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가까이하는 사람// 20011125
2001-12-07 23:57:24 read : 354
주일 낮예배// 마태복음 10장 40-42절
< 영접의 축복 >
한 여류 수필가가 한달 동안 외국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서재 한쪽 벽에는 온통 자신의 사진으로 채워져 있었고,
달력에는 자신이 돌아오는 날짜에 붉은 펜으로 하트 표시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 밑에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아내 돌아오는 날'이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눈물이 핑 도는데 그때 등뒤에서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목욕하고 좀 쉬지!"
목욕탕에서 물을 크게 틀어 놓고 그분은 울다 웃다 하면서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이 정말 제 남편인가요?" 그분은 남편의 변화를 믿기 힘들었습니다.
남편은 원래 술을 좋아했고, 허무주의에 빠져 도저히 희망이 없어 보였기 때문에
그 당시 한참 이혼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남편의 변화된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러자 그분은 가정 법원으로 향하던 발길을 교회로 바꿔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하면서 그분이 한 가지 깨달은 것은 자신이 언제나 피해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자신도 남편 못지 않게 가해자였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란 정말 고통스러웠지만, 인정하니까 남편이 불쌍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영접하는 마음으로 남편을 향해 마음을 열고 남편을 영접했습니다.
얼마 후, 남편은 술과 허무주의를 버리고, 새로운 남자가 되어 그녀에게 나타났고,
곧 그들은 서로를 더욱 이해하고, 용납하며, 참아주는 사이로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듯이 그러한 영접의 마음으로 살 때 하나님은 축복을 주십니다.
남편과 아내! 목사와 성도! 그리고 우리 모두는 서로 전혀 알지 못하던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에 이런 교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소중합니다.
이 교제는 천국 가는 날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성공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여러분들과도 지속적으로 같이 교제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때로 일을 많이 한 어떤 분 장례식에 가면 깜짝 놀랄 정도로 찾는 사람이 없습니다.
일은 참 많이 했는데 왜 그럴까요? 영접하는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진심으로 영접했다면 사람도 용납하고 영접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감싸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치명적인 실수에서도 우리를 용납하고 품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타인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듯이 그런 영접하는 마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영접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40-41절은 그 영접하는 마음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를 잘 말해줍니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가 영접해야 할 대상은 무엇일까요?
< 하나님을 기쁘게 영접하십시오 >
우리가 가장 먼저 영접해야 할 대상은 우리 주님입니다. 40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제일 기초적인 것이고 중요한 것이 주님 영접하는 것입니다.
다른 조건이 없어도 주님은 기쁨으로 영접하는 신앙에는 결코 실패가 없습니다.
여러분! 믿음생활에서 이것저것 너무 바라지 말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십시오.
옛날에 어떤 성자가 간절히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무엇을 해 줄까?"
그때 그분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주님! 주님 한 분만으로 정말 만족합니다."
가장 성공적인 믿음이란 '주님 주시는 것'보다 '주님 자신'을 사모하는 믿음입니다.
그 정도로 주님을 사모하며 산다면 우리의 신앙에는 결코 실패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기쁘게 영접하고자 하는 마음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예배하는 모습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모습이 필요할까요?
적어도 예배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서 힘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면 약속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그리고 옷차림도 단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꼭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시간도 지키고 옷차림도 잘 준비하면 주님이 기쁘게 영접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영접할 때 형식적으로 하면 영접 받는 사람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나의 최선의 것, 나의 소중한 것을 가지고 영접할 때 영접 받는 사람도 기쁘게 됩니다.
가끔 보면 신앙생활에서 예의를 갖추는 것을 형식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몰상식와 비윤리가 아니기 때문에 신앙생활에서 예의는 중요합니다.
보통 성도라면 '예의를 갖추는 것'과 '형식주의'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예의를 잃지 마십시오. 그래야 신앙이 건강하게 자랍니다.
60-7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분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교장의 특명이 떨어지고 학생 전체가 환경 미화에 동원됩니다.
대청소를 하고, 화단을 가꾸고, 창문을 닦고, 복도에 왁스까지 발라 윤기 나게 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교육감이 학교를 방문하기 때문이라는데 학생들은 어리둥절하고,
"교육감이 학교를 방문한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목사님은 고등학교 시절에 그것이 이해되지 않아 선생님에게 따졌다고 합니다.
