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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직분 예화모음 22편

by 【고동엽】 2023.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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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준 위치에서
 
바바리아 헨리 왕이 한번은 궁중 생활에 싫증을 느껴 수도원에 들어가려고 수도원 부원장 리차드를 찾아갔다.
그 부원장은 왕에게 엄격한 규칙을 강조하면서 무조건적이고 정확한 복종이야말로 수사의 필수 조건이라고 말했다.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왕은 그의 모든 지시를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 당신의 직위로 돌아가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위치에서 당신의 의무를 다하시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왕은 다시 왕위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위치에서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것 그것이 우리의 본분이 아닐까?

 

 

 
 
 

 

 

주님의 일꾼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가 하루는 잠자리에 들면서 그의 가정부인 에밀리 글로리아 윌슨 부인에게 절대로 깨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얼마 후 백악관의 죤슨 대통령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대통령 각하, 갈브레이스씨는 지금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리고 깨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깨우시오.


지금 통화를 해야 하오'. '안 됩니다. 나는 각하의 일꾼이 아니라 갈브레이스 씨의 일꾼입니다'.
그 후에 갈브레이씨와 통화를 한 대통령은 에밀리 부인에게 이런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나는 그 여자가 백악관에서 일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누구의 일꾼인가?

 

 

 
 
 

 

 

하나님의 심부름꾼
 
모든 일의 일꾼은 세 종류입니다. 첫째는 자신을 위하여 일하는 자, 둘째는 일을 위하여 일하는 자, 셋째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하나님을 위하여 일꾼된 자는 “나는 심부름을 받고 태어난 생명이다”라는 사명감을 느낍니다. 그런 사람을 두고 사명적 인간이라 합니다.


회사의 조그만 심부름꾼이 소사입니다. 몰래 보낸 심부름꾼이 밀사입니다. 하나님 심부름꾼이 천사입니다. 특별한 심부름꾼이 특사입니다. 급한 심부름꾼이 급사입니다. 임금의 심부름꾼이 칙사입니다. 공적 심부름꾼이 공사입니다. 심부름 받은 신하가 사신입니다. 심부름 받은 제자가 사도입니다. 심부름 받은 사람이 사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심부름입니다. 하나님 심부름꾼입니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은 주를 위해 죽고 주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키에르 케고르가 코펜하겐 대학의 신학생 시절 그가 22세 되던 때에 일기를 이렇게 썼습니다. “온 천하가 다 무너지더라도 내가 이것만은 꽉 붙들고 놓을 수가 없다.


내가 이것을 위해 살고 이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나의 사명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에게서 대답을 듣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나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오늘 이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조화
 
아프리카 남단지역은 이런 해류의 영향으로 해초들과 고기들이 풍성하다고 합니다. 찬 물과 따뜻한 물이 만나기 때문입니다. 찬 물과 따뜻한 물이 적절히 만나면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조화를 이루면 풍성합니다. 하나님은 찬 것과 따뜻한 것이 탁월한 조화를 이루고 계시기에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미국의 각 교회의 교파를 표현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0 감리교인에게서는 진실한 생활 태도를 배우라.
0 침례교인에게서는 신앙간증을 들으라.
0 루터교인에게서는 충성된 교인임을 배우라.
0 성공회교인에게서는 교인의 긍지를 배우라.
0 퀘거교인에게서는 청결한 믿음을 배우라
0 유대교인에게서는 종교의 고결함을 배우라.
0 장로교인에게서는 기도의 생활을 배우라.
0 구세군에게서는 봉사의 생활을 배우라.
0 천주교인에게서는 교인의 보편성을 배우라.
0 그리고 흑인들에게서는 그 열성을 배우라.
이상의 열 가지를 다 배우면 얼마나 좋을까요?

 

 

 
 
 

 

 

교회학교 교사의 고백
 
어느 교회학교 교사가 몇년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회의감이 생겼습니다. 점점 자신의 일에 흥미를 잃어간 그 교사는 결국 교회학교 교사 일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전장에서 날아온 편지 한 통을 받습니다. 젊은이 한 사람이 전사했습니다. 젊은이는 마지막으로 죽어가면서 두 사람에게 전할 말이 있다며 꼭 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나는 어머니에게 “당신의 아들이 조국을 위해서 열심히 싸우다가 기쁘게 죽었다는 점을 전해 달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어려서 교회학교에 다닐 때 자신을 가르쳐준 선생님에게 “가르침 대로 그리스도인으로 살다가 죽었다는 점을 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편지를 받아본 그 교사는 자신의 결정을 부끄럽게 여기고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기로 다짐했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일에는 후회가 없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결실을 거두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약속입니다.

