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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 예화 31편

by 【고동엽】 2023.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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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거래
 
뉴욕의 맨해튼섬은 한 네덜란드인이 어느 인디언으로부터 4달러를 주고 매입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현금이 아닌 4달러 짜리 양주 한 병이었습니다.

그 인디언이 오늘의 뉴욕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우리도 이렇게 어리석은 인생거래를 하고있지는 않는지요? 우리는 종종 눈앞에 보이는 이익이나 욕구 때문에 장래의 꿈을 포기하거나 하찮게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다가는 육신의 죽음과 함께
영혼마저 죽음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존귀한 삶을 어리석은 거래에 내어놓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은 참으로 존귀한 목적을 위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양
 
양을 치는 한 마술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용이 아까워서 일꾼을 고용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양을 잃어버리지 않고 이리에게 빼앗기지 않을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궁리 끝에 양들에게 한 가지 속임수를 쓰기로 작정했습니다. 양들에게 최면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양들에게 최면을 걸고 말했습니다. "너는 양이 아니다. 너는 사자다."

또 어떤 양에게는 "너는 호랑이다."
어떤 양에게는 심지어 "너는 사람이다. 아무도 너를 잡아먹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서 도망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아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양들은 마술사가 최면을 걸고 한 말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양치기 마술사는 조심스럽게 날마다 양을 몇 마리씩 데려다가 도살했습니다.

그러나 양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양이 아니야. 저 사람은 양만을 도살하는 거야. 우리는 사자이고 호랑이니까."

양들은 모두 양치기 마술사의 말을 믿었습니다. 양들이 하나씩 둘씩 도살되어 없어져도 나머지 양들은 태평스럽게 생활했습니다.
이처럼 미련한 사람은 자기가 누구며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에 취해 마귀에게 속으면서 살아 가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영영 버림을 받게 됩니다
 

 

 

 
 
 

 

 

영적 무감각의 큰 죄
 
W. C. Kaiser, 신앙부흥의 영적 원리들,나침반사,P. 17-18.에서
챨스 피니(Chales Finney)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신앙부흥이란 교회가 타락 상태에 빠져 있음을 전제하여 그러한 상태로 부터의 교회의 돌이킴과 죄인들의 회심에 있다"비록 피니가 죄인들의 회심을 신앙부흥에 대한 그의 정의의 일부로결론짓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저서로 볼 때 그 같은 회심을 신안부흥의 주된 과업 가운데 일부가 아니라 그것의 결과로 보았다는 것이 명백하다. 피니는 다음과 같이 경고 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그린도인들이 영적으로 새롭게 되지않는 것은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보다 더욱 비난을 받아야만 할일이라는 것이다" 

 

 

 
 
 

 

 

모르는 것에 대한 아는 체
 
하이든이 어느 날 38년전인 20대 청년이었을 때의 일을 생각하면서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 위에서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1752년 봄.그의 작품인 곱사등이 악마가 오스트리아 빈의 케른토나틀 극장에서 최초로 상연되었다. 이 대본 가운데 바다의 폭풍우 장면이 있었다.

그 런데 곤란한 일은 그작품의 작자도, 작곡자인 하이든도 바다를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물 며 폭풍우의 노도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바다가 어떻게 생겼는지 폭풍의 노도가 무엇인 지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두 사람은 제멋대로 각기 상상하면서 작품을 며나갔다.
이것 저것 해본 끝에 애가 탄 하이든이 양손을 벌려 합시코드의 양쪽 끝을 휘둘러 쳤다. 그러자 작자인 크루츠 벨나르든은 “그거다. 바로 그거야" 하고 소리치며 그를 얼싸안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다에 대한 최상의 음악적인 표현이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38년이 지난 후 하이든. 그날의 일을 생각하니 너무나 바다 폭풍우와는 다른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가막혀서 그만 크게 웃었던 것이다. 나는 이 하이든을 생각하면서 30여 년전에 목사 안수 를 받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체험해보지도 않은 것들을 가지고 내 자신이 아는 체하면서 얼 마나 많은 말을 했던가를 생각해본다.



언젠가 서울 미국 문화공보부 방에 걸려 있는 아메리 칸 익스프레스 신용카드 선전 포스타를 보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한 여학생에게 그 것은 아메리칸 급행열차를 선전하는 것이라고 서슴지 않고 설명해주었다. 얼마나 엉터리 해
석인가. 미국에 와보니 그것은 현금거래 대신에 물건을 살 수 있는 신용카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여학생이 지금은 의젓한 가정주부가 되어 이런 신용카드를 사용하면서 엉 터리로가르쳐준 나를 생각할 것이라고 상상하니 하이든과 같이 너털웃음이 나온다. 먼 훗날 당신과 내가 허공을 바라보고 너털웃음을 짓지 않도록 매사를 깊이 생각하자. 

 

 

 

 
 
 

 

 

호박국은 없어요.
 
