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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무신론 예화모음

by 【고동엽】 2023.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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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미신은 멸망의 길
 
후진국의 특성은 목소리가 크고,부패지수가 높고,우상숭배와 미신이 성하다고 합니다. 고려의 멸망도 불교의 미신화와 관계가 깊습니다. 요승 신돈이 공민왕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고려의 조야를 온통 무당사상으로 병들게 했기 때문입니다.

제정러시아도 같습니다. 1905년 시베리아 출신 수도승인 라스푸틴이 제정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나타나 요사스런 예언으로 사회를 혼미케 하고 급기야는 황제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의 총애를 받아 내정과 외교정책을 좌지우지했습니다. 그는 1916년까지 무려 10년간 무당정치를 했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우상과 미신이 전통문화라는 이름으로 극성을 부리면서 한탕주의와 사행심리의 사회적 질병을 만연시키고 있습니다. 전통문화와 미신,전통예술과 우상을 구별해야 합니다. 특히 기독교 성결 윤리가 사회적 율례가 될 때 선진국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결코 비진리와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녹여낼 뿐입니다. 

 

 

 
 
 

 

 

제사문제
 
시부모님과 제사 문제로 갈등이 심합니다.
어떻게 하나요?

이것은 제사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사문제'라고 하는 이 주제는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것 같아도 실제로는 복잡합니다. 이 문제를 안고 있는 개개인의 형편에 따라서 대처하는 방법도 다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완전한 해결책을 찾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질문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일까요?" 하고 물으셨는데 사실 우리가 찾아내고자 하는 방법 자체도 지혜로운 것이어야 하겠거니와 그 방법을 각자의 상황에 적용하는 태도도 지혜로워야 하리라고 봅니다.

1) 제사에 대한 이해
제사문제를 다루려면 먼저 크리스천의 입장에서 제사 자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제사의 기원과 역사와 변천과 방법들을 낱낱이 알아야 되는 것은 아니겠으나 크리스천이 제사를 드리지 않는 이유는 분명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사는 다양한 민족과 그들의 문화에 따라서 제사의 대상과 방법도 다릅니다. 죽은 조상에게만 아니라 산 종손을 모셔놓고 그에게 제사를 한 예도 있습니다. 이 시대 우리가 익숙한 한국인 전통의 제사는 돌아가신 조상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대개는 제주가 생전에 뵈었던 할아버지 대까지는 개별적으로 기일에 따라서 제사하고 그 윗대의 조상에 관해서는 명절 때나 혹은 어느 날을 택하여 단체로 모아서 합니다.
제사의 방법도 초기에는 단순했으나 점차 발달해서 아주 복잡해졌다가 요즘에 와서는 다시 단순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본적인 개념은 무덤에 계신 선조의 영혼을 불러 위패를 모신 곳, 혹은 지방을 써붙인 곳에 모시고 음식을 차려 드시게 한 후 다시 본곳으로 돌려 보내드리는 절차를 밟습니다.
초혼(招魂: 혼을 부르는 일)을 할 때는 대문을 활짝 열고 빨랫줄을 걷고 방문을 열어드립니다. 생존해 계실 대와 같은 개념으로 영훈을 맞이합니다.
만일 유고의 제례법을 고수하시는 분이 이 글을 읽으신다면 당혹해 하실지도 모르겠으나 정직하게 관찰을 하면 선조의 영혼에 대한 그분들의 개념에 상당한 모순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전통적으로 위패나 지방은 한문으로 적게 되어 있습니다. 고인이 생존했을 때 한문을 터득하지 못했어도 한문으로 적는 것을 예(禮)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후손들 중에서 한문을 알지 못하거나 주위에 한문으로 써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한글로 썼습니다. 고인이 한글마저도 알지 못하는 집안에서는 지방 없이 제사한 예도 있습니다.
그리고, 초혼을 할 때는 대문을 열고 빨랫줄을 거두고 방문을 열어드려야 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여지는 또 하나의 모순점은 만일 영혼이 공간을 초월하지 못하고 산 사람처럼 걸어서 문을 열어야만 다닐 수 있고, 빨랫줄을 피해 다녀야 한다면 무덤에서는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까?


또한 제사 음식을 종류에 따라 위치를 정해서 놓고 조상의 영혼을 극진히 대접해드린다며 제주가 그 앞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여기저기 골고루 옮겨놓으며 많이 드시라고 권합니다. 술도 격식에 맞춰 따라올립니다. 그런 뒤에 잠시 방안의 불을 꺼놓고 마음껏 드실 시간을 드립니다. 그후 다시 묘지로 전송을 하고는 지방을 불사릅니다.
제사 음식과 제주가 입는 제목은 빈부의 차이가 많았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는 음식 대신 종이에 각종 음식의 이름만 적어놓고 제사한 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나마 음식을 만들 시간이 없어 경제적으로 종이에 돈이라고 써서 올려놓고 제사한 예도 있었다고 합니다. 돈이면 무엇이나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겠죠.


만일 제사를 거른다거나 제물이 소홀하다거나 제사 시간이 늦어진다거나 하면 조상의 영혼이 얼마나 시장하실까 하는 생각에 죄송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했습니다. 또한 조상의 영혼은 어두운 밤 시간에 활동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새벽 미명 전에 그 영혼들을 묘소로 전송하엿습니다. 날이 새면 밝은 빛을 인하여 거처로 돌아가는 데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조상의 영혼은 어두움에 속하여 계신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2) 제사의 동기
제사의 기본적인 동기는 자기를 낳아 길러 주신 부모와 조상에 대한 감사와 효도에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문제는 효도하는 태도와 방법입니다. 전통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은 자손들이 빠짐없이 모이고 제사상을 정성껏 풍성하게 차리고 격식에 맞추어 제사를 드리는 것이 최대의 감사요, 효도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이들의 영혼이 처한 실제 입장에서보다는 제사드리는 자손의 입장에서 이것이 옳겠거니 하고 짐작해서 하는 것입니다.


