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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적 예화모음 30편

by 【고동엽】 2023.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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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선으로 바꾸라는 부르심
 
로마 시대에 일어났던 실화입니다. 16세된 영국 소년이 납치되어 야만인들의 노예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그 소년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처절한 현실 앞에서 그는 매일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5년 후 그 소년은 320여㎞를 걸어서 탈출을 시도했고,마침내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소년은 매일 밤 같은 내용의 꿈과 비전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또 어떤 소리도 지속적으로 들었습니다. 자신이 납치되었던 곳으로 돌아가 그 야만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계시대로 순종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성 패트릭입니다. 그가 오늘날에는 아일랜드의 성자로서 존경받고 있지만,사실 그는 그곳에 노예로 납치되어갔던 영국 사람이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이다”(창 50:20)

 

 

 
 
 

 

 

오른빰을 치는 자에게 왼뺨을 돌려대는 것은
 
1920년에 김인서 장로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방에는 또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가 있었는데, 바로 그 유명한 윤병구 선생입니다. 이 사람은 비폭력과 무저항주의에 대해서 비난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김인서 장로를 만나게 되자, 대뜸 한마디 합니다.


“성경에 보면, 누구든지 네 오른빰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라 했는데, 그따위로 해가지고 어떻게 독립운동을 하겠소? 폭력을 쓰는 자는 폭력으로, 무력을 쓰는 자는 무력으로 대항해야 될 게 아니오?”

그 때에 김인서 장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뺨을 치는 자에게 마주 대하여 치는 것은 혈기의 용맹이요, 소인의 용맹이요, 필부의 용기일 뿐입니다. 또, 한 사람밖에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른빰을 치는 자에게 왼뺨을 돌려대는 것은 거룩한 용기요, 만인을 감복하게 하는 대용(大勇)이요, 영적 용기입니다.”


이 말을 듣고 감동해서 윤병구 선생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미움의 결과
 
금지옥엽으로 키우던 아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뺑소니 차에 치여서 죽었습니다. 그 부모가 너무나 원통하고 절통해서 가슴을 치고 울었는데 이 뺑소니 운전사가 잡혀서 감옥에 들어갔으나 재판을 받고 보석이 되어 나왔습니다.

너무나 원통해서 아버지가 권총에 총알을 장전해서 감옥에서 나오는 그를 쏘았습니다. 그런데 부상만 입히고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살인 미수죄로 잡혀서 그 아버지는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너무나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해서 그 부인은 가슴을 치고 몸부림을 치다가 정신병자가 되어서 정신병원에 들어갔습니다.

미움 때문에 온 가족이 풍비박산이 되었습니다. 아들이 죽은 것은 사실입니다. 아들을 죽인 그 사람에 대해서 원한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 원한이 다른 사람을 해치기 전에 자기들 가족을 먼저 풍비박산 만들었습니다.
남편은 살인미수자가 되고 부인은 정신병자가 되고 자식은 이미 죽었고 가정은 무너지고 만것입니다--

 

 

 
 
 

 

 

강도 길들이기
 
퀘이커 교도가 말을 타고 숲을 지나고 있을 때, 순식간에 노상 강도가 나타나 그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목숨이 아깝거든 돈을 내 놓으라고 소리쳤습니다. 퀘이커 교도는 아무 말 없이 지갑을 꺼내 건네 주었습니다.

강도는 그것에 만족치 않고 퀘이커 교도가 타고 있는 말에 눈길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강도는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나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퀘이커 교도가 길을 막아선 채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강도는 권총을 다시 빼들고 퀘이커 교도의 머리를 겨누며 조롱의 말을 했습니다.

“어리석은 놈!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한 채 돈과 말을 빼앗긴 주제에 나한테 설교를 해? 한 마디만 더 해봐라. 네 머리통에 구멍을 내줄 테다!”
그런데도 퀘이커 교도는 조금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듯 웃으며 말했습니다.

“친구여, 돈지갑이나 말 때문이라면 내 목숨을 내놓지 않겠소. 하지만 내가 당신을 구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을 기꺼이 드리겠소.”
그러자 강도는 말에서 내려 지갑을 땅에 던지면서 투덜거리며 도망치듯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행악자를 만나게 될 때, 불평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가 택한 백성이라면 언젠가는 돌이키리라 믿고 그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석공들
 
몇해 전, 며칠 동안 루마니아의 한 목회자인 조셉 톤(Joseph Ton)을 우리 집에서 대접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고국에서 신앙 때문에 옥고를 치러야 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의 대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진지하게 경청했다.

조셉 톤 목사가 감옥에 있던 어느 날, 간수들 몇 사람이 그의 태도가 다른 죄수들의 태도와는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의 모든 죄수들은 간수들의 잔학성 때문에 그들을 증오했다. 그러나 조셉은 그 간수들을 위해,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을 위해 기도했다.

한번은 한 간수가 조셉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째서 원한을 갖지 않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내게는 당신이 하나님의 석공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조셉이 대답했다.