어느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하기 위하여 성도들이 모였읍니다.목사님께서 하박국을 찿아 펴 놓으라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런데 교회를 나온지 얼마 되지 않는 어떤 성도가 신구약 성경을 열심히 이리저리 뒤적거리다 걱정이 되는지 손을 번쩍 들었읍니다.
"목사님! 제 성경에는 아무리 찿아 보아도 호박국은 없어요" 재치있는 성도가 얼른 찿아 주었읍니다.
모여 있던 성도들은 모두 한바탕 까르르 웃고 말았읍니다

 

 

 
 
 

 

 

무식한 사람
 
어느 무신론자가 랍비에게 말했다.
무 :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대보시오. 그러면 나도 기꺼이 신을 믿겠소.
랍 : 성경을 읽어 보았습니까? 아니 어느 한 부분이라도 읽어 보았습니까?
무 : 아니요.
랍 : 하지만 탈무드는 읽었겠지요?
무 : 그것도 안 읽었소.
랍 : 그러면 당신은 도대체 뭘 읽었소? 철학자나 현인들의 글은 읽었소?
무 : 아니요. 난 그런 건 읽지 않소.
랍 : 그렇다면 당신은 진정한 무신론자가 아니오.
당신은 무식한 사람일 뿐이오. 

 

 

 
 
 

 

 

무지는 용감하다
 
1950년대 이야기이다. 김해 덕두라는 곳에 농사를 지으면서 교회생활을 잘하는 집사 가정이 있었다.
그에게는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어느날 그 동생으로부터 소포가 왔다. 풀어보니 작은 약봉지 같은 것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한 봉지를 찍어 조금 혀에 대어버니 맛이 몹시 썼다.
 '음, 이게 미국 사람들이 먹는 보약이로구나'라고 생각한 그 집사는 아침, 저녁 식사 후 끓여 한 대접씩 마시며 가족과 아이들에게도 마시게 했다.


 아이들이 쓰다고 먹지 않으면 그는 노한 얼굴로 꾸짖는 것이었다. "모처럼 삼촌이 생각해서 보낸 귀한 미국 보약을 마시지 않겠다니 될 말이냐? 어서 마셔!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다 이로운거야." 초등학교 4학년인 둘째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 이걸 마시니 밤에 잠이 오지 않아요." "정신이 맑지! 그게 얼마나 좋으냐? 몸에 이로운 거야. 그 보약, 참 효력도 빠르다." 이웃사람들이 오면 자랑을 하면서 보약(?)을 한 사발씩 안겼다.


이렇게 그 보약이 거의 다 떨어져 갈 때 동생으로부터 편지가 한통 왔다. 소포와 함께 부친다는 것이 깜빡 잊어 이제야 부친다고 하면서 소포로 보낸 것은 <커피>라는 것이며 설탕을 타서 식후에 한컵씩 마시는 것이고, 아이들에게는 되도록 주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큰 아들이 한마디 했다. "무지는 용감하다!" 

 

 

 
 
 

 

 

박쥐 인간의 말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이인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97년 대통령 선거 때 대통령 후보까지 지낸 국민회의의 이모 최고위원의 박쥐같은 행보가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97년 대선 당시 여러 토론회에서 스스로 무신론자임을 자처했던 이위원은 2000년 11월 말 어느 주일에 서을 송파구에 소재한 P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였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매주일 예배에 참석하였던 이위원은 특히 지난 연말 성탄절에 이 교회에 등록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위원의 과거를 살펴보면 어쩐지 석연치 않은 점 몇 가지를 발견할 수가 있다. 그는 지난 98년 11월 부인과 함께 경북 영천에 있는 은해사를 찾아 정식으로 보살계를 받았다


또한 그로부터 약 1년 뒤인 99년 12월 자신에게 보살계를 주었던 일타 스님의 다비식에서 유발상좌(속가에 있는 제자)의 자격으로 조사까지 하였다. 이때부터 이위원은 불교 신자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았고 이번 교회 출석으로 인하여 적지 않은 곤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불교계의 반발에 대하여 명확한 답변을 유보하고 있는 이위원의 행보에 대하여 소식통들은 자신의 정치적 행보를 위하여 종교를 이용하는 그의 행적을 비판하면서 무신론자인 그가 언제까지 박쥐와 같은 행보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주목하고 있다. 

 

 

 

 
 
 

 

 

무지
 
우준한 자는 알지 못하대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시 92:6)


타이레놀 등 진통제의 주성분인 아세트아미노펜을 과다 복용할 경우 간(肝)에 심각한 손상을 입을 수 있다고 미 시사주간지 「타임」 최근호가 보도했다. 「타임」 은 텍사스 대학 사우스웨스턴 의료센터 월리엄 리박사팀의 연구 결과를 인용, 22개 병원에서 300여 명의 간 질환 환자들을 조사한 결과 이들 중 38%가 아세트아미노펜 과다 복용으로 인한 환자였다고 밝혔다.

