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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절기 예화모음 24편

by 【고동엽】 2023.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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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목일
 
4월 5일은 식목일입니다.
식목일은 1961년 4월 5일에 제정되었으며, 식목일을 전후하여 일정 기간이 1년 중 나무심기에 가장 알맞은 기간입니다.
1977년부터는 가을철에 육림의 날을 정하여 봄에 심은 나무를 가을에 다시 보살펴주는 나무 가꾸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전국토의 67%를 산림이 차지하고 있어 예로부터 치산치수(治山治水)를 국토이용 정책의 으뜸으로 삼았으며 이는 세계 모든 국가에서도 같은 추세입니다. 세계에서 선진국치고 산에 수목이 울창하지 않는 나라는 없습니다. 국토의 효율적인 산림정책은 곧 그 나라의 문화수준과 부강을 가늠해 보는 척도입니다.

우리 나라는 오래 전부터 꾸준히 나무 심는 운동을 전개하여 헐벗었던 산이 이제는 푸른 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지만, 이제는 좋은 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경제림으로 수종을 바꿔나가는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21세기의 가장 큰 과제는 환경보전입니다. 산림의 수목은 환경보전의 주체입니다.
나무는 인간에게 너무나 많은 자연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여름철에는 홍수의 피해를 막아주고, 바람의 피해를 막아주는 방풍벽 역할을 해 주며, 맑고 신선한 공기와 그늘을 마련해 주고, 나무숲 밑에서는 많은 동식물들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며, 마지막엔 자기의 몸을 바쳐서 좋은 재원의 원료가 되어 줍니다.

여러분은 이런 나무의 고마움을 알고 더욱 사랑과 정성으로 한 그루의 나무를 심고 가꾸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얼마 전에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 발생한 큰 산불로 많은 산림이 불에 타 엄청난 피해를 입은 일을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산불로 인한 피해 지역이 본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는 수십 년이 걸려야 한다고 합니다. 이는 단순히 산림의 피해보다는 산림으로부터 받는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없음은 물론, 인간은 홍수, 산사태 등의 큰 재앙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나무를 심는 일도 중요하지만, 등산객이나 산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사소한 부주의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은 사실을 명심하고 또 다시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산림 보호에 모두가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가정에서 가꾸는 화초도 가꾸는 사람의 정성을 곁들이지 않으면 결국엔 시들고 맙니다. 식목일을 전후하여 집이나 주변 공터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고 가꾸는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에도 우리의 사랑을 심고 정성껏 가꾸어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서 넉넉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 주기를 바랍니다.

 

 

 
 
 

 

 

현충일
 
신록의 아름다움이 절정을 이루는 유월의 산하.
찬란한 햇살과, 푸른 하늘과, 부드러운 바람과 왁자한 웃음소리가 넘치는 이 활기찬 삶의 터전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는 도대체 누구겠습니까?
6월 6일, 현충일은 바로 그것을 허락하신 순국영령들 앞에서 그분들을 추모하고 명복을 비는 날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돌아보는 날이기도 합니다.

현충일은 1956년 6월 6일, 6. 25 동란의 전몰용사와 모든 순국영령에 대한 추모일로 제정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 날 정부는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추모 행사를 갖고, 이와 함께 온 겨레가 그 분들의 높은 뜻을 기리고 애도하는 묵념을 올립니다.

조국광복과 자유수호를 위해 목숨을 던진 순국열사,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개인의 영화를 버리고 분연히 가시밭길을 선택한 선각자, 이국의 전선에서 또는 아직도 발견되지 못한 채 어느 이름 모를 산자락에서 쓸쓸히 잊혀질지도 모르는 영령들에게 최고의 존경과 사랑을 드려야 하는 날입니다.

´희생´이란 ´나´ 보다 ´남´ 을 더 사랑하는 정신이요, 행위입니다. 인간은 유독 자식에게 그 ´희생이라는 사랑´ 을 내림합니다. 하기야, 동물에게서도 인간 못지 않은 눈물겨운 사랑을 발견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나´ 가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담보한다는 것, 그것은 신이 아닌 한 인간이 해낸 최고로 아름다운 이성의 꽃입니다.

순국열사의 그 고귀한 희생과 헌신의 정신이 우리에게 민주국가를 건설하게 했고, 우리 민족에게 자유를 누리게 했으며 오늘의 우리를 존재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그분의 커다란 사랑과 실천의 정신을 되새기고 배우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나´ 아닌 ´남´에게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은 남북 정상회담까지 이끌어낸 우리입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평화통일과 복지국가 건설 등의 지상과제를 이루어 보다 나은 삶의 터전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 후손들의 몫입니다.

올해의 현충일에는 꽃 한 송이를 사들고 국립묘지를 찾아가 봅시다. 어느 묘비 앞이라도 좋습니다. 무명의 전몰용사 묘비라면 더욱 좋습니다. 그 곁에서 가신 이의 목소리를 들어봅시다. 그리고 가만히 말해봅시다. ˝감사합니다. 편히 쉬소서. 이제는 저희가 지키고 가꾸겠습니다.˝ 라고.

 

 

 
 
 

 

 

6.25 동족상쟁의 비극
 
본문: 대하 28:8~15

유월 이십오일은 6.25 전쟁이 일어난 지 54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 당시 열살이었던 저는 매일 동네아이들과 몰려다니며 전쟁놀이를 하며 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제가 살던 동네는 워낙 골목이 비좁아서 넓게 퍼져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랫동네와 윗동네가 전쟁놀이를 시작하면 힘있는 형님들이 앞장서서 싸웠고, 저와 같은 조무래기들은 그저 형님들 뒤를 따라다니며 “와, 와!” 소리나 질러댔습니다. 마치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언이나 하듯이 남자 아이들은 날마다 막대기를 들고 전쟁놀이를 하며 놀았습니다.

1950년 6월 25일은 휴일인 관계로 군인들 대부분이 외출 중이어서 부대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우리 군의 장비는 허술하기 그지없었으나 북한 군대는 소련제 탱크로 중무장하고 물밀듯이 남으로 남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거의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는 우리 국군은 속수무책이었으며, 북으로부터 밀려 내려오는 피난민의 행렬은 길을 가득 메웠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수는 엄청나게 불어났습니다.

우리집도 남들처럼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식구들은 이부자리와 쌀을 나누어 지고 뒤늦게나마 피난민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저도 쌀을 한 말 정도 짊어지고 갔는데, 어찌나 무겁든지, 제 등짐을 줄이기 위해 식구들이 밥을 해먹을 때마다 제 것부터 먼저 풀어서 밥을 지어먹게 해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가족도 남쪽으로 내려가기 위해 한강을 건너려 했으나 이미 한강다리는 폭파되어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소식도 모른채 몰려드는 피난민들로 인해 한강 백사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얼마간의 돈을 주고라도 쪽배를 얻어타기 위해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배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타다보니 배가 가라앉아 모두 빠져죽는 어이없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밤이 되자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비오듯 쏟아지는 총알이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족 중에 어느 한 사람도 죽거나 다친 사람이 없이 모두 무사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고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6.25 전쟁으로 말미암아 남북을 합쳐 무려 450만 명의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전쟁 고아가 5만 명, 남편을 전쟁에서 잃은 젊은 여인들이 3만 명, 행방불명된 자가 36만 명, 북한으로 납치되어 끌려간 사람이 8만 명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과 북으로 흩어진 이산가족이 일천만 명이나 되었으며, 그 중에 300만 명은 죽었고, 700만 명이 남아 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3천 3백만 명으로 온 국민의 1/3이 이산가족이 된 셈입니다.

이런 비극적인 전쟁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성경을 보면 전쟁은 죄 값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사무엘상 17:47을 보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전쟁은 하나님께서 주장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유다왕 아하스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신우상을 섬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역대하 28:5~8을 보면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람 왕의 손에 붙이시매 저희가 쳐서 심히 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갔으며 또 이스라엘 왕의 손에 붙이시매 저가 쳐서 크게 살륙하였으니 이는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유다에서 하루 동안에 용사 십이만 명을 죽였으며 … 이스라엘 자손이 그 형제 중에서 그 아내와 자녀 합하여 이십만 명을 사로잡고 그 재물을 많이 노략하여 사마리아로 가져가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외적의 침략을 받는 것도 불행한 일이지만, 동족상쟁은 더 큰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같은 피를 나눈 형제끼리 죽고 죽이고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저희 옆집에 사는 노인 부부는 대학생인 큰아들은 북한군으로, 고등학생인 작은아들은 남한 군으로 이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사랑하는 두 아들이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는 원수가 되었으니 과연 이 노부부는 어느 편에 서야겠습니까? 두문불출하며 하루하루 사는 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슬프고 괴로웠겠습니까?

성경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의 6.25 전쟁도 죄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평양은 제2의 예루살렘이라고 할만큼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1907년 1월 16일 이 땅에 최초로 성령강림이 있었던 곳이 바로 평양의 장대현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결정했습니다. 총회에 모인 목사, 장로들이 우상숭배를 결의한 것입니다. 교회마다 신사를 만들어놓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전에 먼저 신사참배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종을 떼어 일본의 전쟁무기를 만드는데 쓰도록 헌납했습니다. 이처럼 그 당시 한국교회는 완전히 타락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교회는 겸손히 우상숭배의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운동이 일어났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운동은 일어나지 않았고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정죄하기에만 바빴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습니다. 여러 개의 교파로 분열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더욱 분노케 하는 행위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이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죄를 짓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충격을 받지 않으십니다. 어차피 이 세상을 떠나면 지옥에 멸망을 당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있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이들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이 복을 받고 이들과 함께 사는 다른 사람들까지도 복을 받게 됩니다.
마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사신우상을 섬기고 타락하게 되면 이들만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을 비롯하여 이들과 함께 사는 백성들까지도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6.25 전쟁이 일어난 것은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한 죄 때문입니다. 특별히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주의 종들을 파면시키고 핍박한 죄가 큽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주의 종들을 괴롭히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기독교 역사를 되돌아보면, 타락한 유대인들이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면서 피값을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그대로 심판하셨습니다. 과연 그들의 말대로 독일의 히틀러에 의해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심판하실 때 공산주의자들을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무신론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양심도 없고 윤리도덕도 없습니다. 모든 종교를 아편이라고 금지시킵니다.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서라면 부모 형제라도 서슴없이 죽였습니다.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이 얼마나 잔인한지 감히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일들을 행하고 있는지 소름이 끼칩니다. 북한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직업선택의 자유가 없습니다. 주거지의 자유가 없습니다. 평양에서 살고 싶다고 평양에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동(여행)의 자유가 없습니다.

출판, 통신, 언론의 자유도 없습니다. 평양 이외에는 길거리에 차가 다니는 것을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완전히 죽은 도시가 아닙니까.
그저 당에서 시키는 일하며 배급을 주는 대로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몇 년 동안 배급이 줄었습니다. 주지도 않았습니다. 지금도 식량부족으로 수백만 명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론 보도를 통해 오늘날 중국 땅을 헤매는 소위 꽃제비로 불리는 북한의 청소년들과 남한으로 오기 위해 사선을 넘나드는 탈북자들의 대열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저도 북쪽에서 내려온 아내와 장인, 장모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북쪽 사람들의 생활력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압니다. 오늘날 남한으로 피난 나온 북쪽 사람들이 근검절약하며 부지런히 일하여 당대에 자수성가하신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금이라도 이들에게 자유만 주어진다면 절대로 굶어죽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북한 땅에도 하루 속히 자유가 회복되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공산주의 국가가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1.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몰라도 하나님은 분명히 계시기 때문에 공산주의 국가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어느 국가가 전능하신 하나님과 싸워 이기겠습니까?

2. 교회를 인정하지 않고 핍박하고 없애려 했기 때문입니다.
인류역사를 보면, 교회가 부흥될 때에 국가도 잘되고 국민들이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쇠퇴하면 국가도 힘을 잃고 국민들도 고통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와 경제가 매우 불안정하여 얼마나 이 사회가 위태위태한지 모릅니다.

외국에 나가 한국소식을 듣기라도 하면 금방 난리가 날 것 같고 망할 것만 같은 위기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망할 것 같은데도 망하지 않고 언제나 위기를 극복하며 점점 더 잘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는 일천만 명 이상의 성도들이 있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에스더처럼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부르짖는 성도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산국가에는 교회가 없습니다.

3.소수의 공산당원만을 위해 존재하는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몇몇 공산당원 외에는 모든 국민들을 노예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노예로 부리면 노예근성이 생깁니다. 노예는 자기 것이 없습니다. 주인이 주는 대로 먹고 주인이 시키는 일을 적당히 하다가 죽으면 끝납니다.

전 국민을 노예로 만든 공산주의는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나눈다며 지상천국을 외쳤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공산당원을 제외한 모든 국민들을 거지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일을 해도 안 해도 똑같은 결과를 나눈다면 누가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까. 자신에게 돌아오는 대가가 없는데 무슨 자발적인 봉사를 기대하겠습니까. 그저 눈치나 보고 적당히 시간을 때우면 그만입니다. 전국의 논과 밭과 과수원과 공장이 황페해져가고 있습니다. 결국 공산주의 국가는 평생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4.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감시자요 고발자입니다. 부모를 고발한 철없는 아들이 영웅이 되는 사회입니다. 또 너무 못 살다 보니 누구라 할 것 없이 남의 것을 무조건 빼앗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를 믿고 살겠습니까.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회입니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남한까지도 공산화하기 위해 6.25 전쟁을 일으켰으나 이로 인해 북한의 기독교인들이 남쪽으로 대거 밀려오게 되었습니다. 회개운동이 일어났고 가는 곳곳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회는 하루가 다르게 부흥했고, 성령충만한 교회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새벽기도와 철야기도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전세계 어느 곳을 가보아도 한국교회와 같이 기도 많이 하는 교회는 없습니다.

로마서 8:28의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대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회개하면 살 길이 열립니다. 화가 복이 됩니다. 잃어버린 축복이 회복됩니다.

그동안 남한 사회에는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선전대로 이 땅이 공산화되면 지상낙원이 되는 줄 알고 은근히 공산주의를 사모해왔습니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인해 공산주의의 악함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남한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서방국가들이 목숨을 걸고 공산주의와 싸우게 되었습니다.

