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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철학 예화모음 19편

by 【고동엽】 2023.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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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유태인들이 6백 만 명이나 학살당할 때, 그 일을 치르는데 가장 장애가 되었던 것은 독일군의 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독일군의 양심을 편케 하기 위해 고도의 심리전을 전개했습니다. 그것은 유태인을 짐승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짐승은 사람보다 죽이기가 훨씬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부러 유태인들이 수용된 곳에 화장실을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형식을 위해 3만 2천명이 수용된 곳에 1개의 화장실을 지어 놓았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면 수용소는 밖에서 문이 닫힙니다. 하루 두 번 화장실 가는 게 허용되던 그들은 늘 배변의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식기와 깡통에 배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수용소는 온통 배설물로 더러워 졌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신들은 인간보다는 동물에 더 가까운 것 같았습니다. 스스로 존엄을 잃어버린 생명을 독일군들이 우습게 아는 것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손쉬운 살인이 자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많은 유태인들이 죽어 갔습니다. 이런 포로 수용소에서 살아난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기적을 일으킨 사람들을 우리는 압니다.


그들은 훗날 자신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반 컵의 물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수용소에서는 매일 4시 반이면 커피 한잔을 배급했다고 합니다. 말이 커피지 악취가 나는 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커피는 따뜻하다는 것이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반 컵만 마시고 나머지 반 컵으로 세수를 했습니다. 옷을 찢어서 적신 다음 이를 닦고 그것을 다시 빨아서 얼굴을 씻고 온 몸을 씻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그것은 독일에 대한 매우 효과적인 레지스탕스였다"라고 말합니다.


독일인은 유태인을 짐승으로 전락시키려고 했습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때, "나는 인간이다"라고 말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반 컵의 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죽어도 짐승이 아니라 인간으로 죽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선언하는 것이 생명의 기초입니다. 그것 없이 사는 인생은 살아도 죽은 인생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자신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오늘 반 컵의 물 잔을 들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만이 죽어도 성공하는 인생을 삽니다. 

 

 

 
 
 

 

 

가치의 재발견
 
그림을 그리다말고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곤 하던 화가가 있었습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까닭이었지요.
쓰레기통에 내팽개쳐진 그림은


‘보고 싶지 않은 자신의 인생’이었으며‘버림받은 미운 오리새끼’였습니다.
그런 날이면 화가는 자신이 미워 화실 구석에 앉아 오랜 시간 비탄과 실의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외면당한 인생, 미운 오리새끼를 모든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최상의 백조’로 변화시킨 공로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였지요.


그녀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그‘미완성의 꿈’을 치우지 않고 정성스럽게 펴서 말없이 이젤 위에 놓아두곤 했습니다.
그러면 화가는 한참 그 그림을 주시하다가 잃어버린 꿈을 되찾고 다시 붓을 들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완성시킨 작품이‘전원풍경’,‘목욕하는 여인’등입니다.


화가의 이름은 폴 세잔느. 하마터면 역사의 뒷전에서 유실될 뻔한 작품이 사려깊은 아내의 말없는 격려와 사랑으로 지금까지
모든 이들의 가슴에 불후의 명작으로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행복은 가치의 재발견에 있습니다. 잃어버린 꿈을 다시 찾고 소중하게 가꾸는 사람에게 기회는 ‘최상의 백조’가 됩니다. 

 

 
 
 

 

 

 

예수의 실용 가치
 
예수의 신앙의 실용적 가치를 연구한 문헌들이 나오고 있다. 의학적 측면에서 같은 조건 하의 환자들이 신앙을 가졌을 때 치료 효과가 현저하게 빠르다든지, 신앙인이 심인성 질병에 걸리는 율이 낮다든지, 심리학적 측면에서 조사한 것에 의하면 고통과 불행 극복 능력이라든지, 신념과 의지가 절망해 버린 극한 상황에서 오히려 찬송을 부르며 죽음과 절망의 무덤에서 부활의 기적을 꽃피운 신앙 승리의 간증담 등은 신앙이 삶의 실용 에너지임을 도처에서 증언해 주는 것이다.