리박사는 "아세트아미노펜의 과다 복용이 간에 손상을 준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며 "그러나 우리가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사람들이 과다 복용의 위험성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타임」 은 간염이나 간경련을 앓은 사람들은 아세트아미노펜 성분이 들어 있는 약을 복용할 때 반드시 의사와 상담하고, 감기약의 성분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알코올은 간의 해독력을 약화시켜 소량의 아세트아미노펜을 섭취해도 과다 복용 효과를 가져오는 만큼 알코올과 함께 복용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1943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군중들이 기차역에서 웅성거리고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짐을 곁에 놓고 서서 긴 여행을 떠나는 차림들이었으며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치스 독일 친위대원들은 삼엄한 정장 차림으로 여행객들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기차역 승강장에서 떨고 있는 사람들은 죄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독일군이나 나치스 동조 프랑스인들이 집을 강점했기 때문에 쫓껴난 유태인이거나 프랑스의 반 유태인들이었습니다.
반 유태인이 아닌 프랑스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걱정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사실 기차역 승강장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이웃이고 친구들이었습니다. 시계를 고치고 팔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 신문 팔이 청년, 아름다운 누비 이불을 만들던 할머니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은 딴 곳으로 이송되고 있었습니다.


기적 소리가 들리기 전부터 연기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검은 매연을 뱉으며 검은 기차가 역에 도착하여 멈출 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무장한 군인들이 유태인들을 차 칸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유태인들은 반항도 하지 않았으며 협력적이었습니다. 걱정하는 관객들은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지 협력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에게 '괜찮을 거야, 이 친구들과 이웃들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을거야. 그들은 보호를 받고 있으니까' 하고 스스로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왜 이런 자위를 하고 있었을까요? 왜냐하면 차 칸마다 프랑스어로 "자선 운송 회사" 라는 글씨가 깔끔하게 써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면장
 
오래 전 미국의 서부 지방에 한 청년이 있었다.
하루는 노름을 하였는데, 돈을 잃게 되자 격분하여 권총으로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
그는 곧 체포되어서 재판을 받았고, 마침내 교수형의 언도를 받았다.
그러나 그를 아는 친척과 친구들이 진정서를 사방에 제출하였다.
그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진정서에 서명하였다.
드디어 그 탄원서는 주지사에게 제출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서명이 있는 진정서를 받아든 주지사는 눈물을 흘렸다.
그는 이 청년을 특사하기로 결심하고 특사장을 만들어 교도소로 찾아갔다.
주지사가 사형수 감방에 도착하였을 때, 청년은 전도하러 온 목사님인줄 알고 벌떡 일어나서 나가라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나는 당신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요. 당신 같은 사람을 일곱 사람이나 만나 보았어요."
"그렇지만 청년! 잠깐만 내 말을 듣게. 내가 무엇을 가지고 왔네."
주지사는 간청하였지만 성이 머리 끝까지 솟구친 청년은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여보시오!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내쫓도록 하겠소."
"이거봐 청년! 나는 자네에게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어."
"내 말을 듣지 못했오? 만일 나가지 않으면 소장을 부르겠소."
"좋아, 할 수 없군!"
주지사는 감방을 나왔다.
잠시 후에 소장이 들어왔다.
"방금 주지사가 자네를 방문하였다네."
"뭐요? 조금 전에 들어왔던 그 사람이 주지사였습니까?"
"물론이지, 그는 특사하여 주려고 특사장을 주머니에 가지고 왔는데, 자네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야."
그는 종이에다, "존경하는 주지사님, 저는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저의 무지한 행동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썼으나 주지사는 "이제는 관심이 없다."고 회신을 보내왔다.
청년의 사형집행일이 왔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없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여 주십시오. 나는 내가 사람을 죽인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특사장을 가지고 온 주지사를 몰라보고 그를 내쫓았기 때문이라고." 
 

 

 

 
 
 

 

 

부엉이에 답하다 얼어죽은 사람
 
옛부터 '부엉이가 울면 그 집에 상서롭지 못한 조짐이라 한다.
그래서 부 엉이가 울 때 집주인은 부엉이 소리로 같이 울어서 부엉이가 먼저 그치면 길하고, 주인이 부엉이를 이기지 못하면 집에 재난이 온다' 라는 말이 전해 내려 오고 있다.
어느 마을에 천성적으로 고집이 황소같은 사람이 살았는데 지독히 추운 겨울 어느날 밤중 용변을 보러 속옷바람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밖으로 나다. 그런데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 소리에 반사 적으로 자신도 부엉이 울음소리로 답했다. 그런데 그 대결은 밤이 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그 아내가 남편이 나간지 오래도록 들어오지 않으므로 이상 히 여겨 문밖으로 나가보니 남편의 사지는 움직이지도 못할정도로 뻣뻣하게 굳어져 마당에 쓰러져 있었다.
 그는 아내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은채 목구멍 안에서 겨우 나오는 소리로 "원통하다 부엉, 원통하다 부엉"하며 조금도 틀 리지 않고 부엉이 소리에 응하는 것이었다. 그는 날이 밝아올 무렵 끝내 숨 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는 고집때문에 자신의 생명까지 내놓은 것이다. 

 

 

 
 
 

 

 

값진 진주를 돌 취급해서야…
 
유럽의 탐험가들이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 처음 갔을 때 있었던 이야기다.

어느 바닷가에 갔더니 흑인들이 조개속에서 번쩍이는 것을 물로 휙휙 던지고 있었다.무엇인가 해서 가까이 가보니 값진 진주였다.약삭빠른 탐험가들은 가지고 간 빵과 장난감들을 주고 그것을 모아와 큰 부자가 됐다.

