름대로의 견해를 확립하였다. 그의 종말론 형성에는 성경해석학의 원리도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시대적 상황도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인임을 알 수 있다.92)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도 교회의 전(全) 역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해 왔지만, 구체적인 특징들은 시대적 여건과 계시록을 비롯한 성경의 예언서들에 대한 해석학적 원리들에 의해 다양하게 형성되었다.
또한 핫지의 종말론을 재고찰하면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문제가 바로 전천년설, 후천년설 그리고 무천년설로 구분하여 종말론을 이해하고 논의하는 것이 과연 미래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를 도출할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 이와 함께 “천년왕국”이라는 종말론적 잣대가 역사적 상황과 밀접과 관련되면서 다양하게 표출될 뿐만 아니라, 나뉘어지는 것이 과연 합당한지를 자문해보면서, 좀 더 성경적이고 포괄적인 종말론적 교리의 발전이 이루어져야 함을 절감하게 된다.
주
1) John W. Stewart, "Introducing Charles Hodge to Postmoderns," in Charles Hodge Revisited: A Critical Appraisal of His Life and Work, eds. John W. Stewart and James H. Moorhead (Grand Rapids: Eerdmans, 2002), 11-12, 36-39; Mark A. Noll,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Grand Rapids: Eerdmans, 1992), 235-236; Daniel G. Reid, ed., Dictionary of Christianity in America (Downers Grove: Inter Varsity Press, 1990), 538.
2) Sydney A. Ahlstrom, A Religious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2), 463.
3) 데이빗 F. 웰스, “찰스 핫지,” 데이빗 F. 웰스, ed., 「프린스톤 신학」 박용규 역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2), 69-70.
4) Ernest R. Sandeen, “Toward a Historical Interpretation of the Origins of Fundamentalism,” Church History 36 (March, 1967): 67; idem, The Roots of Fundamentalism: British and American Millennialism 1800-1930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0).
5) Joe L. Coker, “Exploring the Roots of the Dispensationalist/Princetonian ‘Alliance’: Charles Hodge and John Nelson Darby on Eschatology and Interpretation of Scripture,” Fides et Historia 30:1 (Winter/Spring 1998): 41-56; D. G. Hart, “A Reconsideration of Biblical Inerrancy and the Princeton Theology’s Alliance with Fundamentalism,” Christian Scholar’s Review 20:4 (1991): 364; Paul Kemeny, “Princeton and the Premillennialsts: The Roots of the marriage de convenance,” American Presbyterians 71:1 (Spring 1993): 19. 구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세대주의에 대한 자세는 “관용적인 불만족” (tolerant dissatisfaction)의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6) 구프린스톤 신학과 한국장로교회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라. 박응규, “구프린스톤 신학과 한국장로교회,” 「ACTS 신학과 선교」 8 (2004): 185-204.
7) 찰스 핫지의 삶과 사상에 대한 개관은 다음을 참고하라. Mark A. Noll, ed., Charles Hodge: The Way of Life (New York: Paulist Press, 1987), 1-44. Cf. John W. Stewart, “Mediating the Center: Charles Hodge on American Science, Language, Literature, and Politics,” in Studies in Reformed Theology and History 3:1 (Winter 1995): 1-114.
8) Mark A. Noll, ed., Charles Hodge: The Way of Life, 1-17.
9) 데이빗 F. 웰스, “찰스 핫지,” 71-72. Cf. John W. Stewart, “Mediating the Center: Charles Hodge on American Science, Language, Literature, and Politics,” 1-14.
10) 데이빗 F. 웰스, “찰스 핫지,” 74.
11) Cf. Douglas A. Sweeney, Nathaniel Taylor, New Haven Theology, and the Legacy of Jonathan Edward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12) 데이빗 F. 웰스, “찰스 핫지,” 79.