88 서울올림픽 때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들이 우리나라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나라보다 훨씬 못사는 6.25 전쟁으로 페허가 된 남한이 거지와 판잣집으로 가득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즐비한 빌딩 숲과 시민들의 얼굴에 기쁨이 있고 활기가 넘치며, 길거리는 온통 자동차들로 가득하고, 시장마다 물건들로 넘쳐나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북한을 비롯하여 공산주의국가들은 점점 더 못살고 지옥으로 변해가는데 비해, 남한을 비롯한 민주주의 국가들은 점점 잘 살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소련을 비롯하여 모든 공산주의 국가들이 위기 의식을 느끼고 서서히 자본주의 경제원리를 접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전세계의 교회를 지도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가장 앞장서서 세계 선교를 이끌어갈 교회는 한국교회뿐라고 전세계의 교회지도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가 불안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교회가 깨어있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가 잘 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들려주시는 주의 음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41:10에서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광복절
 
본문: 출 32:15-35

오늘은 광복 59주년이 되는 동시에 정부 수립 56주년이 되는 날을 기념하여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립니다. 공교롭게도 8월 15일은 해방이 된 날인 동시에 또한 우리 남한 정부가 수립된 날이기도 합니다. 1945년 해방 후 3년 동안 미국의 군정치하에 있다가 3년 후, 5월 10일 남한만이 단독으로 선거를 치르고 7월 17일에 초대 헌법을 만들어 국회에서 통과한 후 8월 15일, “대한민국”이란 이름으로 우리나라가 출범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출범한 우리 대한민국이 오늘 건국 56주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은 이러한 해방 59주년, 건국 56주년을 맞이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한편으로는 감사의 예배를 드리며, 다른 한편으로는 참회의 예배를 드림으로 주신 바 은혜를 이어가는 동시에, 우리가 저지를 잘못들은 단절시키는 모습을 지님으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우리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나갈 수 있는 다짐을 해야 될 줄 압니다.

사실, 미국 땅에 사는 우리들이 고국의 현실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마는, 우리 고국을 위해 기도할 때, 어떠한 기도를 하면 되겠는가 하는 기도의 제목을 찾는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생각해 보았으면 싶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나라가 지녔던 과오와 잘못을 발견할 수 있게 해 주는 말씀이라고 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라를 생각하며 기도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무엇인가를 발견케 해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한 나라가 이루어지는 데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하나는 사람(백성)이요, 또 하나는 땅(국토)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권(법)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히브리 민족은 사람은 있었지만, 땅과 주권이 없었기에 나라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애굽을 탈출하여 약속하신 가나안의 새로운 땅을 향하여 가게 되었습니다. 나라를 이룰 수 있는 조건인 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하나님은 이 히브리 민족에게 이들에게 필요한 주권인 헌법을 주시기 위해서 모세를 시내 산(Mt. Sinai)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이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이제 새로운 땅에 들어가 살 때에 지녀야 할 법을 말씀해 주시고 최종적으로는 돌로 판을 만들어 거기에 십계명을 기록해 주심으로 헌법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민족이 이제 한 국가로서 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법을 제정해 주시고 그 증거로 돌판 까지도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서 이제 모세가 산을 내려 가려하는데 느닷없이 이 백성이 심히 부패하여 도저히 그냥 볼 수가 없다고 이들을 심판하지 않고는 안 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모세는 너무 뜻밖이라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겸손히 용서를 구했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이러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용서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나타났습니다. 막상 하나님께는 이렇게 기도한 모세였습니다만 모세가 막상 산에서 내려와 보니 가관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난장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고서는 이 금송아지더러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도저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일들이 벌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본 모세는 얼마나 화가 났는지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받은 그 두 돌판을 던져 깨뜨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산에 올라간 모세를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이를 “여호와 하나님이다” 하며 섬기며 난장판을 벌인 것은 잘못입니다. 하지만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돌판을 던져 깨뜨린 것도 잘못입니다. 이유가 어디에 있건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스라엘의 주권인 법을 함부로 망가뜨린 것 역시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지난 50년 역사 속에서 누가 과연 헌법을 파괴하였는가를 생각해 볼 때 한 가지 자명한 사실을 그것은 국가 지도자가 망가뜨렸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더 해 보려고, 그리고 현행 헌법으로는 대통령이 될 자신이 없기 때문에 국민적인 합의와 절차라고 형식적으로 대충 모양만 갖추고 헌법을 파괴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백성들이 잘못하는 것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신성한 헌법을 내 버렸던 일을 같이 취급해버린 모세의 행위와도 같다고 보여 집니다. 우리는 이 모습에서 지난 60여 년의 우리 민족의 과오를 볼 수 있습니다. 백성은 백성대로, 지도자는 지도자대로 과오를 범하였습니다. 지도자의 과오는 이렇게 모세가 하나님의 신성한 법을 내팽개친 것과 같이 헌법을 함부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백성의 과오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첫째로 조급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법과 말씀을 받으러 산에 올라간 모세를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여 우상을 만들었듯이 우리 민족도 이 조급한 마음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에 사는 우리들이 가끔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미국 사람들이 상점에서 줄서서 기다리는 모습에 한번씩은 다 말하는 것 말입니다. 사실, 이러한 조급성이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서 국가적인 차원에까지 연결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건물을 짓는 것이나, 다리를 놓는 것이나, 도로를 만드는 것이나 모든 일에 있어서 조급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러한 모습의 지도자가 바로 아론이었습니다. 무언가 업적을 남기고 싶어 한 아론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말만 듣고, 또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기 위해 금송아지 만드는 일에 적극 가담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문제가 되어 모세가 이를 추궁하였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형 아론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이 때 아론은 변명하기에 급급합니다.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라며 이들의 과실로 떠넘기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또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어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라며 앞뒤가 안 맞는 말로 궁색하게 대답하는 아론이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아론을 성경기자는 어떻게 표현합니까?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고 평합니다(25절). 그렇습니다. 그것은 지도자의 잘못이라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잘못된 지도자는 잘못된 백성을 만들어 낸다는 교훈을 여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둘째로, 백성의 잘못은 이들이 물질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황금 송아지는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공통 관심사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특히 이 황금 송아지를 두고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섬기며 그 앞에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물질만능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바로 부정부패라는 문제라고 합니다. 이는 지난 1~ 2년 동안에 이루어진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는 아주 오래된 문제요 그래서 이제는 고질적이 된 사회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부패의 한 가운데에는 “돈”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의 문제점도 발견해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러한 위기와 잘못에 대한 해결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의 바른 역할이 우리 민족에게 절실히 요구되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누구든지 하나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응답하여 나온 사람들이 “레위 자손들”이었습니다. 모세는 이들에게 잘못을 저지를 백성들을 심판하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자기 개인 사정에 관계없이 그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모세는 이들의 이러한 행위와 자세를 하나님 앞에서 헌신한 모습이라고 칭찬하여 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나 이민 교회 역시 이렇게 레위 사람들처럼 사리사욕을 좇지 않고 하나님 편에 설 수 있는 모습과 자세로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날 우리 교회가 모세 당시 레위 지파 사람들처럼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 심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그것을 우리는 32절에 나타난 모세의 자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이 모세의 기도를 오늘날 우리 교회가 지닐 때, 우리 민족이 용서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세의 기도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는 기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의 낭만적인 기도나 순간 기분에 들떠서 할 수 있는 기도는 아닐 것입니다. 이 기도는 백성과 나라의 운명에 자기의 운명을 함께 하고자 하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를 가질 때 지닐 수 있는 기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후에,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말하면서, 혹 자기 민족 이스라엘이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에서 제외될까봐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롬 9:1~3,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우리들도 이러한 바울과 모세와 같은 마음과 자세로 우리 민족의 구원과 평화적인 통일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될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는 이 모습에서 우리 민족의 앞날을 예단할 수 있습니다. 이는 34절입니다.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이 말씀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구체적인 방향제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상당히 막연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성경 저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어디로 이 백성을 인도하라는 것인지 그 장소나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막연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보면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 순간이 주어질 때까지는 알 수 없는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가 인도하면 분명해지는 그러한 곳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바로 긴장이 있는 것입니다. 즉 막연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신앙의 표현으로 하면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란 우리가 그 갈 곳을 정하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해야만 알 수 있고 또 갈 수 있는 그러한 곳입니다. 그렇지 않고 정해 놓고 가고자 하는 모습을 우리는 이데올로기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령의 인도하심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기계적이거나 이미 만들어진 어떤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날마다 살아있는 관계여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늘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염두에 두는 그러한 모습으로 백성을 인도하라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민족과 나라를 위한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모습을 내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삼고자 하는 그 노력과 모습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조국이 하나님의 나라화(化) 될 때, 희망이 있고 내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만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미약하고 나라 전체의 입장에서 볼 때, 미미하고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썩어질 때, 많은 열매가 우리와 우리 민족에게 풍성하게 열려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현실 가운데 맞이한 해방 59주년입니다. 우리가 우리 조국을 염두에 두고 모세와 같은 심령과 자세로 기도드린다면 하나님께서 이 어려움을 헤쳐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와 은총과 복을 우리 민족에게 내려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 속에 남, 북간의 평화적인 통일도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민족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잘 인도할 수 있는 우리 한국 교회가 되도록 또한 노력하며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사랑하여 주시고, 복을 주시며, 섭리하여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해방 59주년을 맞이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또한 우리 민족의 부족한 모습을 생각하면서 이 예배를 드립니다. 저희는 비록 이 미국 땅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이지만, 고국의 소식과 형편에 늘 귀를 기울이게 되며 마음을 쓰게 됩니다. 현재, 남과 북으로 갈려진 가운데 통일을 이루지 못하는 모습 속에서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부족하여 연약한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저희 민족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이 남, 북간에 역사하여 주셔서, 평화적인 통일을 향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비옵고 원하옵나이다. 남, 북간의 모든 위정자들에게 역사하여 주셔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종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울러 우리 모든 남, 북간의 모든 교회에 역사하여 주셔서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모습으로 우리 민족을 위하여 선교하고 기도하는 교회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가운데에 진정한 평화와 복됨이 있음을 깨닫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이 민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추수감사주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본문: 신 8:11-18

뜻깊은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향기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흠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미국에서 큰 병원을 개업을 하고 있는 어떤 의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의 병원에 특별한 환자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 환자는 병원에 올 때마다 여러 사람의 경호원들을 거느리고 왔습니다. 그 사실로 보아서 그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거나 또는 대단히 돈이 많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는 아랍 계통의 어느 나라의 왕자였습니다. 곧 그 나라의 왕이 될 신분이었습니다. 의사는 그 사실을 알고서 온갖 정성을 다해서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 결과 그 환자의 병은 깨끗하게 나아서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진료비를 청구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의사의 마음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그에게 얼마를 청구해야 될는지 제대로 판단이 서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한 나라의 왕자요, 곧 그 나라의 왕이 될 사람이니까 그것으로 족하게 생각을 하고 무료로 해 주는 것이 좋을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지금까지 온갖 정성을 다해서 그를 치료해 주었으니까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비싸게 청구를 해야 될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형식적으로 50불 정도만 청구를 할까, 아니면 500불, 아니면 이왕 청구하는 김에 좀 비싸게 5,000불 정도를 청구해 버릴까? 그는 그 문제를 놓고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 목사님에게 그 문제를 상의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목사님에게 설명을 다 드리고 나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이럴 경우에 제가 얼마를 청구하면 좋겠습니까?"
목사님은 가만히 생각을 하다가 그에게 한 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목사님이 가르쳐 주신 방법이 지혜롭다고 생각하고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진료비 청구서에 이렇게 기록을 했습니다.

"당신의 신분에 걸맞게 지불해 주십시오."
그리고서 그 청구서를 그 환자에게 보냈습니다. 며칠 뒤에 그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덕분에 건강하게 되었다는 감사의 글과 함께 수표 한 장이 들어있었습니다. 그 금액은 자그만치 7만 달러였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8천만 원에 이르는 많은 돈이었습니다. 의사는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그래서 그는 즉시 목사님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 기쁜 소식을 알렸습니다.

며칠 뒤에 의사에게 한 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교회 목사님이 보낸 편지였습니다. 그 안에는 자그마한 쪽지 한 장이 들어있었습니다. 그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당신의 신분에 걸맞게 하나님께 감사 헌금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거기에는 감사 헌금 봉투도 한 장이 들어있었습니다. 받은 바 은혜에 따라서 당신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라는 뜻이었습니다.

어떤 부잣집에 외동아들이 중병에 걸렸습니다. 절망적이었습니다. 병원에서도 그의 병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손을 붙들고 자기 아들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아이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아이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부자는 너무나도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최고급 호텔에 있는 일류 레스토랑으로 초대해서는 좋은 음식으로 대접을 했습니다. 그는 주일날 하나님께도 감사의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가 감사 헌금으로 드린 액수는 고작 2만원뿐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음식값도 채 되지 않는 작은 금액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신분에 걸맞지 않는 감사를 하나님께 드린 셈입니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은혜는 컸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드린 감사는 쥐꼬리보다도 작은 형식적인 감사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뜻깊은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우리가 여태껏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일에 쫓기다보니 여태껏 한 번도 제대로 된 감사,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감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오늘만이라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제대로 된 감사,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감사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를 제목으로 삼고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00년 동안이나 종살이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축복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감사의 이유는 출애굽의 은혜였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는 죄의 종들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사탄의 권세에 얽매여서 살았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장차 하나님 나라의 모든 영광을 영원히 누리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구원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하루는 길을 걸어가고 잇었습니다. 목사님은 길을 건너기 위해 신호등 앞에 잠시 멈추어 섰습니다. 그때 한 청년이 목사님 앞으로 다가오더니 인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는 교회에 출석하는 청년입니다. 저는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늘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평소에 성경을 읽으면서 늘 궁금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목사님에게 좀 여쭈어보고 싶은데 대답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목사님은 빙긋이 웃으면서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지요, 제가 아는 범위에서 대답해 드리지요? 무엇이 그렇게 궁금하십니까?"
그때 청년이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필이면 가룟 유다처럼 자기를 배반할 사람을 자기의 제자로 삼으셨습니까?"
그때 목사님은 빙긋이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글쎄요. 저도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런데 사실 제게는 그것보다도 훨씬 더 궁금한 것이 한 가지 있답니다."
청년은 그 말을 듣고서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아니 목사님처럼 늘 믿음으로 사시는 분에게도 궁금한 것이 있으십니까? 그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목사님은 웃으시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늘 궁금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왜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해주셨는지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청년은 목사님의 그 말에 더 이상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 우리에게는 가룟 유다가 문제가 아닙니다. 가룟 유다보다도 더못한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은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구원의 은혜를 깊이 생각한다면 다른 것은 절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과 구원의 감격만 회복이 되면 저절로 다른 문제는 쉽게 풀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405장은 이렇게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그렇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큰 죄악에서 건지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장차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절로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부자가 절망적인 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곧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는 큰 대학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차도가 있어서 다행스럽게도 그의 몸이 점점 좋아졌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퇴원을 하게 될 때, 그 대학병원에 연구기금으로 5억 원을 희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 주일이 지났습니다. 그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5억 원은 너무 많으니까 절반 정도만 희사를 해야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의 병이 완쾌가 되어서 퇴원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 부자는 일억 원만 희사하기로 또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때 그의 양심이 그를 질책했습니다.
'이놈아, 네가 죽게되었을 때는 너의 재산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게 생각을 하더니 이제는 살게 되었다고 또 욕심을 부린단 말이냐? 이 못된 놈아! 그러다가는 네가 퇴원할 때는 아예 입원비조차도 깍아 달라고 하겠구나!"
그 소리를 듣고서 그는 마음을 뉘우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 생각했던 5억 원의 두 배가 되는 10억 원을 그 병원에 희사하고서 퇴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감사가 식었습니까? 구원의 기쁨,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다시 한번 구원의 기쁨과 구원의 감격을 뜨겁게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는 형통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12∼14절 상반부의 말씀입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사람이 배가 고프면 코가 예민해집니다. 그러나 배가 부르면 자동적으로 코가 무디어지기 마련입니다. 영적인 견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절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형통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우리가 흔히들 착각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이런 인사를 했다고 가정을 해보십시다.
"축하합니다. 얼마나 기쁘세요?"
그러면 대개는 어떻게 얼버무립니까?
"뭘요,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요."
우리는 그러한 말이 마치 겸손인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을 겸손이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교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될 때, 형통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하지 않는 것을 바로 교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7∼18절입니다.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축하합니다. 얼마나 좋으세요?"
누군가가 우리에게 이렇게 인사를 한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대답을 해야 되겠습니까?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우리는 형통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윗 임금을 한번 생각을 해 봅시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의 왕좌에 올랐습니다. 그는 백향목 궁에 평안히 거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형통할 때 그는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단 선지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좋은 궁에서 평안히 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궤는 아직도 낡은 천막 속에 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옳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궁전보다도 훨씬 더 좋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서 그 속에 하나님의 궤를 보관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의 마음을 보신 하나님은 너무너무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 언제 너더러 성전을 지으라고 말하더냐? 내가 언제 너에게 휘장 속에 거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말하더냐? 그런데 네가 어떻게 그와 같이 기특한 생각을 다 했단 말이냐?"

