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20001206 삼일밤 예배
2001-12-08 17:56:39 read : 422
누가복음 18장 9-14절
사람은 살다보면 반드시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완전히 해결할 수 있습니까?
오직 두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죽어서 문제가 없는 곳으로 가는 길입니다.
또 하나는 살아서 문제를 극복하며 사는 길입니다.
당연히 문제를 극복하며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혼자 극복할 수 있는 문제는 노력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해야 합니다.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과 함께 협력하며 극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주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지렛대 역할을 합니다.
중요한 순간에, 혹은 문제가 생겼을 때 조용히 무릎을 꿇고 백지장 같은 마음을 가지고
무턱대고 "달라!"고 하지 마시고 먼저 하나님의 뜻을 갈구해 보십시오.
우리가 기도할 때 먼저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드리기를 힘쓰고,
또한 기도하는 방법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방법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의 잘못된 방법대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서
올바른 기도와 올바르지 못한 기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기도가 올바른 기도이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기도가 될까요?
1. 겸손한 기도여야 합니다.
본문에서 바리새인은 어떻게 기도합니까? 11절과 12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이 기도를 보면 겸손하지 못한 기도의 특성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어떻게 이 짧은 문장 속에서
겸손하지 못한 기도의 특징이 다 들어가 있는지 정말 신기한 따름입니다.
1) 서서 기도합니다. 잘 보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2) 따로 기도합니다. 특별하게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3) '나는'이 지나치게 강조된 느낌을 받습니다. 자기 만족에 젖어 있습니다.
4)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5) 자기의 신앙행위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내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기도를 받으실까요?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어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리의 기도를 받으십니다. 왜냐하면 겸손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세리가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하면 어떨까요?
"하나님! 저 바리새인 보세요. 자기가 잘난 줄 알고 따로 서서 기도하죠.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자기가 제일인 줄 아네요. 저것 좀 보세요."
이런 기도도 응답되지 못할 것입니다. 역시 겸손하지 못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두 종류의 교만을 보게 됩니다.
1) 하나는 바리새적인 교만입니다. 자기가 제일인 줄 아는 무서운 죄입니다.
2) 그런데 세리적 교만도 있습니다. 남의 성취를 아니꼽게 보는 태도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리는 그렇지 않지만, 오늘날 의외로 세리적 교만이 많습니다.
그래서 남의 성취를 배 아프게 생각하고 흠집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도자기를 만들 때 만드는 자가 얼마나 정성을 기울여 만드는지 모릅니다.
반면에 도자기를 부시는 데는 연구도 필요 없고 노력도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만들고 다듬는 노력을 하지 않고 부시면서 자기 의를 드러내려는 모습!
그런 세리적 교만의 모습이 오늘날 의외로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적 교만도 빠지지 말아야 하지만, 세리적 교만도 주의해야 합니다.
오히려 세리적 교만을 더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리세적 교만은 잘못 행동하면 교만이 금방 드러날 수 있지만,
왜냐하면 세리적 교만은 교만을 정의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두 종류의 교만이 가진 공통적인 특성은 무엇입니까?
남을 세워주는 따뜻한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남을 무너뜨리는 차가운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따뜻한 마음, 따뜻한 시선,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2. 진실한 기도여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바리새인의 기도를 받지 않습니까?
외적인 그럴듯한 형식은 있지만 진실한 기도를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기도가 진실한 기도입니까? 원리는 아주 단순합니다.
사람에게 보이기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진실한 기도입니다.
많은 목회자가 가끔 기도문제로 고민을 합니다.
대개 담임목회자는 일년에 사람 앞에서 약 1000번에서 1500번 기도를 합니다.
그렇게 몇 년 지나면 웬만한 성도는 목회자의 기도가 귀에 익어버립니다.
상투어가 나올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감동이 떨어집니다.
저도 그 문제로 고민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새롭게 기도할까를 고민했는데 그것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사람 앞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기도하면 됩니다.
그래도 변화를 주기 위해서 그날 전하는 말씀을 따라 보통 기도하는 편입니다.
우리는 항상 "오직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내 기도가 어떻게 들려질까?"를 너무 의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에 어떤 분은 사람을 너무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기도를 잘했나?"는 지나치게 신경을 쓰지 않아야 되지만
"내 기도가 남에게 불안감, 혐오감, 불편함을 주지 않는가?"는 신경 써야 합니다.
며칠 전에 아는 목사님을 만나러 아침 6시 10분쯤에 근처 교회에 갔습니다.
그 교회가 새벽 5시 30분에 새벽기도회를 하기 때문에 막 말씀이 끝나고,
기도하는데 얼마나 조용하게 기도하는지 쥐 죽은 듯이 아주 고요합니다.
그 교회는 서울 강남에 있는 S교회의 부목사님이 개척한 교회였는데,
그 S교회의 K목사님은 새벽에 소리내어 기도하는 것을 질색하는 목사님입니다.
질색하는 이유는 "기도할 때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된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 취지는 이해하지만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면에 어떤 분들은 주위를 너무 의식하지 않고 자기 기도를 합니다.