어느 날 부동산 중개 사무소에 무슨 일로 들려 목사라고 했더니 사장이라는 사람이 "요새 교회 사업이 잘되는 것 같은데 목사가 되려면 얼마나 드느냐"고 물어 실소를 한 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직도 돈 드리면 되는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장로 투표를 했는데 떨어진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와 "그렇게 헌금을 많이 했는데도 장로 투표에 떨어지면 얼마나 더 헌금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라고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떨어져야 교회가 평안할 것입니다

 

 

 
 
 

 

 

직분을 완수한 넬슨 제독
 
영국의 해군 제독이었던 넬슨은 싸움에 나갈 때마다 ꡒ영국은 제군들이 각자 맡은 바 임무를 다할 것으로 믿는다.ꡓ라는 신호기를 달았을 정도로 끝까지 최선을 다한 군인이었습니다.
1770년 르코시마 전쟁 때, 그는 오른쪽 눈을 잃어 버리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1789년, 젠투빈샌트 해전에서 그는 또다시 오른쪽 팔을 잃어 버리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싸움에 임할 때는 항상 꿋꿋한 자세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1805년, 트라팔가 앞바다에서 프랑스, 스페인 연합함대와의 접전에서 적의 함대를 거의 침몰시켰으나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쓰러졌으면서도 싸움의 결과를 걱정하여 부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누가 승리하고 있는가?"

부하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승리는 우리 쪽입니다."

그는 부하의 말에 웃음을 띄며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내 직분을 다할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넬슨은 국가를 지키는 군인으로서 그에게 주어진 책임을 충실히 이행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통해 받는 직분이라는 것은 특수한 직분입니다.

첫째는 하나님나라를 위한 직분
둘째는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직분.
셋째는 성령의 은사.(성령님을 철저히 의지)
넷째는 섬기는 직분.
다섯째 생명을 살리는 직분.
여섯째 하늘나라에 상급이 준비되는 직분.(면류관)
일곱째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목적인 직분.
여덟째 죽도록 충성하는 직분.
아홉째 계급이 없는 직분.
열 째 믿음이 있어야 하는 직분.

 

 

 
 
 

 

 

자기 자리 지키기
 
“Dirty is out of the place” 라는 말이 있습니다. ‘더러움이란 자기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연못 속에서 커다란 고기가 헤엄칠 때에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고기가 우리의 침대 위에 누워 있다면 우리는 더럽다고 말합니다.
아름답던 물고기가 혐오스러워지는 것은 그 물고기의 본질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적합하지 않은 장소에 있기 때문입니다. 논밭에서는 꼭 필요한 흙이 방바닥에서는 닦아내야 할 더러운 것이 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주어진 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임의대로 버리고 떠날 수 있없습니다. 사회에서나,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십시오. 그것은 견고함과 인내와 피나는 노력이 요구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은 제자리를 지키며 그 곳에서 충성스럽게 맡겨진 역할

 

 

 
 
 

 

 

겐그레아의 뵈뵈
 
뵈뵈를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뵈뵈 집사를 일꾼이라고 표현한 내용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일꾼은 일하는 사람,또는 맡은 일이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또 일꾼이라는 말은 열심이 있고 자기 일에 충성스러운 사람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일꾼은 삯을 받고 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일꾼은 단순한 노동력을 기준으로 말하지 않고 그 개인의 사역이나 그가 갖고 있는 교회에 대한 비중이나 또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 등 정신적인 부분에 더 많은 의미를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라고 하는 것은 그 교회의 중진을 말하고 그 교회에서 소중하게 쓰임 받고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오늘날도 “아무개 집사님은 우리 교회의 일꾼입니다”라는 표현은 그 교회에서 비범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우리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문에 나타난 뵈뵈는 바울 사도의 마음속에 겐그레아 교회 하면 떠오르는 정말 소중한 일꾼이었습니다.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의 기둥 같은 일꾼이었고 다른 사람들의 신앙의 본이 되는 성도였던 것입니다. 더욱이 여자로서 교회를 떠받치는 소중한 위치에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그녀의 신앙 인격 봉사 헌신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이 컸던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교회의 일꾼이 되어야 하고 교회의 일꾼으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뵈뵈를 가리켜서 바울 사도가 나의 보호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보호자라는 말은 어른이 어린아이를 보살피는 경우를 말합니다. 또는 힘이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힘이 없고 약한 사람을 도와주고 지원하는 것을 보호자라고 합니다. 이는 뵈뵈가 바울 사도의 힘이 되고 또 바울 사도가 마음으로 의지했고 여러 모로 바울 사도를 돕고 있었기 때문에 뵈뵈를 나의 보호자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겐그레아에서 로마까지는 수천리나 되는 거리인데도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 여자의 몸으로 바다와 육지를 건너 바울 사도의 편지를 전한 것을 보면 바울 사도가 자기의 지체로 여길 만큼 소중한 친분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뵈뵈는 교회를 위해서나 바울 사도를 위해서 훌륭한 일꾼이요 보호자였습니다.