제사의 두 번째 동기는, 제사드리는 자손들 자신이 복을 받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아들 잘 낳고, 재물이 늘고, 하는 일이 형통하며, 몸이 건강하고, 집안 번성하고, 악귀를 물리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조상의 영혼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명당을 찾아 장례를 치르고 성묘를 하며 때마다 예를 갖추어 정성껏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세 번째 동기는 가족과 사업에 재액이 임하는 것을 피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만일 자손이 조상의 묘소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든가, 해마다 기일과 절기에 제사상을 정성껏 준비하여 모시지 않는다든가, 조상을 탓한다든가 해서 그 영혼의 노여움을 사면 자손에게 화가 미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재액을 받지 않고자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네 번째 동기는 뿌리 깊은 관습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새롭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하면서도 지금까지 오랜 세월 다져온 관습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모가 전하여 준 제사를 자식이 이어받아 그 전통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전통을 바꾼다는 것은 이목을 의식한 체면과 수치와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남들이 다 변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기도 슬그머니 변화의 길을 찾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은 소수이고 그들은 희생을 각오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3) 제사의 기능
이제 제사의 기능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제사는 첫째로 집안의 가풍을 유지하는 기능을 합니다. 온 집안 식구들이 다 모여서 어른의 교훈을 받아 그 가문 대대로 이어 내려오는 가풍을 배우고 유지해 나아갑니다. 선조의 역사를 배우고, 훌륭했던 조상들을 기리고, 가훈을 마음에 새깁니다. 어른 공경하는 효도와 인사법을 배우고 서열을 확인하며 질서를 유지합니다.
둘째로, 가문의 결속을 유지하는 기능을 합니다. 제사 때 일가가 종손의 집에 모이는 것 자체가 동네 사람들의 눈에 띄는 일이고, 제사음식을 돌리는 풍습이 이웃에게 그 가문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한국인들은 자기 가문이 번성한 것을 이웃들이 알아주는 것을 기쁘게 생각해 왔습니다.


셋째로, 사방에 흩어져 사는 가족들이 종손의 동네에 와서 이웃들에게 인사를 올리고 제사음식을 돌려 함께 나누는 관습이 순수한 동기에서 지켜질 때는 이웃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발전시키고 서로 간에 화목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고도로 산업화된 현대의 도시생활 속에서 핵가족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전의 농촌 생활에서 보던 제사 풍습이 오히려 생소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아직도 전통적인 제사를 고집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4) 조상의 영혼에 대한 전통적 개념
조상의 영혼에 대한 한국인의 전통적인 개념은 무속종교와 불교와 그밖의 개인적인 생각들이 혼합되어 있는 것으로 관찰됩니다. 사람마다 이해의 차이를 보이기도 합니다. 전도의 현장에서 일반적으로 접하게 되는 견해는 사람이 죽으면 그 후에 영혼이 남고, 그 영혼은 자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과 그 영혼도 산 사람처럼 편안히 쉴 처소와 먹을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 등입니다.

5) 크리스천이 제사를 드리지 않는 이유
크리스천이 한국의 전통적 개념의 제사를 드리지 않는 이유는 그 제사 자체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의 영혼에게 제사 드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행 14:8-18)
사람의 영혼은 죽는 즉시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들어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 안에서 잠든 영혼은 천국에 가고, 믿지 않고 죽은 영혼은 지옥으로 들어갑니다. 천국과 지옥에 간 영혼은 자기 마음대로 천국을 떠나 지옥으로 가거나, 지옥을 떠나 천국으로 가거나, 이 세상에 돌아와 여기저기 다닐 수가 없거니와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눅 16:19-31).



천국에 간 영혼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 위로와 평안을 얻습니다(계 14:13, 21:1-7).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는 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이 땅 위의 무엇을 가지고도 그 이상 더한 기븜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대문에 우리는 영혼을 위해 이 세상의 어떤 음식도 대접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또한 지옥에 간 영혼은 손가락 끝의 물 한 방울도 허락되지 않으며 불꽃 가운데서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됩니다(눅 16:23-26).
이러한 상황은 우리가 무슨 노력을 기울여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한번 죽고 나면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히 9:27). 제사를 아무리 많이 드려도, 제사상을 아무리 잘 차려도, 자손들이 제사에 아무리 많이 모여도, 그 어떤 지성을 드려도 이미 죽은 영혼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될 수가 없습니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창조주시요 구속자이신 하나님 한 분에게만 제사하게 되어 있습니다(출 20:3-6).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한 유일의 영원한 제물로 단번에 받으셨기 때문에 다시 다른 제물을 원치 아니하십니다(히 7:26-28). 구약 시대의 모든 제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을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신 제사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제사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롬 12:1).


한국인의 전통적 제사는 성경이 말씀하는 제사와는 다릅니다. 제사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조상의 영혼입니다. 제사의 대상이 잘못되었을 분만 아니라 제사에 대한 믿음이 잘못되었습니다. 제사를 드림으로써 조상의 영혼이 기뻐하여 자손에게 복을 주고 재액이 임하지 않게 지켜줄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조상의 영혼이 묘지를 근거로 활동한다는 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조상의 영혼이 주려서 고통을 받는다는 생각도 잘못되었습니다.

