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8.31 주일 설교(요한복음 강해 74)
끝난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믿음
요한복음 20장 19~23절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
지금 우리 교회에 성령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교인들이 성령의 바람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실제로 체험하고 있는 성도의 비율은 작습니다. 분명히 모여 기도할 때 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나타나고 있습니다만, 실제로 성령을 체험하고 성령의 바람을 느끼고 있는 성도들은 수적으로 보면 훨씬 작습니다. 그렇지 못한 분들이 훨씬 많습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더욱 힘들어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교인도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너무나 마음이 답답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다고 하는데 내겐 부흥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바로 그러한 교인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요즘에 영적으로 답답하고 메마르고 심지어 영적인 좌절에 빠진 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영적으로 소생하는 놀라운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답답하고 힘들다고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직전,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의 상태는 우리보다 훨씬 더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직접 목격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의 영적인 절망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좌절감 그리고 예수님을 버렸다고 하는 죄책감 때문에 마가 다락방에 있는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다락방 안에 숨었습니다.
아리마대요셉과 니고데모 때문에 예수님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했지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도가 되었겠습니까? 찬양이 되었겠습니까?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제자로 3년을 따라 다녔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 지 막연하고 후회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소망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숨죽이고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마음에는 슬픔만 가득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 직전,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끝난 것같이 느껴졌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직전의 상태가 바로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영적으로 답답하다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흥이 임하기 직전, 누구에게나 영적인 답답함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부흥이 눈 앞에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제자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들에게 그런 변화가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 마리아는 슬펐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갈 때만 해도 슬픔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알았을 때만 해도 너무나 두려웠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마리아는 감격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하러 달려가는 마리아의 얼굴은 환희 그 자체였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바뀔 수 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삶이 이렇게 바뀝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걸어 잠군 것은 단순히 문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문이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실패 때문에 죄책감 때문에 마음이 꽉 닫혔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1절)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 사명을 주셨습니다.
(2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기도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주의 사도로 쓰시다니! 예수님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도 하셨습니다. 제자로서의 위치를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23절)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죄 사함의 권세 자체를 제자들에게 위임해 주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전도할 복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전도란 죄 사함을 얻게 하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감격하였습니다.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의 죄를 이미 용서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도 많이 받았고 죽이려하는 자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핍박하는 자, 죽이려고 다가오는 자들을 만났을 때 “하나님 이 원수를 갚아 주소서.” 기도하지 않고 핍박을 하면 핍박을 당하고 죽이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은 그들에게 “당신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천국에서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합니까? 제자들이 용서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을 다시 용납해 주시고 받아주시고 다시 쓰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에 너무나 감격하여 가슴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고 우리에게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사람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계획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제자들은 너무나 충격을 받았지만, 예루살렘은 여전히 조용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있었던 마가 다락방에는 세상이 바뀌는 역사가 일어났지만, 아직도 예루살렘에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도마같이 여전히 믿지 못하는 제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계획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은 엄청난 태풍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진짜 태풍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는 역사가 무엇입니까? 성령의 부으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배신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을 다시 복음의 사도로 쓰셨을까요?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무섭다고 도망 갔던 나약한 제자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다시 사도로 쓰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배신한 사람을 다시 쓰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는 실패자를 쓰시는 완전한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계획은 성령님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22절)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계획은 성령님이었습니다.
두려워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제자들, 실제로 좌절에 빠져있었던 제자들, 죄책감에 무너진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주셔서 성령으로 그 제자들을 위대한 사도가 되게 만드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강해 설교도 이제 끝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부활 사건도 다 지나갔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는 ‘이제는 중요한 부분은 다 지났구나.’ 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제부터 엄청난 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끝나면 어떤 성경이 이어집니까?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은 무슨 책입니까? 제자들에게 임하신 성령 행전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복음서보다 더 엄청난 역사를 이루는 사도행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실패자를 쓰시는가? 성령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계획은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할 일은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제자들은 너무나 준비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준비가 된 것입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실패와 좌절입니다. 그들은 정말 철저히 실패했고 좌절한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내 의지로는 안된다! 내 결심으로도 안된다!’ 이것이 깨달아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성령님께 순종할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의지하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자기들은 그 예수님 곁에 있지도 못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제자들은 오직 성령님에게만 의지하고 성령님에게만 순종하는 자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깨달은 사람에게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실패자를 쓰시는지 아십니까?