"선생님! 꼭 이래야 합니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 정직한 것 아닙니까?"
바로 그때, 선생님이 말했다고 합니다.
"이해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른에 대한 예의란다. 그리고 손님에 대한 예의이기도 해.
잘 보이려는 것을 외식으로만 보지 말고, 어른에 대한 예의로 보면 어떻겠니?"
그 선생님의 말씀이 목사님의 가치관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때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정의감이 넘칠 때 실수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생각은 정의로운 생각인데, 태도는 정의로운 태도가 아니면 반쪽 정의일 뿐입니다.
진정한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는 반드시 마음과 더불어 행동도 따르게 될 것입니다.
< 전도자를 기쁘게 영접하십시오 >
예의를 강조하는 것을 예의를 받는 사람을 위해 강조하는 것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사실, 예의를 갖추면 받는 상대방도 기쁘지만, 갖추는 본인도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의는 나를 위한 것이고, 조금 깊게 생각하면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이탈리아 군대 백부장 고넬료는 베드로가 오자 땅바닥에 엎드려 절하며 영접합니다.
그러자 이방인으로서 그와 그의 가족이 구원받고, 성령 받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처럼 주님의 종에게 예의를 갖추고 권위를 부여하면 더욱 은혜가 주어질 것이고,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소중하게 대하면 그 말씀도 더욱 은혜롭게 들려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 41절 말씀을 보십시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언뜻 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 원래 내용은 이런 내용입니다.
"선지자이기 때문에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와 같은 상을 받을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목회자이기 때문에 목회자를 영접하면 상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목회자를 개인적인 감정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목회자로 세워주셨기 때문에 기쁘게 영접해야 그 신앙이 든든해집니다.
특히 본문에서 "선지자를 영접한다"는 것에는 한가지 깊은 뜻이 있습니다.
선지자의 가장 큰 일은 무엇입니까? 백성들의 무관심의 죄를 선포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를 영접하라는 말은 영적인 무관심에서 벗어나라는 말도 됩니다.
믿고 축복 받았습니까? 그러나 신앙은 "축복 받고 어떻게 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축복을 받았을 때 "이 축복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다"고 생각해보셨습니까?
은혜 받을수록 더 이기주의자가 되고 더 무관심하다는 얘기가 나오면 안될 것입니다.
지금 많은 선교사님들이 IMF 이후에 선교후원비가 크게 줄어 고생한다고 합니다.
그런 소식을 듣고도 마음에 아무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면 큰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내 집 마련도 중요하고, 내 교회 마련도 중요하지만 선교와 구제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금년에는 김재호 선교사님과 안디옥 선교회의 외국 신학생을 돕기 시작했지만
내년부터는 태국에 있는 여러 나환자 교회를 위한 선교에도 힘써 참여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선교사를 도울 때 우리 모두는 선교사와 같은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저는 성도들과 식사할 때 비싼 곳으로 가지 말자고 자주 말하는 편입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만원 짜리 이상 되는 식사를 하면 솔직히 맘이 불편합니다.
받는 데에 너무 인색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따라가지만, 맛은 그저 그렇습니다.
선교지에서는 우리의 절약한 식사비가 아주 요긴하게 잘 쓰일 수 있을 것입니다.
목회자는 평범하게 대접하시고, 선교를 돕는 일에는 비범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선교사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서 힘쓰는 것이 바로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 소자를 기쁘게 영접하십시오 >
그처럼 주님과 주의 종들을 기쁘게 영접하면서 우리는 소자도 기쁘게 영접해야 합니다.
본문 42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소자, 병자, 약한 자를 기쁘게 영접할 때 꼭 상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얼마 전 밀입국을 시도하다가 배 창고에서 질식사한 중국 동포들 사건이 있었습니다.
해경의 눈을 피해 잠시 숨으려고 창고로 들어갔는데 그곳에 산소가 희박한 것을 알고,
다시 나오려고 해도 창고 문이 열리지 않아 안타깝게 죽어갔던 그들이 불쌍했습니다.