보화도 주인을 잘 만나야 빛이 나는 법이다.무지한 사람에게는 값진 진주도 돌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얼마전 유네스코에서 천연 관광지로 지정한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 근처 하롱베이를 보고서 느낀 게 많다.바다에 수천 개의 천연섬을 무뿌리처럼 심어놓은 듯이 보였다.정말 아름다웠다.그런데 그렇게 좋은 자연이 빛을 못보고 훼손된 부분이 적지 않아 안타까웠다.하롱베이는 마치 원주민에게 맡겨진 진주 같았다.

사회주의 국가지만 차라리 더 개방적으로 외국 자본이라도 유치해 개발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외유내강의 생활철학은 좋아도 지나친 고집은 무지일 수도 있겠다. 

 

 

 
 
 

 

 

금강석이 아무리 보배라 할지라도
 
금강석이 아무리 보배라 할지라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금덩어리와 과자를 주면 금덩어리를 내어버리고 달콤한 과자를 먹는 것과 같다. 이는 금덩어리를 모르는 까닭이다.
옛날 독일의 광물학자가 아프리카에 갔더니 새까만 흑인종 계집애가 돌 네 개를 가지고 공기를 하는 것이다. 그 돌을 보니 금강석이라. 겁얘, 너희 집이 어디냐?겂 하니 겁저기예요겂 하면서 가리킨다.
그 아이를 따라 그 집에 가보니 새까만 흑인종 부인이 움막집에서 핏겨죽을 쑤어 먹고 있었다. 겁여보시오, 이 아이가 당신의 딸입니까?.겂 그렇다고 하니 겁미안하지만 이 아이가 가지고 노는 돌을 나에게 파시오겂 하니 겁아이고, 별 양반 다 보겠군. 돌을 팔기는 무얼 팔아요? 그 양반 그거 드려라겂 하니 그 아이는 돌 네 개를 광물학자에게 주었다.


광물학자는 지갑에서 돈 몇 십원을 주었다. 그 부인과 어린이는 횡재했다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광물학자는 금강석을 가지고 자기의 나라에 와서 몇 백만 원에 팔고 정부와 교섭하여 거기서 채광한 것이 독일 정부 재산의 절반 이상이나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금강석이 아무리 보배라 할지라도 알지 못하는 아프리카 사람은 돈 삼십원 받고 주었지만 아는 독일 사람에게는 자기만 아니라 자기 국가에까지 큰 행복을 가져온 것이다.

 

 

 
 
 

 

 

목마르지 않은 나귀에게 물 먹이기
 
목마르지 않은 나귀에게 어떻게 물을 마시게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찾는 갈망을 잃고 맥주와 양주로 텔레비젼과 드라이브로 만족하고있는 사람을 대체 무슨 수로 하나님을 목말라 찾도록 할 수 있을까? 매질이라도 해봐야 할까? 나귀란 우리의 매보다도 더 굳은 목석이다.

게다가 오늘날 그런 위압적인 수단을 쓸 사람이 누가 있으랴! 아니면 소금을 먹여야 할까? 그것은 동물학대가 된다. 그러면 어떻게 스스로 물 마실 마음을 생기도록 할 수 있을까? 해결책은 단 하나뿐이다.

목마른 다른 나귀를 옆에 데려다 놓고 물통의 물을 아주 기분 좋게 마시게 하는 것이다. 물론 연극이 아니라 진짜 목이 말라서, 참을 수 없이 갈증이 심해서 마시는 것을 보고 그의 동료 나귀도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으리라.

자기도 물통에 목을 넣고 시원한 물을 쭉 들이키고 싶은 욕망이 일게 되리라. 하나님을 찾아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사람들은 동료 인간들에게 수많은 경건한 말들보다도 더 훌륭한 설교가 된다. 
 

 

 

 
 
 

 

 

뱀 알을 품은 암탉
 
암탉이 무얼 모르고 뱀 알 몇 개를 굴리다가 조심스럽게 앉아 알을 품었다.
이윽고 새끼 뱀이 알을 깨고 나오자 제비가 비명을 지르며 말했다.
"이 멍청아, 일단 자라고 나면 맨 먼저 너에게 해코지를 할 짐승을 뭣 때문에 길러 주니?" 

 

 

 

 
 
 

 

 

장미꽃에도 가시가..
 
고양시 오금동에는 통일로 변에, 5월 중순이 지나면 활짝 핀 장미꽃 때문에 참으로 눈이 부실 정도의 아름다운 장미꽃 화원이 있다.
하루는 한 젊은 부인이 너댓살 난 딸과 함께 장미를 몇 그루 사려고 그곳엘 왔다. 꽃나무를 고르기 전에 부인이 잠시 장미꽃의 황홀함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그때, "아아!" 하는 딸의 울음 소리가 정신을 퍼뜩 들게 하였다.
꽃 한 송이를 따려다가 어린 딸이 그만 장미의 가시에 손을 찔린 것이었다.
그렇게 예쁜 꽃에 아프게하는 가시가 있는 줄을 어린 아이는 모르고 있었다.
"가시없는 장미는 없다."(영국 속담) 

 

 

 
 
 

 

 