그런 모습은 자칫 주변에 같이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방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원리를 알면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서서히 기도를 달굽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새벽기도회에 은사를 표현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은
대개 사람들이 기도가 다 끝나고 돌아갈 무렵 즈음에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러면 가끔 저에게 사람들이 묻습니다. "저분은 기도에 발동이 늦게 걸리나 보죠."
물론 기도에 발동이 늦게 걸릴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렇지 않습니다.
주변 상황을 의식하면서 은사를 표현하는 것을 절제하다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경험이 많은 분들은 뜨겁게 기도하면서도 주변을 살핍니다.
"혹시 연약한 자가 없나? 혹시 내 기도가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그런 식으로 사려 깊은 태도를 가지는 것을 발동이 늦게 걸린다고 생각합니다.
진실한 기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면서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에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살피는 기도가 되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어떤 교회에 뜨겁게 기도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니까 대부분의 교인들이 그분을 존경합니다.
그런데 존경을 하긴 하지만 식당에서 식사 기도를 할 때에는
대부분의 교인들이 그분이 기도하지 않았으면 하는 눈치입니다.
이 분은 식사기도를 할 때에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너무 한참 기도하고, 너무 열정적으로 기도하니까
오히려 사람들이 거북해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쳐다봅니다.
그렇다고 거짓된 기도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 진실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식사 기도는 음식물 및 교제에 대한 감사기도를 하고 끝내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식사기도할 때 밥상까지 치면서 기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마로 국그릇을 쳐서 밥상이 엉망이 된 적도 있었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지나치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가장 훌륭한 성도는 기도의 맛을 알고 열심히 기도하는 성도이긴 하지만
때로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릴 필요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첫째, 하나님은 중보기도를 기뻐하십니다.
중보기도란 남을 위해서 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왜 중보기도가 좋을까요? 그 기도는 이기심이 없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남을 위한 기도를 시간 낭비인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남을 위한 기도의 열매는 결국 나에게도 돌아옵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데
그 사람이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기도가 그대로 기도하는 사람에게 되돌아오게 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는 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받는 소중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그런 축복을 받기 위해서 중보기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 중보기도를 합니까? 그 사람과 그 공동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온전한 기도는 사랑의 또 다른 명칭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랑과 기도는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중보기도의 손길을 항상 펼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둘째, 하나님은 간절한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간구란 무엇입니까? 목적이 있고, 열심이 있는 기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같은 기도제목을 놓고 매일 같은 기도를 반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중언부언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어떤 기도제목을 놓고 열심히 간구하고 있었습니다.
그 간구가 얼마나 뜨거웠던지 같은 말이 자주 반복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기도를 듣던 어떤 분이 그 사람에게 충고해줍니다.
"하나님은 귀머거리가 아니고, 기억을 못하시는 분이 아니니까
그렇게 큰 소리내지 말고, 그렇게 중언부언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충고가 맞습니까?
같은 기도를 반복하고, 같은 말을 반복하면 중언부언하는 것입니까?
성경에 중언부언으로 기도하지 말라는 것은
공기만 파동시키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기도를 경고한 것이지
같은 기도를 계속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한 기도라면 천번 만번 같은 기도를 해도 중언부언이 아닙니다.
기도의 용사 다니엘이 어떻게 기도를 했습니까?
유다가 회복될 때까지 매일 하루에 세 번씩 똑같은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기도가 중언부언의 기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또한 앗시시에 살던 성 프랜시스는 자주 아베르노 산상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산상에서 기도할 때 그의 입술에서는 가끔 한마디가 흘러나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란 말이었습니다. 다른 말은 거의 안합니다.
그 한마디의 말을 가끔 반복하며 여러 시간을 보내곤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그의 기도가 중언부언의 기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진실한 간구가 담겨 있다면 어떤 기도도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간구하라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금식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릴 때 잘 응답해 주십니까?
진실한 금식기도는 육체와 생명을 생각지 않는 간절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3) 셋째, 하나님은 감사기도를 기뻐하십니다.
감사에는 자신의 믿음의 분량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큰 사람은 대개 믿음도 크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적은 사람은 대개 믿음도 적습니다.
왜 감사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빨리 응답해 주실까요?
감사기도는 바로 믿음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대부분 달라는 '자기 중심적 기도'이지만,
감사기도는 '하나님 중심적 기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한 아이가 부모님의 생일날 부모님께 정성스런 선물을 드렸습니다.
그때 부모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자식에게 더 주고 싶어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정성스럽게 감사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더욱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시편 50편 23절에 이런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가장 옳은 행위이기 때문에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열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복된 삶을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감사하는 눈입니다.
감사하는 눈으로 꽃을 보는 사람은 잡초를 보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받은 복을 세어 보는 사람에게는 불만의 리스트가 더 이상 기억나지 않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기쁨의 추억은 기억하지만 상처의 아픔은 잘 지워버립니다.
자세히 보면 감사하는 마음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결국 감사하는 마음은 온전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기적을 일으키는 신기한 도구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탄원기도도 해야 합니다.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달라고 하는 기도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탄원기도 이상으로 하나님께 중보기도와 감사기도를 드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 전에 먼저 우리의 기도하는 마음을 보십니다.
겸손한 기도, 진실한 기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통해서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 찾아가 승리의 깃발을 들고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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