13) Earl William Kennedy, “From Pessimism to Optimism: Francis Turretin and Charles Hodge on ‘The Last Things,’” in Servant Gladly: Essays in Honor of John W. Beardslee III, edited by Jack D. Klunder (Grand Rapids: Eerdman, 1988), 111.
14) David B. Calhoun, Princeton Seminary: Faith &Learning, 1812-1868, Vol. 1 (Carlisle: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4), 105; W. Andrew Hoffecker, 「프린스톤신학사상」, 홍치모 역 (서울: 한국로고스연구원, 1991), 92-93.
15) A. A. Hodge, The Life of Charles Hodge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880), 18, 47. Hodge always affirmed that he was “moulded more by the character and instructions of Dr. Achibald Alexander, than by all other external influences combined.”
16) John Wheeler Auxier, “Princetonian Eschatology 1812-1878: The Neglect of the Apocalypse,” (M. A. thesis,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1986), 25.
17) John Wheeler Auxier, “Princetonian Eschatology 1812-1878,” 29, 37. He has in effect a “nonmillennial” form of Postmillennialism. “He is in effect, a postmillennialist without a millennium.”
18) John Wheeler Auxier, “Princetonian Eschatology 1812-1878,” 36.
19) W. Andrew Hoffecker, 「프린스톤신학사상」, 141.
20) Elenctics is derived from the Greek word for that which exposes error. Elenctic theology is thus polemic theology, since it is devoted to refutation of errors.
21) R. J. VanderMolen, “Turretin, Francis.” In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ed. Walter A. Elwell (Grand Rapids: Baker, 1984), 1116.
22) Justo L. Gonzalez,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Volume III: From the Protestant Reformation to the Twentieth Century (New York: Abingdon, 1975), 251.
23) Mark A. Noll, The Princeton Theology, 29-30.
24) Earl William Kennedy, “From Pessimism to Optimism: Francis Turretin and Charles Hodge on ‘The Last Things,’” 104.
25) Mark A. Noll, The Princeton Theology, 36-38.
26) Stanley W. Bamberg, “Our Image of Warfield Must Go,” Journal of the Evangelical Society 34: 2 (June 1991): 237.
27) Earl William Kennedy, “An Historical Analysis of Charles Hodge’s Doctrines of Sin and Particular Grace” (Ph. D. diss.,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1968), 17.
28) Daniel Walker Howe, “Victorian Culture in America,” in Victorian America, ed. Howe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76), 3.
29) Sydney Ahlstrom, A Religious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385.
30) See Charles I. Foster, An Errand of Mercy: The Evangelical United Front, 1790-1837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60); Timothy L. Smith, Revivalism and Social Reform in Mid-Nineteenth-Century America (Nashville: Abingdon, 1957).
31) 마크 놀, “프린스톤 신학,” 데이빗 F. 웰스, ed., 「프린스톤 신학」, 50.
32) E. Brooks Holifield, "Hodge, the Seminary, and the American Theological Context," in Charles Hodge Revisited, 103-128; John Oliver Nelson, “The Rise of the Princeton Theology: A Genetic Study of American Presbyterianism until 1850” (Ph. D. diss., Yale University, 1935), 235-236.
33) 1912년 개교 100주년에 신학교는 미국의 어떤 신학교보다도 많은 1000여 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프린스톤에서 교수를 시작하고부터 워필드가 죽을 때까지 6,386명의 학생이 프린스톤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들 중에 몇 사람은 유명한 신학자, 교육가, 그리고 목회자들이 되었다. 1912년까지의 졸업생들 중에는 56명의 장로교 총회장이 포함되었고 5명의 개신교 감독교회 감독이 포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국회에 프린스톤 출신의 목회자들이 진출하면서 강력한 미국 칼빈주의를 표현하여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마크 놀, “프린스톤 신학,” 50, 60.
34) George M. Marsden, The Evangelical Mind and the New School Presbyterian Experience: A Case Study of Thought and Theory in Nineteenth-Century America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0), 235.