기울어진 지구의(地球儀)
 
교육부의 한 관리가 어느 초등학교를 시찰하면서 한 학새에게 묻는다.
"지구의는 왜 기울어져 있지?"
학생이 당황하여 얼굴이 빨개 가지고,
"그건 제가 한 짓이 아닌데요"하였다.
관리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교사를 향하여, 교육이 신통치 않다고 면박하였다. 교사가 몸둘 바를 몰라하며,
"실은 이 지구의는 처음 사 올 때부터 이렇게 기우뚱해 있었습니다."
기가막힌 관리가 이번에는 교장에게 가서 언짢은 소리를 퍼붓고는 갔다.
교장이 화가 나서 즉시 교사를 불러 세우고는 호령하였다.
"그래 내가 뭐랬어요? 학교 교재를 살 때는 유대인 가게는 절대로 가지 말라고 주의 했잖소?" 

 

 

 

 
 
 

 

 

교육계의 영적 무지
 
지금 미국이 안고 있는 심각한 사회문제의 근본적인 원인들은 무엇인가.
미국을 병들게 만든 원인 중의 하나는 1959년 미국의 공립학교에 행해지던 기도와 성경공부를 금지시켜서 인본주의적이고 뉴 에이지적인 문화들이 미 국의 청소년들에게 급속도로 번져가도록 방치한 것이었다.
이것은 특히 1960년대에 아시아인들에 대한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되면서 힌두교의 무리들이 미국으로 몰려와 발생한 뉴에이지의 신비주의 문화가 청 소년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치도록 만들었다.


청소년들이 문제를 통한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엡6:10)함에도 불구하고 신본주의에 입각한 교육이념을 버리 고 인본주의적인 교육이념을 앞세워 청소년들을 세상문화에 대해 영적인 무 방비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못된 열매들이 계속해서 맺히고 있는 것이 다.


얼마 전 학교행사 때 감사기도를 했다는 이유로 인경구 교사가 징계를 받 은 것은 미국의 경우처럼 점점 심각해지는 청소년 문제로 고민하면서도 가 장 중요하고 절실한 대안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교육계의 모순과 영적인 무 지를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하나 님의 지팡이를 잡은 모세의 손이 올라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기고 내려 갈 때는 아마렉이 이기는 그 전쟁에서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 렸기 때문이었다.


이 땅의 모든 교사들이 모세처럼 두 손을 들고 청소년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교육계가 그들이 피곤하지 않도록 아론과 홀처럼 그 팔을 붙들어 올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홀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 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출17:12,13) 

 

 

 

 
 
 

 

 

철탑에 걸린 연
 
죤군은 N교단의 선교사인 캅 목사님의 여섯 살 난 사내아이다. 성격이 명랑 쾌활하고, 서부의 사나이 같이 대담성도 있어 보였다.
어느 겨울날,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어 연 날리기에는 맞지 않는 날이었다. 그러나 죤군은 어제 밤 아빠와 함께 정성으로 만든 긴 꼬리연을 가만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마침 집에는 죤군 밖에 없었기 때문에 말리는 사람도 없고 해서 죤군은 연을 갖고 나와 신나게 날리기 시작했다.
세찬 바람이 긴 꼬리연의 얼레를 기계처럼 돌리고 있으니까, 따라서 죤군의 연은 빠른 속도로 높이 올라가고 있다.
그러나 실이 다 풀리자, 뚝! 하고 끊어지더니, 연이 곤두박질 치며 떨어져 가까운 송전탑 꼭대기에 걸리고 말았다.
죤군의 생각에, 올라가기만 하면 연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용감(?)한 죤군이 한 칸 한 칸 철탑을 다 올라 가, 고압선에 걸려 있는 연을 잡는 순간, 찡! 죤군은 2만 5천볼트 전기에 감전되어 죽고 말았다. 

 

 

 
 
 

 

 

나귀와 수탉과 사자
 
나귀와 수탉이 농가 마당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굶주린 사자가 그 곁을 지나가다 나귀가 살도 잘 찌고 건강해 보이는 것을 보고, 이 나귀를 먹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수탉 울음소리만큼 사자가 싫어하는 것이 없다고들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순간 때마침 수탉이 울어서 사자는 황급히 곧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나귀는 사자쯤 되는 자가 한 마리의 새한테 겁을 먹는다 생각하니 아주 재미있어져서 용기를 내어 백수의 왕을 뒤쫓아 가는 기쁨을 맛보면서, 자기 뒤도 돌아 보지 않고 곧장 달려갔다. 그러나 별로 멀리 가지도 않아 수탉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사자는 나귀 쪽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려 순식간에 나귀를 잡아먹고 말았다.

* Presumption begin in ignorance and ends in ruin.
우쭐댄다는 것은 무지에서 시작하여 파멸로 끝나고 만다.