고단하게 살다 코리안 드림을 가지고 오는 길에 그들이 겪은 절망과 공포를 생각하면
그런 소자들을 기쁘게 영접하지 않고는 진정한 축복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쓰는 어떤 한국어 교본의 첫 문장이 "때리지 마세요"라고 합니다.
우리는 희망이 없는 자, 어려운 소자들의 설 땅이 되어주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도와줄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엇인가 반대급부를 원하며 돕는 길을 찾는다면
반대급부를 줄 수 없는 정말로 어렵고, 소외되고, 매스컴을 타지 못하는 사람들은
누가 그들의 설 땅이 되어줄 수 있겠습니까? 알게 된 이웃들이 해야 하지 않습니까?
자기 교회 목회자만 대접하려고 하지 마시고, 모르는 목회자도 은밀하게 도우십시오.
나를 칭찬해줄 수 있는 목회자만 대접하지 마시고 나에게 줄 것이 없는 분도 도우십시오.
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비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은 더 도우려고 해야 합니까?
그들이 도움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분들은 우리들에게 갚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보상을 원하면 오직 천국의 보상만 바라고 상류에서 그냥 씨앗을 뿌리십시오.
그 이름 없는 씨앗이 물을 따라 하류의 적절한 땅에 도달해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면
그 하류에 있는 사람들이 수확해 먹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짜 선교요 구제입니다.
< 이름 없이 소자를 기쁘게 영접하십시오 >
그래서 본문 42절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소자를 영접할 때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고 주는 자는...."
이 구절에서 '제자의 이름으로'라는 구절은 무엇을 도전하는 말씀일까요?
사실상 이 구절은 남을 도우려고 마음을 먹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제자의 이름보다는 자기 이름으로 돕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우리의 도움을 많이 받으면서도 왜 고맙다는 말보다 왜 거부감을 느낍니까?
무엇이든지 돕기만 하면 꼭 이름을 내서 자기들 자존심을 너무 꺾는다는 것입니다.
쌀을 보내면서 쌀부대에 보내는 교회 이름을 써 놓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써 놓고,
그런 식으로 하니까 어떤 북한 관리는 "남조선 사람 참 이름 좋아합니다"라고 하면서
"이런 식으로 하면 받는 사람이 더 예수님을 거부하게 됩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사람들은 선행을 많이 합니다. 선행을 하고 싶지 누가 악행을 하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자기 이름으로 하고 싶어하고, 드러내고 싶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이해가 되지만 정작 하나님 앞에 평가되는 선행은 조용히 구제하는 것입니다.
탈무드는 받는 자가 주는 자의 얼굴을 보지 못할 때, 그것이 참된 구제라고 합니다.
여러분! 갚아줄 능력이 없는 사람을 나의 보람있는 인생의 손님으로 영접하십시오.
사회적 약자라고 해서 스스로 위축될 필요도 없고, 그런 분을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갚은 길이 없는 소자를 나의 인생의 귀중한 손님으로 영접할 때
그것이 복된 삶이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결단코 상을 잃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요새 미국의 예일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던 헨리 나우엔 신부님 책이 많이 읽힙니다.
그분은 유명한 석학의 자리를 버리고 캐나다의 한 중증 장애인 시설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10년 동안 자기 의사 표현도 못하는 아담이라는 사람을 돌보아줍니다.
사람들은 인생 낭비라고 했지만 신부님에게는 그때가 주님을 깊이 만나는 때였습니다.
그곳에서 신부님은 아담을 먹이고, 입히고, 돌보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눕니다.
결국 인간적으로 아담은 신부님에게 갚을 것이 없었지만 신부님은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 선물이란 아담의 몸을 만질 때마다 성령님이 자신을 만지는 듯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상하게 아담의 몸을 만지면 그들이 가진 상처가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아담의 몸을 만지는 것은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경험과 유사했습니다.
마가복음 6장 56절에서 주님께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었다는 말씀대로였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갚을 능력이 없는 분들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질 때
우리는 반드시 정신의 불구를 극복하고 주님의 놀라운 치유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 것도 갚을 길이 없는 소자를 '제자의 이름'으로 영접해 보십시오.
