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승리하며 사는 법
2002-05-14 16:40:52 read : 1867
암 5:4-8,20020428 // 2002-05-04
< 사람의 가장 큰 비극은 무엇일까요? >
여러분들은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생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데 실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외면할 때 우리는 항상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우리가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은 영적 자살 행위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밤에 찬란히 빛나는 네온사인의 불빛과도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발견되기를 원하는 네온사인의 불빛처럼
하나님도 우리에게 위대하신 주님으로 발견되기를 간절히 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어디 계셔요?"라고 간절히 찾으면,
하나님은 바로 우리 앞에 나타나셔서 "여기 있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을 찾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혼돈과 근심이 사방에서 밀려드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을 위해 만든 것이 오히려 사람을 위협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1986년 소련에서 분리된 벨라루스에서 있었던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폭발력은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떨어뜨린 원자폭탄의 200배가 넘는 위력을 가졌습니다.
그 피해액은 2350억 달러로, 벨라루스 국가 전체 예산의 32배였다고 합니다.
그런 핵 누출 사고가 비록 소량이지만 우리 나라 월성에서도 있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만든 핵발전소가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흉기가 된 것입니다.
이런 혼란한 시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편한 마음으로 잘 살 수 있을까요?
지금 사람들이 많은 대비를 하지만 사실상 피할 곳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5-6절 말씀을 보십시오.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사람의 방법을 찾지 말고, 나를 앞세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찾으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모든 성공과 실패는 사람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결정됩니다.
사람의 수고와 노력으로도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인생의 성공을 좌우하는 큰일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도와주셔야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땀을 흘리며 김을 메고 논밭을 가꾸어도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가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성공과 가정의 성공은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아야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보다 우리 자신을 앞세우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좋은 생각을 가지고, 좋은 뜻을 품어도 내가 앞서면 그것은 허무한 것이 됩니다.
< 내가 하지 말고 주님이 하게 하십시오 >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은(childlike)'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어른 아이와 같은 유치한(childish)' 존재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두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어린아이가 신체적으로 쑥쑥 자라는 것처럼 영적으로 성장하라는 말이고,
또 하나는 어린아이가 부모를 전적으로 의지하듯이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어떤 분은 가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주님을 위해 선한 일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은 바람직한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님! 부족한 저를 통해서도 세상을 위해 선한 일을 하도록 저를 도와주세요."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떨리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저도 우리 교회에서 말씀 사역을 할 때 무거운 책임감 때문에 항상 떨립니다.
저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런 측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저는 말씀을 전하기 전에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강단에서 그렇게 떨리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자기를 높이는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의 승리의 원천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꿈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생명과 우리 가정을 지켜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룻기에서 흉년 때문에 모압으로 이민을 간 엘리멜렉 가정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남자 세 명은 모두 죽고 나오미와 모압 여인 두 며느리 등 여자 셋만 남게 됩니다.
그것은 어떤 교훈을 줍니까?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교훈은 성경 66권 전체가 모두 가르치는 교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시대가 어렵고, 가정이 어려우면 모압 땅이 더 좋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하나님이 있으라고 한 자리를 지켜야 좋은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다 잃고, 잠시 얻는 것 같아도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삶이 아주 어려운 때에는 믿는 사람들에게조차 거친 질문이 나옵니다.
"하나님! 세상이 공정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어디에 계신가요?"
이해는 되지만 이제는 '우리의 질문'보다 '하나님의 약속'에 초점을 맞추며 사십시오.
성경에는 '승리와 기쁨의 이야기'도 많지만 '패배와 고통의 이야기'도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반드시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이라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있어도 더 하나님을 찾고 더 믿음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피할 곳은 모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피해야 되고, 하나님을 찾아야 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끝까지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번에 미국에 갔을 때 한 가지 느낀 것은 행복은 이민에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은 돈 때문에 이민을 갑니다. 그 이민은 실패합니다. 돈을 벌어도 실패입니다.