35) Walter Conser, Church and Confession: Conservative Theologians in Germany, England, and America 1815-1866 (Macon: Mercer Press, 1984), 10.
36) A. A. Hodge, Life of Charles Hodge, 308-309.
37) Bruce Kuklick, Churchmen and Philosophers From Jonathan Edwards to John Dewey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5), 78-79.
38) Charles A. Jones, “Charles Hodge, The Keeper of Orthodoxy,” 31.
39) Charles A. Jones, “Charles Hodge, The Keeper of Orthodoxy,” 12.
40) Mark A. Noll, "Charles Hodge as an Expositor of the Spiritual Life," in Charles Hodge Revisited, 181-216; John W. Stewart, “The Tethered Theology: Biblical Criticism, Common Sense Philosophy, and the Princeton Tradition, 1812-1860,” (Ph. D. diss., University of Michigan, 1990), 157-158.
41) Mark A. Noll, ed., Charles Hodge: The Way of Life, 41.
42) John H. Leith, Assembly at Westminster: Reformed Theology in the Making (Richmond: John Knox Press, 1973), 65-74; D. B. Calhoun, “Old Princeton Seminary and the Westminster Standards,” The Westminster Confession into the 21st Century, Vol. Two, ed. Ligon Duncan (Geanies House: Mentor, 2004), 33-61.
43) Derek Thomas, “The Eschatology of the Westminster Confession and Assembly,” in The Westminster Confession into the 21st Century, Vol. Two, 308-309.
44) Derek Thomas, “The Eschatology of the Westminster Confession and Assembly,” 378-379.
45) Richard B. Gaffin, “Theonomy and Eschatology: Reflections on Postmillennialism,” in Theonomy: A Reformed Critique, eds. William S. Barker &W. Robert Godfrey (Grand Rapids: Academie Books, 1990), 197-224. “A-millennialism, a twentieth century term, was upheld by many in previous centuries, but would have been known as postmillennialism.”
46) Iain Murray, Jonathan Edwards: A New Biography (Carlisle, Pennsylvania: Banner of Truth Trust, 1987), 297-298; Robert G. Clouse, The Meaning of the Millennium (Downers Grove: Inter Varsity Press, 1977), 11.
47) James Moorhead, “The Erosion of Postmillennialism in American Religious Thought, 1865-1925,” Church History 53 (March 1984): 61-77. 종말론 형성에 있어서, 성경해석학과 시대적 상황의 연관성에 대해서 다음의 논문을 참고하라. Stanley N. Gundry, “Hermeneutics or Zeitgeist as the Determining Factor in the History of Eschatologies?”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20 (March 1977): 45-55.
48) George Mars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11, 49.
49) Dennis M. Swanson, “Theonomic Postmillennialism: A Continuation of the Princeton Tradition?”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ies Papers (1994): 9.
50) Earl William Kennedy, “From Pessimism to Optimism: Francis Turretin and Charles Hodge on ‘The Last Things,’” 109.
51) David Whitford, “Painting a New Portrait: Charles Hodge and Abraham Lincoln,” The Princeton Seminary Bulletin 22:1 (2001): 91-93.
52) Mark A. Noll, America’s God: From Jonathan Edwards to Abraham Lincol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433-434; idem, The Civil War as a Theological Crisis (Chapel Hill: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06), 82-83.
53) 핫지의 노예제와 남북전쟁에 대한 견해에 대해서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 John W. Stewart, “Mediating the Center: Charles Hodge on American Science, Language, Literature, and Politics,” 67-110. Cf. William S. Barker, "The Social Views of Charles Hodge (1797-1878): A Study in Nineteenth-Century Calvinism and Conservatism," Presbyterion 1 (Spring 1975): 1-22; Richard J. Cowardine, "The Politics of Charles Hodge," in Charles Hodge Revisited, 247-297; Allen C. Guelzo, "Charles Hodge's Antislavery Movement," in Charles Hodge Revisited, 299-325; George M. Marsden, “Reformed and American,” in Reformed Theology in America: A History of Its Modern Development, ed. David F. Wells (Grand Rapids: Eerdmans, 1985), 1-12.