다윗은 형통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아름답게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존귀케 하셨습니다. 그와 그의 자손 대대로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형통할 때에, 평안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쓴 글을 인용해봅니다.

"당신은 복 받은 사람."
당신 개인 소유의 성경책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복 받은 것입니다. 세상 인구의 3분의 1이 성경을 한 권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당신이 오늘 아침에 건강하게 일어났다면 당신은 복 받은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십만 명이 아침에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당신이 전쟁의 위험이나 감옥 생활이나 고문이나 기근에 고통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복 받은 것입니다. 세상에는 거의 5억 명이 그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당신이 위협이나 체포나 고문을 당하지 않고 교회에 갈 수 있다면 당신은 복 받은 것입니다. 세상에는 30억 명의 사람들이 교회와 동떨어져 살고 있습니다.
당신의 냉장고에 음식이 있고 따뜻한 옷과 살 집과 잠잘 곳이 있다면 당신은 복 받은 것입니다. 세상 인구의 75%가 그렇지 못합니다.

당신의 통장에 생활비가 있고 지갑에 용돈이 있다면 당신은 복 받은 것입니다. 당신은 세상 사람들 가운데 상위 8%에 속한 사람입니다.
만일 당신이 어제도 오늘도 기도했다면 복 받은 것입니다. 비록 소수에 속하지만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복 받은 사람입니다. 거기에 죄 용서와 평안과 영생의 보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다윗처럼 형통할 때에, 평안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우리는 곤고할 때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형통할 때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해야 되지만, 곤고할 때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15∼16절 말씀입니다.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은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는 그들을 해하는 불뱀과 전갈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곳은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목축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까? 그들을 골탕을 먹이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었습니다.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에서도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 전체를 책임지시고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주릴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들이 목말라 할 때 하나님은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셔서 그들의 갈한 목을 축여주셨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갈 길을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 기둥을 띄우셨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을 띄우셔서 그들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살던 40년 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릍지 아니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돌보시고 책임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지금까지 광야와 같은 인생 길을 걸어왔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무사히 오게 된 것은 전적으로 에벤에셀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고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계속해서 광야와 같은 인생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그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은 마침내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자동차 왕이라고 불리는 헨리 포드가 한 번은 어떤 기자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포드의 나이가 78세로서 백발이 성성할 때였습니다. 기자는 포드의 얼굴을 보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의 얼굴이 그렇게나 온화하고 평온하게 보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자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당신은 큰 기업을 운영하면서 이런 저런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와 같이 곱게 늙으셨습니까?"
그때 헨리 포드가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 가운데서 모든 것을 섭리해 가신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 왔습니다.

따라서 내 앞에 어떤 어려운 일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그 속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그러니 왜 내가 걱정하고 염려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나는 아무리 위기의 상황을 맞이했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언제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가 늘 감사하면서 살아온 것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평온한 삶을 살 수 있게 만든 근본적인 이유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행복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행복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할 때 절로 우리에게 행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이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잊지 맙시다.
여기에 어떤 글을 한 가지 더 인용하겠습니다.

"하나님,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고독하고 외로운 것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 되도록 들어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의 교만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돈이 떨어지고 사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사게 하신 것도 감사합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이 공부를 기대만큼 안 하고, 아내가 미워지고, 어머니와 형제들이 짐스러워질 때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저의 우상이 되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허무를 느끼게 하고, 때로는 몸이 늙고, 아프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그럼으로 인하여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불의와 부정이 득세하는 세상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제게 잘못하고 저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그럴수록 더욱 겸손해지고 더욱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밤, 잠 못 이루고 뒤척이게 하신 것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병들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을 더욱 감사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곤고할 때도 얼마든지 그 속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뜻깊은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모두가 구원의 기쁨과 구원의 감격을 다시 한번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으십시다.

기도할 때도 감사함으로 기도하고, 찬양할 때도 감사함으로 찬양하고, 헌금을 드릴 때도 감사함으로 드리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도 감사한 마음으로 받으십시다. 우리는 형통할 때도 감사하지만, 곤고할 때도 변함 없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뜻깊은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향기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6.25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본문: 요한계시록 3장 19∼22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1950년 6월 26일 당시 저는 동래중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그날도 상쾌하게 기차를 타고 등교했습니다. 교실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뒤숭숭했습니다. 전날 미명에 공산군이 탱크를 가지고 침공해 왔는데 야크기가 김포공항을 습격했고 탱크는 이미 의정부까지 쳐들어 왔다고 했습니다. 전쟁이 난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전교생을 불러 모아놓고 ‘특별한 지시가 있을 때까지 학교는 무기 휴학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곧장 군인들이 학교를 접수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길로 언제 학교로 돌아올지 기약 없이 집으로 갔습니다. 그 이후 3년 1개월 동안 우리는 6·25 동란이라는 비참한 전쟁을 겪게 된 것입니다. 전쟁의 결과로 사망, 부상, 실종, 포로된 인명 피해만 해도 한국군인과 경찰이 62만명, UN군이 15만명, 한국 민간인이 99만명, 북한과 중공군이 200만명, 북한 민간인이 150만명 총 526만명이 사상을 당했습니다. 여기에 전쟁고아가 10만명, 전쟁 미망인이 30만명, 피랍민이 320만명, 이산가족은 1000만명이 넘게 발생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전쟁이 우리 한국에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1. 육이오(6·25)는 자업자득
우리가 기억할 것은 6·25라는 이 비극적인 사건은 자업자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있어 정신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초래한 비극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가 강했다면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조선 말엽에 한국의 실정은 비극 그 자체였습니다. 무능한 왕조와 부패한 정치로 사색당파 싸움이 끊이질 않고 쇄국정치로 나라는 세상과 완전히 분리되어 무지하고 가난한 국민은 갈 바를 모르고 방황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17절에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고 한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무능한 왕조는 그 측근 세력들이 활동을 부추겼습니다. 고종의 아버지였던 대원군은 지위를 이용해 천주교를 박해해 어마어마하게 많은 천주교도를 참수해서 죽였습니다. 그렇게 많은 천주교인들을 박해하고 무역을 청하러온 외국 무역선을 격파시키며 쇄국정책을 행했습니다. 만일 그때 나라의 문을 닫지 않고 열었더라면 우리 국가가 현대화되고 일본에 강점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라를 막아놓고 구태의연한 생활을 했습니다. 고종의 아버지 대원군은 서슬이 퍼렇게 주먹을 쥐고 흔들고 아내 명성황후는 명성황후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그 수하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달려들어서 정치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왕조와 정치권의 부패는 국민들을 분노로 몰아넣었습니다. 이에 1860년 최제우를 교주로 하는 동학란이 일어났고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습니다. 드디어 1910년에 힘없고 무력한 한국은 일본의 압력에 무릎을 꿇고 일본에 병탄(倂呑)되고 만 것입니다.

그일 이후로 36년간 식민지 생활을 했으며 나라도 잃고 언어도 잃고 창씨개명하고 징병, 노역, 수탈, 신사참배, 정신대 등 비극적인 역사의 상흔을 남겨놓고 만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그렇게 망한 이유는 우리 지도자들이, 우리 국민들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다고 즐거워했지만 스스로 풀지 못한 쇠사슬이었습니다. 강대국에 의해서 해방이 되었으므로 강대국에 좌지우지되고 우린 자율권을 잃어 버렸습니다. 연합군이 와서 해방을 시켰기 때문에 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이 우리를 38선으로 갈라놓고 만 것입니다.

스스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힘이 없는 사람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미소에 의한 38선이 분단되고 우리 한국은 냉전의 최전선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에 세계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격렬한 투쟁장소였습니다.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던 곳이 한국이었습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앞세워서 우리 한국을 적화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 대한민국은 혼란이 극에 달했습니다.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쟁으로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완전무장한 보병사단과 소련제 전차로 무장한 북한의 기습에 힘없이 무너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서울이 함락되고 전국이 북한군에 짓밟히고 오직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부산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습니다.

2.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지 않으셨다면 절대로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었습니다. 애국가에서처럼 하나님이 개입해서 우리를 6·25의 비참에서 건져내 주신 것입니다. 트루먼 미 대통령이 바로 6·25가 나자마자 한국에 지원군 파병을 UN안보리에 회부했고 소련대표 말리크가 불참해 한국파병이 결의되고 UN 16개국이 파병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상임이사국은 미국, 중국, 소련, 프랑스, 영국 총 5개국인데 이중에 한 나라만 반대해도 UN군을 파견할 수 없습니다.

한 나라만 반대했어도 우리 한국은 공산화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시편 118편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낙동 강변까지 소련 탱크로 무장한 북한군들이 쳐들어왔기 때문에 ‘오늘 부산이 무너진다. 내일 부산이 무너진다’ 그런 위기에 처했습니다.

바로 그때에 이승만 대통령께서 부산 지사관에 계셨는데 제일 큰 초량교회에 모든 피난 목사들을 불러 모아놓고 부탁을 했습니다. “북한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와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방어할 힘이 없고 며칠 이내에 하나님이 도와주지 아니하면 우리는 부산바다로 몰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 친구 맥아더가 B-29를 보내 융단폭격을 해서 침공하는 북한 공산군의 주력을 깨뜨려 주기로 약속을 했는데 지금이 8월로 우기에 들어서 비가 내리면 비행기가 뜨지 못합니다. 비가 오지 않도록 목사님들이 기도를 해주십시오”

아무리 맥아더가 비행기를 보내 우리를 지켜주려고 해도 비가 오면 비행기가 뜰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호소를 듣고 초량교회에 모여서 열흘간 철야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때에 만일 목사님들이 초량교회에 모여서 열흘간 금식하고 철야하며 부르짖지 아니했더라면 한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해 8월에 하루도 구름 낀 날이 없었습니다. 한 달 내내 하늘이 청명했습니다. 그때 B-29가 주야로 날아와서 폭격을 안했으면 한국은 그대로 공산군의 손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기도하는 맥아더 장군이 곧 인천상륙을 개시했고 인천에서 허리 중간을 막아 버리니까 독안에 쥐가 된 공산군들은 다 패퇴했고 그길로 UN군과 한국군은 진격해 올라가서 압록강까지 갔으나 중공군이 개입하므로 말미암아 다시 패퇴하고 오늘의 휴전선까지 내려와서 휴전 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요엘 2장 12절로 13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재앙에 처했을 때 주의 종들이 철야하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몸부림치고 부르짖은 결과로 하나님의 손길이 움직여서 우리 대한민국이 파멸에서 구출되고 오늘날 교회가 한국에 이처럼 살아서 역사하게 된 것입니다.

3. 잊지 말아야 할 은혜
옛말에 은혜는 돌에 새기고 원한은 물에 새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은혜는 다 물로 떠내려 버리고 원한만 돌에 새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과 UN군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미국과 우방의 군사들이 물질적 도움이 없었으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6·25를 체험하지 못했지만 6·25를 겪은 우리 연배의 사람들은 그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산에 피난민들의 삶이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죽음을 눈앞에 둔 삶이었습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습니다. 있을 곳이 없어 산에 굴을 파고 판자로 집을 지어서 겨우 비를 피하고 추위를 피했습니다. 수많는 사람들이 굶어죽고 병들어 죽고 얼어 죽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래도 대다수의 국민이 살아남은 것은 미국 사람들이 갖다 준 식량과 의복과 의약품 원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적인 의지와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미국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날 수 있다는 마음의 의지가 있고 희망이 있었습니다. 실질적으로 한국 재건의 기본적인 원조는 미국이 해주었습니다. 8·15해방 이후 미국은 지속적으로 한국을 원조했습니다. 경제통계연보에 의하면 1945년 해방된 때로부터 1950년 6·25발발 전인 그때까지 미국은 우리나라에 금액으로 따지면 약 5억 8400만 달러를 원조했고 전쟁이후 1965년까지 약 33억달러나 원조해 주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이 땅의 선조들이 뼈를 깎는 고통과 눈물을 흘리며 헐벗고 굶주리면서 나라를 건설한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연히 이렇게 잘 살고 잘 먹고 잘 입는 일이 일어난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시점에 와서 꼭 알아야 될 것은 지금 누가 우리 편인가를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누가 우리 편인지 혼동 상태에 빠져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우리 동족끼리 뭉쳐서 살자’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와 동맹을 한 미국과 서방국가들은 우리와 멀리 있으니까 우리가 자꾸 배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북한은 같은 민족이라는 상징만 존재할 뿐 가치관과 체험 등에서 어떤 공감대도 없습니다. 언어와 외모를 빼면 같은 점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이질성을 무시하고 ‘같은 민족이니까 무조건 통일해야 한다. 뭉쳐야 한다’는 주장은 함께 죽자는 얘기일 뿐입니다.

오늘날은 동맹이 통하는 시대입니다. 동맹이란 얼굴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더라도 이해가 같고 사상이 같아서 함께 살면 그것이 진짜 동맹이 되는 것입니다. 민족끼리 하나 되자고 하는 말은 허구입니다. 북한은 우리를 미혹하기 위해서 ‘동족이니까 하나가 되자’고 합니다. 하지만 동족이라고 하면서 주머니에 총과 원자탄을 감추고 있습니다.