당신의 삶에 있어서는 누가 하나님의 석공인가? 그 사람들이 당신에게 고통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 속에서 당신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그 고통을 사용하실 것이다. 그 고통을 통해 영원토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게 될 살아 있는 성전 가운데 꼭 맞는 당신의 자리를 만드실 것이다.

 

 

 
 
 

 

 

증오심으로 인생을 허비하지 않겠소
 
생후 20개월 만에 고속도로에서 연쇄충돌로 순식간에 숯덩이가 되었다가 기사회생하여,어린 몸으로 50여 차례의 수술을 받은 비운의 청년 조엘 군의 아름다운 믿음이 담긴 이야기입니다.

그는 사고 후 18년 만에 열린 법정에서 가해자 운전사에게 말했습니다.“도트 씨,당신은 저와 저의 아버지, 어머니의 행복을 다 빼앗아갔습니다.그러나 우리 가족을 위한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는 빼앗지 못했습니다.

저는 사고 이후부터 저를 환영하지 아니하는 세상 속에서 성장해야 했습니다.제가 사람들 눈에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저는 집이라는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날 때마다 질식할 것 같은 응시와 ‘저것 좀 봐!’ ‘이봐, 가면 좀 벗지 그래!’ ‘입맛 떨어져!’ 같은 모진 말로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증오심으로 인생을 허비하지 않을 것입니다.원망과 절망이 또 다른 고통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지요”.그렇습니다.증오하며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습니다.

 

 

 
 
 

 

 

땅에는 잡초가 있어야 한다
 
"땅에는 잡초가 있어야 해요. 김을 매다 보면 잡초가 유익한 것을 알게 되지요. 아무리 무성한 잡초라도 그냥 둬야지
제초제를 뿌려 없애면 안 돼요. 처음엔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는 것 같아도 가을이 되면, 그렇게 무성했던 잡초는 다 썩어져 비료가 되고 땅은 비옥하게 됩니다. 잡초가 무성한 토양에서 자란 나무들이 거목이 되거든요. 거목이 된 나무 주변에는 잡초가 생기지 않습니다. 나무 그늘 때문이지요."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제일 귀한 일
 
톨스토이의 민화 중에 [세가지 의문]이란 단편이 있다.
한 임금이 세가지 의문에 부딪쳤다. 첫째로,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적절한 때는 언제인가? 둘째로 어떤 사람이 내게 있어서 제일 필요한 사람인가? 세째로,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인가?


임금이 이 세 가지 의문에 올바른 답을 주는 신하에게는 후사하겠다고 했다. 많은 학자와 신하들은 여러 가지 해답을 제시했다. 제일 적절한 때는 점을 쳐봐야 알 수 있다느니, 고문을 두고 물어봐야 한다느니, 또 제일 필요한 인물은 정치가니, 승려니, 군인이라고도 했고, 제일 중요한일은 학문이니, 예술이니, 경신이니 하며 중론이 구구했다.

임금은 마음에 드는 대답을 얻지 못하여 옳은 대답을 얻기 위해서 성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골의 은자를 찾아갔다.
늙은 은자는 혼자 야채밭을 갈고 있었다. 임금은 은자에게 세 가지 문제의 해답을 요구했으나 은자는 아무 대답도 없이 밭만 갈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임금도 은자를 따라 밭을 갈았다. 임금은 다시 물었지만 은자는 묵묵 부답이었다.

얼마후에 밭 옆 숲숙에서 어떤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뛰쳐나왔다. 그는 상처를 입고 누구엔가 쫓기는 눈치였다. 임금은 자기 옷을 찢어 그 부상의 상처를 싸매주고 정성껏 간호했다. 그 부상자는 다름이 아닌 임금의 옛날 원수였다. 자기의 형제를 죽이고 재산을 빼앗은 임금의 원수를 갚으러 왔다가 임금의 부하들에게 붙들려 부상을 당하고 간신히 도망가는 길이었다. 그 부상자는 임금의 은혜에 감격하여 앞으로 좋은 신하가 되겠다고 맹세했다.

임금은 다시 은자에게 세 가지의 답을 요구했다. 이때 은자는 미소를 짓는 얼굴로 그 대답은 이미 다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때는 '지금'밖에 없다. 왜 지금이 중요하느냐 하면 내가 지배하고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이기 때문이다. 또 제일 중요한 사람은 누구냐? 그것은 지금 여기서 내가 접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일은 무엇이냐? 그것은 지금 접하고 있는 사람에게 정성으로 선을 베푸는 일이다. 사람의 가장 귀한 일은 원수의 상처를 싸매는 일이다.

 

 

 
 
 

 

 

원수를 친구로 만드는 능력
 
링컨에게는 에드윈 스탠턴이라는 정적이 있었다. 스탠턴은 당시 가장 유명한 변호사였는데 한번은 두 사람이 함께 사건을 맡게 된 적이 있었다.


이 사실을 모르고 법정에 앉아 있던 스탠턴은 링컨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저 따위 시골뜨기와 어떻게 같이 일을 하라는 겁니까?”라며 나가 버렸다. 이렇게 링컨을 얕잡아 보고 무례하게 행동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세월이 흘러, 대통령이 된 링컨은 내각을 구성하면서 가장 중요한 국방부 장관 자리에 바로 스탠턴을 임명했다. 참모들은 이런 링컨의 결정에 놀랐다. 왜냐하면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스탠턴은 “링컨이 대통령이 된 것은 국가적 재난”이라고 공격했기 때문이다.