54) Charles Hodge, Commentary 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Grand Rapids: Eerdman, 1953), 17.
55) Charles Hodge,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 (Grand Rapids: Eerdman, 1950), 28.
56) Earl William Kennedy, “From Pessimism to Optimism: Francis Turretin and Charles Hodge on ‘The Last Things,’” 110. “Missionary enthusiasm and postmillennial optimism go hand in with Hodge.”
57)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Vol. 3 (Grand Rapids: Eerdmans, 1995), 792.
58) Hodge, Systematic Theology 3: 800.
59) Hodge, Systematic Theology 3: 804-805.
60) Earl William Kennedy, “From Pessimism to Optimism: Francis Turretin and Charles Hodge on ‘The Last Things,’” 110.
61) Hodge,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 374.
62) Hodge, Systematic Theology, 3: 808. “For Hodge, national was understood to be racial.” Dennis M. Swanson, “Theonomic Postmillennialism: A Continuation of the Princeton Tradition?” 17.
63) Hodge, Systematic Theology, 3: 828.
64) Hodge, Systematic Theology, 3: 836.
65) Dennis M. Swanson, “Theonomic Postmillennialism: A Continuation of the Princeton Tradition?” 19.
66) Hodge, Systematic Theology, 3:856; A. A. Hodge, Outlines of Theology, Rev. ed. (New York: Carter, 1878), 568. 후천년설과 선교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다음의 저서를 참고하라: J. A. de Jong, As the Waters Cover the Sea: Millennial Expectation in the Rise of Anglo-American Missions, 1640-1810 (Kampen: J. H. Kok, 1970).
67) Hodge, Systematic Theology, 3: 804.
68) Earl William Kennedy, “A Historical Analysis of Charles Hodge’s Doctrines of Sin and Particular Grace,” 2, 258-264, 343-344; Joe L. Coker, “The Dispensationalist/Princetonian ‘Alliance,’” 44-45.
69) David B. Calhoun, Princeton Seminary: Faith &Learning, 1812-1868, 141-148, 205-207, 436.
70) Hodge, Systematic Theology, 3: 867.
71) Earl W. Kennedy, “From Pessimism to Optimism: Francis Turretin and Charles Hodge on ‘The Last Things,’” 113; idem, “An Historical Analysis of Charles Hodge’s Doctrines of Sin and Particular Grace,” 259-260. Cf. James Perry Martin, “The Place of the Last Judgment in Protestant Theology from Orthodoxy to Ritschl,” (Th. D, thesis,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1958).
72) Charles Hodge, “The Second Advent,” in A. A. Hodge, Outlines of Theology, 450. 핫지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천년왕국”(millennium)이라는 용어를 하나님 나라와 전천년설적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시켜 두 번만 사용하고 있다. Hodge, Systematic Theology 3: 858-859, 861-868.
73) John Wheeler Auxier, “Princetonian Eschatology 1812-1878,” 66.
74) Earl William Kennedy, “From Pessminism to Optimism,” 115. 핫지의 성경해석원리에 대해서 다음을 참조하라. Hodge, Systematic Theology 1: 187-188; David H. Kelsey, "Charles Hodge as Interpreter of Scripture," in Charles Hodge Revisited, 217-245.
75) Hodge, Systematic Theology 3: 790.
76) John Wheeler Auxier, “Princetonian Eschatology 1812-1878,” 54-55.
77) 이 원리들은 찰스 핫지가 J. B. Ramsey의 Spiritual Kingdom에 쓴 서문과 Systematic Theology 3: 790-791에서 발견할 수 있다.