“이제는 오직 성령님만 의지할 사람이 되었는가?”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실패와 좌절 조차 복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됩니다.
20세기 초반에 오순절 운동을 일으킨 스미스위글스워스 목사님, 수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병 고침 받고, 14명의 죽었던 자가 그의 기도를 통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 매우 가난하였고 공부도 하지 못하였기에 처음에는 사람들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제 아내는 제가 설교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시도는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여보, 당신은 할 수 있어요. 저는 당신이 오는 주일에 설교하기를 간절히 원해요.’ 라고 이야기하곤 하였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해 보았습니다. 제가 설교를 하기 위해 써보지 않은 방법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심지어 목사님들이 하신 설교들을 1주일 내내 적은 적도 있습니다. 저의 아내의 바램, 저에 대한 사랑, 그녀의 소망이 틀렸다고 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설교단에 일단 올라서면 저는 그 동안 적어놓았던 설교들을 읽지는 않고 그 대신 ‘저는 설교 못하겠습니다. 저 대신 다른 분이 하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한 차례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여러 차례 일어났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를 영접하겠다고 설교단 앞으로 나오는 경우, 저는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영접시키는 것은 참 잘합니다. 제 아내가 설교하는 동안 제가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것도 잘합니다. 저는 그와 같은 일을 참 좋아합니다. 그러나 설교만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령님이 임하시자 저는 설교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설교할 수 있는 능력은 저의 것의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성령으로 채움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너무나 무능하고 자신에게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준비된 사람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제자들 뿐 아니라 온 예루살렘이 뒤집어집니다.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지금 종교 문제로 나라가 시끄럽지만, 성령님이 임하시면 완전히 해결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한국 교회를 사로잡으시면 온 백성으로부터 칭송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마가 다락방에 임한 성령 강림이 아직 끝이 아닙니다. 2천여 년 전에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였을 때 우리나라에 무슨 영향이 있었습니까? 여러분, 성령의 계획은 엄청난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들끓었지만 전 세계는 여전히 조용했습니다.
요엘 선지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예언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신 지 2천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봅니다. 성령의 역사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만민에게 부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성령의 바람이 그것입니다.
요즘 부는 바람에서 가을을 느끼듯이 앞으로 이루어질 일이 눈 앞에 보입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이미 가을은 와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바람을 경험할 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우리는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예언이 무엇입니까?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집니다. 만민에게 성령이 부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과 우리의 경험은 동일합니다. 지금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 주님을 만납니다.
여러분 중에도 아마 마음을 몇겹을 닫아놓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실패 때문에 좌절 때문에 상처 때문에 누구도 비집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지금 마음을 있는대로 닫아놓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닫아놓은 마음을 깨뜨리고 들어가십니다. 마가 다락방에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처럼 마음을 닫아놓고 있는 여러분에게도 오늘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찾아오십니다. 여러분,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기도하고 싶은 갈망이 없습니까? 말씀을 듣고 싶은 갈망, ‘나는 이대로 살아도 되는 것인가?’ 여러분 안에 이런 삶에 대한 변화와 ‘나도 성령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을까?’ 하는 영적인 갈망을 한번도 안해 보셨습 니까? 성령의 바람이 강하게 부느냐 약하게 부느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바람이 부느냐 안부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의 역사가 아주 강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약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성령님의 역사가 느껴지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정말 내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기도의 갈망, 말씀에 대한 소원, 삶의 변화에 대한 갈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갈망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답답하다면 그것 역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분별해야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성령님에 대한 갈망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해 보십시오. 성경을 읽어 보십시오. 두려운 가운데 믿음이 생기고, 위로가 느껴지고. 순간이라도 평안이 느껴지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제게 오세요. 저를 만나주세요.” 하고 기도만 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주님. 환영합니다, 주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깨닫는 순간, 성령님께서 나에게 역사하시는구나! 성령의 바람을 인식하는 순간 강력한 성령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성령의 바람을 느끼신다면 여러분은 은혜의 강 가에 서 있는 것입니다. 태풍이 불어오는 길목에 서 있는 것입니다.