이은경 집사가 지금 현재의 모습으로는 여러분들에게 아무 것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백혈병에 걸렸고, 셋방에서 월세를 내며 살고 있고, 주변에 도울 사람도 많지 않고,
백혈병에 걸린 사실도 모르고 임신하여 딸까지 뇌성마비 증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다른 많은 병자들은 책임을 지지 못해도 우리 곁에 보내주신
한 사람 정도야 최선을 다해서 돌보려고 할 때 치유의 능력을 체험하지 않겠습니까?
백혈병 진단 초기에는 여러 곳에서 이은경 집사를 돕는 손길이 꽤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병이 장기화되면서 지금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치료는 계속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보다 우리들이 일차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지 않습니까?
< 이은경 집사를 돕기 원하는 분 후원안내/ 신한은행 642-12-079560(이승연) >
여러분! 갚을 것이 없는 사람이 우리가 진정 도와야 할 사람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어려운 소자들 곁에 머물고, 그들을 위해 나의 것을 최선을 다해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이 우리 곁에 머물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 냉수 한 그릇의 의미 >
꼭 많은 것을 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냉수 한 그릇'도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돈이 소자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돈에 담긴 마음이 소자를 살리기 때문입니다.
냉수 한 그릇이 소자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냉수에 담긴 사랑이 소자를 살립니다.
그래서 그 냉수 한 그릇의 의미는 소중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상급이 예비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사람은 아무리 변명을 해도 결코 하늘의 상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복이 없는 것에 대해서 누구를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재의 복만 복이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복을 받을만한 행동을 정말 하려는 심성을 가지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불쌍한 사람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복이 가까이 가겠습니까?
정말 복을 원하시면 '냉수 한 그릇에 목숨이 달린 사람'에게 손을 펴시기를 바랍니다.
며칠 전 국민일보에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먹지 못해 죽는다는 소식이 실렸습니다.
그런 비참한 얘기가 들려지는데, 우리는 무슨 어떤 복을 더 바란다고 불평을 합니까?
그렇게 행동하면 우리 가정, 우리 민족에게는 결코 미래가 보장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소자를 기쁘게 영접하시고, 긍휼한 마음을 가지는 것에서 끝나지 마십시오.
어떤 분은 불쌍한 사람을 보고 안타까워하면서 남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기만 합니다.
그것은 가장 정의로운 모습 같지만 사실상 정의로운 모습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어느 날, 정의감이 많은 한 교인이 용산역에 나갔다가 끔직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노숙자가 즐비하고. 노인들이 지쳐 앉아 있고, 빈 젖을 빠는 갓난아기의 모습도 봤습니다.
그 비참한 모습을 보고 그는 하소연합니다. "하나님! 왜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한가요.
왜 하나님은 그냥 보고만 계시는지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대책을 세우지 않나요?"
그때 갑자기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그럼 너는 내가 심심풀이로 너 있는 곳에 보낸 줄 아니? 네가 바로 나의 대책이란다."
여러분! 왜 세상이 불공평하냐고, 왜 정부는 대책이 없냐고 따지기 전에
나의 호주머니부터, 나의 손길에서부터, 나의 발걸음에서부터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많이 먹어서 찜질방에서 땀을 흘릴 때마다 굶주린 이웃을 한번쯤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한 생각마저 없다면 우리의 인간성은 황폐해지고 진정 상과 복은 없을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 무엇입니까? 초대교회에 성령이 충만하니까 유무상통이 이루어졌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성령 충만 전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보이고, 그래서 나누게 되지 않았습니까?
지금 내가 도울 사람이 보이십니까? 그 눈을 가진 분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은 인격의 열매로도 나타나지만 삶의 윤리로도 나타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소자를 영접하고 도울 때 어떤 약속이 있습니까? 42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다른 어떤 것보다 우리의 베푼 손길, 헌신의 손길을 잊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열심히 빼앗으면서 살다가 결국 다 빼앗기며 사는 비참한 삶이 있고,
열심히 베풀면서 살다가 풍성함과 보람을 누리고, 영생과 상급을 얻는 삶이 있습니다.
어떤 삶을 사시겠습니까? 항상 베푸는 삶으로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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