겉으로 ‘우리와 같이 살자. 우리에게 쌀다오. 비료다오, 돈다오, 도와다오’라고 합니다. 그런다고 해서 우리가 거기에 미혹되었다가는 큰 코를 다칩니다. 북한은 김일성 이후로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적화통일의 야욕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북한이 원자탄을 가지고 있다고 큰소리 치고 있습니다. 북한이 원자탄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함께 망합니다. 왜냐하면 북한이 원자탄을 가지면 물론 이미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의 모든 무장은 해제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원자탄 앞에 재래식 무기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북한이 원자탄을 가지면 일본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일본이 핵무장을 하게 되면 우리는 사방에서 협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만도 핵무장을 하게 될 것이고 이러면 미국이 가만있지 않습니다. 미국은 반드시 북한을 공격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남북은 공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길은 우리와 이해관계가 같고 사상이 같은 미국과 굳건한 동맹을 가져야 안전할 수 있습니다. 미국을 멀리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6·25때 미국, 영국, 호주, 네덜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프랑스, 필리핀, 터키, 대만, 그리스, 남아공화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노르웨이 등에 35만명의 군인이 우리 한국에 와서 우리를 도와주었고 총 15만 4881명이 죽었습니다. 미국 군인이 3만 7000명, 영국 군인이 1078명, 터키 군인 742명이 남의 땅에 와서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서 죽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고난당할 때 피 흘려 싸워준 우방들입니다. 동족이라는 말보다 동맹이라는 말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4. 역사적 비극을 막기 위하여
한국이 역사적인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정치가 새로워져야 됩니다. 정치가 잘되야 나라가 삽니다. 우리 정치가 잘되면 나라가 잘되고 정치가 못되면 나라가 못됩니다. 우리는 꿈과 지도력이 있는 정치인들을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꿈이 없고 지도력이 없이 서로 싸움만 하는 정치인들을 갖다 놓고는 우리나라에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민족과 국민을 잘 먹고 잘 입고 잘살고 부강하게 만들 수 있는 꿈과 지도력을 가진 사람이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정치지도자는 애국 애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파벌이나 위하고 정치를 통해서 자기 이익만 도모하는 정략적인 사람이 아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정치인들이 우리를 이끌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인들이 부정부패가 없어야 합니다. 불의가 있는 곳에 국가가 바로 설 수 없고 부정부패가 있는 곳에 국민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의욕이 생겨날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미가 6장 8절에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도 현명해져야 됩니다. 나라와 민족 사랑이 앞서야 되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면 전라도도 없고 경상도도 노인도 젊은이도 아무것도 안 남습니다. 또한 나라가 살기 위해서 국민이 현명하여 서로 손잡고 함께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왜 이 좁은 땅에서 도가 나뉘고 지역이 나뉘고 계층이 나뉘어지는 것입니까? 서로를 위하며 아끼고 협동하는 국민이 되어야 합니다.

부강한 나라 건설을 위해 우리가 서로 힘을 합쳐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부강하면 우리가 행복하게 살뿐 아니라 해외에 나가서도 대접을 받습니다. 나라 부강을 위해서 우리 국민 전체가 서로 상부상조하고 손을 잡고 나가야지 지역 간에 갈라지고 계층 간에 갈라지고 노사 간에 갈등으로 나라를 망쳐 버리고 난 다음에는 우리가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통해서 배워야 됩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서고 우리가 강하면 아무도 우리를 넘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교회가 우리 한국에 있다는 것은 큰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우리와 같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한국을 볼 때 교회를 계산에 넣지 않습니다. 한국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 군사, 산업만 계산해 넣지 교회를 계산해 넣지 않습니다. 중대한 잘못입니다.

우리나라에 5만 교회와 10만 주의 종과 1200만 성도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만큼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이 계시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적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문을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아 놓으면 열 자도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창대해지고 교회가 흥왕하고 교회가 빛과 소금이 되면 나라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6·25때는 우리 한국 교회가 미약하기 짝이 없고 성도수도 별로 되지 않아서 힘이 되지 못했지만은 지금은 국민의 4분의 1이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부르짖음을 하나님이 귀 기울여 들으십니다. 6월 25일 대학로에 수 만명의 우리 성도들이 모여서 부르짖어 기도한 것은 반드시 효과를 발생합니다. 그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고 하나님이 반드시 들으신 것입니다. 우리 한국이 지금까지 망하지 않는 것은 성도들의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고 하늘에 보존되어 있어서 그 기도의 효과로써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빛과 소금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로 14절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가 사회의 빛이 되어야 되고 교회가 도덕적인 소금이 되어야 되고 교회가 기도하여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간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불사조처럼 6·25의 잿더미 위에서 오늘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정치, 군사, 경제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힘으로 능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저는 저의 어릴 때와 지금을 비교해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몇 번이고 가슴을 두드렸는지 모릅니다. 정말 믿을 수 없습니다.

내가 어릴 때 본 한국의 처참하고 황폐한 상황에서 55년 만에 이렇게 부하고 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이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세워 주셔서 마지막 때에 제사장의 국가로 세우시사 아시아와 세계의 빛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과거 1919년 3·1운동 때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한수의 시를 지어서 한국 국민에게 보냈습니다. 옛날 아시아의 황금시절에 찬란한 등불이었던 코리아. 다시한번 그 등불 밝히는 날에는 온 세계 빛이 되리라고 말했었습니다. 그 시성이 말한 것처럼 이제 다시한번 그 등불이 우리에게 비춰지는 것은 다른 것을 통한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비춰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으로 온 세상을 비취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6·25의 잿더미에서 우리를 건설하사 오늘이 있게 한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 하나님의 성호를 높이는 우리들이 다 되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다시는 6·25와 같은 민족적 비극을 당하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행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나라사랑, 이웃사랑을 충실히 당하는 우리 개인이 다 되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인간으로서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을 때 하나님이 간섭하여 주셔서 건져 주시고 오늘날과 같이 잘살게 만들어 주신 것은 기적이요, 상상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를 살리심은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 우리 한국에 품고 계신 뜻을 다 이루어 주옵소서. 다시는 6·25와 같은 전쟁이 일어나지 말게 도와주시옵소서. 한국을 제사장 국가로 삼으셔서 그리스도의 빛을 만방에 비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광복절 조국위한 느헤미야의 기도
 
본문: 느 1:1-11

<을유 광복 60주년을 맞으면서>
금년 8월 15일은 광복 60주년이 됩니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고 36년 동안 고생하다가 자유를 되찾은 지 60주년이 됩니다.
1945년은 을유년(乙酉年), 닭의 해였습니다. 닭의 울음소리가 새벽이 동터옴을 알리듯이 우리 조국의 광복은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또 한 차례, 닭의 해인 을유년에 광복 60주년을 맞기에 더욱 감회가 새롭습니다.

여러분, '광복'(光復)이 무슨 뜻입니까?
빛을 회복한다는 말이 아닙니까?
어둠 속에 갇혀 있다가 다시 빛을 본다는 뜻이지요.
어떤 사람은 '광복'이라는 말이 너무 타율적이므로
보다 주체적인 '해방'이라는 말로 고쳐 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광복절'이라는 말 대신에 '해방 기념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조국 광복이 우리의 자주적 뜻과는 무관하게 찾아 온 선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광복을 맞을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는 상태에서
일제에 대한 연합국의 승리로 어부지리(漁父之利)로 얻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른바 '타율적 해방론'이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지만 남과 북에 이내 미국과 소련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조국광복에 대한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돌발적인 선물이었기에,
일본이 떠난 빈 공간을 공산주의를 대변하는 소련과
자유민주주의를 대변하는 미국이 각각 점령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1945년 8월 15일이 분명히 해방일이긴 하지만 아직 미완성의 해방일이라는 것입니다.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사 최대의 숙제가 남아있기 때문이지요.

제가 볼 때, 8.15 해방이 외세에 의하여 저절로 주어진 선물로만 보는 견해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제 36년 동안 우리 선조들의 항일독립운동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국광복은 우리의 노력과 무관하게 어느 날 갑자기 굴러온 선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목숨을 걸고 줄기차게 피눈물나게 저항한 투쟁의 귀결점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일제로부터 주권을 되찾은 뒤 60년 동안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제 일본이 우리 나라를 더 이상 얕볼 수 없을 만큼 우리는 경제, 군사대국이 되었습니다.
그 눈부신 성장과 발전은 이미 온 세계가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청산해야 할 식민잔재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세대간, 계층간, 지역간의 갈등과 분열이 심합니다.

특히 이미 세계적인 추세로 볼 때 해묵은 논쟁이 되어버린
좌우, 혹은 보혁의 이념대결이 오직 우리 나라에서만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도청 사건을 비롯하여 부정부패가 아직도 공공연하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IMF이후 경제는 여전히 바닥을 치며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광복 60주년을 맞는 우리의 자세도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조국의 광복을 어떻게 볼 것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조선총독부 문서에 보면 "조선민족의 미래에 대해 희망을 버리지 않는 유일한 집단이 기독교"라는 언급이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많은 지식인들과 선각자들이 기독교에 속속 입문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조국광복이었습니다.
유교나 불교나 모든 재래종교들이 조국해방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절망했기에 유일한 희망의 대안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8.15 해방이 우리 민족을 뜨겁게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총이요 섭리적 선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세계사 속에 위대한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구속사로 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조국이 다시는 국권을 잃고 신음하는 일이 없도록 힘써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기도했던 느헤미야를 본받아>
오늘 본문말 씀은 느헤미야가 자신의 조국인 유다와 그 백성들을 위해 기도한 내용입니다. 느헤미야는 유다 백성들이 포로 생활을 마치고 속속 귀환할 때 활동한 지도자였습니다.
느헤미야의 관심은 두 가지였습니다. 오랜 포로 생활을 통하여 이방의 악습에 물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도록 촉구하는 것 하나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 하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아닥사스 왕의 술맡은 관원이었습니다. 왕이 마실 술과 음료를 책임지는 직책인데 매우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혹시라도 왕이 마시는 술과 음료에 독약을 타서 암살시도를 하지 않을까 경계했기 때문에 꼭 신임하는 사람이 아니면 이 자리를 맡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고관으로 있다가 고국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나니라고 하는 형제로부터 예루살렘과 유다 백성들의 비참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본문 3절을 보세요.

"사로잡혀 오지 않고 그 지방에 남은 사람들은, 거기에서 고생이 아주 심합니다. 업신여김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다 불에 탔습니다."
하나니가 전해준 소식은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유다 백성들은 하나같이 멸시와 천대를 받을 뿐 아니라 유다 백성들의 심장부요 자존심인 예루살렘은 형편없이 훼파되고 말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느헤미야는 어떻게 했습니까?
본문 4절을 보세요.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고국에 대한 비참한 소식을 듣고 슬픔을 이기지 못해 풀썩 주저앉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날 동안 슬퍼하며 금식기도를 올렸다는 것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에서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그 마음은 언제나 조국에 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국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눈물과 금식의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광복 60주년을 맞으면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조국 사랑하는 마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5-11절에 나타난 느헤미야의 기도를 보면 크게 세 가지 내용이었습니다.
① 이스라엘 자손의 미래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고백입니다.
5절을 보세요.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폐허로 변한 예루살렘에 남아 짐승같이 천대를 받는
유다 백성들이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 민족이 의지할 분도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북핵 문제로 6자 회담이 열리는 모습을 보면 이런 생각은 더욱 굳어집니다. 옛날부터 우리 나라는 극동 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가 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로부터 무수한 외침을 받아왔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핵 문제가 간단하지 않은 것은 한반도가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의 강대국들에 의해 둘러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강대국들 사이의 국제적인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기 때문에 쉽게 타결되지 않는 것이지요.
삼면이 바다로 둘러 쌓여 있으니 우리가 믿을 길은 하늘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사방이 막혀 있어도 하늘이 뚫려있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한민족은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민족이 살길입니다!

②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을 거역한 죄를 고백합니다.
6-7절 말씀을 보세요.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느헤미야는 유다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과 자기의 집안까지도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지도자인 자기와 자기 집안부터 죄를 지었기에 이 민족이 고난을 당한다는 반성이지요!
이 나라가 바른 길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의 죄를 공동으로 자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나는 잘했는데 누구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태도가 아닙니다.
먼저 나의 죄부터 발견하고 그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자기와 자기 집안부터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해 국가적인 재난을 당했다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지도자로서 자기부터 먼저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렇습니다.
해방 60주년을 맞으면서 한민족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위대한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거족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지도자들부터 자신의 죄를 돌아보며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다시는 국권을 잃고 남의 나라에 종살이하는 일이 없도록 한민족을 눈동자처럼 지켜주실 것입니다!

③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 계명을 지키고 실천하면 하나님께서 회복해주심을 믿습니다. 8-9절 말씀을 보세요.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

참 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면 이스라엘을 여러 나라 가운데 흩어버리시지만, 주님께로 돌아가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실천하면, 쫓겨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 끝에 가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거기에서도 이스라엘을 모아 주님의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의 공의를 지키고 실천하는 민족은 희망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범죄하는 민족의 앞날은 뻔합니다. 일본이 지난날의 엄청난 죄악을 인정하지 않고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교과서를 왜곡하는 행위는 참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지난 날 한국을 비롯하여 많은 나라에 끼친 범죄 행위를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미화시키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우리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한민족이 온 세계에 우뚝 솟아 축복받는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한민족이 아무리 깊은 고난의 터널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끌어 내주실 것입니다! 기도에는 책임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조국 위하여 열심히 기도는 했는데 기도한 대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 기도는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국가가 위기에 빠질 때 애국심을 잘 발휘하는 민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애국심은 위기 때가 아니라 평소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나라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자기 울타리 영역 안에서만 그렇게 할 때가 많습니다. 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애완용 동물이 배설한 오물들이 나뒹굽니다. 함부로 내뱉은 가래침이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이런저런 더러운 쓰레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그곳에 차를 주차할 경우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데도 자기 생각만 하고 주차하는 얌체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자기 집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데 공공 장소에 가면 물건을 마음대로 쓰고 함부로 어지럽히는 경우는 얼마나 많습니까? 진정한 애국심은 꼭 국가가 위기에 처해야지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공중도덕을 지키는 등, 구체적인 삶의 실천을 통하여 나타나야 하지 않습니까?