6) 크리스천이 당하는 제사문제
이상과 같은 이유로 크리스천이 제사를 드리지 않는 데 대하여 전통적 제사를 고집하는 가문의 가족들은 여러 말로 압력을 가하고 핍박을 합니다. 그들이 하는 말 가운데는 "제사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상놈이다"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은 불효다" "너는 조상도 모르느냐?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조상의 노여움을 산다"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화가 미친다"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집안이 망한다"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조상의 영혼이 배고 고파 떠돌아다닌다" 등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한국에 제사가 정착된 것은 신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한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부터였습니다. 중국 주자의 영향이 컸습니다. 제사의 절차와 모양도 점점 복잡해졌습니다. 장례법도 남자가 죽으면 3년상을 치르고, 여자가 죽으면 1년상만 치르다가 근래에 와서는 남녀 모두 1년으로 줄더니 6개월이 되고, 3개월이 되었습니다. 어떤 집에서는 더 줄여서 삼우제와 사십구제로 끝내는 것을 봅니다.
이러한 제사법의 변천을 보면서 우리는 또 하나의 모순을 발견합니다.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인 1392년에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창건하면서 장려한 것이 중국의 풍습인 제사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 시대에 죽은 영혼들은 제사 없이 어떻게 지냈을까요? 영혼들의 상태가 시대마다 변했을까요? 제삿밥이 없으면 영혼이 주린다는 생각이 옳다면 남자는 여자보다 더 오래 더 많이 먹어야 되고 여자는 그보다 덜 먹어도 된다는 것인가요? 또 최근처럼 장례기간이 짧아진 경우에는 어찌된다는 말인가요? 현재 우리가 아는 전통적인 제사는 우리 민족이 처음부터 지내온 것이 아닌 중국의 풍습이었습니다. "제사를 안 드리는 사람이 상놈이라면 제사를 드리는 양반은 되놈이다"라고 한 손봉호 박사의 지적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7) 제사문제를 지혜롭게 대처하기 위한 제안
이제 크리스천이 제사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몇 가지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제사 자체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가족이라면 제사에 대한 크리스천의 입장을 정중하게 설명하여 제사를 드리지 않도록 설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설득을 할 때는 제사를 전면 부정하는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차근차근 전통의 개념과 성경의 개념을 비교하여 설명하십시오 .예를 들어 전통의 제사는 돌아가신 영혼에게 효도하려는 것이나 성경은 살아계신 어른들에게 효도할 것을 강조한다는 것을 확실히 일러주십시오.
제사의 개념과 대상과 방법은 받아들일 수 없으나 제사의 기능 중에서 집안 식구들의 친교를 통한 결속과 우애, 이웃과의 화목을 추구하는 일들은 성경이 훨씬 더 차원이 높게 적극적으로 장려한다는 점을 지적하십시오.
집안이 잘되고 가문이 번성하기 위해서는 조상의 영혼에게 빌 것이 아니라 창조주요 구속주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시요 영원히 살아계셔서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설득하십시오.

둘째로, 말로 설득하는 동시에 참고서적들을 읽어보도록 권할 수 있을 것입니다(<한국교회와 제사문제(이종윤, 도서출판 엠마오)>, <기독교와 관혼상제(박근원, 전망사)>). 책을 읽고 나서 느낀 점을 놓고 대화를 나눈다면 좀더 구체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말로나 글로 설득하기가 어려운 경우에는 때를 기다리며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명절이나 생신, 결혼기념일, 결혼식 등 식구들이 모이는 특별한 날에 살아계신 집안 어른들에게 정성껏 효도를 하여 평소에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십시오.
제사문제를 빼놓고는 나무랄 데가 없는 며느리라는 인식을 갖게 해드리십시오.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어려운 동기들을 돌아보고 사랑을 베푸는 일들을 솔선하여 하십시오. 영적으로 주도권을 잡고 대범하게 일해 나가십시오.
남편과 자녀와 집안 어른들과 친척들에 대한 책임을 즐겁게 이행해 나가십시오. 특히 사업에 어려움을 당하거나, 배우자를 잃거나, 병석에 누웠을 때 최선을 다하여 도와 드리십시오. 제사 때에도 가서 집안 가족들을 만나십시오. 제사를 드리지 않더라도 식구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교제를 나누십시오. 눈총을 받고 미움을 받아도 개의치 말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십시오.
주님을 모시고 사는 크리스천이 어떤 사람인가 생각과 말과 행실로 확실하게 보여 주십시오. 머지 않아 신뢰 관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제사문제의 틈을 뚫고 그들의 심령에 파고 들어갈 기회를 주님이 주실 것입니다.

넷째로, 집안 식구들 가운데 설득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지목하여 기도하면서 기회가 되면 전도훈련을 받은 크리스천을 청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주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식구가 전도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전도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과거에 제사를 철저히 드린 경험이 있는 전도자라면 대화가 좀더 잘 통할 것입니다.

다섯째로, 자기 집안을 믿음 위에 세워 일으키는 것이 제사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녀를 신앙적으로 잘 길러내십시오. 최선을 다해서 남편을 주님께로 인도하십시오. 집안 살림을 알뜰이 가꾸십시오. 재정적으로 윤택한 살림을 일구십시오. 그리하여 도움을 받는 가족이 아니라 도와주는 가족으로 일어서십시오. 그러면 전도가 훨씬 더 설득력 있을 것입니다.
여섯째로, 이 질문을 주신 성도님 자신이 전도 훈련을 받아 집안 식구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전도폭발 훈련을 받을 것을 권합니다. 다양한 반대 의견을 처리하고 지혜롭게 복음을 제시할 실력을 갖춘다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16장 31절에 나오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성경의 약속을 붙잡고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온 가족을 주님께로 인도할 그 날을 바라보면서 기도하실 때 주님의 약속대로 응답을 받아 제사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것을 확신합니다. 아멘.