 

 

 
 
 

 

 

사자와 이리
 
어느 날 아침, 사자가 염소새끼를 잡아먹고 있었다. 이때 강아지 한 마리가 사자의 밥상 옆을 졸랑졸랑 돌아다니다가 고기 한 점을 집어먹었다. 아직 철부지 강아지의 소행인지라 사자는 눈살만 찌푸렸을 뿐 성은 내지 않았다.
이 광경을 이리 한 마리가 바라보고 있었다.
'옳지, 저렇게 온순한 걸 보니 사자란 짐승은 아마도 기운이 없는 모양이구나.'
이리는 이런 생각을 하자마자 저도 고기를 집어먹기 위해 강아지의 흉내를 내며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리의 강아지 흉내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야 이놈 이리야, 너는 강아지가 하는 짓을 보고 까부는데 네게까지도 내가 모른 척 할 줄 아느냐? 강아지란 놈은 아직 철부지지만 너는 다 자라서 아기가 아닌 걸 모르고 있단 말이냐?"
결국 이리는 사자의 밥이 되고 말았다.
* 참조: 마26:25, 막12:24, 27, 신32:27 

 

 

 

 
 
 

 

 

이미 계산됨
 
피터 크리프트라는 작가는 미국으로 가는 배표를 사기 위해 몇년간 저축을 한 유럽의 한 가난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항해를 시작한 후에 그들은 여행 중에 먹으려고 가져온 빵과 치즈를 신중하게 배분했습니다.
 사흘이 지나자 아들이 아버지에게 “나는 치즈 샌드위치가 싫어요.
 미국에 도착할 때까지 다른 음식을 먹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아요”라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갖고 있던 마지막 돈 5센트짜리 동전을 아들에게 주면서 식당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라고 했습니다.

오랜 시간 후 그 소년이 함박웃음을 웃으며 돌아왔을 때 걱정이 된 아버지가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식당에서 아이스크림콘 3개와 스테이크 정식을 먹고 왔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5센트로 그것들 모두를 사먹었다는 거야?” 아버지의 질문에 아들은 “아니에요. 음식은 공짜예요. 배표에 포함되어 있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다 아신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잠 14:16.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注目)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악을 행한 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어두운 그늘이 없느니라"-욥 34:21,22.

현생(現生)하는 새 중에서 가장 큰 새인 타조는 키가 2~2.5m 정도이고, 체중은 136kg 정도인데, 날개가 작아 날지는 못하나 시속 90km 정도로 잘 달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새가 정말 웃지 못할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추격해 오는 적을 피해 달아나다가도 모래밭만 만나면 머리를 처박고 꼼짝 않고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타조는 고작 머리만 모래 속에 파묻고는 그 큰 몸까지 전부 가리워진 줄로 착각을 합니다. 그런데 타조만 이런 어리석은 착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너무나 자주 이런 착각을 합니다. 엄연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감찰하고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보지 않았으면 자신이 은밀하게 저지른 죄는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건 하나
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고 있지 않는 행동입니다. 혹, 당신도 요즘 이런 류의 착각을 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
"저희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는 주님, 저희로 타조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요즘,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생활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
지상에서 숨겨진 비밀은 천국에서는 공개된 이야기거리이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
 
야고보서 3;8∼13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약 3:10)

옛날 어느 마을에 남편은 청각장애인이고 아내는 시각장애인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부부는 마을에서 가장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내는 앞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남편이 얼마나 못 생겼는지를 몰랐고 남편은 아내의 따발총처럼 쏟아내는 잔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마을에 기적을 행하는 마법사가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이 부부는 그 마법사를 찾아가서 자신들의 장애를 고쳐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마법사는 그들 부부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어 그들의 장애를 다 고쳐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부부에게서 감사하다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아니 이럴 수가,이렇게 못 생겼을 줄이야”하며 아내가 외쳤습니다. 이어서 남편이 “아니 당신 목소리가 이렇게 끔찍했소?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구먼”하며 둘 다 기절초풍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반면에 “모르는 게 약이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우리의 앎과 무지(無知)가 조화를 이루면 이 두 속담 모두의 장점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말은 다 내뱉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우리는 별것 아닌 것까지 다 알려고 듭니다.

연예인들의 신변잡기와 같은 개인적인 일들에 목숨 건 사람들을 보면 한심스럽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알아서 안될 것까지 알려고 듭니다.


모든 것을 다 알아야 직성이 풀리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식으로 상대의 약점을 널리 전파하고 있습니다. 때론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 말아야 합니다.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은 침묵해야 합니다. 한 증권회사 광고 문안처럼 “쉽게 듣지 않겠습니다. 쉽게 보지 않겠습니다. 쉽게 말하지 않겠습니다”는 자세로 말입니다.

오히려 상대방이 못나게 보이고 맘에 들지 않아도 이렇게 말해 보십시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멋있으시네요, 주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시리라 믿습니다, 주님 안에서 부자되세요” 오늘 우리의 관심사를 바꿉시다. 지엽적인 것에서 탈피하여 크고 중요한 주님의 계획 가운데로 말입니다. 관점을 조금만 바꾸면 세상이 달리 보입니다. 오늘 마음껏 주님의 복된 언어를 전하십시오. 

 

 

 

 
 
 

 

 

바른 교육
 
"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우리나라의 교육은 지식과 기술교육에 지나치게 치중하고 인성교육은 지나치게 소홀히 하기 때문에 사회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교육은 훌륭한 사람을 만드는 일입니다.