내 미국 친구가 성적이 좋아지는 비결을 통계적으로 조사해서 책을 썼는데 신앙이 노력의 활력소가 되고 지능 계발에 묘약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예수는 불행한 환경을 승화시키고 야만 민족을 문화 민족으로 변화시키며 좋은 민주 정치를 하게 하고 좋은 교육, 정직하고 부지런한 사람 되게 하고, 미움을 사랑으로, 혼란을 질서로 변화시키는 생명 효소로 쓸 수 있다. 예수 신앙을 국력으로 에너지화 하면 무한 동력이 나올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가을
 
마르크스는 독일 사람이고 그 사상과 방법도 독일에서 나왔는데 헤겔 철학을 뒤집은 것이며 기독교의 도적맞은 페이지이다(토인비).
마르크스와 도스토예프스키는 동시대 사람이며 다 같이 헤겔의 영향과 접촉을 받은 사람들이다.
전자가 [가난한 사람들]을 썼는데 노예 상태의 인간들을 그렸다. 마르크스는 세 가지를 주장했다.
즉 ①역사는 경제가 지배하는데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반드시 공산 혁명이 승리한다.
②공산 사회는 지상 천국이므로 정치 통제가 불필요하며 국가나 민족은 쇠망한다.
③인민의 아편인 종교는 공산 천국에서는 없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의 예언은 다 틀려졌다.
최대의 공업 국가들이 하나도 공산 혁명 안 됐고 지상 천국 대신 생지옥화되고 있어 도스토예프스키의 예언대로 역사는 대신 관계가 기본이며, 하나님을 버린 민족은 미친 귀신같은 전체주의가 지배하게 됨을 입증하고 있으며 예수 신앙은 전례 없이 부흥하고 있다. 

 

 

 
 
 

 

 

자기 만의 길을 가라
 
우리에게 이미 <헝거리 정신>으로 잘 알려진 영국 경제학자 찰스 핸디는 최근 그의 책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에서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 29명을 분석하고 그 결론으로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것은 일등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남을 따라하지 말라. 남과 비교하지 말라. 자신을 믿고,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 아무도 가지 않은 자기만의 길을 가라"

'자기다움'에 대한 인식의 문제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창조 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설계되지 않은 집은 지을 수도 없습니다. 자신이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도 없이 되어지는 인생은 아무리 잘 살아도 사실 자신의 인생이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비둘기가 독수리를 왜 부러워하겠는가?
 
스펄젼은 말하길 "콩을 먹고 사는 비둘기가 고기를 먹는 독수리를 부러워하는 일이 없고 푸른 초장에서 풀을 뜯는 양떼가 짐승을 잡아먹는 사자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먹는 양식이 다르고 사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매인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그때부터 세상사람들과 먹는 양식이 달라지고 사는 세계가 달라집니다. 저들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행복의 시작입니다.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19세기 미국 역사에 그 이름이 빛나는 외교관 찰스 아담스(Charles Francis Adams,1807-1886)는 매일 매일 일기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떤 날 일기장에다가 다음과 같이 기록을 했습니다.
"오늘은 아들과 함께 낚시를 다녀왔다.하루를 낭비해 버리고 말았다!"
그의 아들은 나중에 미국의 유명한 역사가가 된 부르크 아담스(Brook Adams,1848-1927)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도 어려서부터 일기를 기록한 사람이었는데 아직도 남아있는 그의 일기장에는 똑같은 날짜에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아빠와 함께 낚시를 다녀왔다. 나의 일생에 가장 기쁜 날이었다!"
똑같은 날짜의 아버지와 아들의 일기가 여러분에게 큰 깨달음을 주어서 가정생활과 행복의 가치관에 새로운 각성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마르크스주의자의 전향
 
공산주의자였다가 전향한 부덴츠(Louis Francis Budenz)가 회고록에서 밝힌 전향 이유다.
"나로 하여금 지칠 줄 모르게 정열적으로 그리고 계속 비판적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마술 같은 하나의 원인은 무엇일까?
거기에는 저 위대한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가 설득력 있게 기록했던 불신앙이라는 최면술이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내게 하나의 '철학'을 제공해 주었다.