모든 참모들이 재고를 건의하자 링컨은 “나를 수백 번 무시한들 어떻습니까? 그는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으로 국방부 장관을 하기에 충분합니다”라고 했다. “그래도 스탠턴은 당신의 원수가 아닙니까? 원수를 없애 버려야지요!” 참모들의 말에 링컨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원수는 마음속에서 없애 버려야지요! 그러나 그것은 ‘원수를 사랑으로 녹여 친구로 만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링컨이 암살자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을 때 스탠턴은 링컨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 있습니다.” 결국 링컨은 자기를 미워했던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한 진정한 승리자였던 것이다.

 

 

 
 
 

 

 

원수는 원수를 부를 뿐이다
 
어떤 동네 정자나무 그늘에서 두 노인네가 장기를 두다 그만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한 사람은 한 수 물리자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안 된다 하니 승강이가 벌어진 것이지요. 까짓 한 수 물리는 것이 안 될 게 뭐 있냐며 끝내 고집을 부리는 노인네를 밀쳤는데, 그만 상대 노인이 뒤로 넘어지며 죽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고의가 아니라지만 사람을 밀쳐 죽였으니 여간 큰 일이 아니었습니다. 죽은 집에서 쫓아와 어떤 일을 한다 하여도 달게 받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떠민 노인이 깊은 시름에 잠겨 있을 때 마침 장터에서 이야기를 듣고 달려온 아들이 집으로 들어섰습니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냐?"

"그까짓 것 염려하지 마시구 이리 좀 나오셔유."
아들의 말을 듣고 사랑 툇마루로 나왔더니 아들이란 놈 한다는 짓이 아버지를 새끼로 기둥에 칭칭 묶더니 어디론가 휑하니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한참만에 죽은 이의 큰아들인 상주의 산발을 한 머리채를 잡아끌고 집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를 기둥에 묶인 제 아버지 앞에 세우고는 어디서 났는지 도끼 한 자루를 가져다 그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습니다.
"죽여라!"

아무리 아버지를 밀쳐 죽인 원수지만 감히 도끼를 쳐들 수는 없는 노릇, 상주가 어이없어 물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니?"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부모를 죽인 원수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이라, 같은 하늘에서 살 수 없다 하지 않았나. 너는 네 아버지 원수를 갚고, 그러면 네가 세 발짝 움직이기 전에 내가 널 죽여서 또 원수를 갚고, 네게 어린 아들놈이 있으니 그 놈이 자라 날 죽여 원수를 갚고, 그런 거지 뭐......"


이야기를 듣고 가만 생각하던 상주는 도끼를 저만치 던져버리고 기둥에 묶인 노인의 새끼줄을 끄르며 말했습니다.
"어르신, 그만 들어가세요. 저희 아버지가 돌아갈 운수여서 그랬지 어르신께 무슨 허물이 있겠어요?"

전해져 오는 우리의 옛 이야기지만 깊이 생각해 볼만한 것이 있습니다. 원수는 원수를 부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장은 내가 원수를 갚아 속이 시원할지 몰라도 원수는 또 한번의 원수를 부르는 법, 결국 원수를 갚은 자신이 원수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어렵고 힘겹더라도 누군가가 나서 고리를 끊지 않으면 원수 갚는 일은 계속해서 이어지며 모두를 무너뜨릴 뿐입니다. 상생(相生)과 공멸(共滅)은 그렇게 가까이 있는 것, 어느 편을 택할지는 우리의 몫입니다.

 

 

 
 
 

 

 

2차대전
 
1968년 조용한 사건이지만은 위대한 일이 있었습니다. 세계 제 2 차대전 당시에 나치 독일이 유대사람 600만을 죽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학살에 원흉이었던 아이히만 이라는 사람이 체포되어 가지고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제 사형집행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 시점에서 유대사람 중에 꼴 란즈라고 하는 사람은 아이히만을 석방해 달라고 대대적으로 데모를 했어요.

대대적으로 석방 운동을 했습니다.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그는 상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아이히만을 죽인다고 해서 죽은 유대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사형하지 않고 내 버려두어도 인생은 다 죽듯이 저 사람도 곧 죽을 텐데 뭐 미리 죽일 거 없지 않느냐?

셋째는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이미 심판 하셨으니 우리가 심판할 것 없지 않느냐? 넷째는 동생을 죽인 가인도 하나님은 용서 하셨는데 우리가 누구를 정죄해서 그것이 옳단 말이냐고? 마지막 다섯째가 너무나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사랑이 식어지는 세상에 이제부터라고 참 사랑을 심어가야하지 않겠느냐고. 여러분 언제까지 보복을 할 겁니까?