기술과 지식만을 갖추었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고 훌륭한 인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훌륭한 분의 지도를 받고 감화를 받아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나약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표준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을 알아야 온전한 인격을 본받고 내면의 성장과 분별력을 지닐 수 있습니다. 

 

 

 

 
 
 

 

 

미국 보약
 
1950년대 이야기이다. 경남 김해의 덕두라는 마을에 농사를 지으면서 교회생활을 잘하는 집사 가정이 있었다.
그에게는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동생으로부터 소포가 왔다. 풀어보니 작은 약봉지 같은 것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한 봉지를 찍어 조금 혀에 대어보니 맛이 몹시 썼다.
'음,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니 이게 미국 사람들이 먹는 보약이 분명하구나'
그 집사는 그것을 정성을 다해 끓여서 아침, 저녁 식사 후 대접씩 마셨다. 다른 가족과 아이들에게도 마시게 했다.
아이들이 쓰다고 먹지 않으면 그는 노한 얼굴로 꾸짖는 것이었다.
"모처럼 삼촌이 생각해서 보낸 귀한 미국 보약을 마시지 않겠다니 될 말이냐? 어서 마셔!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다 이로운 거야."
그것을 먹은 초등학교 4학년인 둘째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 이걸 마시니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아요."
"그래? 정신이 맑아진단 말이지! 그게 얼마나 좋으냐? 그 보약, 참 효력도 빠르다."
그는 이웃사람들이 오면 자랑을 하면서 보약(?)을 한 사발씩 안겼다. 이렇게 그 보약이 거의 다 떨어져 갈 때 동생으로부터 편지가 한 통 왔다. 그것을 먹는 법을 소포와 함께 부친다는 것이 깜빡 잊어 이제야 부친다고 하면서 말이다


자기가 소포로 보낸 것은 <커피>라는 것인데 설탕을 타서 식후에 한 컵씩 마실 것이며, 아이들에게는 되도록 주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큰아들이 한 마디 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목자의 음성
 
부흥사 무디 목사의 친구가 경험한 일이다.
목자가 양들을 인도하는 모습을 목격한 그는 목자에게 가서 이렇게 부탁했다. “내게 당신이 입고 계신 의복과 지팡이를 빌려 주십시오. 그것을 입고 한번 양을 불러보고 싶습니다.” 무디 목사의 친구는 목자의 하락을 받아 그의 의복을 입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서 목자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매-매-매”하며 양들을 불러 보았다.

 그러자 양들은 따라오기는 고사하고 모두 놀라 도망쳐 버렸다. 무디 목사의 친구는 목자에게 “이렇게 했는데도 양들이 왜 저를 안 따라올까요?”하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병든 양이라야만 당신을 따라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등한이 하거나 무지한 자들은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지 못하여 사단의 거짓 교리들에 쉽게 유혹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에 가장 큰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함으로 인해 오는것이라고 본다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함
 
눅 23:32∼42

우리는 고난 주간을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신 사건을 기억하면서 보냅니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부활에는 치욕스러운 십자가 고난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난 없는 영광 없고, 십자가 없는 부활 없습니다. 고난이 깊을수록 영광은 더욱 찬란하고, 십자가 길이 험할수록 부활의 기쁨은 풍성합니다. 

고난의 흔적이 있는가?
오늘날 기독교와 크리스천의 최대 위기는 바로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내 가정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해서는 아픔을 겪지만 마태복음 5장에서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위해 고난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공허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공허합니다. 내가 손해보고 고통을 겪고 눈물을 흘리고 아파하는 그런 고난의 흔적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1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 받아 그 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당신의 삶과 육체에 예수님 때문에 시간을 빼앗기고 돈을 잃고 수모를 당한 고난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운명하실 때까지 여섯 시간동안 일곱 마디 말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정체, 본질, 우리가 따라가야 할 모범이 이 일곱 마디 에 있습니다.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대부분 사람들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문을 당하면 화가 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기도하러 가셨다가 갑자기 체포당해 빌라도 총독에 의해 불법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사형 을 언도하고 두 흉악한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처형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그 순간,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우리는 간혹 용서를 해도 시간이 흐른 뒤에 합니다. 일단 맞을 때는 화를 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처음 말씀하신 것은 놀랍게도 용서의 메시지였습니다. 32~34절을 보겠습니다.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십자가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반응은 원망과 저주, 분노와 복수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인생이 갈기갈기 찢고 폭력을 행하며 조롱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반응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나이다” 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고난주간을 맞이하며 배워야 할 첫 번째 교훈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십자가의 첫 번째 훈련은 용서입니다. 기독교의 본질, 십자가의 본질은 용서입니다. 참된 구원은 용서로부터 시작됩니다. 용서는 죄를 덮고, 죄를 치워우고, 대가를 지불합니다. 이 용서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찢겨져 움직일 때마다 온 몸에 고통이 전율처럼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에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보복이 아니라 용서입니다.