세계화된 시대 속에 자기 민족만 최고라고 하는 주장은
시대착오적인 국수주의, 쇼비니즘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식구, 우리 학교, 우리 교회, 우리 나라라는 좁은 울타리를 뛰어넘어 인류 전체의 평화와 안정에 무엇인가 기여할 수 있는 민족이 1등 민족일 것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 난 기사 한 편이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지난 8월 6일 일본 삿포로에서는 55개국 학자 중 곰 전문가 80명이 따로 모여 '아시아 곰 워크샵'이 열렸습니다. 아시아 지역의 곰서식 현황과 보호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국제 학술회의였습니다. 우리 나라 대표들이 자랑스럽게 학술발표를 했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이 나라 저 나라 대표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한국인의 웅담채취를 꼬집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나라에서는 곰을 보호하기 위하여 절대로 고기도 먹지 않고 가죽도 사용하지 않는데 한국인들이 웅담을 얻기 위해 비싼 돈을 주고 사가니까 곰이 남아나지 않는다는 비판이었습니다. 신문에 난 내용 그대로를 옮기면, 대회가 끝난 다음에
한국 대표들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이런 것들이 오늘 우리의 치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 한민족은 고립된 세상 속에 살 수 없습니다.

온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데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볼 때 눈살을 찌푸린다면
우리는 국제사회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애국심은 우리의 의식을 넓히는데 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며 세상을 섬기고 변화시키는 쪽으로 나아가는 애국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할 뿐 아니라 기도한 내용을 조금이라도 실천하고자 애쓰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청교도의 창시자 존 낙스(John Knox, 1514?-72)는 본래 소심하고 겁이 많았습니다. 종교개혁을 하면서 메어리 여왕의 박해를 피하여 몇 차례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도했을 때 담대해졌습니다. 결사적으로 금식 기도했을 때 거꾸로 메어리 여왕이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낙스는 자신의 조국인 스코틀랜드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던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해방 60주년을 맞으면서 한민족이 살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실천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했던 느헤미야처럼,
우리 조국을 위하여 힘써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광복절 도적같이 온 해방
 
본문: 계 16:15

올해 광복절은 일본제국에 의해서 36년 동안 식민지인으로 살던 우리 민족이 그 사슬로부터 해방을 맞은지 60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종살이의 끝이 이렇게 오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정말 도적같이 온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옛날에 지사라던 사람들도 다 일본으로 넘어가고, 지도자라는 사람들도 다 일본과 타협하고, 지식인도 다 일제에 팔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교육자는 학생을 보고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거짓말을 하고, 종교가는 교인들을 보고 일본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곧 오리라 생각했더라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도적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재림이나 인생의 종말이나 아주 귀중한 기회들은 도적같이 온다고 하셨습니다. 마 24:42~44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 계 16:15에서도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도적같이 오기 때문에 준비하고 깨여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법입니다. 애초에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에게 도적같이 온 해방을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 민족이 맞은 8.15해방은 도적같이 온 해방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었습니다.
도적은 예고 하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오리라고 생각하지도 못하는 때에 오는 것입니다. 이성을 가지고 해방이 1945년 8월 15일에 오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언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믿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믿었다고 알았다고 하는 사람은 다 거짓말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올줄 알았다면 믿었다면 변절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도적같이 온 우리 민족의 해방을 생각해 볼 때 "도적은 오지 않는다", "도적은 없다" 아니면 "도적이 온다하더라도 우리집은 오지 않는다' 혹은 오늘은 안 온다'고 하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3일동안 먹을 것이 없어서 굶은 집도 도적이 도적질할 물건은 있다고 합니다. 도적 맞을 팔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도적의 대상이며 표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적을 대비하는 일은 누구나 어떤 가정이나 반드시해야 하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족단위로 집을 비우는 시간들이 많기 때문에 항상 도적을 예비하고 대비하는 일을 습관적으로 해야하며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도적들은 성도들이 가족단위로 교회가는 시간을 미리 알고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집안에 현금이나 귀금속 두지 않기, 문단속을 잘 하기, 그리고 현금카드나 통장번호를 자기집 전화번호나 주민등록번호 같은 것들로 하지 않기, 등등을 잘해야 할 것입니다.

조금 편한 것보다는 안전한 것을 택하는 자세가 도적을 방비하는 방책이 될 것입니다. 편하다고 문잠그는 것도 하지 않고, 편하다고 은행과 같은 곳에 돈을 맡기지 않고 장농속에 넣어두고 하다보면 도적이 들지 않아서 괜찬을 수도 있지만 만약에 도적이 들면 틀림없이 잃어버릴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2. 우리 민족이 맞은 8.15해방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민족의 8.15해방은 어떤 인물이 힘써서 된 것도 아니요. 어느 파가 투쟁을 하여서 된 것도 아닙니다. 공산주의자가 한 것도 아니고 자본주의자나 민주주의자가 한 것도 아닙니다. 전체주의자가 한 것도 아니며 민족주의자가 한 것도 아닙니다.

국내파가 한 것도 아니고 해외파가 한 것도 아닙니다. 준비가 되어서 온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한국을 위해서 소련의 스탈린과 미국의 루즈벨트가 밀담을 하게 하고, 일본이 과도한 욕심을 부려 태평양전쟁을 하게 하고, 원자탄이 일본에 투하되고 일본은 항복을 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어찌 누가 계획을 해서 된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민족은 어떻든 우리 민족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또 하나의 감사절기가 8.15광복절인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민족은 하나님을 경험한 민족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백성들입니다. 아무도 해방이 오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때에 모두가 다 이젠 일본인으로 사는 것이 운명이러니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갑작스럽게 주신 은혜의 선물이 바로 광복이요 해방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큰 은혜를 모르면 더 큰 재앙이 올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3. 8.15해방은 우리 민족의 고난의 기간이 찼기 때문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고난이 차면 하나님이 반드시 고난에서 건지십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성서적 사관이며 기독교적인 역사이해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선을 행하면 때가 이르게 되고 때가 되면 하나님이 이루시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고난의 때가 차자 정말 상상해본적도 없는 일들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게 하셔서 결국 해방을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일제 식민지는 어떻게 보면 우리 민족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갚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동해 바다 가운데 있어서 그 사는 사람의 종자의 일부는 원시시대의 인종의 하나인 아이누요. 또 다른 일부는 남으로 올라온 계통의 인종인데 거기서 비로소 문화 사회를 발달시키기 시작한 것은 소위 천손민족이라는 필시 이 반도를 타고 구주지방으로 건너갔던 우리 민족의 한 물결이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의 쓸만한 지식과 지혜자들이 그곳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끌어 안지 못한 사람들이 일본의 세력이 되어 결국 일본의 힘을 키운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다스릴 수 있었는데 거꾸로 우리가 우리의 인물을 아끼지 못하고 안목이 부족하여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의 기간은 길고 험했습니다. 그만큼 우리 민족의 허물과 죄가 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기간이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에게 해방을 주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도저히 올 것 같지 않았던 해방도 왔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작은 소원들, 그보다도 힘들지 않는 일들이 어찌 오지 않을 것이라고 낙심하고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도적같이 불현듯 갑작스럽게 전혀 예상도 못하게 오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준비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받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추석
 
영원히 찬송받으실 분
본문: 롬 1:18~25

오늘은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인 추석입니다. 옛날 농경시대를 살았던 선인들의 입에서는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여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나라와 민족마다 고유한 역사와 문화가 있고 거기 따르는 명절의 전통이 있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逾越節)을 최대명절로 하고, 칠칠절(맥추절)과 초막절(장막절) 같은 절기를 지켰습니다(신 16:16). 이와 같은 성경의 절기는 모두가 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식과 전통을 지켜 나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명절과 그 의식은 사실상 하나님과 단절된 문화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비성경적이고 비신앙적인 전통이 이어졌고, 이것을 미풍양속(美風良俗)이라고 하여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 잡아 온 것입니다. 명절을 지키는 사람들이 제각기 고유한 전통에 따라 축제를 행하고 즐기는 일을 하지만 빠지지 않는 것이 어떤 대상에게 제사를 행하는 일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그 제사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만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본문 말씀 25절에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고 하였습니다.

I. 인간의 종교적 본성

「언어 없는 민족은 있어도 종교 없는 민족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구 위에는 수많은 종족이 살고 있지만 저들마다 제각기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풍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문명의 나라요 지성의 도시인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고 하였습니다(행 17:22).

(1) 신을 찾는 본성입니다.

바울은 아덴사람들에게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3)하고 전도의 문을 열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그 마음속에 막연하게나마 신을 찾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마음속에 있는 종교성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사람이 신에게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본문 말씀 19-20절에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고 하였습니다.

(2) 도움을 받고자 하는 본성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종교적 본성은 섬김의 대상을 찾는 것 뿐 아니라 거기에 의존하며 강력하게 도움을 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타납니다.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인간 스스로 연약성을 인정하고 자기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일을 제 마음먹은 대로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큰소리 치곤 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시간에 잠만 자는 제자들에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고 하셨습니다(마 26:41).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하고 탄식하였습니다(롬 7:24).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고 장담하던 사람도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봉착하면 결국 무능한 자기를 인정하며 주저앉고 맙니다.



모든 사람은 신체적인 질고나 마음의 공허함, 그리고 죽음에 직면할 때 어디든지 손을 뻗치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얼마나 다급하고 절박하였으면 전혀 도울 힘이 없는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에게까지 무릎을 꿇겠습니까?(23절)

(3) 종교적인 행복감을 가지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종교적 성품 가운데 신의 뜻을 추구하고 거기에서 안위를 받는 일입니다. 비록 그 섬김의 대상이 인격적이지 못하고 그저 허무한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에 불과한 것인데도 그것을 신이라고 생각하거나 그 신의 뜻에 부합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 신이 책임져 줄 것이라고 생각할 때 체념을 하든지 만족해하든지 마음속에 안정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가치 없는 우상과 허무한 것에게 굴복하는 사람은 얼마못가서 그 바닥이 들어나게 되고 더 큰 허탈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사 46:6-7). 솔로몬 왕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전 3:11).

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종교적 본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건전한 섬김의 대상과 거기서 오는 종교적 희열이 아니고는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3:9에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II. 변질된 종교성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본래의 심성을 파괴시켜 버렸습니다. 로마서 1:28에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2:1-3에는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야 될 인간의 마음속에 공중권세 잡은 자, 마귀가 주인으로 차지하고 있어서 그 행동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익숙하게 되었고, 그 결과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낙인이 찍혀 버렸다고 했습니다.

본문 말씀 25절에도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변질된 종교행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1) 자연을 숭배하는 행위입니다.

고대 원시인들은 대부분 자연을 신성시하여 그것들을 섬김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해와 달과 별과 같은 천체들을 신비롭게 여기고 거기에 절을 하며 소원을 아뢰는 경우가 있고, 또는 오래된 나무나 큰 바위, 또는 높은 산이나 깊은 강물, 바다 같은 것도 사람에게 복을 주거나 화를 준다고 믿었습니다. 동물들도 사람으로부터 섬김을 받는 것이 많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본래 천지와 만물을 지으실 때 그것들을 사람의 손에 맡기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선한 목적에 맞게 이를 다스리며 관리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창 1:28). 그러나 인간의 마음속에 죄가 들어오고부터는 건전한 사고의 능력을 잃고 지배해야 될 자연 만물에게 종노릇을 하며 그것을 섬기는 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21절에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하였습니다. 22-23절에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하시며 오직 하나님만 섬길 것을 요구하였습니다(출 20:3). 이와 같은 명령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주권자요 경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명시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나 다른 신의 형상을 만들면 안 됩니다. 출애굽기 20:4에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죄하고 타락할 때 자기 손으로 우상을 만들어 그것들을 섬겼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열왕들은 이웃 나라 이방인의 풍습을 좇아서 여러 가지 신상을 만들고 음행하듯 그것들을 섬기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왕하 17:7-18).

오늘날도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게 기도하며 복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와 같은 경우를 들어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그것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고 하였습니다(사 44:9).

(3) 인간을 숭배하는 행위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변질된 심성은 사람을 하나님보다 우위에 두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오늘날 과학이나 물질문명의 발달에 따라 인간이 한없이 교만해 있어서 거의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19에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저희 신은 배”라고 한 말은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되어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일은 고대 노아의 후손들이 시날 땅에서 바벨탑을 쌓을 때부터 나타났습니다. 창세기 11:4에 보면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였습니다. 죄로 인하여 변질된 인간의 마음은 지식이나 기술, 또는 쌓은 업적으로 이름을 들어내며 공명심에 들떠 있는 것입니다.

옛날 다윗은 이와 같은 인간 세상의 타락한 상태를 보고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고 하였습니다(시 2:4). 성도는 오직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하시는 성경 말씀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III. 찬송 받으실 하나님

25절에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타락한 인간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거나 심지어 자연과 만물 또는 금수와 버러지를 신으로 섬기며 경배하곤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홀로 찬송 받으실 분이라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의 타락한 문화가 극에 달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가 만연할지라도 성도는 하나님께 찬송하며 영광 돌려야 된다는 뜻입니다.

(1) 하나님은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문명을 단적으로 지적한 것입니다. 중생한 성도가 성령의 감동으로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입술의 열매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과 찬미의 제사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립니다(히 13:15).

인간뿐만 아니라 오염되지 않은 자연과 만물도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 돌리며 그 본연의 기능을 발휘합니다. 시편 19:1에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고 하였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이며 그 존재 목적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43:21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2) 만물을 다스리는 주권자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1:36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7:24에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만물과 세계의 모든 인류를 통치하시고 관리하시되 그의 선하신 목적에 따라 평화롭고 의롭게 공존하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로우신 목적이 이루어지게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마 6:33). 역사상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거역하며 인간의 욕심이나 완력에 의하여 횡포가 자행될 때 세상은 불행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라는 악순환이 거듭되었습니다.

이런 사태를 지켜보면서 피조물들이 썩어짐의 종노릇할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며 탄식한다고 하였습니다(롬 8:19-22). 그렇지만 역사는 언제나 주권자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며 어떤 형태로든지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진행되고 맙니다. 그것이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수순이기 때문입니다(계 21:1-4).

(3)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사람들의 생각이 우둔하여져서 존귀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리고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세상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오직 하나님만 섬기며 그에게 찬송 드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일찍이 지혜자 솔로몬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 하였고(잠 1:7), 그 지식을 가진 사람은 가장 큰 복을 소유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잠언 3:15-17에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만 경외하며 그에게 찬송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뻐하시는 자들 두고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였습니다(계 3:20). 시편 144:15에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고 하였습니다.

 

 

 
 
 

 

 

단오의 어원
 
단오는 일명 수릿날[戌衣日·水瀨日], 천중절(天中節), 중오절(重午節), 단양(端陽)이라고도 한다. 단오의 '단(端)'자는 첫번째를 뜻하고, '오(午)'는 다섯의 뜻으로 통하므로 단오는 '초닷새'를 뜻한다. 중오는 오(五)의 수가 겹치는 5월 5일을 뜻하는 것으로 양기가 왕성한 날로 풀이된다.

