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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바울을 잃어버리다 2

by 【고동엽】 2006. 7. 18.
기독교, 바울을 잃어버리다 2
(한국교회에 고함, 같은 제목 앞글의 보충 글)
성서와 바울이 기독교에서 잊혀진 경위 입니다.
1. 2- 3 세기의 첫 신학자들인 오리게네스, 헤르마스, 클레멘스 등은 그리스 철학자 입니다. 오리게네스의 스승인 암모니오스 사카스는 신플라톤주의 창시자인 플로토니스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암모니오스라는 뜻은 부두 노동자라는 의미 입니다.
성서저자들은 하나님의 의가 예수를 통해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를 알리는데 중점을 둔 반면에, 첫 신학자들은 예수가 어떻게 신인가를 알리는 게 중심이었고 이것을 그리스 철학에 기초해 알렸습니다.
2. 이러한 그리스철학의 홍수 속에서 인류 정신사의 2 번 째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타나시우스(296-398)의 등장인데요. 그는 1. 아리우스는 예수가 뛰어난 지혜자인 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아타나시우스는 예수가 참인간이시고 참하나님이시다 라고 하여 예수를 예배의 대상이 되도록 했습니다.
2. 바울편지를 중심으로 성서를 정립 했습니다. 후에 공의회가 2 번에 걸쳐 이것을 승인 했습니다. 이때 성서가 된 바울편지들은 하나님의 의가 중심이고 외경이 된 편지들은 인간의 의 즉 선한 의지, 도덕과 경건이 중심 입니다.
그러나 이때에 하이어라키(hierachy)라는 위계제도를 강조하는 신학이 형성되고, 4 세기에 배교자 황제 율리우스가 기독교를 탄압했을 때 교회를 배신했던 신자들이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을 교부들이 심사했습니다. 교부들의 권위가 성서를 능가하게 되었고 모든 교부들은 관리이거나 그리스 철학자였기 때문에 성서가 기독교의 중심이 되지 못했습니다.
3. 5 세기에 성서가 결정타를 맞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에 의해 기독교신학이 최종 확립되는데, 이 사람도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입니다.
그는 '그대의 내부 속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거기서 진리를 발견할 것이다' 라고 말 합니다.
이것은 힌두교가 참자아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거기서 신, 섭리, 자유, 영혼불멸 등을 익힙니다.
그는 그리스 전통에따라 영을 인격개념이 아닌 은사(donum) 개념으로 파악 합니다.
이에 따라서 대부분의 중세 신학자들은 성령을 우리의 마음 속에 부어진 사랑의 은사와 동일시 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 은사를 피조적 은사로 여기며 성령과 구분했습니다.(판넨베르크, 판넨베르크 조직신학 3 신준호 새물결플러스 28p)
그리고 그는 신플라톤주의 자로서 선한의지를 통해 신에게로 가는 신학을 세웠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마니교에 있었던 영향으로 현실의 삶을 부정적으로 봅니다.(폴 틸리히, 그리스도교 사상사)
기독교가 하나님의 의를 나의 삶에서 이루어가는 삶의 종교에서 개인구원, 즉 영혼구원의 종교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이것은 나의 중요한 언술인데요,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말할 때 그 중요성을 다시 논술 하겠습니다.
이제 성서도 바울도 잊혀지고 실은 예수도 성서저자들이 증언하는 예수가 아니라 관념속의 신인 예수가 고백 됩니다. 이후로 기독교는 역사예수를 찾기 위한 지난한 과정을 겪습니다.
4. 토마스 아퀴나스(1224- 1274) 등에 의해 스콜라 신학이 일어납니다. 이 신학도 성서에서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의와 어떻게 다른가, 또는 성서저자가 증언하는 예수가 어떤분인가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 계시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이성으로 신을 어떻게 파악하는가 즉 이성과 믿음, 지성과 의지 등을 탐구했습니다.
이때는 철학과 신학의 구분이 없었고요, 철학이 오늘날처럼 학문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지혜를 찾는 것 입니다. 그러니 이사람들은 요즈음의 의미인 신학을 한 것이 아니라 철학을 한 것 입니다.
그래서 성서가 이들에게 필요하지도 않았고 교회에서도 중요하지도 않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예배에 설교가 없어지고 성사가 예배에 전부였습니다. 성서는 고대 라틴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글을 모르는 신부가 태반이고요, 성서가 집 반채 값이라 가정에 두는 것은 어림도 없고 교회 비치용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이 올 때까지 기독교에 성서가 없었으니 당연히 예수의 인간의 존엄과 바울의 예수를 통한 평화도 없습니다.
성서가 없는 기독교의 타락상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2- 13 세기 프랑스 남부와 이베리아 반도 일대에 살던 알비파(카타르파) 그리스도인들을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십자군이 무참히 어린이와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학살했습니다. 1 세기 동안 5 백만 여의 그리스도인이 학살됐습니다.
15 세기에 교황국과 세속 황제국 간의 전쟁이 치열했습니다. 교황 알렉산드로의 사생아인 체사레 보르자(1445-1507)는 교황군의 사령관이 되어 점령지를 약탈, 방화, 학살을 세속 황제군보다 상상을 할 수 없게 잔인하게 저질렀습니다.
교황청만이 아니라 프란치스코회 도미니크회 등 모든 수도회가 거짓과 타락이 일상이 되었습니다.(그 참상은 글이 길어져서 적지 못하고요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문화를 참조하세요)
여기에 성서도 없고 바울의 평화는 물론이고,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가 없었습니다.
니체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그의 스승인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문화'에서 오히려 루터가 가톨릭 교회를 살려냈다고 합니다. 당시 교회의 타락상이 도저히 사회와 함께 할 수 없는 지경이라 세상에 의해서 교회가 파괴될텐데 루터와의 투쟁을 통해 교회 자정 노력으로 다시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글을 쓰면서 오늘의 교회가 젊은이들을 전부 몰아내고 유럽과 미국처럼 망하는 길로 가고 있는 현실이 오버랩되면서 가슴이 저리고 아픕니다.
글이 길어졌습니다. 종교개혁 시의 참상과 성서 문제와 오늘의 교회문제는 이번주일 저녁에 올리겠습니다 .
여러분과 가정이 평화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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