원래 미국의 조상들은 돈 벌려고 이민가지 않았습니다. 잘 믿어보려고 이민 갔습니다.
그처럼 잘 믿으려고 이민 가면 몰라도 돈 많이 벌려고 이민 가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사실 이 땅에서도 기도하며 땀을 흘리면 남부럽지 않게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습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날이 오면 반드시 축복의 역사가 펼쳐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교회를 떠나면 어디로 가도 잘 사는 길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서 아모스는 하나님을 찾아야 사는 길이 열린다고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떠나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열릴 길도 막힙니다.
사람의 역사는 하나님을 떠나면 반드시 망한다는 것으로 결론지어지는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조금 어렵다고 해서 눈앞의 것만 보고 모압(세상) 땅으로 가면 안됩니다.
우리가 교회를 잘 다녀도 흉년이 오고, 가난이 오고, 실패가 오고, 어려움도 오지만
그 자리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위로의 때를 기다리면, 그 때는 반드시 옵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죽음의 수용서 벽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태양이 빛나지 않아도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제가 외로워도 사랑이 존재함을 믿고, 당신이 침묵해도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이 침묵하셔도 하나님을 굳게 믿으십시오.
믿음으로 기다리면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의 때는 반드시 오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엄청난 절망마저 희망으로 바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사십시오 >
때로 어떤 분들은 우리가 완벽해야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실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벽함을 원하시지 않고 '말씀에 열린 귀'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 듣기를 힘쓰면,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힘써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자녀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녀를 원하십니다.
들을 귀가 있는 곳에는 말씀도 살아있고, 들을 귀가 없는 곳에는 말씀도 없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잘될 때는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잘못될 때는 아주 차이가 크게 납니다.
일이 잘못되고, 환난 시험 당할 때 믿는 사람에게는 말씀이 다시 살아 역사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안전터로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품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의 품을 떠나고 말씀의 자리를 떠나 세상에 가서 무슨 성공을 하겠습니까?
이 세상의 성공은 잠깐입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도 오래 머무를 자리는 없습니다.
장관 자리가 아무리 좋아 보여도 길어야 3년이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이 세상의 어느 분야의 영광도 잠깐이고, 어떤 인기 있는 자리도 잠깐일 뿐입니다.
오래도록 이어지는 축복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축복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 모압(세상)으로 가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들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 영혼이 살게 됩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축복은 말씀을 잘 듣는 축복입니다. 그래야 제 길을 찾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은 '눈으로 보고 가는 곳'이 아니라 '귀로 듣고 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소리가 많습니까? 그래서 진짜 소리를 잘 듣지 못합니다.
옛날에는 소리들이 적었지만 지금은 소리들이 참 많습니다. 채널도 수십 개입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무엇입니까? 생명을 구원하는 소리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의 지식이 엄청나게 많아졌지만 우리가 들을 좋은 소리가 별로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좋은 소리를 듣지만, 그 소리를 듣고 실천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사람들이 저마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말은 많이 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변화시키겠다고 하는 태도는 거의 없습니다. 그것이 큰 문제입니다.
< 좋은 소식을 듣는 것이 축복입니다 >
오늘날 사람들의 가장 큰 불행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소리는 지루하게 느끼고, 세상 소리에는 귀를 번쩍 뜨는 것이 불행입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기 불만과 한을 쏟는 대상을 찾는 경향이 있는데,
요새는 정치인들이 그 좋은 대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모이면 정치 얘기뿐입니다.
이상하게 정치인들 욕하는 소리는 아무리 많이 들어도 지루하게 듣지 않습니다.
마치 "정치인이 없으면 이 세상 재미없어 어떻게 살까!" 하는 모습처럼 느껴집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는 물이 간 생선처럼 눈에 초점이 없어지다가
증권 얘기, 아파트 얘기, 정치 얘기만 나오면 눈빛이 살아나니 이 무슨 조화입니까?