또 그것은 왜 내가 그러한 과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는가를 설명해 줄 수 있는 하나의 척도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그런 과정들이 결국은 소련 외교정책의 선택과정이었다는 사실이 하나씩 밝혀지는 순간, 나는 1940년의 나의 전향이 정당하였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는 논거를 다시금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공산주의자가 된 이유
 
공산주의자 챔버의 증언이다.
"나의 막역한 친구 중 하나가 내게 이렇게 묻곤 했다.
'어떻게 자네 같은 사람이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었는가?'
그 때마다 나는 한 사람이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은 그가 공산주의에 매료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시대가 겪고 있는 역사의 위기에 의하여 그 자신이 깊은 절망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이 힘들었기에 머뭇거렸다." 
 

 

 

 
 
 

 

 

공산주의 사고
 
헝가리 부다페스트 전차운전사들이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면 아마 미국인들은 웃고 말거나 비탄에 잠겨야 할지도 모른다.
"전차가 움직이고 있는 중에는 하차하지 말라.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건강하고 능력 있는 노동자들 위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돌발적인 전차사고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면, 다른 이들에게 불편을 끼칠 것이다."


또한 버마의 어느 공산주의자가 상대방에게 구혼할 때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저는 충성적이며 열정적인 당원으로서의 당신의 당성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당신과 함께 당을 위해 헌신하며 투쟁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한다는 것을 듣고 재미있어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고백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심각한 것이고 종교적인 경우도 많다. 

 

 

 
 
 

 

 

공산주의 붕괴 예고
 
에릭 호퍼가 <참 신앙인>(The True Believer)에서 한 말이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가 점점 실행될 수 없게 되고 지도자들이 어쩔 수없이 타협하게 되고 원래의 신조를 바꾸어 갈 수밖에 없어질수록, 불신자들의 세계를 향한 그들의 공략은 점점 더 뻔뻔스럽고 오만해져 갈 것이다.
남부의 노예 소유자들이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유포시키는데 점점 더 호전적일수록, 근대 세계 속에서의 그들의 위치는 점점 더 지탱하기 힘들어져 갔다.


만약 자유기업이 공산주의자들의 신성한 대의(大義)를 변질시키게 된다면, 이는 자유기업의 실행 가능성과 장점들이 그간 공산주의 사회에서 금지되어 왔음이 분명하다는 신호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과 소망
 
스토아 학파의 철인 황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는 "만일 자기의 일이 걱정이 되면, 헛된 희망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구제해야 한다"([성찰록] 중에서)고 지적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E. 브로포도 높은 희망을 지향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샤를르 순례는, 오늘날에는 곧 레코드가 되어 1972년의 소망을 주제로 한 순례의 레코드의 자켓에 "우리들의 소망은 미약하나 확실하다"라는 글이 쓰여져 있다.


이는 소망에 의거해 있으므로 확실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보여도(행 23:6) 우리는 자기가 지금 갖고 있는 소망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 있는가, 혹은 하나님의 말씀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헛된 소망 때문에 악착같이 애쓰는 경우는 없는가?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지향하고 전 우주도 포함하는 웅대한 것이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1-39)"고 우리의 소망의 대상과의 일치를 강력히 고백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잊어버려 이런 일이
 
반세기도 더 전에 어렸을 때 듣던 말이 기억납니다. 많은 노인들은 러시아에 닥친 대재난들을 이렇게 풀이하곤 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잊어버려 이런 일이 터진 것이다"
그 이후 러시아 혁명사연구에 족히 50년을 바치면서 수없이 많은 책을 읽고 개인 증언도 무수히 모으고 혁명이 남긴 파편을 추스려 보려 나름대로 쓴 책도 8권이 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국민을 육백만이나 삼켜 버린 몰락 혁명의 근본 원인을 한 마디로 말해 보라 한다면 이 말을 반복하는 것보다 더 정확한 표현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잊어버려 이런 일이 터진 것입니다" 

 

 

 
 
 

 

 

빈대철학
 
현대 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이 청년 시절, 인천 부두에서 막노동을 할 때의 일이다. 당시 그는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방을 얻지 않고 노동자 합숙소에서 잠을 잤다. 합숙소의 낡은 벽 틈에는 빈대가 들끓었는데, 고된 노동으로 몹시 피곤했던 그는 빈대가 계속 무는 바람에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밤새도록 잡고 또 잡는 전쟁을 치뤘지만 그 많은 빈대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그는 합숙소 한쪽에 밀쳐 놓은 길다란 상을 가져와 신문지를 깐 뒤 그위에 올라가 잠을 잤다. 하지만 빈대들은 상다리를 타고 올라와 그를 괴롭혔다. 그때 그의 머리에 기발한 생각이 한가지 떠올랐다.


