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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누가복음 15장11-24 / 탕자의 비유 (둘째 아들 편)

by 【고동엽】 2023. 1. 18.

누가복음 15장)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묵상/눅 15:11-24)

 

◆ 탕자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오늘 본문은 유명한 탕자의 비유다.

둘째가 아버지에게 자기 몫을 미리 달라고 함은 더는 아버지의 통제 아래 있지 않고 독립하겠다는 의도다. 

 

재산 독립, 아버지를 떠남, 먼 나라... 모두가 자유를 향해 멋지게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성공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애초에 둘째는 자유롭게 사는 삶만을 그리워했지, 제대로 살 궁리는 없었다.

 

'허랑방탕' - 사전적인 의미는 언행이 바르지 못하고 방탕한 삶에 빠져있다는 뜻이다. 헬라어 아소토스는 무절제의 의미를 가진다. 성도들도 무절제한 삶을 살게 되면 탕자와 다를 바가 없다.

 

허랑방탕과 낭비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자유로 착각하지만, 사실은 죄의 노예이며, 어둠의 심연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 종착점에서 후회한들 무엇이 남아있을까?

 

하나님을 계속 믿을지 말지를 고민하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없었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면 두려움 없이 재미있게 살 수 있었을 텐데...과연 그럴까?

 

 

◆ 방탕의 끝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재산은 유한했고, 낭비벽은 고쳐지지 않았다. 결국 탕자는 모든 재산을 소비한 후 궁핍해질 무렵, 그 나라에 흉년까지 겹쳐서 정말 먹을 것조차 없었다.

 

흥청망청은 먼 이야기가 되고, 먹고 살기 위해 돼지까지 쳐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양이나 소를 치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를 친다는 것은 인생이 밑바닥까지 내려갔음을 보여준다.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여전히 배를 곯게 된 둘째는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주린 배를 채우고자 했지만 그조차 쉽지 않았다.

 

앙상한 몸, 퀭한 눈, 지저분한 옷,

이제 틀림없이 굶어서 죽는다.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 없이 사는 영혼이 행복할 것 같은가? 어림없다. 자유롭다고? 말도 안된다. 허랑방탕할 뿐이다. 탕자의 몰골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마지막 모습이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자신이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라, 죄의 노예가 되었고, 마귀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돌이킬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대부분 죽을 때야 깨닫고 비참하게 종말을 맞이한다.

 

 

◆ 탕자의 결단

 

 

(18-19)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탕자가 굶어 죽게 되자, 탕자는 아버지께로 돌아갈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 결심이 쉽지 않다. 일단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게 큰소리치고 떠났는데, 돌아가려면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리고 자기 같은 자를 아버지가 반겨주겠는가? 무슨 변명을 하고 집에 기어들어 간단 말인가?

 

그래서 탕자는 기가 막힌 생각을 했다. 아버지 집에 품꾼으로 취업하는 것이다. 아들 자리는 사양하고 품꾼으로 받아달라면 받아주지 않을까?

 

그조차 안된다고 쫓아내면 어떡할까?

어차피 여기 가만히 있으면 죽으니, 그래도 시도는 해보고 죽으리라.

 

 

◆ 아버지의 기쁨

 

과연 아버지는 나를 어떻게 맞이하실까?

아무리 품꾼의 하나 되기로 결심하고 가는 길이지만, 지은 죄가 너무 커서 발이 가벼울 순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에게 큰 손해를 끼치고 다시 살려달라고 가는 자신이 너무나 뻔뻔하고 비굴해 보인다.

 

못된 놈이라고 때릴지라도 매달려보리라. 호통치는 아버지를 상상하며 터덜터덜 걸어갔다.

 

저 멀리 집이 보인다. 가물 가물가물하지만, 아버지도 서 계신 듯하다. 속으로 불러본다. 아버지...

 

그런데 아버지가 뛰기 시작하신다.

맨발에 거지 옷을 입은 자신을 덥석 껴안으신다. 목을 안고 뺨에 입을 맞춘다. 이것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이제 준비해온 멘트를 해야 하는데, 목이 멘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들은 체도 안 하신다. 즉시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라고 명한다. 그리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하신다. 가락지는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키심이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고 잔치를 벌였다. 아버지의 기쁨. 정말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 아버지에게 슬픔이며 불효하는 것으로 생각했건만, 오히려 아버지에게 진정한 기쁨을 준 효도가 되었다.

 

만일 탕자가 자신이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겠다고 했다면 그는 결국 굶어 죽었을 것이고 그것은 아버지를 무척 슬프게 했을 것이다.

 

탕자의 가장 잘한 점은 자존심을 내려놓고 있는 모습 그대로 아버지께로 돌아갈 결심을 한 것이다. 이것이 가장 칭찬할 만하다.

 

 

내 평생에 가장 잘한 일은 내가 하나님을 믿은 것이고, 또한 세상을 사랑했지만, 결국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이킨 것이다. 주님께서 나의 열정을 회복시켜주신 것이 참으로 감사하다.

 

당신이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께 돌아갈 결심을 하는 것은 참으로 잘하는 일이다. 이제부터라도 믿음으로 살기로 결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항복하고 무릎 꿇는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신다. 마귀는 자기 노예를 빼앗기고, 죄의 노예는 해방을 맛보게 된다.

 

멜 트라더는 술주정뱅이였다. 그는 자기 어린 딸이 죽자, 딸의 발에 신겨진 신발까지 몰래 벗겨 팔아서 술을 사 먹을 정도로 인간 말종이었다. 그런 자가 어느 날 하나님께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피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는 그를 하나님께서는 고치셨다. 후에 그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 시카고의 천여 명의 술주정뱅이들이 이 사람의 복음 전도로 새사람이 되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드라크마 하나, 그리고 탕자의 비유들이 모두 잃어버린 자를 찾았을 때의 기쁨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히 11:6). 당장 하나님께 항복하고 돌아가라. 말만 잘하는 성도가 아니라 진실하게 믿는 성도가 되기로 결심하라.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진실한 믿음을 갖자. 진실한 믿음에서 행동이 나오고, 언어가 형성된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받아주심을 감사합니다.

무수히 많은 죄를 사하시고,

아버지의 자녀로 살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제 믿음이 진실하게 해주십시오. 제 믿음이 정직하게 해주십시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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