음양사상(陰陽思想)에 따르면 홀수[奇數]를 '양(陽)의 수' 라 하고, 짝수[隅數]를 '음(陰)의 수' 라 하여 '양의 수'를 길수(吉數)로 여겼다. 예컨대 전통사회의 절일(節日)로서 설(1월 1일)·삼짇날(3월 3 일)·칠석(7월 7일)·중구(9월 9일) 등이 있는데, 이러한 속절은 '양수(陽數)'를 '길수(吉數)'로 여기는 기수민속(奇數民俗)들이다.

이러한 기수민속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수릿날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는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5월조의 기록에 전한다. 그 기록에 의하면 이 날 쑥떡을 해먹는데, 쑥떡의 모양이 수레바퀴처럼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리'란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또 수리란 고(高)·상(上)·신(神) 등을 의미하는 우리 의 고어(古語)인데, '신의 날', '최고의 날'이란 뜻에서 불리워졌다고도 하며, 일설에 의하면 단오의 유래와 더불어 중국의 초(楚)나라 사람 굴원(屈原)이 수뢰(水瀨)에 빠져 죽었다 하여 수릿날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2. 단오의 유래
단오의 유래는 중국 초나라 회왕(懷王)때에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굴원(屈原)이라는 신하가 간신들의 모함에 자신의 지조를 보이기 위하여 멱라수[汨羅水]에 투신자살하였는데, 그날이 5월 5일 이었다. 그후 해마다 굴원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단오가 되었다고 한다.

3. 단오의 풍속
입하(立夏)와 소만(小滿)을 지나 음력 오월(五月)이 되면 태양의 열기가 뜨거움을 더해간다. 오월의 절기(節氣)로는 망종(芒種)과 하지(夏至)를 들 수 있다. 절기는 태양의 운행에 기초를 둔 것 이며, 농사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예컨대 망종은 보리나 벼와 같이 까끄라기가 있는 곡식을 거두거나 모를 내는 절기이며, 하지는 낮 시간이 가장 긴 절기를 말한다. 이 시기의 농사력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오월조의 농사관련 부분에 잘 나타난다.

문앞에 터를 닦고 타맥장하오리라 / 도리깨 마주서서 짓내어 두드리니 잠농을 마를 때에 사나이 힘을 빌어 / 누에섭도 하려니와 고치나무 장만하소 오월오일 단오날 물색이 생신하다. / 외밭에 첫물따니 이슬에 저젔으며 모찌기는 자네하소 논심기는 내가 함세 / 들깨모 담배모는 머슴아이 마타내고 가지모 고추모는 아이딸 너 하여라. / 맨드람 봉선화는 네 사천 너무마라.

오월은 여름철 세시풍속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대표적인 명일로는 5월 5일 '단오날'을 들 수 있다. 단오날은 고려시대의 9대 명절에 속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설날, 한식, 추석과 함께 4대 명절에 속하였다.

단오는 일년 중에서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이라 해서 큰 명절로 생각하여 여러가지 풍속과 행사가 행해졌다. 전통사회에서 농가의 부녀자들은 '단오장(端午粧)'이라 하여 창포뿌리를 잘라 비녀로 만들어 머리에 꽂아 두통과 재액(災厄)을 막고,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아 윤기를 더하게 하였다.

또 단오날 새벽 상추밭에 가서 상추잎에 맺힌 이슬을 받아 분을 개어 얼굴에 바르면 버짐이 피지 않고 피부가 고와진다고 한다. 남자들은 단오날 창포뿌리를 허리에 차고 다니는데, 이는 벽사의 효험을 기대하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단오날 중에서도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가장 양기가 왕성한 시각으로 생각하여 전통사회의 농가에서는 약쑥, 익모초, 찔레꽃 등을 따서 말려 두기도 한다. 말려둔 약쑥은 농가에서 홰를 만들어 일을 할 때에 불을 붙여놓고 담뱃불로도 사용하기도 한다.

또 오시에 뜯은 약쑥을 한다발로 묶어서 대문 옆에 세워두는 일이 있는데, 이는 재액을 물리친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농가에서는 대추풍년을 기원하기 위하여 대추나무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놓는 습속이 있는데, 이를 '대추나무 시집보내기'라 한다.

단오의 대표적인 놀이로는 그네뛰기와 씨름을 들 수 있다. 그네뛰기는 단오날 여성들의 대표적인 놀이이다. 조선 후기의 화가 신윤복의 '단오풍정'을 보면 한복을 차려 입은 부녀자들이 치마폭을 바람에 날리며 하늘로 치솟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남성들의 놀이로 씨름대회가 있다. 씨름대회에서 이기는 사람에게는 관례로 황소를 상품으로 주는데, 경기방식은 요즘과 같이 토너먼트식이 아니라 도전자들을 모두 이겨 상대자가 없게 되면 우승을 하게 된다. 한편 지역민들의 일체감을 고취시키는 의례로서 '단오제'와 '단오굿'을 들 수 있다.

예컨대 강원도 강릉지방의 강릉단오굿, 경남 영산의 문호장굿, 경북 자인의 한장군놀이 등이 있는데, 이러한 의례들은 각종 놀이 및 행사들과 접목되어 지역민의 축제 형식을 띠고 있다. 조선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5월 조의 기록에 의하면 "궁중의 내의원(內醫院) 에서는 옥추단(玉樞丹)과 제호탕을 만들어 왕에게 진상하였다.", "공조(工曹)에서는 단오선(端午扇)을 만들어 왕에게 진상하였다."는 궁중풍속이 전한다.

제호탕은 한약재를 꿀에 섞어 달인 약으로 더위가 심한 여름철 건강을 유지하는데 사용하였으며, 옥추단은 일종의 구급약으로 여름철 곽란이 났을 때 물에 타서 마신다. 부채는 더위를 식히기 위한 도구로 단오 무렵이면 더위가 찾아오니, 이날 부채를 만들어 왕에게 진상한 것을 '단오선'이라고 하였다. 전통사회에서 단오의 세시풍속은 더운 여름철의 건강을 유지하는 지혜와 신체단련을 위한 이, 재액을 방지하기 위한 습속, 풍농을 바라는 의례가 주를 이루고 있다.

4. 단오의 시절음식

단오의 시절음식으로는 수리떡과 약떡이 있다.《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기록에 의하면 "이 날은 쑥잎을 따다가 찌고 멥쌀 가루 속에 넣어 반죽을 하여 초록색이 나도록 하여 이것으로 떡을 만든다. 그리고 수레바퀴 모양으로 빚어서 먹는다."라는 풍속이 전한다. 이것이 바로 수리떡을 가리키는 것이다.

약떡은 전라남도 지역에서 전하는 시절음식이다.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떡을 하는 예가 잘 없으나, 떡을 할 경우에 5월 4일 밤 이슬을 맞혀 두었던 여러 가지 풀을 가지고 단오날 아침에 떡을 해 먹는데, 이를 약떡이라고 한다.

앵두가 제철인 단오무렵이면 앵두화채를 만들어 먹기도 하며, 아이들의 주전부리로 옥수수나 쌀 등을 튀겨 주기도 한다. 또 이 날은 새 쑥을 넣어 만든 떡으로 차례를 지내는 것이 상례이다. 제주도에서는 보릿가루에 누룩을 썩어서 부풀게 만든 기루떡과 곤떡·새미떡·인절미·표적·율적·해어·실과 등을 제물로 사용한다

 

 

 
 
 

 

 

추석을 맞아
 
본문: 로마서 8장 5- 14절

추석을 맞았습니다. 모두 모여 함께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며 한껏 즐기는 의식은 동서고금을 통해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한 해 동안 땀 흘리고 정성을 쏟아 키운 오곡 백과를 차려 놓고, 네것 내것 구별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에 지난날의 수고와 한숨은 씻은 듯이 사라집니다.

추석은 우리의 고유한 명절로 1년 중에서 가장 즐거운 축제일입니다. 구약의 초막절(출23: 16, 출34: 22, 신16:13- 15)과 견주어 보면서 그 뜻을 생각하면 첫째, 풍요한 수곡에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없이는 생의 보람이 없고, 보람없이는 행복도 있을 수 없으므로, 모든 결실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추석을 가배, 한가위라고도 하는데 햇곡식과 햇과일이 풍성한 때에 햅쌀로 떡을 빚어 먹으며 온갖 유희를 즐겼습니다.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지킬 것이라"(레23:34)

초막절은 유대 성력으로 7월 15일부터 일주일간을 지키는데 양력으로는 9, 10월에 해당됩니다. 포도와 무화과 등의 과실을 추수하여 즐기면서 포도원 무도회를 갖는 것이 특색이었습니다.(삿21:19) 그리고 여호와께 감사하는 갖가지 행사를 행했습니다. 우리는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해야 합니다.(고후9:15)

둘째,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추석에는 조상의 은덕을 기억하여 조상의 산소에 성묘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초막절 기간에는 밭에 장막을 짓고 기거하면서 조상들의 광야생활을 기념합니다. 이것은 조상들의 은덕과 신앙적 유산을 기리는 종교적 축제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조상제사와 같은 이교적 풍습은 행하지 않지만, 조상의 은덕을 기리며 추고 예배를 드리고 이 날의 뜻을 의미있게 보냅시다. 오늘이 좋은 계절에 추수에 대한 감사예배와 조상의 은덕에 대한 추모행사를 함께 드립시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시50:14)

추석과 같은 명절 때에 평상시 보다 이혼율이 높다고 합니다. 이는 악한 영이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아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A.D 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할 때 기독교인의 숫자는 로마인구의 10%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변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의 인구는 20%가 넘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의 추석 풍토가 우상숭배와 제사 음식의 문화로 얼룩져 있습니다. 이는 많은 기독교인들의 영이 육신의 생각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영과 혼과 몸이 있습니다.(살전5:23. 히4:12) 여러분들 중에 동물이 신(神)을 찾거나 제사 지내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짐승에게는 영이 없습니다. 동물은 영이 없기 때문에 본능대로만 삽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므로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창2:7) 그래서 야만인들도 제사를 지내고, 믿지 않는 이들도 죽은 자의 영혼이 제사 음식을 흠향한다는 생각에서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묘지 앞에서 공양하고 절합니다.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지만 둘로 나뉩니다. 하나님의 영과 사탄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를 생각하며 기도와 전도, 예배에 힘쓰지만 사탄의 영을 가진 사람은 육신의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즉 그들의 마음속에는 교만, 거짓, 음란, 탐욕, 시기, 분냄, 나태 등으로 가득하여 오직 이 세상에서 돈 벌고 출세하고, 예뻐지고 즐기는 데에만 온통 관심이 있고, 하나님과 천국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둘 사이에는 쉴새 없이 전쟁을 합니다. 이 영적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해야 합니다.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엡6:13- 17)

제가 오래전에 어떤 책을 보니까 세상에서 잠시 죽었다고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여럿이 있는데 그들이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서 하는 말은 대체로 '자기가 죽는 순간에 자기는 위에 떠있는데, 가족 친지들이 자기 시체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 몸과 영이 분리된 순간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은 영이 잠시 머무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마치 게가 소라 껍질속에 있을 때는 마치 소라가 살아있어 움직이는 것 처럼 말입니다. 의과 대학생들은 시체를 해부하고 만지는 수업을 합니다. 그럴 때 느낄 수 있는 것은 영이 떠난 사람의 몸은 죽은 동물의 시체와 마찬가지로 껍데기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살아있는 사람 몸의 세포도 영원하지 않고. 수시로 죽고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런데 그 껍데기 앞에서 아무리 음식을 차리고 절을 해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우상숭배에 그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썩어 없어질 육신이 자기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육신의 일만 힘쓰고, 진짜 나인 영의 일은 생각지 않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여러분 마음속의 하나님의 영은 살아있습니까?

사람의 육신이 살아있으려면 반드시 숨을 쉬어야 하고, 먹어야 하고, 운동을 하여야 하듯이 하나님의 영이 살아 있는 사람은 숨을 쉬는 것처럼 기도해야 하고, 먹는 것처럼 영의 양식인 성경말씀과 설교말씀을 들어야 하고, 운동하는 것처럼 전도와 복음 전하는 행위를 열심히 하여야 비로소 살아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번 추석기간에 죽은 자와 산자의 차이 그리고 영과 육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들을 가지시고,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시고 또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기도하시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식물과 조상의 은덕을 기리게 하심을 감사하오며 우상숭배의 실수를 범하지 않게 도와주옵소서. 우리나의 추석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추수감사절로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온전하신 주님이 저를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을 감사드립니다.

저를 죄에서 놓여 나게 하시려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제 영혼과 몸을 가지셨으니 주님의 거룩한 처소로 만드시고 뜻하시는 대로 사용하소서. 여기에 주님의 빛을 영원히 비추시고 이 집을 하나님으로 가득 채우소서. 오, 전능하신 주님, 이 몸 안에 사시고 이 몸 안에 움직이시어 마침내 저의 모든 삶이 그대로 사랑이게 하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순절을 맞는 우리의 자세
 
본문: 마27: 26- 53

영국 대영 박물관에는 옛날 앗수르 제국이 왕궁 입구에 세워놓았던 수호신 형상이 있습니다. 돌에 새긴 얼굴 형상은 사람이고 몸은 독수리 날개로 덮여 있고 발은 사자입니다. 사람의 지혜와 하늘을 높이 나는 독수리의 날개와 힘이 센 사자를 통합한 그 형상이 앗수르를 지키는 수호신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부조화와 불행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변질시킨 데 있습니다. 사람과 독수리 그리고 사자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고 우상숭배입니다. 사람 속에 짐승의 형상이 있는 것이 죄로 타락한 인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얼굴은 사람인데 속에는 돼지 염소 공작 뱀 호랑이 같은 짐승이 들어 있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을 가리켜 화가 임할 외식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사순절에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짐승들의 형상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해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2월 중순부터 3월 한달 간은 사순절 기간입니다.'사순절'이란 부활주일부터 앞으로 세어 주일을 제외한 40일 간의 기간을 말합니다.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은 언제나 수요일로. 그날은 '재의 수요일'이라고 불러 특별한 회개의 날로 삼았습니다. 구약 시대에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던 전통을 살려 참회를 하며 정절을 지키기로 약속하는 날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고기를 금하고 금식을 하는 등 절제하는 생활을 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고 그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부활절이나 고난주간 정도만 의미있게 보내도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라고 평가받는 요즘 세대에 사순절을 기억하고 지키기란 매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간에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면서 기도하며 회개하는 일을 통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깊은 고난에 이해하는 사람만이 부활에 기쁨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많은 시간 기도에 힘쓰면서 경건 훈련들을 통해 사순절을 의미있게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순절은 교회력에 있어서 성탄절, 부활절과 함께 대단히 중요한 절기입니다. 사순절이 40일간의 기간으로 확립된 것은 오랜 기간의 변천의 결과였습니다. 원래 1세기에는 사순절이 단 40시간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속에 40시간 있었던 것과 일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3세기에는 6일간이 되었다가 일년 365일의 11조로 36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731년 샤를마뉴(Charlemagne)대제 시대에 이 36일간에 나흘이 첨가되어 오늘의 40일간의 절기가 되었습니다.