그는 얼른 수돗가에 가서 대야 네 개를 가져와 상다리에 하나씩 받치고 거기에 물을 부어 두었다. 아무리 악착같은 빈대라 해도 대야를 타고 오르다가 물에 빠져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안심이다.물에 빠져 죽으려거든 기어올라라." 그는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다시 빈대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빈대들이 어떻게 탁자위로 올라왔을까?'


불을 켜고 자세히 살펴보니 빈대들은 아예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가 그를 향해 공중낙하를 시도한 것이었다. 그순간 그는 무릎을 탁 쳤다.


"빈대도 저렇게 전심전력으로 연구하고 필사적으로 노력해 제 뜻을 이루려고 하는구나. 하물며 인간인 내가 빈대만도 못한 인간이 될 수는 없다. 나도 열심히 노력해서 내 꿈을 꼭 이루고 말리라." 그날 빈대에게서 얻은 교훈은 그 뒤 그가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때마다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어떤 관점에서 사물을 보십니까
 
크리스천 삶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삶의 기준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예수님의 사고방식, 예수님의 생활 양식, 예수님의 태도, 예수님의 관점, 예수님의 사상, 예수님의 철학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모든 사물을 판단하고 해석하며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때아닌 보수와 진보 논쟁으로 사회 전체가 흉악해졌습니다. 복음의 관점이 아닌 이념의 관점에서 세상을 해석하다 보니 자기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극단적인 핻동을 하게 됩니다. 요즘 우리 정치의 난맥상과 몰염치도 대권 장악이라는 이념 때문입니다. 누가 대권을 잡느냐 못 잡느냐가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정의가 사라지고 양극화 현상과 극도의 혼돈이 발생합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사물을 돈의 관점으로 판단합니다. 이익이 생기면 일하고 이익이 없으면 일을 안 합니다. 옳고 그른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수험생들은 모든 가치관이 다 진학에 쏠려 있습니다. 결혼 적령기에 있는 사람은 결혼의 관점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인생을 성공이라는 관점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쾌락이라는 관점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관점이나 기준을 갖느냐에 따라 모든 해석이 달라집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관점에서 사물을 보십니까? 어떤 관점에서 가정과 자녀 교육, 직업, 미래를 생각합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말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고 행동하며 결정하는 크리스천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신 장점에 확신을 가져라
 
몇년전 방콕에서 데일 카네기 아시아 퍼시픽세미나를 할 때다. 하루는 대만 스폰서인 존 헤이 사장이 나를 보며 “최염순 소장 당신은 정말로 창의력이 있는 사람이다.어떻게 다이어리를 이렇게 멋지게 만들었느냐.

내가 10년동안 카네기 일을 했지만 당신은 내가 그동안 만난 사람중에서 가장 창의적인 사람”이라면서 우리가 만든 석세스 다이어리의 창의성에 대해서 극구 칭찬하는 것이 아닌가. 그후로 나의 창의성에 대해서 나는 더 확신과 자신감을 갖고 일하고 있다. 그러다보니까 모든 일을 할 때도 더욱 더 창의성을 발휘해서 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느낀다.


나는 누구인가.


곰곰이 생각을 해보라. 내가 가진 장점은,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는. 그리고 속으로 외쳐보라. “나는 열정적인 사람이다. 나는 열정적인 사람이다”“나는 성실한 사람이다. 나는 성실한 사람이다” 등등.우리는 우리의 가치관에 따라서 행동을 하게 된다.‘나는 성실하다’고 외치면서 성실을 가치관으로 가진 사람은 약속을 하면 틀림없이 지킨다. 왜냐하면 성실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치관은 우리 자신의 뿌리다. 뿌리가 튼튼하면 나무가 잘 자라듯이 ‘나는 누구이다’라는 가치관이 분명한 사람은 그러한 가치관에 따라 일관성 있는 행동을 하게 된다. 일관된 행동을 통해서 신뢰를 얻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관에 따라서 중요한 것을 남기고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다. 