두 번째, 용서는 율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법과 정의에는 용서가 없습니다. 법대로 하면 여러분이나 저는 다 죽었습니다. 은혜로 했기 때문에, 실수를 용서하고 허물을 감추어 주었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온 목적은 온 인류의 죄를 구원하시고 또 용서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용서의 상징입니다. 우리의 최대 숙제는 용서입니다. 용서는 내가 나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데부터 시작합니다.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기 가족을 용서하십시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고난의 흔적을 따라가는 것은 당신이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예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행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스데반입니다. 그는 돌에 맞아 죽어가는 순간에 예수님과 동일한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는 여러분도 오늘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예수님과 똑같은 기도, 스데반과 똑같은 기도를 드리기를 축원합니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십자가 상에서 바로 그 기도를 하고 있는 순간 예수님 주변에는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39절에서 43절입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 옆에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회개하지 않은 흉악한 강도요, 또 한편은 회개한 흉악한 강도였습니다. 흉악한 강도라는 점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진노의 자식이며 흉악하고 마땅히 죽어야 할 인간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과 운명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 앞에서 더 펄펄 뛰고 진노하는 죄인인가, 아니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잘못된 것을 회개하는 죄인인가 하는 차이일 뿐입니다.
한 강도는 펄펄뛰며 “네가 그리스도냐? 그렇다면 너도 살고 나도 살려봐라”하고 예수님께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다른 강도는 자기가 살아온 모든 흉악한 인생을 회개하며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바로 응답합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반응하셨다는 것입니다. 한 강도가 구원을 요청했을 때 주님은 즉각 그 영혼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낙원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에 구원의 긴박성과 구원의 절박성을 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구원을 요구하는 그에게 아무 요구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죄를 회개해라. 거듭나라. 착한 일을 해라. 새벽기도 가라. 십일조 해라’ 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잘못된 과거에 대해서도 질문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요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 오직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바라보고 간구하는 것으로 필요충분조건이 다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 ‘이렇게 해야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하는 올무를 놓지 마십시오. 그냥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하십시오. 우리 주위에는 회개하고 주님 앞에 돌아와야 할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를 즉각 예수님과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축복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두 가지 말씀을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첫 째는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두 번째는 구원의 메시지였습니다.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오늘 이 두 가지를 계속 연습하십시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에게 전화하십시오. 마음을 푸십시오. 용서는 하기로 결정하면 간단합니다. 여러분의 힘으로는 못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의 능력는 전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도하십시오. 친구의 영혼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60대 내 아버지의 영혼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오늘 가서 전도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축복입니다. 

 

 

 

 
 
 

 

 

주님을 알아야 살지
 
출애굽기 14;24∼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출14:31)
애굽의 병사들은 무시무시한 두려움을 느꼈을 겁니다. 신의 노여움이지요. 인간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전능한 신의 진노 앞에서 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에 떨며 죽어갔습니다. 바로와 그의 군대에게는 그 밤이 지옥과 같은 심판의 시간이었습니다.
밤새도록 그들은 두 가지 감정에 얽매인 채 멸망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먼저는 불타는 복수심과 분노였습니다. 애굽의 통치자 바로는 스스로 신적인 존재였습니다



. 자기 나라 안에서 노예로 살던 하찮은 족속에게 당했다는 치욕과 분노가 그를 못 견디게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론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열 가지 재앙이 차례로 애굽을 덮칠 때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는 하나님의 위력을 체험했습니다. 마지막 재앙에서 바로는 무조건 항복했습니다. 애굽을 빠져나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추격할 때 바로는 불타는 복수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텐트를 친 곳에 이르렀을 때 거대한 구름기둥에 뒤덮이자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애굽 병사들은 밤새도록 구름기둥과 불기둥에 시달리다 드디어 길이 열려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기 위해 바다로 내달렸지만 이미 그들은 신의 노여움 앞에서 절망적인 두려움으로 간담이 녹아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


완전히 졌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지요. 그러나 너무 때가 늦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었습니다. 절벽처럼 좌우에 솟아있던 거대한 물벽이 무너져내립니다. 애굽 군대는 깊은 바닷속에 잠겨버렸습니다. 바로와 애굽 사람들은 결국엔 여호와가 누군지 알았습니다. 아주 불행한 방식으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삽니다. 그러나 심판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을 안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늘 주님과 동행하면서 그 분을 ‘나의 하나님,우리 가정의 하나님’으로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갈급하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잠30:2,3)

한 젊은이가 소크라테스를 찾아왔다.
"선생님, 저는 지혜와 학식을 원합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를 데리고 해변으로 가서 물이 허리에 찰 때까지 바닷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갑자기 그의 머리를 잡더니 물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한참 후 소크라테스는 그를 데려다 해변에 눕히고는 돌아왔습니다. 정신을 차린 젊은이가 소크라테스에게 다시 찾아와 이유를 묻자 대답 대신 그에게 되물었습니다. "물 속에 있을 때 당신이 가장 갈급 했던 게 무엇이었는가?"


"숨을 쉬고 싶었습니다." "자네가 물 속에서 공기를 원했던 것만큼이나 지혜와 학식을 원한다면 그걸 가르쳐 달라고 그 누구에게 물을 필요가 없을 걸세."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인간의 무능력과 무지를 더 깊이 느끼게 됩니다. 아굴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잠언을 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굴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이 너무나 크시고 원대하시고 심오하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너무도 미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무지를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람(겸손한자)을 들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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