* 성경: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복수의 증오
 
어떤 남자가 '자네가 가지고 있는 칼을 좀 빌려주게'하고 상대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상대는 '싫다'고 한마디로 거절하는 것이었다. 며칠이 지난 뒤 이번에는 반대로 앞서 거절했던 그 남자가 찾아와

"자네의 말을 좀 빌려주게."
하고 부탁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가지고 있는 칼을 좀 빌려주게나."
그러자 상대는 '싫다'고 역시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며칠이 지난 뒤 이번에는 반대로 앞서 거절했던 그 남자가 찾아와
"자네의 말을 좀 빌려주게나." 하고 부탁하자 먼저 그 남자는 말을 빌려주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자네는 자네가 가지고 있는 칼을 내게 빌려주지 않았으나, 나는 자네에게 내 말을 빌려주겠네."
이것은 증오인 것이다.

 

 

 
 
 

 

 

용서로 복수한 동생
 
한 청년은 자기의 형이 집안 사업의 약속된 몫에서 자기를 제외시키려고 모략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였다. 그래서 그는 크게 분개했으며 그의 형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업에서 동생을 완전히 배제시킨 형의 사업은 결국 실패로 끝났으며 설상가상으로 병까지 얻게 되었다. 형의 사업실패와 병 악화 소식을 누군가로부터 전해 받은 동생은 그 길로 모든 것을 제쳐두고 형에게로 달려갔다.

동생은 형을 시설이 좋은 병원으로 옮겨 주었고, 그 치료비 일체를 부담하였다. 또한 그는 형의 사업 일부를 재건시켰고, 정당한 절차로 형에게 그 일을 다시 맡겼다. 솔직히 그 청년은 형을 쉽게 용서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오랫동안 참아 온 울분을 극복하고 복수의 유혹을 과감히 이겼던 것이다. 용서란 용서를 받는 사람과 똑같이 용서하는 사람에게도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어쩌면 사랑으로 용서하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일인지도 모른다.

 

 

 
 
 

 

 

원수까지 사랑
 
일본에서 창간된 한 잡지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습니다. 그것은 잡지의 표지 때문이었습니다. 그 표지에는 평범하게 보이는 회색 나비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표지에 사람의 손이 닿아 그 사람의 체온이 전달되면 순식간에 회색 나비는 총천연색의 아름다운 나비로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존에 있던 사랑의 관념을 깨뜨리셨습니다. 그때까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던 사랑이란 가족과 이웃, 친구와 국가에 한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랑은 하나님 나라 확장의 새로운 도구로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사랑은 원수에게까지도 베풀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단순히 준다고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닙니다. 거기에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희생의 십자가를 질 때, 회색으로 음산했던 세계는 총천연색의 아름다운 세계로 변합니다. 이 세상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십자가의 온기가 필요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 기도: 사랑의 하나님, 십자가의 온기로 원수까지라도 사랑하게 하소서.
* 묵상: 나는 원수를 용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 성경: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

 

 

 
 
 

 

 

원수까지 사랑2
 
성경: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

레오나드 그리피스 목사의 설교집 <십자가 밑에서>에는 필라델피아에서 발생한 한국 학생 피살 사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1958년 4월 25일 교환학생으로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인 학생이 편지를 부치러 가다가 불량배에게 몰매를 맞고 사망한 사건이었습니다.

살인자는 체포되었고, 대학가의 높은 여론과 시민의 분노로 사형이 언도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피살자의 부모가 담당 판사에게 탄원서를 보냈습니다. 탄원서에서는 자식을 죽인 살인자의 생명을 구해주면 그의 재활까지 책임지겠으며 이런 탄원을 하는 이유는 우리를 멸망의 길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조금이라도 실천하기 위해서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답답하기만 합니다. 도저히 우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과 환경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 기도: 사랑의 주님,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 묵상: 나는 원수를 용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 성경: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

 

 

 
 
 

 

 

원수를 사랑하라
 
어떤 사업가가 사업차 뉴욕에 갔다가 그곳에서 고등하교 2학년생인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사고로 죽은 것도 아니고 상급생으로부터 폭행을 당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분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을 서둘렀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복수심으로 이를 갈았습니다.

금지옥엽으로 키운 아들을 살해한 상급생과 학교 관계자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분은 기독교인인지라 비행기 안에서 탄식하며 기도하는데 심령 깊은 곳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면서 용서하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비행기 타고 오는 15시간 동안 마음속으로 원수를 수없이 죽이고 살리고 하다가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착륙했을 때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리라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용서를 통해 얻은 결과였습니다.



이분은 관계 기관에게 아들을 죽인 피의자를 관대하게 처리해 달라는 탄원서를 보냈을 뿐만 아니라 아들의 학교에 장학금을 기탁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은 이보다 더 큽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원수 사랑
 
미 공군 중위 ‘드 샤저’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정부의 사기를 꺾기 위해 최초로 도쿄를 폭격한 두리틀 소장의 폭격대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폭격대원에 자원한 것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시 아내를 잃은 원수를 갚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당시 도쿄 폭격은 항공모함에서 출격해 폭격을 마친 후 중국의 중경으로 귀환하는 매우 위험하고 모험적인 작전이었습니다. 그는 미친 듯이 도쿄에 폭탄을 투하하고 중경으로 귀환하다가 엔진 고장으로 중국내 일본군 점령지역에 불시착해 포로가 됐습니다.