 

 

 
 
 

 

 

집사 장로 목사도 환영
 
일전에 어떤 점쟁이가 낸 광고에서 ‘집사,장로,목사도 환영’이라는 카피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광고를 보면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이 점을 보러 가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점쟁이들이 대통령이 당선될 때마다 자기가 예언해서 맞혔다는 등 소문내기를 좋아합니까. 또 자기가 가르쳐줘서 로또에 당첨됐다고 자랑하는 점쟁이도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은 점쟁이들이 사주카페라는 것을 만들어 커피도 마셔가며 친근한 언어로 예언을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예언들은 모두 거짓된 것입니다. 맞아도 거짓이요,틀려도 거짓입니다. 점쟁이들은 모두 거짓 예언자입니다. 참된 예언자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오직 그 분의 참된 예언의 말씀을 듣고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말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참된 예언자입니다. 

 

 

 
 
 

 

 

찬송 중 쓰러진 무당
 
내가 살고 있는 농촌 마을에 개척교회가 세워졌다. 나는 그해 성탄절 전까지 중학생과 고등학생 20여명을 전도했다. 성탄절 새벽송을 위해 학생들에게 찬송가 3곡을 외우게 했다. 교인집에 가서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불신자 집에 가서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르기로 했다. 새벽 4시쯤 귀신들린 무당집을 방문했다. 징을 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우리는 대문 밖에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큰 소리로 불렀다.

요란하던 징소리가 그쳤다. 그때 집 주인이 겁에 질린 모습으로 달려나와 “굿하는 집에 웬 찬송가여. 우리 집 이제 망했어”라며 고함을 질렀다.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찬송가 소리가 들리자 일어나서 춤추던 무당과 앉아서 징을 치던 무당이 쓰러졌다는 것이다.
여호사밧왕의 찬송대가 찬송 부른 때에 여호와의 복병이 적군에 임하여 그들이 패망한 일이 생각났다(대하20장). 그 일로 인하여 그 집이 모두 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게 되었다. 하나님은 찬송 중에 임하신다. 

 

 

 
 
 

 

 

문고리 귀신
 
어느 마을에 다 쓰러져 가는 흉한 집이 한 채 있어서 사람들이 귀신이 나온다며 가까이 가지 않았습니다.
나그네 둘이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동네에서 하룻밤 묵어가게 되었는데, 아무도 재워주지 않자 그 집에서라도 하룻밤 자기로 하였습니다.
동네 사람 누군가가 그 집에서 귀신이 나온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러든 말든 한 선비는 집 안으로 들어갔고, 겁이 많은 다른 선비는 한 참을 망설이다가 그래도 둘이 있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먼저 선비가 들어간 방문을 잡아당기니 문이 안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힘껏 잡아 당겨도 문이 안 열렸습니다. '이건 필시 귀신이 장난을 치는 게야' 하고 생각한 선비는 겁이 더럭 나서 더욱 세게 문고리를 잡아당겼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문고리를 붙잡고 끙끙대다가 날이 밝고 말았습니다.
알고 봤더니, 먼저 방으로 들어간 선비가 막 짐을 풀려고 하는 순간 문고리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고, 필시 귀신이라고 생각한 그 선비는 얼른 달려가 귀신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고리를 꽉 움켜잡았습니다. 그렇게 문 안팎에서 두 선비는 문고리를 붙잡고 밤을 샌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감찰하는 자가 없기를
 
한 선교사가 남아메리카의 인디언 부족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들어가 주민들에게 기독교의 진리와 말씀을 전파하고 있었다.그러던 어느날 원주민들이 그 선교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당신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일을 알고 계셔서 그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겨질 수가 없다고 했습 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같이 능력있고 날카로운 눈을 가진 하나님을 별로 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아닌 다른 사람이 우리들의 주인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우리의 머리 위에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항상 살피고 감찰하는 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부인할 수는 있으나 신의 속성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권고들을 무시하고 듣지 않는다. 

 

 

 
 
 

 

 

돼지와 같은
 
불경건한 자들은 돼지와 같다.
돼지가 도토리는 주어먹으면서도, 도토리 나무가 귀한 줄은 모른다.

불경건한 자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주신 자비는 누리면서도,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계신가
 
1.현대적인 무신론자들
첫번째 부류의 무신론자들은 현대적인 무신론자들로, 그들은 스스
로 그들의 사상이 다른 사람들보다 앞섰으며, 재능도 다른 사람들보
다 앞섰다고 단정하는 현시대적인 인물로서, 만일에 그들이 하나님이
계심을 승인한다면 사람들에게서 미신을 믿는다고 조소를 당해 체면
을 잃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입으로는 그들이 하나님이
없다 말하지만 실지로는 하나님의 존재 여부에 대해 연구를 해 본 적
이 없다.

2.자신을 속이는 무신론자들
두번째 부류의 무신론자들은 귀를 막고 방울을 훔쳐내는 식으로 자
신을 속이는 무신론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우매하므로 하나님이 계심을 승인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그 지방의 불량배
가 관군이 없기를 바라며, 학생들이 시험 감독이 없기를 바라며, 악
한 사람이 법률이 없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이
계심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을 믿지 않게 만든다.


만일에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이 있음을 믿지 않는다. 내 머리
속에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없다.` 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의 손을 잡
고 그에게 이렇게 말하라. `친구여! 당신은 도덕적으로 어떻습니까?
` 무신론자들은 대부분이 도덕적으로 파손된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으로부터 나가는 때는 곧 부도덕이 그 사람 안으
로 들어오는 때이다.