 

 

 
 
 

 

 

사람 작은 사람
 
子曰 君子 不可小知而可大受也 小人 不可大受而可小知也(논어15:33)
자왈 군자 불가소지이가대수야 소인 불가대수이가소지야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사소한 것은 잘몰라도 큰 일은 맡을 수 있고, 소인은 큰 일은 맡
을 수 없어도 사소한 것은 잘아느니라.


사람마다 각기 타고난 역량이 다르다. 그래서 큰역량을 가진 인물은 큰 일은 맡고 작은 역
량을 가진 인물은 작은 일을 맡아야 한다.


6톤 트럭을 몰고 좁은 시장길로 가서 저녁 반찬꺼리를 사려고 한다면 이는 어려운 일이니
차라리 작은 손수레를 이용함이 좋다. 반대로 작은 손수레를 끌고 산더미처럼 쌓인 이삿짐
을 옮기려고 한다면 이 역시 불가능하다. 이처럼 군자는 사소한 일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큰 일에 매달려야 한다.

큰교회의 당회장이 교회의 큰일을 염려하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 매달린다면 이런 사람은
큰 일꾼이 못된다. 각기 적합한 일꾼들을 세워 분담하여 일하게 하고 당회장은 목자로서의
본 일에 전념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벽돌공의 자세
 
지혜의 임금으로 알려진 솔로몬이 하루는 성전 건축현장을 방문하고
일꾼들을 돌아 보았다. "왜 당신은 여기서 일을 합니까? " 한 일꾼이
대답을 했다.



"아 그야 뭐 배운 것도 없고 이럭저럭 살아가려니 죽지
못해서 하고있지요." 얼마쯤 가다가 다른 일꾼에게 똑같이 물었다. 그
일꾼은"배운 도둑질이 일하는 것 뿐이니 놀고 먹을 수가 있나요,그럭
저럭 한 세월 보내는 것이죠"



왕은 얼마쯤 가다가 해진 옷을 입고 일
하는 청년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왜 여기서 일을 하느냐구요? 정말
난 기뻐서 죽을 지경이지요 자,보세요 나는 지금 하늘나라의 영광을
이 땅위에 드러내는 성전을 바로 이 손으로 돌을 쌓고 있지 않나요?


이 손으로 쌓는 벽돌 한 장이 이 위대한 성전의 작디작은 부분일지언
정 큰 일을 이룬다는 것은 소명을 가지고 일하는 자 와 그렇지 못한자
의 엄청난 차이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장로의 책임은 무엇인가.
 
교회와 장로는 우선 행정적 책임을 진다. 교회를 다스리는 책임이다. 감독이라는 단어가
그 의무를 나타내 준다.오랜 경험을 통해서 교회의 움직임을 잘 아는 장로가 앞장서서 자신
의 성숙한 생각과 언어와 태도와 행동으로 직접 본을 보여주면서 성도들을 이끌며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다.

때때로 직분의 권위로 마치 회사의 사장인 것처럼 성도들을 대해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들이 없지도 않다 (벧전 5:2~3,살전 5:12~13,히 13:7^17^24).조심할 일이다. 교회는 사회의
회사가 아니다. 영적 공동체다.

세속적 사회생활에 익숙한 장로님들이 교회에 와서도 같은 사고와 방법으로 교회를 움직
이려 할 때 많은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에도 잘 성장하던 교
회에서 바로 이와같은 문제 때문에 법정에서까지 교회의 명예를 떨어 뜨리고 있는 경우가
있다.