답답함도 성령의 바람입니다. 갈급함은 더욱 성령의 바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에게는 인생의 끝이라고 말하는 순간이 새로운 인생의 시작입니다. 죽음의 세력은 우리로 하여금 “끝장 났어!”라고 말하지만 부활의 주님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욥기에 보면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욥에게 차라리 하나님을 원망하라고 말하자 욥은 욥기 23장 10절에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고백했습니다.
고난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단련을 통해 정금같이 나오기 위한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32장 11절에서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위에 너풀 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것 같이”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독수리에게 날개짓을 가르치듯이 우리를 고난으로 훈련시키신다는 것입니다.
팔자나 운명을 믿는 사람은 고난을 당할 때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창조 신앙을 가진 자 부활 신앙을 가진 자에게는 고난이 독수리 훈련의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분 모두가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부활의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아보려고 무척 애를 써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 좌절을 겪었습니다. 사랑이 능력이요, 순결이 능력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설교하고 가르치면서도 정작 저는 할 수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은밀한 죄의 종이었고 자존심으로 뭉친 괴물과도 같았습니다. 잘못을 하고도 자존심 때문에 용서를 빌지 못했습니다. 변명하고 합리화시키기에만 급급했습니다.
제 자신이 미워지고 용서가 안되는데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용서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위선자의 고민을 아십니까? 자신은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무대 위 광대와 같은 목사의 심정을 아십니까?
어느 사모님이 남편 목사님이 연구 대상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강단 위의 설교와 실제로 삶이 어찌 이리 다를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정말 저는 제 자신이 연구 대상이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도 제 자신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답은 없었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속일 수가 있었지만 가까이 있는 동역자나 아내는 얼마나 실망했겠으며 안타까워 했겠습니까?
그래서 "자격이 없으면 강단에서 내려 주시옵소서!"하는 기도를 몇 번이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제게 “죽으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저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지 않았다면 저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남았습니다. “하나님, 저를 죽여 주십시오. 하나님 저를 죽여 주십시오.” 기도했지만 자아는 죽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런 저에게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6장 11절, 13절을 읽게 하심으로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라!”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라”
죽음은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으니 믿으라, 받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나는 죽었습니다.” 가 제 노래가 되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놀라운 일을 고백하고 감사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받았습니다.
저도 믿음으로 예수님만 바라보고 목회하지만, 때로는 피로감이 몰려올 때가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 잘 가고 있는 것인가?’ ‘엉뚱한 길로 가는 것은 아닌가?’ 그 때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다, 이제 은혜의 시작일 뿐이야!’
그렇습니다. 바람을 분별해야 합니다. 아무리 늦더위가 심해도 우리는 가을이 옴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하셨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진짜 하시려고 하는 일에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영적으로 답답하다고 낙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듣기는 했지만 그것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마음에 그려보지도 못한 하나님의 역사, 온 세계 열방 가운데 부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정말 태풍이 불어오는 것같은, 태풍이 불어오지 직전에는 바람이 다르지 않습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현재 여러분의 삶에 절망하고 있습니까? 영적으로 너무 답답합니까? 소문은 많이 들었는데, 내게는 뭔가 잡히는 실체가 없습니까? 그렇다면 정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 심령에 오시기는 했는지 먼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게도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다고 느껴지신다면, 내게도 성령의 바람이 부는 것은 사실이라고 자각이 되신다면 주님 앞에 나가 기도하십시오.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부활의 주님, 제게 압도하는 능력으로 임하여 주시옵소서.”
반드시 주님이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 인생의 끝이 놀라운 삶의 시작이 됩니다.
“주님, 제 삶을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 지금도 저를 만나주시는 부활하신 주님, 실망과 좌절과 낙심, 두려움 속에 있는 저를 성령의 권능으로 일으켜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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