 

 

 

 
 
 

 

 

성공자의 철학
 
미국 템플대학 창시자 러셀 코웰 박사가 2차대전 후 미국에서 백만장자로 성공한 4043명을 조사한 결과 아주 흥미로운 공통점 두 가지를 발견했다.

하나는 그 많은 성공자들 가운데 고졸 이상의 학력자는 69명뿐이고 나머지는 거의 공부를 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사람이 성공하는데 학벌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또 두번째 공통점은 그 성공자들에게는 세 가지 분명한 철학이 있었다는 것이다.


첫째는 목적이 아주 분명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목적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으며 셋째는 자신의 무능과 무식을 통감하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점이다.


이 세 가지 공통점은 어느 시대나 불변하는 성공의 조건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 철학은 간데 없고 요행과 일확천금의 꿈만 난무한다. 그러기에 성공자는 적고 실패자만 늘어난다.

 

 

 
 
 

 

 

올바른 가치관
 
오늘날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가치관이 전도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올바른 가치관이 정립되려면 ① 무엇을 하느냐 보다 무엇이 되느냐가 더 중요함을 알아야겠습니다. 좋은 나무가 먼저 되면 좋은 열매는 자연히 따라오게됩니다. Doing보다 Being이 먼저요 더중요합니다. ②얼마나 소유했느냐 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쓰는 법을 바로 알지 못하면 소유가 클수록 더 불행함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소유했느냐를 계산하지 않고 썼느냐를 계산하십니다. ③섬김을 받느것 보다 섬기는 생활이 더 값진 것입니다. 칼빈은 "왕 이라도 섬김이 없이는 참으로 의롭게 다스릴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려 왔고 생명까지 주려고 세상에 왔다고 했습니다 (막10:45). ④육신보다 영혼이 잘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육신은 잠깐이요 영혼은 영원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이게 뭐예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란 20세기 후반부에 본격적으로 나타난 "탈근대주의" 혹은 "후기근대주의"라고 불리는 주요한 철학적 사조(思潮)중의 하나입니다. 말이 철학적 사조이지 사실은 우리의 생활 전반에 속속들이 스며들어서 우리의 사상과 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사고체계입니다. 처음에는 서구에서 문학과 미술 등의 분야에서 나타났지만 지금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관찰 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체계는 앞으로도 30-40년은 너끈히 온 세상에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입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복잡하게 보려면 한도 끝도 없지만 여기서는 특히 십대들에게 적용하여 기성질서와 대립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들을 살펴 보면서 복음의 문화적 변혁에 접촉점을 찾아 볼까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한 특성 중 첫째로는 서로의 '관계성(relationship)' 보다는 '나 자신'에게 삶의 안정감을 두고 집중을 더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공동체 안에서의 "서로"의 관계성에 기초를 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관점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에게 유익한 것인가는 두 번째 문제이고 내 자신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가를 포스트모더니즘 세대들은 항상 염두에 둡니다. 그래서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거나 유익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쉽게 나서지를 않습니다. 반면에 자기자신이 절대적 가치를 체험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고생을 하는 것일지라도, 어려움과 부담이 느껴지는 것일지라도 자신의 인생을 거는 세대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세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복음적 인생을 살아가는 관점에서 볼 때 전 세대(世代)보다 훨씬 더 많은 헌신도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일단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인생을 맡길 수 있는 절대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그들은 그리스도적 삶에 대해서 물, 불을 가리지 않는 특질이 있습니다. 이것 저것 앞뒤보고 잔머리 굴려가며 인생을 재어보는 것이 아니라 '좋으니까 그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헌신도를 가지고 행하는 사역은 지금과 같이 주위환경으로 인해 믿음이 식어진 이 세대에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련회나 모임에서 레크레이션 좋아한다고 그런 위주의 프로그램 일색으로 짜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원복음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시간들을 갖는 것이 절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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