그는 4년 동안 여러 포로수용소를 전전하는 고난 중에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종전 후 신학교를 졸업한 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일본 선교사로 파송된 샤저는 가장 먼저 진주만 폭격기 편대장 후지타 대위를 전도했습니다.

진정한 승리는 복수가 아니라 사랑인 것입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복수를 하는 사람입니다.

 

 

 
 
 

 

 

복수가 아닌 사랑으로
 
본문 : 출애굽기 21;23∼25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출 21;24)

라멕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인이 둘이며 자식도 여럿 두었는데 모두 사회적으로 출세했습니다. 야발이라는 아들은 낙농업계를 주름잡는 사업가가 되었고 유발은 음악계의 거장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크게 성공한 아들은 두발가인인데 세계 철강업계를 주도하는 강철왕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4장 19절 이하에 나오는 라멕 집안 얘기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큰소리 떵떵 칠 만하지 않습니까!

라멕은 자신만만하게 부인들에게 큰소리를 칩니다. 창세기 4장 23∼24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누가 나에게 해를 입히면 그는 내 손에 죽을 것이다. 누가 내게 조그마한 피해를 입힌다고 해도 나는 상대방의 아이를 죽일 것이다.



우리 조상 가인을 해롭게 하면 벌이 일곱 배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지만 누가 나에게 해롭게 한다면 일흔일곱 배로 갚아줄 것이다” 라멕 시대에 잔인하고도 무제한적인 개인적인 복수가 자행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해주는 기록입니다.

라멕 시대의 무법성에 비교한다면 오늘 본문의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곧 ‘피해를 입힌 모양대로 당해야 한다’는 이 법의 기본 정신은 복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자비하고 무제한적인 사적 복수를 방지하는 데 있습니다.

당한 것보다 더 지나치게 복수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법의 집행을 사적인데서 공적인 영역으로 옮김으로써 개인 멋대로 복수하는 것을 예방하고 있습니다. 동시대에 만들어진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함무라비 왕은 ‘질서와 정의를 세운 왕’으로도 평가되는 인물입니다.

예수님은 이 법을 더 발전시킵니다. 하나님의 본디 가르침은 사적인 복수의 ‘방지 정도’가 아니라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마태복음에 나오는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원수를 사랑하며…”

남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당한 그대로 또는 더 심하게 갚아주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런 감정을 넘어서야 합니다.
* 기도: 복수의 감정을 넘어서게 하소서. 사랑을 열망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막전쟁
 
불투명한 가운데 이란, 이라크의 전쟁이 휴전 쪽으로 기우는 것 같다. 동서고금을 통
틀어 이 사막의 8 년 전쟁처럼 이상한 전쟁은 없을 것이다. 먹고 살 길 없어 침략하는
생존전쟁도 아니고, 또 땅이 비좁아 넓히려는 영토전쟁도 아니다.



그렇다고 서로 다른 종교의 이단전쟁도 아니고, 이해가 얽힌 경제전쟁도 아니며, 동서간의 이데올로기
전쟁이나 강대국의 대리 전쟁도 아니다. 이상의 여러가지 요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
나 그 어느 뭣도 전쟁목적이 아닌, 그야말로 이상한 전쟁이다. 목적이 뚜렷하지 않기
에 싸워보았자 이득이 없는 줄 알면서 소모전쟁을 적지않이 8년 동안 지속시켜온 것이
다. 이 8 년 전쟁의 이상인수(異常因數)를 풀어보는 데는 사막에서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의 심성에서 그 요인을 찾아보는 것도 한 방편일 수 있다.


그 첫째 인수(因數)로 사막민족의 혈연집단 `카므사'를 들 수 있다. 주로 오등친(五等
親) 안에 든 사나이끼리의 결사다. 카므사의 한 멤버가 어떤 딴 카므사의 멤버로부터
피해를 입으면 이 카므사 전 구성원에게 복수의 의무가 주어진다. 그 가해자가 국법에
의해 처벌받아도 복수심은 소멸된다는 법이 없다. 중세의 한 서사시에 보면, 한 살인
범을 둔 카므사끼리의 복수가 3백 80 년이나 계속되고 있다.


이란, 이라크 전쟁도 따지고 보면 이슬람교의 종파간 복수전쟁이랄 수 있다. 수천 년
전 이란 시아파 교주의 아들 호세인이 이라크의 우마이어파와 싸워 비참하게 죽음을
당했으며, 그 원념이 수천 년의 불화와 이번 전쟁의 저류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담
야돌브 담'-곧 피는 피로써 갚는다는 사막민족의 격언이 구현된 전쟁이다.


두번째 인수가 우리 나라 말로 체면이랄 수 있는 `와주프'다. 체면 세우는 것을 얼굴
에 희게 한다. 체면 깎이는 것을 얼굴을 검게 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사막의 형벌에
얼굴에 먹칠하는 형이 있는데, 손목을 절단하는 형보다 가혹한 벌에 속한다 하니 와주
프를 얼마나 소중히 하는가 알만하다.