둘째,목회적 책임이다.교회를 이끄는데는 목자가 목양하듯이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모아놓고 교회가 마치 양떼인양 "교회를먹이라"(행 20:28)
고 했고 또 베드로 사도도 "양떼를 먹이라"(벧전 5:2)고 표현했다.예수님의 동생 유다도 양
떼를 돌보지 않고 자신들의 유익만을 챙기고 있는 교회지도자들에게 경고를 한적이 있다(유
다 12절).

셋째,교육적 책임이다.성도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장로의 자격속에 "가르
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딤전 3:2). 이 일은 주로 말씀훈련을 받은 목회
자가 하지만 일반 장로들도 다른 성도들 보다 더 잘 배워서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말과 본으로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장로를 "말씀과 교리안에서 수고
하는 자"(딤전 5:17)라고 불렀다.성도들이 말씀에서 어긋나 잘못가면 고쳐
주고 또 오른 길을 가도록 권고해 주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딛 1:9).

또 에베소서 4:11에는 목회적 역할과 가르치는 역할이 하나로 고려되고 있
다.장로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하고 배우나 일단 장로가 된
다음에는 배우는데 소홀히 함으로써 성도들의 많은 지탄을 받는 경우가 자
주 있다.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 지속적으로 배워야 한다.

넷째,지도자적 책임이 있다.교회의 여러가지 활동들을 앞장서서 이끌어 간
다. 야고보는 아픈 사람이 있어도 먼저 장로들을 부르라고 했다(약 5:14).병
자를 위해 기도해주는데도 장로들이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장로들만
이 이런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고 모든 신자들은 다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 이지만 그 일
을 하도록 만드는데는 장로들이 앞장 서야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장로직분에 모든 일에 앞장서는
역할을 부여하셨다.그러나 교회가 장로들에게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잘
못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표자의 책임이 있다.필요할 때에 교회를 대표한다.사도바울
도 에베소교회의 방향을 제시하려 했을때 장로들을 모아서 지시했다(행 20:
17).디모데전서 5:17에서는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를 구분하기도
한다.



가르치는 장로는 주로 목사를 뜻하고 다스리는 장로는 평신도로서 장
로로 선택된 분들을 말한다. 그 역할과 책임에는 차이가 있으나 자격에 있어
서는 목사나 장로가 전혀 차이가 없다.



한사람은 소명을 받아 신학교를 거쳐
목회자가 되고 한사람은 오랜 기간동안 평신도로 섬김을 통해 교회와 성령
의 인정을 받아 장로라는 목회자가 되는 것이다.

 

 

 
 
 

 

 

충실해야 할 직분
 
사냥군이 개 두 마리를 길렀다. 한 마리에게는 사냥을 가르
치고 다른 한 마리에게는집을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사냥군은
사냥하여 온 것 중에서 한 몫ㅇ르 언제나 집지키는 개에게 주
곤 하였다.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냥개가 집 지키는 개에
게 항 의를 하였다.


"내가 고생 고생하여 잡아온 것을 너는 아무 일도 안하면서
먹다니 말이 되느냐."
그러니까 집 지키는 개는 대답하였다.


"그 말은 나한테 하지 말고 주인한테 하렴. 나는 네 것을 먹
는 것이 아니고 주인의것을 먹는 거란 말이야."

 

 

 
 
 

 

 

멀티 포지션
 
월드컵 한국 대표선수단의 히딩크 감독은 새로운 축구형을 만들어냈습니다.
지금까지 세계 축구는 유럽형과 남미형으로 크게 나뉘었습니다.그러나 이제는 그 둘에 한국형이라는 새로운 형이 첨가되었다고 합니다.한국형 축구란 힘을 바탕으로 한 소위 멀티 포지션 플레이를 의미합니다.


멀티 포지션 플레이란 선수가 어느 한 포지션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포지션이든 소화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이런 히딩크의 작품은 대이탈리아전과 대스페인전에서 진가를 발휘했습니다.
수비수를 빼고 그 자리에 공격수를 교체해 넣은 것입니다.

멀티 포지션 플레이는 힘이 기본이 돼야 가능합니다.힘이 있는 그리스도인은 어느 한 포지션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전도는 할 수 있지만 가르치지는 못하고 성경공부는 잘 하지만 사회봉사는 등한히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마음껏 소화해내는 사람이 멀티 포지션 크리스천입니다.