미국의 어떤 전도인이 한번은 복음을 전하는데 어떤 대학생이 와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이전에 저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이 계심을 믿지않습니다.` 그 때 전도인은 그
에게 이렇게 물었다. `왜 지금은 믿지 않게 되었습니까?` 그러자
그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 지식을 많이 쌓았
습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습니다. 이 책도, 저 책도 읽었습니다.



 하
나님도 읽었습니다.` 라고 했다. 그 전도인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나를 속이지 마십시오. 나도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고 더우기 박사
입니다. 책도 적지 않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읽지는
못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데는 반드시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읽는다는 말입니까?
내가 한마디 하는 것을 허락하기 바랍니다. 현재 당신의 도덕적인 행
위는 어떻습니까?` 대학생은 매우 솔직하게 대답했다. `현재 나의
도덕적인 상태가 이전만 못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 대답이 매
우 성실한 것을 본 전도인은 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과 쟁론
하지 않겠습니다. 수많은 이유를 들어서 하나님이 계시다고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에 당신이 나쁜 일을 하지 않고 당신의 더덕적
인 상태를 약간만 높인다면 하나님은 즉시 오실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까닭은 결코 많은 이
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들의 수만 가지 죄
악이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아프리카의 타조와 같다. 이 타조는 크고 우뚝해 사람
을 태울 수는 있으나 날 수는 없다. 타조를 잡으려면 몇십 명이 사방
을 둘러싸고 타조가 저쳐서 도망갈 수 없을 때까지 좇아가면 된다.
타조는 지치면 곧 다리로 구멍을 파고서 매우 작은 제 머리를 구멍
안에 넣고 사람을 보지 않은 채 평안하고 아무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타조가 머리를 구멍 안으로 넣었다고 잡으려는 사람이 없는
가? 그의 비대한 몸은 감추어지지 않고 아직도 밖에 드러나 있다. 많
은 사람들이 타조와 같이 머리를 구멍에 쳐박고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통하겠는가?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당신은 겨로 타조가 되지 말라.

3.강경한 무신론자들
세번째 부류의 무신론자들은 강경한 무신론자들로 한 미디로 하나
님이 없다고 단언한다. 다른 이유도 없다. 그들의 입은 매우 강경하
다. 이미 말했기 때문에 바꾸지 않는다.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당신이 삼 일 밤낮 하나님이 있다고 말해도 믿지 않는다. 자
신이 잘못된 것을 안댜 해도 완강히 버틴다. 굴복하지 않고 자신을
고집한다. 그들은 아직가지 빈 마음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다른 사
람들의 말을 자세히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단지 무력적으로
단정한다 말다툼으로 이기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4.직무적인 무신론자들
네번째 부류의 무신론자들은 직무상의 무신론자들이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의 지위로 인해서 하나님이 계심을 믿지 않는다. 과학
자라는 직함 때문에, 교육자라는 직위 때문에, 신의 존재를 반대하는
주동자이므로 하나님의 계신 것을 믿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
을 가다듬고 자문해 본다면 감히 하나님이 없다고 단정하지 못할 것
이다. 어떤 사람이 일찌기 과학자 30인을 대상으로 통계를 냈는데 그
중 92%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었다는 것이다.

5.이지적인 무신론자들
다섯번째 무신론자들은 이지적인 무신론자들이다. 이 무신론자들의
태도는 가장 정당하다. 그들은 매우 합리적이다. 당신이 그들에게 합
당하고 정당한 이유를 제시하고 증명한다면 그들은 받아들이려고 한
다. 그러나 이렇게 사리가 온당한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참으로 드
물고 귀하다. 연구하고 조사하여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드
물다. 당신은 이러한 사람을 찾아낼 수 있겠는가?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여러
분이 연구를 한다면 여러분 또한 유신론자가 될까 두렵다. 왜 그런가
?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
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7:8). 

 

 

 
 
 

 

 

무신론자 앨런과 딸의 죽음
 
Ethan Allen이라는 무신론자가 있었읍니다. 그는 유명한 뉴잉글랜드의
군인이었읍니다. 그는 어디서나 반종교적인 언동을 일삼았읍니다. 그런데
어느날 딸이 죽게 되었읍니다. 그 딸은 아버지를 불렀읍니다.
`아버지, 전 이제 곧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그리스도도 있고 천국도 있다고 하셔요.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일을 비웃어요.

저는 죽기 전에 지금 마지막 결정을 해야겠는데, 어느 쪽을 제가 믿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말하는 그리스도를 믿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무신론을 옳게 여길까요?`
딸의 이런 질문에 그는 크게 충격을 받아, 흐느껴 울면서 말했읍니다.
`딸아, 내 말을 믿지 말고 엄마의 말을 따르거라.`
참으로 훌륭한 권고입니다.
---- W. Hershel Ford, Seven simple sermon on the Second Coming ---- 

 

 

 
 
 

 

 

무신론자가 된다는 것
 
아젠하워 장군은 말하기를, `무시론자가 된다는 것은 골통을 빼버린다는
것과 같다. 어떤 바보라도 초자연적인 것을 부인할 도리는 없다`고 했읍니다.
생각컨대 아이젠하워 장군이야말로 지당한 말을 했읍니다.
---- 빌리 그래함, The Challenge ----

 

 

 
 
 

 

 