패가망신은 할망정 패배의 `검은 얼굴'은 못 참는 심정이다.
셋째 인자가 습격을 미화한 말인 `가즈우'다. 사막의 어머니들은 아이를 기를 때 형제
간이나 이웃간에 라이벌의식-곧 경쟁심을 키워주는 것이 미덕이다. 담뱃불로 제 몸에
보다 많은 화상을 입힌다든가, 칼로 사타구니에 보다 깊은 상처를 낸다든가 하는 자학
(自虐)놀이가 있다는 것도 사막의 생존조건인 `가즈우'의 용기를 북돋우기 위한 것이
다.


이 사막의 심성이 국가단위로 수천 년 동안 가장 첨예하게 대립된 현장이 이란과 이라
크이다.


유엔의 휴전권고를 수락한 발표문에서도 적들의 새로운 음모를 무산시킬 새로운 조치
라고 했지, 평화공존을 하기 위해서라는 대목은 없다.

 

 

 
 
 

 

 

用人 잘못하면 나라가 망한다
 
성 구 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기여 요람의 두 팔 사이를 쏘니 살이 그 염통을 꿰뚫고 나오매 저가 병거 가운데 엎드러진지라 (왕하 9:24)


파멸로 이끄는 아지태와 그를 막으려는 종간의 첨예한 갈등으로 KBS 1TV 대하 드라마 "태조 왕건"은 제2막을 맞았다. 그 갈등 속에 천하의 구세주인 궁예가 폭군으로 떨어지고 있다 농민과 하층민의 절대적인 지지 속에 출발한 그의 왕국이 무너져 간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뒤에 견훤도 비슷한 운명을 맞는다 그에게도 능환(정진)과 최승우(전무송)이라는 두 책사가 있다.



처음 힘을 합쳐 무진주를 공략한 그들이 대야성 공격 실패와 금성(나주)을 왕건에게 빼앗기면서 갈등을 시작한다 사려 깊고 판단력이 뛰어난 최승우에 비해 다소 충동적 이고 과시적인 능환이 견훤의 장남 신검과 함께 반역을 도모한다 후백제는 그것으로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사료에는 이들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아지태만 '궁예에 붙어 정치를 혼란시켜 갈등을 촉발한 인물'이라는 언급이 있을 뿐 나머지는 이름만 나온다. 드라마에서는 이들을 상상력으로 살려냈다. 능환이 견훤 부자의 갈등을 촉발시킨다는 것도 가설이다 안영동 CP는 "책사들의 갈등과 왕의 잘못된 선택은 당연히 궁예와 견훤의 파멸의 필연성을 부여하기 위한 설정"이라고 했다.


영웅의 파멸은 그들 스스로에게 있지 않다 '인의 장막'이 언제나 나라를 무너뜨린다. '나중에 왕건이 책사 최응의 뛰어난 지략과 역량을 받아들여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 주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원수를 위해 기도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려 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잠 24:17)

스펄전(C.H. Spurgeon)이 젊었을 때 순교자 스데반에 대해서 설교하는데 비신자의 질문으로 인하여 설교가 갑자기 중단되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도대체 무얼 하셨습니까?" 그것은 매우 당혹스런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나? 그는 돌을 옆으로 치우지도 않으셨고, 스데반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스펄전은 이미 예정된 정답 그 자체로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으로 하여금 기도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시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원수가 잘못되는 것은 물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잘못 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은 옛사람의 죄악된 습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공의로 선악간에 판단하시고 그에 따라 갚아주시기 때문에 내 원수가 잘못되었을 때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자신을 점검하고 근신하여야 합니다. 내게는 그와 같이 징계를 받을 만한 요소가 전혀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미국이여, 원수를 사랑하라
 
2001년 9월11일 21세기의 초입에 일어난 미국 뉴욕 세계무역회관 쌍둥이빌딩 붕괴사건은 말 그대로 인류 역사에서 일찍이 없었던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정치인들이 보는 해석이 있을 수 있고 경제인들이나 역사가들이 보는 의미가 다 다르고 종교인들이 보는 의미 또한 다를 것입니다.


물론 9·11 사건은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성서적으로 볼 때도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계 최강국 미국에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메시지가 .


1년 전 그 당시 저는 로스앤젤레스에 있었습니다. 모든 비행기들의 발이 갑자기 묶여 1주일이나 거기서 머물러야 했습니다. 지난달 뉴욕에 들러 바로 그 현장인 맨해튼의 폐허가 된 그라운드 제로,그 빈 터전을 봤습니다. 너무나 많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작년에 붕괴된 그 건물의 공식적인 명칭은 ‘월드 트레이드센터’ 세계무역회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더 많은 사람들이 트윈 타워,곧 쌍둥이 건물이라고 불러왔습니다.


성경에서 쌍둥이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입니다. 이들은 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 형제였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가 후에는 서로 미워하는 철천지 원수가 됐습니다. 형 에서의 후손은 근동에서 아랍민족이 돼 알라신을 섬기는 이슬람 교도가 됐고 동생 야곱의 후손은 이스라엘 민족이 돼 여호와 신을 섬겼습니다. 이 두 형제,이 두 민족,이 두 종교가 오늘날까지 3500년의 역사를 두고 서로 원수가 돼 싸워왔습니다.