 

 

 
 
 

 

 

나 한 사람이 중요해
 
한 유명한 지휘자가 오케스트라 앞에서 두팔을 올리고 서있었다. 중요한 음악제의 마지막 연습을 시작하려는 찰라였다.
그의 지휘봉이 움직이자, 거대한 홀은 오르간의 장엄한 선율과 드럼의 우렁찬 소리, 심벌의 명쾌한 소리, 현악기의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나왔다.


갑자기 "스톱!"하는 소리가 들렸다모두 놀란듯이 침묵했다. "피콜로(고음의 작은피리)는 어디있오!"
피콜로 연주자는 그의 악기가 너무 작아 남의 주목을 끌지 못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여 연주를 하지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잘 훈련되어진 지휘자의 귀는 작은 악기의 선율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그 음악은 피콜로의 소리없이는 미완성이며, 완전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달란트의 분량대로 교회 안에서 각각의 역할이 있다.

 

 

 
 
 

 

 

명감으로 헌 신문·고철 모으는 경찰관
 
"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사도행전 6:8)

폐지를 정리하고 있는 최정운 경사. 익산경찰서 팔봉 파출소 최정운(崔正云.41) 경사는 이틀에 한번씩 돌아오는 비번이면 오후 1시쯤 1t트럭을 끌고 집을 나선다. 익산시내 주택가와 상가. 관공서. 공장 등을 세 차례 돌면서 신문 등 폐지와 빈 병. 고철 등 재활용품을 모은 뒤 분류한다.



그러다 보면 귀가 시간은 보통 밤 10시를 넘기기 일쑤다. 폐품수집으로 얻는 수익금(월 평균 60만~70만원) 은 지난해 옛 남중2가동사무소 건물에 꾸민 장애아 교육시설인 '한두리'의 운영비로 들어간다.

이리 농림고를 나와 특전사 하사관으로 8년 동안 근무하다 87년 퇴역, 경찰관으로 변신한 崔경사가 폐품수집 순례를 시작한 것은 3년전. 아들 명준(明俊.14.혜화학교 6학년) 이가 자폐증을 앓아 가입한 '익산장애인 부모회' 를 이끌게 되면서다.
"무작정 다른 사람들의 도움에만 기댈 수 없으니 자립기반을 갖춰야 하며 그 한 방법으로 회원들끼리 재활용품을 수집해 팔자고 제안했습니다."



처음엔 자신의 승용차를 끌고 나왔는데 적재량에 한계가 있었다. 97년12월 폐차직전의 트럭을 10만원에 구입, 수리하고 도색한 후 뒤문짝까지 달았다. 또 장애아를 위해 폐지나 재활용품을 버리지 말고 모아주자는 취지의 '한지회'(회원 6백 여명)도 조직했다. 함께 폐품수집에 나섰던 회원들의 대부분이 떨어져나갔다. 일 자체가 쉽지 않고 때론 주위사람들의 시선과 창피함을 무릅써야 하기 때문.

"사명감이 없었다면 저 역시 며칠을 못 버티고 포기했을 겁니다. 말벗이라도 있으면 흥이라도 날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
崔경사의 손바닥은 수도 없이 물집이 잡혔다 터졌고 이젠 굳은살이 단단히 박혀 돌덩이 같다. 그의 소망은 장애아들이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아 수용된 기존의 복지시설과 달리 부모들과 함께 하는 사랑의 보금자리를 꾸미는 것.
"아직도 주변에는 감춰진 장애인들이 많은데 그들에게 더 많은 도움과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펼칠 수 있을 때 우리 사회는 더 밝아지지 않을까요. "


잠시 동안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약 없이 평생 남을 위해 일하는 것은 보통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소명감이 있어야 한다. 내가 이 일을 위해 태어났고 이 일을 하는 데서 분명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하는 소명감이 있어야 한다. 소명감이 있을 때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가 맡은 일을 지속적으로 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인생에 있어서 소명감을 발견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소명감이 있을 때 그 인생은 힘이 있고 생명력이 있고 활기가 있게 된다. 그러나 소명감이 없을 때 그 인생은 단지 먹기 위해 사는 인생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수위의 입사 서류
 
해외의 어느 공관에 아주 모범적인 수위가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어찌나 자기 일에 열심인지 아침일찍 제일 먼저 출근하여 말끔히 주변 청소를 했고 공관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에겐 언제나 예의 바르고 깍듯하게 인사를 하곤 했다.
누구나 한번쯤 공관에 들린 사람들은 그 수위를 인상 깊게 보았다가 두고두고 칭찬했다.