무신론자의 유언
 
막 8:36-37; 시 121편 ; 잠 1:7; 롬 1:20
공산주의자들이 신처럼 숭상하는 레닌은 다음과 같은 유언 을 하였습니다.
`나는 큰 실책을 범했다. 우리의 주목적은 피압박 대중에 게 자유를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 방법은 더욱 끔찍한 죄와 살륙만을 초래하였다. 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피 바다 속에 빠져 버둥거리는 환상, 죽음보다 더 괴로운 이 악몽이여!
이젠 어쩔 수 없지만 참으로 러시아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프랜시스 같은 인물 열 사람이면 족하고도 남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이제까지의 모든 업적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부정했던 무신론자의 종말은 죄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뿐입니다

 

 

 
 
 

 

 

믿을 수 없는 무신론
 
과학의 선구자 베이컨은 말했다. `이 우주에는 질서와 법칙 이 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반드시 그 질서나 법칙을 있게
한 주인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우주가 주인이 없을 것이라는 말은 믿을 수 없다.
그것을 믿기보다는 차라리 아 무 근거도 없는 우화를 믿음이 가하다`라고. 다만 어리석은 자 만이 하나님이 없다 하고, 무신론을 주장 하는 것이다. 

 

 

 
 
 

 

 

죽을때 힘 못되는 무신론
 
한 무신론자가 죽게되어, 매우 불안해지고 무서워졌다.
 그 때 곁에 있던 또 한 사람의 무신론자가 말하기를 `이 사람! 좀 사나이 답게 죽어! 끝까지 사내 답게 해야 해`하고 깨우 쳐 주었다.


그러자 죽음에 처하여 있는 그는 `아이고 나도 그렇게는 생각하고는 있어! 그러나 이 마당에 붙어잡을 것이 하나도 없지 않어. 이런때 무엇에 의지하여야 할지를 좀 가 르쳐 주게`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실로 죽음에 처한 사람에 게 무신론처럼 못쓰는 것도 없는 것이다. 

 

 

 
 
 

 

 

죽음 앞에는 무력한
 
아메리카의 최대의 설교사로 알려지는 저드슨의 대학 시절이 었다.
그는 뉴 잉글런드의 조합 교회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 났지만, 대학 재학중, 무신론자 친구와 사귐으로써 마침내 신앙을 멸시해 버리고 말게 되었다.
따라서 졸업 후에는, 그 의 꿈꾸던 극적인 삶을 시작해 보려고, 부모의 만류도 뿌리 치고 방탕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여행 도중, 한 여관에 들 었을 때, 바로 옆 방에서 갑자기 몹시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 오더니, 드디어는 절망의 비명을 지르면서 숨쉬는 소리가 들 려왔다.
그밤 그는 생각하였다.


자기도 죽음의 막다른 골목 에 빠진다면, 의지할 곳 없어 저렇게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겠고나 하는 생각이 들 때, 무서워져 한 밤을 고민으로 새 웠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그의 고민은 한 층 더 견딜 수 없 는 것이 되었으니, 어제 밤에 그 비명과 함께 죽은 사람이 바로 머리가 민첩하고, 재주가 출중했던 무신론자인 자기의 친구였음으로이다.
그는 여행을 그 이상 계속할 수 없이 되 었을 뿐 아니라, 무서운 번뇌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 었다.
헤매던 그는 드디어 앤드버 신학교로 향했다. 여기서 그는 기쁨과 평강을 얻을 수가 있었다. 언제나 무신론은 일 이 잘 될 때, 평안한 때나 힘이 있는 것이고, 죽음에 처한 때는 무색하다. 

 

 

 
 
 

 

 

하나님께서 웃으실
 
어리석은 자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일인가? 태엽을 바 줄 네지가 없는데 시계가 움직이고 있다.

태엽이 끊긴 시계를 수선할 사람이 없다. 시계방이 없는데 시계가 있다. 기관차 가 없는데 기차와 시간표가 있다.
심지를 태울 기름을 부을 사람이 없는 등불이 켜져 있다. 정원사가 없는데 뜰이 있다.
꽃을 만드는 사람이 없는데 꽃이 있다. 조건을 세울 사람이 없는데 조건이 있다. 도대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늘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은, 어리석은 무신론을 웃으실 것 임에 틀림없다. 

 

 

 
 
 

 

 

한 무신론자의 죽음
 
무신론자로 알려진 철학자 볼테르도 임종 때에는 `사후의 세 계와 절대자의 존재`를 의식했다.그는 임종의 자리에서 주치의
에게 이야기했다.`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소.만일
당신이 내게 6개월동안 생명을 연장해 준다면 내 소유의 절반 을 당신에게 주겠소.



`의사는 대답하기를 `선생님,당신은 단6주
도 살수없습니다.`그러자 볼테를는 이렇게 대답했다.`그러면
나는 지옥으로 가게 될거요.그리고 당신도 나와 함께 가게 될 것이요` 라고 말하고 곧이어 그는 숨을 거두었다. 

 

 

 
 
 

 

 

한심한 무신앙인
 
도이취의 정치가 비스마르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
자 기 자신에 관하여 사색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에 관하여는 아무 것도 모르며,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이, 그 인생을 모멸과 무료에서 어떻게 지켜내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실로 한심한 것이 무신론자, 무신앙이다. 

 

 

 
 
 

 

 

한 무신론자의 임종
 
무신론자로 알려진 철학자 볼테르도 임종 때에는 [사후의 세계와 절 대자의 존재]를 의식했다.