우리는 무엇보다 말씀 듣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축복은 말씀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이 살고, 가정이 살고, 나라가 사는 길은 복된 말씀을 듣는 데에 있습니다.
원래 터키 땅은 영적으로 축복을 많이 받은 땅이었습니다.
성경 신구약에서 중심지 역할을 한 곳으로, 예루살렘 못지 않은 성지가 터키입니다.
초대 교회 부흥의 중심지로서 수많은 초대교회들이 터키 안에 있었고,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했던 안디옥 교회도 터키에 있었습니다.
그처럼 은혜가 넘치는 땅이요 초대교회 당시 가장 부흥하던 땅이 바로 터키였지만
그 복된 땅을 회교도가 점령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땅에 더 들리지 않으면서
지금은 과거의 영화를 거의 잃고, 가난과 지진만 연상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문화재도 엄청나게 많았지만 좋은 소식이 사라지니까 축복도 사라져버렸습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세계에서 제일 문화적으로 자랑거리가 많은 나라가 어느 나라입니까?
옛 문명국이었던 이집트, 그리스, 터키, 인도, 중국 등에 문화재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옛날의 문명국이 지금은 세계에서 어떤 위치에 처해 있습니까?
좋은 문화재를 산더미같이 가지고 있으면서 지금은 얼마나 어렵게 삽니까?
< 내 주장을 접고 하나님 말씀을 들으십시오 >
우리는 이 역사가 말해주는 교훈을 알고 우리 삶의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어떤 교훈입니까? 믿는 인생, 믿는 나라가 진정 복 받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추구하고 진리의 말씀 듣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의견부터 내세우려고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빳빳하게 서서 따지듯 말합니다.
그런 모습은 마치 하나님이 채무자요, 우리는 채권자인 것처럼 비추어집니다.
"하나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다 설명해보세요"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말씀은 거부하고 자기 의견을 진리요 우상으로 삼겠다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우리가 순종하고 우리의 찬양 받아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문둥병에 걸린 나아만 장군이 먼 길을 따라 고생하며 엘리사를 찾아왔지만
엘리사는 그를 만나주지도 않고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목욕하라"는 말만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이따위 소리를 들으려고 이곳까지 왔느냐"고 혈기를 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 앞에서 논리적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말합니다.
"잘 믿으면 복 받습니다"고 하면 어떤 분은 "기독교가 기복주의냐?"고 따집니다.
"기도하면 된다"고 하면 "기도가 밥 먹여주냐! 땀이 필요하지!"라고 받아칩니다.
언뜻 생각하면 그렇게 논리적으로 잘 받아쳐야 잘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자세히 보면 하나님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분이 잘 삽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3분의 1이나 잠을 자야 살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람이 잠 없이도 살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실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잠이 필요한 존재로 만드신 이유는
우리가 아무 힘도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임을 가르치기 위한 뜻이 아닐까요?
잠은 우리를 아주 겸손하게 만듭니다.
사실상 잠을 잘 때만큼 우리가 겸손해지고 약해지는 때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약함 속에서 강해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 말씀을 받을 때 우리는 진정 복된 존재가 됩니다.
그처럼 엘리사의 말에 화가 나서 돌아가려고 하는데 나아만의 종들이 말합니다.
"장군님, 큰 일을 시킨 것도 아니고 그냥 목욕하라는데 말씀대로 해보십시오."
그 소리를 듣고 말씀대로 실천하니까 나아만의 몸이 아주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승리하며 사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따라가면 아무리 바닥에 있는 인생도 반드시 축복된 길이 열릴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가 복된 존재가 되도록 하나님 말씀에 "예!" 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어떻게 될지 우리는 잘 모르지만,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 말씀에 "예!" 함으로서 주님이 우리 인생의 가장 위대한
'삶의 파트너'가 되어주시고, 또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를 힘써보십시오.
'말씀을 아는 것'과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마귀도 말씀을 아는 것까지는 잘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말씀에 순종을 안합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의 중요성을 잘 말해줍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여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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