이를 알게된 공관측에선 그가 조금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좀 더 나은 직책으로 전보 발령을 냈다. 그런데 동료들의 축하를 받는 수위 의 얼굴은 전혀 기쁘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여보게, 자네 얼굴이 왜 그러나?" 절친한 동료가 묻자 수위는 힘없이 대답했다.

 "글쎄 막상 내가 하던 일에서 놓여난다니 이상하네, 평생 내가 해온 일인 데 ..." 그러더니 그 수위는 다음날 사표를 내고 공관에 나오지 않았다.
 동료들이 집으로 전화를 걸고 집을 찾아가 출근할 것을 설득했지만 그는 막무가내 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공관에서는 새로운 수위를 채용하는 광고를 신문에 냈 다. 속속 응시서류들이 도착하고 담당 직원이 서류를 검토 하였다.

 
한참동안 서류를 뒤적여보던 그 직원은 갑자기 한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낯익은 얼굴사진이 붙어있는 그 이력서는 바로 얼마전 전보발령을 받은 바로 그 수위가 제출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직분
 
서양 속담에 아주 없어서는 안될 요긴한 사람이나 그 사회에서 유용한 사람을 가리켜 그 아무개는 세상의 소금같은 사람이라 고 말합니다.
고대에는 소금이 아주 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 이 하는 말 가운데 Nil Utiius sole etsole 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There is nothing more usefu l than sun and salt 세상에 해와 소금보다 더 유용한 것은 없다 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 때에 소금 하면 보통 세 가지로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1 . 소금은 순결과 연결되는 낱말이기도 합니다.
특히 로마 사람들은 소금을 순결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원시종교에서 그들의 신들께 헌 물을 할 때에도 소금을 뿌렸는데 이것은 그들의 순결을 의미하는 의식이라고 합니다.


구약에 보아도 레위기 2 : 13에 소제를 드릴 때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 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 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섬김
 
로마서 12:1∼8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3절)

영국의 스펄전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메트로폴리탄 타버나클(교회)이 있습니다.

 100년전만 해도 세계 최대의 교회, 최고수준의 회중,최고의 건물,몇 세기에 한번 날까 말까하는 설교자를 갖추었던 그 교회가 1세기도 가기 전에 얼마나 초라하게 몰락했는지 모릅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까요?


런던도 바뀌고 사람들도 바뀌었지만 교회만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오늘 본문 2절을 보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변화는 인격의 변화입니다. 또한 이 변화는 삶이 뒤따르는 변화입니다. 인격과 삶의 변화를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변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변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마음에 인격적으로 모신 사람이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고전3:16)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변화될 것이 있습니다.그것은 삶의 변화입니다. 생활이 따라주는 인격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틀을 마련하지도 않은 채 무엇을 하려고 하는 데에 교회의 교회됨을 상실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평신도'(平信徒)는 없다
 
'평신도'(平信徒)의 사전적 의미는 "교직(敎職)을 가지지 않은 일반 신자 (信者)"이다. 이 말은 오래 전부터 천주교와 같은 조직체에서 사용하여 왔었다.
이 말이 교회 안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초 강남에서 대형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O 목사의 "평신도를 깨운다"는 책을 통해서부터일 것이다.


이 때부터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아닌 성도를 가리켜 '평신도'로 호칭하기 시작했다.
'교회 안에서 잠자는 성도들을 깨워야 교회가 성장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책은 당시 교회의 대형화의 열풍과 함께 교회의 외형적 성장을 보장하는 보증수표처럼 획기적인 선풍을 일으켰다.


이 책은 너도 나도 대형 교회를 지향하는 목회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성도들의 영적 각성을 일깨우는 기폭제로 치부되었다.
"평신도를 깨운다"는 슬로건은 90년대 초에 교회의 무한한 발전을 위해 성도들의 참여도를 높이기 위한 각종 세미나가 활발하게 전개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평신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못해 급기야 90년 대 말에는 '평신도 영성 운동'으로까지 발전되기도 하였다.
이 책이 출판 된 후부터 교회에서 '평신도'는 목회자를 제외한 장로와 집사 를 포함한 모든 성도들을 지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전적 의미를 밀어내고 신종 어휘로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신종어인 '평신도'란 단어가 교회 안에서 널리 사용되면서부터 교회의 가치관을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성도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 안에는 오직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는 성도들만이 있을 뿐이다.