그는 임종의 자리에서 주치의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소. 만일 당신이 내게 6개월동안
생명을 연장해 준다면 내 소유의 절반을 당신에게 주겠소] 의사는 대 답하기를 [선생님, 당신은 6주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러자 볼테르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면 나는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당신도 나와 함께 가게 될 것이요] 곧이어 그는 숨을 거두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은 없다
 
모든 것을 다 갖는 삶은 누구에게도 오지 않습니다.
겉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지요.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얻는 것만 있거나 잃는 것만 있는 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잃는 부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상실이 다가올 때마다 더 큰 좌절을 느낄 수도 있지요.
- 우애령의《숲으로 가는 사람들》중에서 -

*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도 없고, 모든 것을 혼자서 가질 수도 없습니다. 내가 잃은 것을 누군가 다른 사람이 얻기도 합니다.
'잃을 준비'가 되어 있으면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도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여유가 생기고 마음도 넉넉해 집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만족하는 삶

나는 멕시코의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단기 선교를 다녀왔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그 교회의 목사는 작은 단칸방 집에 살고 있었다. 그 교회의 많은 남자들이 직업이 없었다. 아이들은 누더기를 입고 있었고(누더기라도 있는 아이들의 경우에 말이다) 맨발로 놀고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장난감은 줄에 매달은 낡은 기름 여과기였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을 때 그들은 쓰레기 더미에서 주운 낡은 정원 의자에 달린 쇠로 된 편편한 자리를 가져다가 불 위에 석쇠 대신으로 올려 놓았다. 그리고는 내 평생 본 중에서 가장 말라빠진 닭 한 마리를 가져와서 불에 구웠는데 그것은 비둘기 정도의 크기로 작아졌다.
음식이 다 준비되었을 때, 그 목사는 사람들을 조용하게 한 후에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오 주님, 당신은 저희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나는 바로 그때 거의 식욕을 잃었다. 음식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이 사람이 자기의 삶에 대하여 만족해하는 것에 대해서 완전히 놀랐다.
“너무나 많은 것을 주셨다니? 설마 농담이시겠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때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하워드야, 그것은 모두 어떻게 보느냐에 달린 것이란다.”
성숙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뿐 아니라 주시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만족한다.
- 사람을 세우는 사람 / 하워드 헨드릭스

만족하라

성경: 빌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미국의 광고 선전문 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은 "만족시켜 줄 것이다" (satisfy you) 는 약속이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당신이 만족할 것을 보증합니다" (satisfaction guaranteed) 라는 광고도 내세웁니다.
가구를 사거나 집이나 자동차를 구입하거나 만족을 위해서입니다.
운동경기, 음악감상 등 비싼 입장권을 사는 것도 만족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오락과 교제에 돈을 쓰는 것도 만족을 위해서입니다.

심지어 자녀의 교육비 투자나 노후의 안정을 위한 보험투자도 만족을 위해서입니다. 결국 사람이 평생 돈을 쓰는 것은 만족을 사들이는 행위입니다. 세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6세"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나의 왕관은 머리에 있지 않고 나의 가슴 속에 있도다. 왕관의 장식품은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보석이다.

나의 왕관은 만족이라 불리우는 관인데, 도대체 몇 명의 임금이이 왕관을 써 보았을고"땀 흘리고 눈물 흘리고 피도 흘리며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면서 주름살과 함께 무덤의 문턱에 이를 때까지 구하고 찾는 것은 만족이라 불리우는 왕관이라는 것입니다. 만족은 소유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하여 자족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도 이와 같은 아름다운 믿음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송태승 목사

자족하라

우리는 지금 ‘만족결핍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족하며 사는 비결은 무엇일까. 만족한 생활로 훌륭한 귀감이 된 한 성직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두 눈을 올바로 사용하는 것 외에 다른 비결은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든지 난 먼저 하늘을 쳐다봅니다. 나의 삶이 ’영원한 나라‘에까지 이른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지요. 그 다음 지상의 내 무덤을 생각하며 세상을 봅니다. 세상엔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면 내가 불평할 이유가 없어지지요.”
오늘도 자족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룩한 불만족
 
“여러분은 ‘거룩한 불만족’(Holy discontent)을 지니고 있습니까? 거룩한 불만족으로 인해 마음이 무너진 목사들이야 말로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지닐 수 있습니다. 세상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묻고 있습니다.‘이렇게 끝날 수는 없잖아요’라고 말입니다.

죽음과 테러, 에이즈, 가난, 무너지는 가정, 흔들리는 사회 등 어려운 세상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교회에 묻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답변해야 합니다.‘이렇게 끝나지는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로 그냥 끝나지는 않습니다’라고요.교회는 세상을 향해 소망을 선언해야 합니다. 교회는,목회자는,크리스천들은, 세상을 보며 거룩한 불만족을 가져야 합니다”

미국 시카고 윌로우크릭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가 최근 교회에서 열린 리더십 컨퍼런스에서 한 말이다. 올해로 윌로우크릭 리더십 서밋은 10주년을 맞았다. 10년동안 그가 강조했던 동일한 말은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라는 것이다. 올해도 하이벨스 목사는 변함없이 “교회여,세상에 소망을 주자”고 말했다. 갖가지 어려움이 교회에 있지만,그래도 교회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희망의 장소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올해 하이벨스 목사는 ‘거룩한 불만족’이라는 용어를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무엇을 바라 보았을 때 결코 참을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느끼는 감정이 거룩한 불만족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어떤 것을 보고 마음이 무너지며 거룩한 불만족을 느낄 때 목회자나 성도들 모두가 그것에 삶을 투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거룩한 불만족을 느끼는 사람이야 말로 과감하게 위험에 몸을 던질 수 있다.