40이라는 숫자의 성서적의미는 <준비>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동안 기도하신 후 사역을 시작하셨고, 모세도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금식한 후에 이스라엘을 이끌 수가 있었습니다. 엘리야도 하나님의 산으로 가는 길에서 40일간 금식하였으며, 이스라엘 백성들도 40년간 광야에서 훈련받고서야 가나안에 들어갈수 있었습니다.

사순절의 40일 기간은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즉 사순절기는 예수님의 고난당하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신앙의 영적 준비 기간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심령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십자가의 은총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순절에 준비되고 훈련된 심령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성회 수요일인 오늘부터 시작되는 40일간의 사순절기를 잘지키고, 잘 준비하셔서 십자가의 은총에 동참하시는 심령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회개와 참회로 준비하여야 합니다.
사순절은 회개와 참회의 기간입니다. 사순절의 첫날인 오늘, 성회 수요일은 속죄일입니다. 속죄일이란 명칭은 1099년 교황 우르반 2세가 명명한 것인데 회개와 참회를 하는 날입니다. 재(Ash)는 회개를 상징하였습니다. 사재들은 신자들의 머리에 재를 뿌리며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임을 기억하라 고 하는 예식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까지도 로마 카톨릭 신자들은 재의 수요일에 모여 죄를 용서 받는 표로써 이마에 재를 찍어 바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의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순절이 회개와 참회의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사순절의 첫날을 금식 시작일이라고도 합니다. 재위에 앉아 금식하면서 회개하는 기간이 바로 사순절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다음주일 부터 40일 특별 새벽기도회를 가지려고 합니다. 십자가의 은총을 받기를 원하시면 우리 모두 나와서 회개와 참회의 시간을 꼭 가져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새벽기도를 못나오신 분들도 이번 사순절 새벽기도만큼은 꼭 나오셔서 준비하는 사순절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둘째로, 사순절은 훈련과 교육의 준비기간입니다.
원래 사순절은 부활절에 세례받을 지원자들을 준비시키는 기간이었습니다. 사순절은 우리가 영적으로 훈련받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훈련받는 기간이 바로 사순절입니다. 준비 되지 못하고 훈련되지 못한 성도는 십자가의 은총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세상에서의 영적인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훈련된 당신의 참된 제자를 요구하고 있습니다.사사기 7장에 보면 기드온의 300용사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은 결코 군대의 숫자를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오합지졸이 아닌 훈련된 정예부대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두려워 떠는 자들을 집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2만2천명이 돌아가고 1만명이 남았습니다. 남은 1만명은 용감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물가에 데리고 가서 물을 먹는 자세를 보고 손으로 먹는 자만 남기시고 무릎끊고 입대고 먹는 자는 다시 보내셨습니다. 남은 수는 300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준비된, 훈련된 병사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번 사순절을 보내면서 이렇게 기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들은 이번 사순절을 보내면서 훈련된 십자가의 군병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희들을 교육시켜주시고 훈련시켜 주옵소서. 주님의 가장 강한 정예부대가 되게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참제자가 되게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서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못하신 분은 이 사순절 기간에 철저히 신앙생활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성수주일을 못했으면 이번 기회에 성수주일을 철저히하고, 말씀 읽는데에 게을리 했으면 이번 사순절에 성경을 열심히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사순절은 말씀읽는 기간입니다.

매일 성경 읽기는 사순절을 지키는데 있어서,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전도를 그동안 못했으면 전도를 열심히 한다든가, 봉사를 열심히 한다든가, 이 사순절은 훈련받는 기간인 것입니다. 그동안 나태한 자리에 있었다고 하면, 게으름의 신앙이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면 이 사순절이 시작되는 오늘, 새롭게 마음의 결단을 하여 영적으로 준비하는 사순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그는 우리의 절대 가치이며,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우리의 삶의 모범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해야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버리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는 우리의 생명이며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며, 그리고 그는 우리의 스승입니다. 우리는 이 기간에 그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그의 사랑,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준 그 사랑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의 겸손과 그의 낮아지심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의 섬김의 삶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는 이 땅에 아주 비천하게 오셨습니다. 그는 죽기 위해 태어나신 분입니다. 그의 삶은 고난과 역경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가 도리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부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그는 약하게 살았던 것 같았으나 끝까지 비굴하지 않으셨으며, 진리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몸소 나타내 보이신 가장 강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너무나도 비참하였습니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손과 발에는 커다란 못에 찔리우셨습니다. 못에 찔리운 그 구멍에서 피가 한방울 두방울 십자가를 타고 죽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십자가 예수의 발 아래로 뚝뚝 떨어지며 그는 처참하게 죽어갔습니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외로이 꺼져가는 십자가아래에서 군인들은 그의 옷을 제비뽑았습니다.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였고 관원들은 비웃었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고 자신은 구하지 못한다고" 조롱하였습니다. 군병들은 희롱하며 목마르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입술에 흰 포도주를 갖다 대었습니다. 달린 행악자중의 하나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사실살 저주를 퍼 부었습니다.

온갖 조롱과 멸시, 점점 죄여 오는 죽음의 공포속에서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절규하셨습니다. 드디어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었습니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였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사순절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며 그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간입니다. 사순절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함께 골고다를 향하는 순례의 기간입니다. 만일 우리가 부활절의 새로운 삶속에서 그리스도와 일어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먼저 그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사순절은 자신이 먼저 죽는 것을 배우는 때입니다. 우리는 기뻐하기 전에 통곡해야 합니다. 살기 전에 죽어야 하고 높아지기 전에 낮아져야 하고 예수님의 겸손과 예수님의 사랑과 죽음을 배우는 때가 바로 사순절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대단히 이기적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공동체와 이웃이 없어지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법을 제정하기 위해 출마한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정직과 신뢰가 땅에 떨어진 오늘날 우리는 다시한번 사순절기를 맞이금습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회개하고 참회하는 사순절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으로 무장되고 철저히 훈련받는 사순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배우고 그 고난에 동참하는 사순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이번 사순절이 회개로 준비되고 훈련으로 준비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준비되어서 십자가의 은총을 받으며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는 사순절을 보내시기 축원합니다.

* 기도: 사랑의 하나님, 사순절 기간에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하나님의 일을 우선 생각하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즐겁게 십자가를 지면 영광과 부활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스도를 만나 진실한 신앙고백을 하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강림절
 
어느 새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강림절이다. 시내 번화가에는 벌써 성탄트리의 등이 화려하게 점등됐다. 크리스마스 장식은 성탄의 기쁨을 전해준다. 첫 강림과 장차 다가오는 강림은 모두 어둠 속에서 시작됐다. 어둠이 서서히 밝아올 때가 주님이 오실 때다. 그래서 밝아오는 것은 때를 알리는 분명한 징조다.

프랑스 격언에 “두 요한이 일년을 나눈다네”는 말이 있다. 사도 요한은 빛이 점점 자라는 동지의 성인이고, 세례 요한은 빛이 차차 쇠하는 하지의 성인이다. 세례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했다. 우리는 빛의 갈림길에서 빛이 점점 자라는 동지의 성인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

강림절은 겨울철의 사순절이라고 불린다. 신랑을 맞기 위해 등불에 기름을 채우고 불을 켜는 신부처럼 한해를 돌아보는 등불을 밝게 켜야 할 때다.

 

 

 
 
 

 

 

네 개의 촛불
 
대강절은 본래 의미가 '도착하다'는 뜻이다. 공항에서, 터미널에서 손님을 기다려본 사람은 의미를 실감할 수 있다. 설렘과 초조함 그리고 반가움의 감정이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강절에 네 개의 초를 준비해 한주 한주 촛불을 켜나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 둘, 셋, 넷 차례로 밝히며 기다림의 의미를 극대화하고 있다.

대강절 네 개의 초를 예언의 초, 베들레헴의 초, 목자의 초 그리고 천사들의 초라고 부른다. 2000년 전 아기 예수 탄생을 회상하고, 우리의 마음과 삶의 현장, 역사 속에 참여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장차 오실 영광의 주를 기다려야 한다.

거친 들판에서 행한 고행, 깊은 영성, 겸손함,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 거듭된 자기 비움 등 그 자체가 예비된 길이었다. 지금 우리는 그 길의 끝에서 다시 시작을 준비하고 있는가.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마 3:3)

 

 

 
 
 

 

 

사순절의 유래
 
주님처럼 부활하기 위해 그분처럼 죽어야…
이마에 재를 얹는 예식으로 시작, 40일간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회개와 보속의 시기 '사순절'이 2월 17일부터 시작한다. 사순시기를 거룩하고 뜻깊게 보내기 위해 그 유래와 의미, 주요 전례에 대해 알아본다.

◇ 유래
교회에서 사순절을 지키기 시작한 것은 부활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초대교회부터 3세기까지는 각 지역교회에 따라 부활 대축일 전 2∼3일 동안 단식하며 부활을 준비했으나, 4세기말 로마교회는 부활전 40일을 부활 준비기간으로 지정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부활전 40일부터 성토요일까지를 사순시기로 보고 단식과 회개의 생활을 했다. 그러나 주일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쁜 날이었기에 사순절의 40일에서는 제외됐다.

그래서 부활 전 6주간(42일) 중 주일을 뺀 36일에 부활 전 제7주의 4일간(수요일까지)을 포함해 총 40일을 만들고, 그 첫째 날에 재를 뿌리는 예식을 통해 사순절의 시작을 알렸다. 이런 관습은 5세기경부터 이뤄졌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성삼일 고유의 전례적 의미를 되살려 성목요일을 사순시기를 마무리하는 동시에 파스카 시기를 시작하는 날로 보고 있다.
따라서 엄밀하게 따지자면, 사순시기는 재의 수요일부터 성목요일 주의 만찬 미사 전까지이며 이 기간은 글자 그대로 40일이라기보다는 부활을 준비하는 회개와 보속 시기하는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 의미
성서에서 '40'이라는 숫자는 하나님과 만나기 전에 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나기 위해 거쳐야 할 정화와 준비의 기간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기 전 40일간 재를 지킨 것,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사막에서 40년 동안 머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이 태어난 사실, 엘리야가 호렙산에서 40일간 단식과 기도를 하며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했다는 것, 더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 후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간 단식과 기도로 사신 것 등이 이를 연상시킨다.

따라서 사순절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헌장이 규정하고 있듯이 "파스카 신비의 경축을 준비케 하는 것"(109항)이다.
다시 말해 사순절이란,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동참하기 위해 어느 때보다 더 큰 열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기울이며 기도와 희생에 전념해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고 탐욕과 이기심에서 벗어나 회개와 보속,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도록 권고하면서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단식과 금육을 명한다.

그러나 사순시기의 보속과 희생은 단지 개인적 차원에서 이뤄져서는 안되고 외적이고 사회적이어야 한다. (전례헌장 110항 참조)
결국 사순절은 부활을 준비하는 기간으로서 고행 자체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출장 갔다 돌아오는 아버지를 맞이하기 위해 집 안팎을 정리하는 자녀들처럼 주님의 부활을 제대로 맞이하기 위한 준비의 시간, 즉 정화와 성화의 시기인 것이다.

◇ 전례
사순시기는 "사람은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며 성지가지를 태워 만든 재를 이마에 바르는 재의 수요일 예식으로 시작한다. 재는 참회와 회개의 상징으로 신자들은 재를 받으며 하나님 앞에 먼지와 같은 존재임을 고백한다.

사순시기 동안 주일 독서는 인류의 타락과 노아의 계약, 아브라함과의 계약, 하나님의 이름을 모세에게 계시하심, 유배와 귀향 등 인류가 그리스도의 파스카로 향하는 전체 과정을 보여주고, 복음은 예수의 유혹 장면, 라자로의 부활 등을 보여주며 신자들의 회개를 촉구한다.
사순 전례의 외적 특징으로는 그리스도의 수난의 신비에 동참하기 위해 미사 때 '알렐루야'와 '대영광송'을 바치지 않는다는 것과 사제의 제의가 회개와 속죄를 상징하는 자색(보라색)을 바뀐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순 제4주일은 신자들에게 부활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하는 '장미주일'로 지내며, 이때 사제는 장미색 제의를 입는다.
교회는 또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깊이 동참하도록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칠 것을 권고하며, 주님 수난 성지주일로 시작하는 사순 마지막 주간을 성주간으로 정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는 가장 거룩하고 뜻깊은 기간으로 지내도록 초대하고 있다

 

 

 
 
 

 

 

추수감사절
 
추수 감사절을 처음 시작한 사람들이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청교도들이 1620년 12월 26일 크리스마스 다음날 117일 간의 험한 항해 끝에 미국 동부의 플리머스에 상륙을 했습니다.

146명이 배에서 내렸습니다. 그들 앞에는 황무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디안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대륙의 기후 조건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들은 농사를 짓기 시작했지만, 어떻게 지어야 될 지 잘 모르니까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흉년이 들었습니다.

양식이 모자라서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게다 가 전염병까지 번져 결국은 배에서 내린 146명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모여서 하나님 앞에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신대륙으로 도망친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쫓겨다니면서 핍박을 당하고 가족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보다 못 해 배를 타고, 요사이 말로 하면 보트 피플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대서양을 건너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십 시오.' 하고는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금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렸는데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지, 어디에 숨어 버리셨는지 금방 응답을 안하셨습니다. 그 다음해 농사를 지었더니 또 반타작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이렇게 한 2, 3년 거듭하는 중인데 여전히 상황이 바뀌지를 않았습니다. 농사가 잘 안되고 굶주리는 사람은 많고, 병든 사람들이 속출하였기 때문에 또 총회로 모였습니다. '우리가 좀더 하나님 앞에 베옷을 입고 금식하면서 기도하자.



우리가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이다.' 서로가 이렇게 격려하면서 금식하려고 하는데, 그때 어떤 농부가 일어나서 이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제 이야기를 한 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제 생각에는 어려울 때마다 금식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많이 해 봤지 않습니까? 이제 그만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불평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만 이곳에 와서 살기 때문에 이전에 누리지 못하고 있던 정치적인 자유도 누리고 있고, 이전에 상상할 수 없었던 신앙적인 자유를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제 금식은 그만 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는 축제를 엽시다.

비록 어렵지만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축제를 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시다.'그 말이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 시켰습니다. 그래서 금식하려고 하던 생각을 바꾸어서 축제를 열었습니다. 여위고 해쓱해진 모습들이었지만 그들은 모여서 하나님 앞에 눈물로 감사했습니다. 그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입니다. 그들의 기도가 오늘의 미국을 있게 해서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깨어 있으라
 
스코틀랜드 수도원에 큰 돌이 있는데 그 표면에 "WatchWeel"이란 말이 불규칙적인 글자로 큼직하고 깊게 새겨져있다.
그 뜻은 "깨어서 잘 지키라"는 뜻이다. 이 말은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로 하여금 졸지말고 깨어서 적군이 오는가를 잘 지키라는 말로 사용한 것인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깨어서 잘 지켜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으므로 수도원 큰 돌에 새겨 놓았다는 것이다.