교회에서는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직분자를 선택하여 세우는데 우리 장로교에서는 목사와 장로와 집사라는 직분을 그들에게 부여한다. 이것을 항존직(恒存職)이라고 하는데, 교회가 조직체로서 존재하기 위해 교회 안에 항상 있어야 할 직분인 것이다.

목사와 장로와 집사는 모두가 똑같은 교회의 직분자이며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직분자들이다. 따라서 항존직의 직분자들은 그 직무상 목사와 장로와 집사로 각기 고유 업무를 교회에서 수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들 관계에서는 순서의 차서가 없으며 그 비중에서 높낮음도 있을 수 없다. 또한 그 직분이 끝나면 그 역시 본래 그랬던 것처럼 성도의 한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참된 우위
 
목회자와 장로는 분명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온전히 하기 위한 각각의 지체이고 각각의 기능을 가진 고유 직분이다.
모두가 소중하다. 그러므로 주의 몸된 교회의 모든 직분자는 서로를 섬기며 피차 복종하며(엡 5:21) 세워주는 성숙한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낮아질수록 존귀했던 주님처럼, 목회자나 장로의 참된 ‘권위’도 겸손에서 비롯된다.


사실 목회자나 장로에게 있어서 설교나 행정, 혹은 능력이나 인간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를 닮은 겸손한 삶이다. 그 겸손의 원형은 성육신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이 곧 겸손이요, 낮은 데로 내려오는 것이 겸손이다.


겸손이란 힘 있는 자가 그 힘을 포기하는 것이며, 능력이 있는 자가 그 능력을 감추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됨을 포기하고 종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사람과 같이 되셨다

 

 

 
 
 

 

 

자기 자리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두 친구가 뉴저지 주 칼드웰 거리를 걷다가 교회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우리 이 교회에 가서 주일 예배를 드리자." 그러나 다른 친구는 오늘은 휴일이라 친구들과 한잔하기로 했다며 친구의 요청을 거절하고 가버렸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때 교회로 향했던 클리브랜드라는 친구는 미국의 22, 24대 대통령이 되어 깨끗한 정치가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술집으로 향한 청년은 변호사가 되었지만 뇌물 등 여러 범죄에 관련되어 형무소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각자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만일 한 집의 가장이 다른 집에 가서 살고 있거나, 말단 직원이 사장의 직무를 보고 있다면 그 사회는 아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주일에 휴양지나 다른 곳에 가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 자기 자리를 바로 찾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눅2:49)

 

 

 
 
 

 

 

맡은 직무를 다합시다
 
디모데후서 4장 5절 말씀에는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했다.
우리는 교회에서 여러 가지 직무를 맡고 있다. 성가대는 성가대의 직무가 있고, 교사는 교사의 직무가 있고, 기관의 임원은 임원대로의 직무가 있다.



 집사는 집사대로, 권사는 권사대로, 장로는 장로대로, 목사는 목사대로의 직무가 있는 것이다. 각자의 달란트나 은사에 따라서 맡겨지는 직무로 하나님은 자기의 직무를 ‘엄하게 명하노니’ 잘 감당하라고 권고하신다.

유다서 1장 6절 말씀에는 ‘천사들이라도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끝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고 하셨다. 은혜를 많이 받고 믿음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맡은 직무를 다하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열매없는 인생이다.


예수님께서는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며 저주하신 것을 보게 된다. 자기의 직무를 잘 감당할 때 주님이 기뻐하신다.

바울은 열심히 주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고백하기를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했다.



성경은 ‘직무를 감당하지 못한 자는 마치 암초와 같은 존재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없는 가을 나무와 같다’고 했다.

교회에서 한 주간이 지나면 매주 마다 보고서가 올라온다. 주일학교에서부터 각 기관까지 구역은 구역대로 다 보고서가 올라오는데 아주 세밀한 것까지도 다 기록이 되어 있어서 모든 사정들을 잘 알수 있다. 이같이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한 모든 일들이 주님 앞에 낱낱이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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