애굽에서 동족끼리 싸우는 모습을 보고 참을 수 없는 거룩한 불만족을 느낀 모세는 출애굽을 하는 모험을 단행한다.골리앗 앞에서 모두가 피하는 상황속에서 다윗은 거룩한 불만족을 느낀다. 그래서 물맷돌을 들고 용사 골리앗 앞에 서는 모험을 시도한 것이다. 거룩한 불만족을 지니며 성전을 재건한 느헤미야나 인종차별에 온몸으로 저항한 고 마틴 루터 킹 목사 등 이 땅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거룩한 불만족을 지녔다.

우리에게는 거룩한 불만족이 있는가.지금 세상을 바라보면서 견딜 수 없는 것,마음을 무너져 내리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거룩한 불만족을 느끼면서도,현실의 벽에 막혀 쥐었던 물맷돌을 슬그머니 내려놓지 않는가. 아예 거룩한 불만족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무디어 졌는가.사실 거룩한 불만족을 느낀 사람들에게 선택권은 없다. 그 길로 나가는 것 뿐이다. 거룩한 불만족을 느끼고도 행동하지 못한다면 그 불만족은 감정의 사치일 뿐이다.

오늘 세상의 소망인 교회를 책임진 이 땅의 목회자들이여! 죽어가는 교회,방황하는 영혼,무너진 사회를 보면서 거룩한 불만족을 느끼지 않는가. 구름같이 둘러싼 신앙의 선배들은 한결같이 거룩한 불만족을 느끼며 과감하게 그 길로 떠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역사를 만들었다. 모두가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할 때,거룩한 불만족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오늘날,목사는 과연 누구인가. 목회는 무엇인가.
하이벨스 목사는 말했다.“여러분이 거룩한 불만족을 느끼며 마음이 무너져 내릴 때 하나님의 마음도 동일하게 무너져 내립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이 무너지는 그 순간,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일상에서 만족을 얻는 법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17:15)
And I in righteousness I will see your face when I awake, I will be satisfied with seeing your likeness.』

• 나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심지어 날씨조차도-불평하지 않겠다.
• 다른 환경이나 다른 장소에 있는 나의 모습을 그리지 않겠다.
• 나의 몫을 남의 것과 비교하지 않겠다.
• ‘이것 혹은 저적이 지금과 달랐더라면’이라고
가정하지 않겠다.
• ‘내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겠다.
내일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자. 

 

 

 
 
 

 

 

삶의 만족
 
하나님의 말씀을 중거하기 위해 세계에서 제일 잘 산다는 덴마아크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던마이크가 잘 사는 나라라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가보고는 정말 놀랐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강원도 두메 산골 정도 되는 덴마아크 산간벽지가 그 시설은 우리나라 여의도보다 월등히 나았습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 놀란 사실은 인구 500만명밖에 안되는 조그만 나라에 자살하는 사람수가 1년에 3천명이 넘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잘 사는 나라,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이 풍족한 나라에서 왜 이렇게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을까요? 잘 사는 나라에 높은 자살지수, 이것은 생(삶)의 만족이란 물질의 부요함만도 아니고 어떤 목표에 있는 것만도 아니라는 것을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그 언 것에 진정한 가치를 두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그 목표에 도달한다고 해도 그것이 사람의 영혼에 진정한 만족을 가져다 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더 큰 허무와 삶의 깊은 회의에 직면할 뿐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작가 해밍웨이가 부의 명예를 다 얻고도 권총 자살한 사건은 이러한 것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느 것에서도 영원한 것을 찾을 수도 없고 우리의 영혼에 참 만족을 줄 수 있는 것도 발견할 수는없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가, 그 사랑만은 영원한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살 때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시편 73:28)
"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전 5:7)
" 일의 결국은 다 들어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 12:13)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행복으로의 초대에 게재된 글 중에서 신앙 생활이나 생활중에 우리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시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무신론자가 자신의 주장을 선전하기 위해서 자기 집 지붕 위에다 이런 간판을 붙였습니다.

"God is nowhere." 하나님은 아무데도 계시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글자색이 바래기 시작했습니다.

맨 끝에 있는 here라는 글자가 희미해지면서 그 앞의 단어 now가 차별화되어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보니 간판에 아주 멋있게 이렇게 쓰여졌더랍니다.

"God is now here(하나님은 여기에 계시다.)"라고 말입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아, 하나님은 참 유머가 있으시구나.'

 

 

 
 
 

 

 

하나님을 버렸던 미국의 소설가 헤밍웨이의 최후
 
미국의 소설가 헤밍웨이는 노벨문학상 플리쳐 상을 받았던 20세기의 대표적인 작가였습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는 ‘무기여 잘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 등은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유명한 책들입니다.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의사로서 평생 선교사가 될 꿈을 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신앙심이 아주 깊었습니다.
그러나 해밍웨이는 성장하며 믿음의 길을 져버리고 아버지 어머니의 길을 떠나서 그는 불신앙의 길로 들어가서 방탕하면서 살다가 결국에는 자살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는 삶의 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항상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렸고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엽총으로 머리를 쏘아서 자살을 했습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 무렵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전지약이 다 떨어지고도 코드를 꽂으려 해도 꽂을 전원이 없어서 불이 들어오지 않은 라디오의 진공관처럼 외로움과 공허함속에 살고 있다.
나는 필라맨트가 끊어진 텅빈 전구처럼 공허하다.
왜 하나님을 버렸으니까
세상의 지위도 있고 명예도 있고 상도 받고 사람들에게 박수 갈채를 받았어도 그것은 다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그 마음속은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기전구처럼 너무나 텅비고 외롭다는 것 입니다.
세상의 부귀와 영화 공명과 쾌락을 다 가지고 있어도 삶의 희망을 잃어버리면 그 마음은 공허하기 짝이 없습니다.
삶의 희망을 잃어버리면 살아갈 희망과 용기를 상실하고 인생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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