78) 찰스 핫지, “서문,” in Ramsey, Spiritual Kingdom, xxix; Joe L. Coker, “The Dispensationalist/ Princetonian ‘Alliance,’” 48.
79) John Wheeler Auxier, “Princetonian Eschatology 1812-1878,” 60; Joe L. Coker, “The Dispensationalist/Princetonian ‘Alliance,’” 52-53.
80) John Wheeler Auxier, “Princetonian Eschatology 1812-1878,” 70-71; George Mars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136; John W. Stewart, “Mediating the Center: Charles Hodge on American Science, Language, Literature, and Politics, 2-3.
81) Kennedy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Hodge’s apparent ignorance of his significant departures from the older Reformed orthodoxy as represented by Turretin suggests that Hodge had a ‘tin ear’ with regard to historical development.” Earl William Kennedy, “From Pessimism to Optimism,”116.
82) James Moorhead, “The Erosion of Postmillennialism in American Religious Thought, 1865-1925,” 62.
83) Biblical Repertory and Princeton Review 19 (January 1847): 120. John Wheeler Auxier, “Princetonian Eschatology 1812-1878,” 73에서 재인용.
84) John Wheeler Auxier, “Princetonian Eschatology 1812-1878,” 74-75. 핫지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종말론을 언급하면서 예언서들과 시편, 복음서에 기록된 하나님 나라에 관련된 귀절들, 그리고 로마서 11장들을 비롯한 성경귀절들을 인용하고 있지만 요한계시록에 대한 언급은 매우 희박한 것이 사실이다. Hodge, Systematic Theology 3: 800-807, 855-859.
85) James H. Moorhead, World without End: Mainstream American Protestant Visions of the Last Things, 1880-1925 (Bloomington and Indianapolis: Indiana University Press, 1999), 22.
86) John Wheeler Auxier, “Princetonian Eschatology 1812-1878,” 76. 20세기 초에 이르면 후천년설은 현저하게 그 영향력이 약화된다. 이러한 퇴조에 대한 연구는 다음의 글들을 참조하라. James H. Moorehead, “Erosion of Postmillennialism in American Religious Thought, 1865-1925,” 61-77; idem, “Between Progress and the Apocalypse: A Reassessment of Millennialism in American Religious Thought, 1800-1880,” Journal of American History 71 (December 1984): 22-35; Jean Quandt, “Religion and Social Thought: The Secularization of Postmillennialism,” American Quarterly 25 (May 1973): 390-409; William R. Hutchison, The Modernist Impulse in American Protestantism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6), 99-100; George Mars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141-195.
87) James H. Moorhead, “Erosion of Postmillennialism in American Religious Thought, 1865-1925,” 62.
88) Paul Kemeny, “Princeton and the Premillennialsts: The Roots of the marriage de convenance,” 17-30. 마스덴은 이렇게 파국으로 끝난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1937년의 정통장로교회와 성경장로교회의 분열을 지목하였다. George M. Marsden, “Perspectives on the Division of 1937,” in Pressing Toward the Mark: Essays Commemorating Fifty Years of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eds. Charles G. Dennison and Richard C. Gamble (Philadephia: Committee for the Historian of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1986), 295-328
89) Timothy P. Weber, Living in the Shadow of the Second Coming: American Premillennialism, 1875-1982 (Grand Rapids: Zondervan, 1983).
90) John M. Frame, “Machen’s Warrior Children,” in Alister E. McGrath &Evangelical Theology, ed. Sung Wook Chung (Cumbria, UK: Paternoster, 2003), 113-117.
91) Dennis M. Swanson, “Theonomic Postmillennialism: A Continuation of the Princeton Tradition?” 21-22, 25. 후천년설은 현재 신정주의자들 (Theonomists)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스완슨의 논문 pp. 23-33을 참조하라.
92) John W. Stewart, “Mediating the Center: Charles Hodge on American Science, Language, Literature, and Politics,”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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