9·11 테러 사건도 마찬가지로 아랍인인 오사마 빈 라덴을 중심으로 한 테러리스트들이 미국을 지배하고 있는 유대자본의 상징인 쌍둥이 빌딩을 공격한 사건입니다.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자리에는 폐허만이 남아있습니다. 에서도 야곱도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투쟁의 자리에는 살아남는 자가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폐허를 다 같이 화해하고 반성하며 평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증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일 지난해 9월11일 미국이 공격을 받은 그 다음날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추모예배를 드리던 그날,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기도를 올리고 부시 대통령이 첫 연설을 했던 그날,그때 만일 부시 대통령이 전쟁 선언이 아니라 용서와 평화의 선언을 했더라면 세상은 어떻게 됐을까요.


지금 맨해튼의 그라운드 제로에는 전세계에서 찾아오는 순례객들의 인파가 하루에도 수천∼수만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많은 사람에게 미국은 지금 무엇을 보여주고 또 무엇을 말해줄 것입니까. 다 같이 일어나 전쟁을 하자고 말할 것입니까,아니면 평화를 만들자고 해야할 것입니까?


최근 보도된 뉴스에 따르면 뉴욕시민의 40%가 그 자리에 다시 쌍둥이 빌딩을 세우자는데 동의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보복의 표현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전세계 어느 누구도 기뻐하기 힘듭니다.


그 무너진 터전 위에는 세계 만국을 위한 평화의 공원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후손들에게 다시는 더 이상 야곱과 에서의 싸움이 없고 동서간의 전쟁이 없고 테러와 보복이 없는 평화의 세계를 염원하는 자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9·11 테러 1주년을 맞아 우리는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잡초도 필요하군
 
어느 날 한 농부가 자기 마당에서 잡초를 뽑고 있었다. 얼굴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잡초를 뽑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 몹쓸 잡초만 없으면 이런 고생을 안 해도 되고 밭도 깨끗할 텐데, 하나님은 왜 이런 쓸모 없는 잡초를 많이 나게 하셨을까? 그때 마당 한쪽 구석에 뽑혀진 잡초가 농부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농부 아저씨는 우리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모르고 있군요.

우리가 진흙 땅 속으로 뿌리를 뻗침으로 흙을 갈아주고 있는데, 우리를 다 뽑아 버리면 누가 흙을 갈아줍니까? 또 비가 내릴 때는 우리 잡초들이 바람이나 모래, 먼지가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당신을 잘 지켜 왔습니다. 만일 우리 잡초가 없었다면 당신이 꽃을 키우려고 해도 비가 흙을 씻겨 내리게 하고, 바람이 흙을 날려서 당신을 더 곤란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꽃이 아름답게 피었을 때 우리의 공로도 좀 생각해 주었으면 합니다. 농부는 잡초의 말을 들은 후부터 마당에 있는 잡초를 소홀히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만물 중에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스라엘 역사에는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블레셋, 애굽, 앗수르, 바벨론 등 이방 나라들이 항상 있었다.

이방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괴롭힐 때마다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셨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선민 이스라엘 민족을 올바로 세우시기 위해서였다. 즉 사랑의 채찍으로, 경고의 몽둥이의 도구로 이방 나라를 사용하신 것이었다.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우스운 이야기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시골 농장에 불이 나자 주인이 재빨리 소방서에 신고했다고 합니다. 잠시 후 낡고 허름한 소방차가 도착해서는 겁도 없이 불길로 휩싸인 농장 한가운데로 달려 들어 가서는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불길 속에서 뛰어내린 소방수는 미친듯이 물을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용기에 감동한 농장주는 소방수에게 500달러를 내놓았습니다. 이를 취재하러왔던 기자들이 그 소방수에게 물었습니다.

"정말 용감하군요. 기증 받은 돈은 어디에 사용할 건가요?".
그러자 소방수가 씩씩거리며 화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우선 이 고물 소방차의 브레이크부터 고칠겁니다.".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소방수차가 브레이크 고장으로 불속 깊은 곳에 들어가서 살기 위하여 열심히 물을 품었지만 결과는 소방수로서 목숨걸고 사명 감당한 것처럼 되어 선을 행한 것이 되었습니다.
마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

 

 

 
 
 

 

 

원통함을 푸는 방법
 
마음속에 남아 있는 원한을 제거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그것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정체를 밝혀내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현재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든지 스스로 자신을 용서하고 또한 과거에 당신에게 중요한 존재였던 사람들이 당신에게 했던 행동과 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이다. 당신이 아직 조금이라도 보복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면 원통한 감정은 제거될 수 없다.

루이스 스미즈는 이것을 다 음과 같은 말로 잘 표현했다. “용서하는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모두 그것을 조금씩 배워야 할 필요가 있고, 온전히 배우기까지는 많은 갈등이 따르게 마련이 다.” 많은 사람은 용서하기 원하는 마음과 보복하고자 하는 두 가 지 마음의 갈래길에서 한 발은 이쪽에, 다른 한 발은 저쪽에 놓고 산다. 우리는 고정된 상태에서 꼼짝못하고 묶여버리고 만다.