첫째 성도들은 말세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해야 하고, 둘째 우리의 구세주요 친구이신 주님이 오심을 영접하기 위하여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구정 문화재
 
예수 그리스도가 며칠날 태어났는지는 <신약성서>의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
에 적혀 있지 않다. 그 옛날에는 1월 6일, 3월 21일 등 종파에 따라 달리 경축되
기도 했다. 오늘 12월 25일 크리스마스는 고대 로마력의 동짓날이다. 이날부터


해가 길어진다 하여 옛날에는 이 동지를 설날로 잡은 민족이 많았다. 로마 법황
청이 크리스마스를 동짓날로 통일시킨 것은 4세기 반경이었다. 크리스마스 트리
를 장식하는 것도 본래 성탄과는 관계없던 풍습으로 게르만인들이 동짓날 전나무


나 자작나무를 장식하던 북방의 풍속을 4세기 반경 로마인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곧 크리스마스는 로마의 구정(舊正)이며, 크리스마스 트리나 산타클로스는 구정
에 기생(寄生)한 세시민속(歲時民俗)으로 구정 문화재다.

동지말고도 로마에는
구정이 또 있었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누마력(曆), 율리우스력, 그레고리오력 등
역법(曆法)이 자주 바뀌었기로 구정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의 가장 큰


명절로 지금도 성대히 축제를 올리고 있는 `테르미나리아'도 고대 로마시대의 설
날이다. 이 구정이 유지됨으로써 이날에 베풀어졌던 고대 로마의 유형 무형의 민
속 문화재가 근 1백여 가지나 보존될 수 있었다 한다. 물론 이 테르미나리아 축


제를 구정으로 여기는 이탈리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은 크리스마스가
로마의 구정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 나
라도 역법이 달라져왔던만큼 구정이 하나만은 아니다. 로마나 게르마니아에서뿐
아니라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짓날이 우리 나라에서도 설날이었던 적이 있었


다. 그래서 지금도 동짓날을 아세(亞歲)-작은 설이라 부른다. 또 동지 후 첫 만
월인 정월 대보름날을 연초로 삼았던 적도 있었다. 세시 민속은 설날에 가장 많
이 기생되게 마련인지라 우리 민속이 동지, 음력 구정, 정월 대보름날에 집중돼
있음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18세기경에 지어진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1백85종의 각종 세시민속이 적
혀 있는데, 그중 대보름날에 40종, 구정에 26종, 동지에 16종이나 되어 전세시
민속의 절반 가까이가 이 구정 사흘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정이 전근


대적이라는 이상한 논리로 이를 말살해버린다면 국제화 시대에 한국의 한국다운
동일성을 증명할 그 숱한 세시문화재를 대량으로 파괴하는 것이 된다. 구정에서
설날이라는 것이 증발되고도 이것이 남아 있어야 할 존재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이다.

 

 

 
 
 

 

 

추석 예배(성묘·당일) 순서
 
묵상기도:성묘일 경우 헌화한 후 온가족이 함께 고인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묵상기도를 드린다.

찬송:‘내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364장),‘저 높은 곳을 향하여’(543장),‘지금까지 지내온 것’(459장) 또는 고인이 좋아하던 찬송가 중에서 한 곡을 선택해 부른다.

성경봉독:시편 23:1∼6,시편 90:1∼12,시편 112장1∼6,잠언 3:1∼10,요한복음 14:1∼11,로마서 8:1∼11,누가복음 20:34∼40 중에서 한 곳을 택해 인도자 혹은 온가족이 한목소리로 봉독하거나 한 구절씩 교독하면서 은혜와 위로를 받는다.친척 중에 비신앙인이 있을 경우 기독교식 예배를 인도하기가 어렵다.이때는 추모예배 순서와 성경구절 찬송가를 미리 프린트해 가족들에게 나누어주면 성경구절을 돌아가며 읽고 함께 찬양할 수 있어 무난하다

설교:설교를 생략하고 성경봉독만 하거나 가족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신앙시를 낭독해도 좋다.

가족 대표기도

주기도문:‘주님 가르치신 기도’를 함께 드림으로 예식을 마친다.

음식을 나눔:성묘일 경우 묘소 앞에서 준비한 음식을 가족이 나누어 먹으면서 고인을 추모하는 이야기를 나눈다.선조들의 신앙생활 이야기,주변의 모범적인 신앙인 이야기로 대화의 꽃을 피워본다.

 

 

 
 
 

 

 

따뜻한 명절! 따뜻한 눈물
 
세진은 이른아침 엄마가 바쁘게 나서는것을 알면서도 모르는척 잠에서 깨어나지않고 이불속에 그냥 누워있다가 엄마가 대문을 나서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석명절이라고 오늘부터 학교는 휴업인데 마땅히 갈때도 오는손님도 없는 세진은 슬프지만 엄마앞에서는 그것마저도 표현하지못하고 오히려 엄마의 눈치만 살피는중이다.
엄마는 보험설계사다.


어젯밤에 수금관계로 자정이다되어서 들어오셨는데 오늘아침에도 밀린 수금관계로 집을 나서는 모양이다
지쳐있는 엄마의 어깨위에 세진이 해 드릴수 있는 유일한 일은 동생 세민을 돌보는일과 엄마가 오시기전에 방청소와 숙제점검및 몇일째 먹고있는 김치찌게를 대워놓는일이다.


아빠의 빈자리가 주는 슬픔이 이렇게 오래가고 클줄이야...
엄마는 미국출장이시라고 말씀하지만 세진은 이미오래전에 다 알고 있었다.
아빠의 회사가어려워지면서 아빠의 모습을 볼수없었으니까...
하지만 엄마를 재촉하거나 아빠를 그리워하는 내색은 할수없었다.


그러기전에 엄마는 이미 지쳐서 자정이넘어서 귀가하셨고 매일매일 고객과 통화중에 실망하고 속상해하신 일이 더 많았으니까
"계세요?"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어보니 엄마와 같은교회다니시는 집사님이시다.
손에는 까만봉지가 들러있다


"엄마는 나가셨니?" "네 들어오세요" "아니야 이것 받아라 엄마오시면 굳이내가 다녀갔단말 하지말고 명절 잘지내시라고 하렴"
집사님은 엄마가 안계신것이 다행이라는듯이 봉지만 내밀고


사라지셨다. 과일과 과자몇개 생선을 비롯해서 김치등 명절을 준비하신 음식을 절반은 가져오신듯 했다.
마지막으로 손에잡히는것이 있었는데 하얀봉투가 하나나왔다. 짤막하게 남기신 메모지와 만원짜리 몇장이 들어있었다.
식당을 하시는 집사님인데 그분도 요즈음은 힘들다고 엄마한테 들은것 같은데 우리집을 생각하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찾아오신것 같다.


저녁늦게 돌아오신 엄마는 그 집사님이 남기고가신 편지를 읽다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빠가 자리를 비우시던 그날밤처럼 엄마는 밤새도록 우셨다.
울다가 지쳐서 주무신 엄마에게 세진은 메일로 편지를 남겼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엄마!"
엄마의 사랑으로 우리는 꿈을 키우며 내일을 설계합니다.
사진은 과거를 말하지만 설계는 미래를 말한다고 하셨잖아요.
너무힘에겨워 힘이 드실때는 참지마시고 실컷 우셨으면 좋겠어요
그러시다가 정말 마음에 병마저드시면 걱정이 잖아요.


엄마 주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고통은 감당할만한 사람에게 주시고 그 고통이겨내고나면 축복이 있다구요.
엄마 ! 힘을내세요 아빠도 엄마를 응원하고계실거에요.
사랑합니다" 세진올림.


엄마모르게 흐르는 눈물이 더욱 뜨겁게 세진의 볼을 적시는 밤이 깊어가는 추석전야밤이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
 
오늘은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이 해방을 맞은지 57주년이 되는 광복기념 주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의 해방을 해마다 기념했듯이 우리 민족은 8.15 해방을 해마다 기념하며 민족의 독립과 발전을 다짐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정복과 억압의 역사이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해방과 구원의 역사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는 애굽과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억압했지만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과 앗수르에서 해방시키고 구원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는 일본과 북한이 우리 나라를 침략하고 억압했지만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나라를 일본과 북한에서 해방시키고 구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과 앗수르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실 뿐 아니라 애굽과 앗수르까지 구원하시고 축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우리 민족의 역사에 적용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나라를 일본과 북한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실 뿐 아니라 일본과 북한까지 구원하시고 축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정신
 
미국이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새 땅을 찾아온 청교도들에 의하여 개척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들이 자유와 새로운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써 신생국 미국이 시작된 것이다. 첫 개척지 플리머스의 초대 지사였던 윌리엄 브래드퍼드는 감사절을 지킬 것을 이렇게 선포하였다.

“높으신 하나님께서 금년에 풍부한 수확을 주셨다. 인디언의 도움을 받아 옥수수 밀 콩 호박과 여러 채소를 심게 해주셨고 자라나게 하셨다. 숲에서 사냥을 하고 바다에서는 생선과 조개들을 넉넉히 거둘 수 있게 축복해주셨다. 야만인의 습격에서 보호하시고 여러 질병에서 지켜주셨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의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모든 순례자들(Pilgrims)에게 선포한다. 주후 1623년 11월29일 목요일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어른과 아이들이 모두 모여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이 모든 축복을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려라”


그들은 칠면조 고기와 감자,옥수수 팬케이크를 굽고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조촐한 감사파티를 열었다. 그리고 점심 후에는 곧장 그 날의 작업으로 돌아갔다. 참으로 믿음이 깊고 부지런한 사람들이었다.


1863년 남북전쟁의 와중에서 국민이 고통스러운 역사를 겪고 있을 때도 링컨 대통령은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을 국경일로 선포하였다. “국내외에 흩어진 모든 미국민이 이 날은 하늘 아버지의 선한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라” 그 후 역대 대통령은 추수감사절 메시지를 발표하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험하고 고생스러운 시대에 초라한 경제력을 가졌던 우리 조상에 비하면 지금 우리는 훨씬 편하고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의 위험은 좋은 것을 주신 하나님깨 감사하지 않는 것이다”(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덕에 대하여 헌신과 봉사 정신으로 감사를 올리자”(우드로 윌슨 대통령)
“이 가을 날 하루를 추수감사절로 정하여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감사하는 것은 우리 미국인의 슬기와 경건이 드러난 전통이다”(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감사하는 민족에게 복을 내려주신다.

 

 

 
 
 

 

 

송년회 대신 기도회
 
연말이 되어 송년회가 많이 열립니다. 우리들 역시 모임이나 직장, 일터에서 송년회를 열면 참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 두 차례로 사양하고 기도회로 나가면 어떨까요? 실제로 어느 직장에서는 송년회 대신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가서 봉사하기로 했다는 말도 들립니다.


본문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재판관인데, 재판관으로서는 곤란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게다가 사람을 무시하는 자라고 합니다(2절). 이 재판관에게 늘 찾아와 자기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요청하는 과부가 있습니다. 이 과부는 매우 끈질긴 사람입니다.


자주 그에게 찾아갔고(3절), 번거롭게(5절) 했으며 재판관을 괴롭게(5절) 했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밤낮 요청한 것 같습니다(7절). 8절에 소개한 것처럼 재판관이 자신의 원한을 풀어줄 것이다 는 끈기를 갖고 계속 매달린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한 두 번 기도하다가 포기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영국의 고아의 아버지라 불리는 죠지 뮬러는 친구 한 사람을 구원하려고 50년간을 기도했다 합니다. 결국 생전에 그가 교회에 나오는 것을 목격하지 못했지만 뮬러가 죽은 후 장례식을 지낼 때 바로 그 친구가 교회에 나왔다고 합니다. 50년 긴 세월의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새해를 바라보며
 
너무나도 오랫동안 길을 걸어왔던 한 사람이 있었다. 걸어가야 할 길은 평범한 방향이었지만, 그는 믿고 따라갈 만한 지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실수를 거듭하며 헛고생을 했고, 그 결과 심히 고달프기만한 여행이 되고 말았다.

그때 어느 마을에 도착한 그는 어떤 낯선 사람에게 가야 할 방향을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 낯선 사람은 이렇게 되물었다. “당신에게는 지도가 한 장도 없다는 말입니까?” “없습니다.” 낯선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도책을 건네주었다.



“자, 여기 지도가 있소!” “이 지도책이 나에게 유용한 것입니까? 이렇게 긴 내용을 읽을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이 지도책은 내가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가지고 다니기만 할 뿐 읽지 않고 걸리적거리는 물건에 불과할 겁니다.”

과연 그 사람은 자신의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지금 새로운 한 해의 시작점에 서 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떻게 갈 것인가? 최소한 길은 정해 놓고 출발해야 되지 않겠는가? 세월의 힘에 의해 떠밀려 가는 인생이 아니라 내가 세월을 이끌고 가는 인생이어야 되지 않겠는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라고 고백한 시편 기자처럼, 인생의 지도 한 장쯤은 갖고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생명의 말씀을 뒤로하고 살아오면서 수없이 저질러 온 실수와 허물을 회개하게 하소서!


 

 

 
 
 

 

 

삼일절
 
<
성 구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시 149:4)


대한독립만세! "오늘 우리는 조선이 자주국가이며 조선 사람이 자유인임을 온 세상에 선언하는 바이다." 이는 1919년 3월 1일 선언된 독립선언문의 도입 부분을 국역한 것입니다. 독립선언문 가운데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기술한 부분을 보면 마치 성경의 어느 대목을 읽는 듯합니다.



ꡒ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朝鮮獨立(조선독립)은 朝鮮人(조선인)으로 하야금 正當(정당)한 生榮(생영)을 遂(수)케 하는 同時(동시)에, 日本(일본)으로 하야금 邪路(사로)로서 出(출)하야 東洋(동양) 支持者(지지자)인 重責(중책)을 全(전)케 하는 것이며, 支那(지나)로 하야금 夢寐(몽매)에도 免(면)하지 못하는 不安(불안), 恐怖(공포)로서 脫出(탈출)케 하는 것이며 … " 이를 해석하자면,


"오늘날 우리 조선의 독립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존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침략자의 그릇된 길에서 나와 동양을 떠받치는 자로서의 중요한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자나깨나 떨쳐버리지 못하는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 ꡓ입니다.


이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요구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정당한 생영을 이루려면, 그리고 사단의 악한 사술로부터 건짐을 받으려면, 또한 자나깨나 떨쳐버리지 못하는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려면 완전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ꡒ그런즉 … 여호와께 귀순하여 영원히 거룩케 하신 전에 들어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겨 그 진노가 너희에게서 떠나게 하라"(대하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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