과거에 상처를 주었던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불신과 원통한 마음을 버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원통함을 품는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 상태를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조정하게 내 버려두는 것을 의미한다. 그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께 맡겨드리고 그분이 삶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허용하라.

 

 

 
 
 

 

 

적도 친구다
 
"사람에겐 친구와 적이 필요하다. 친구는 충고를, 적은 경고를 준다."
소크라테스는 "적"을 사상적 대립자나 사업적 경쟁자, 직장동료라고 규정한다.
사람들은 일하다가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적이 있으면 몹시 언짢게 생각한다.
그러나 주변에 친구만 있고 적이 없다면 긴장이 풀리고 만다.
친구는 내 잘못에 대해 마음이 상할까봐 충고하기를 주저할 것이다.
적은 평범한 일상에서 저지를 수 있는 과오를 예방하고 진보와 성장을 가져다주는 또 다른 이름의 친구다.

 

로마 시대에 일어났던 실화입니다. 16세된 영국 소년이 납치되어 야만인들의 노예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그 소년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처절한 현실 앞에서 그는 매일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5년 후 그 소년은 320여㎞를 걸어서 탈출을 시도했고,마침내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소년은 매일 밤 같은 내용의 꿈과 비전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또 어떤 소리도 지속적으로 들었습니다. 자신이 납치되었던 곳으로 돌아가 그 야만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계시대로 순종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성 패트릭입니다. 그가 오늘날에는 아일랜드의 성자로서 존경받고 있지만,사실 그는 그곳에 노예로 납치되어갔던 영국 사람이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이다”(창 50:20)

 

 

 
 
 

 

 

용서와 증오
 
우리 교회 김 집사가 투병하고 있을 때 심방을 갔다.

“천국은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이니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위대한 소망을 가지세요. 이 세상은 하나님을 위한 곳이니 투병까지도 하나님을 위한 사명과 영광으로 알아야 합니다.”


나는 이런 설교를 했다. 구원의 확신을 갖고 살아온 김 집사는 내 오른손을 꼬옥 잡았다.

“목사님, 이 집사와 20년 전 크게 싸우고 서로 원수가 됐습니다. 이 집사에게 저를 용서해달라고 말해주십시오.”

나는 두 사람을 모두 만나 화해의 시간을 가졌다. 두 사람이 20년만에 서로 용서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 먼저 용서하는 사람이 승리자다. 마음 속에 증오를 품고 화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패배자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생각해보라. 용서받지 못할 사람,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복수와 용서
 
'어느 군인의 복수' 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한 남자가 입대해 전방으로 갔습니다. 몇 달 후 여자친구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우리 이제 헤어지자, 그러니 내 사진을 돌려보내 줬으면 좋겠어"
화가 났지만 군대에 있는 몸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대 동료들의 여자친구 사진을 죄다 모아서 다음과 같은 편지와 함께 보냈습니다.

"어떤 게 네 사진인지 기억이 안 나네. 네 것만 빼고, 다른 사진은 빨리 돌려보내!"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다보면 억울하고 원통해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억울한 일을 당하고 복수하지 않고 사랑으로 모범을 보여준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입니다.

17살 나이에 이복형제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하다가 노예로 애굽에 팔려갔습니다. 가까스로 보디발 장군의 종으로 들어갔지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 참담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 총리가 되고 형제들을 만났을 때 대제국의 총리로서 복수할 수 있었고 하고 싶은 원망을 모두 접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로 삼아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요셉은 말합니다(창 45:7∼8).

요셉은 복수하지 않고 사랑으로 모든 형제와 아버지의 친척을 먹여 살렸습니다(창 45:9∼10). 자신의 넓은 아량으로 용서하고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이 도구가 된 것이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소풍가는 날처럼
 
천상병이란 시인이 있습니다. 군사정권 시절에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푸르른 꿈도 펼쳐보지 못한 채 그의 삶은 시들어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음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는 그는 <귀천>이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좌절과 분노와 원망과 불평을 퍼부어대며 살 수 밖에 없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는 생각를 달리하여 하루하루를 '소풍가는 날'처럼 즐겁게 살았노라고 이 시에서 노래했습니다.
유명한 미술가 루오의 판화에 재미있는 제목의 판화가 한 점 있습니다. 그 판화의 제목은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날에도 향을 묻힌다'입니다.

괴롭히고, 아픔을 주고, 상처를 주는 도끼날에도 독을 묻혀주지 않고 오히려 향을 묻혀주는 향나무. 올 한 해에도 우리가 넘어야 할 산과 건너야 할 강이 많습니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좌절을 주고 아픔을 주고 때론 분노와 절망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그때마다 '소풍가는 날처럼' 생각을 바꾸어 살고 싶습니다.

또 '자기를 찍는 도끼날에도 향을 묻혀주는 향나무처럼' 일년을 달려가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그런 삶이었습니다. 비방하고 멸시하고 죽이려는 자들 앞에서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고 기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를 찍으려 달려오는 사람들 앞에서도 예수의 향을 묻혀주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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