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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누가복음 15장1-10 / 백 중의 하나일지라도...

by 【고동엽】 2023. 1. 18.

누가복음 15장)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묵상/눅 15:1-10)

 

◆ 죄인을 영접하신 예수님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사람들은 자기보다 수준이 낮은 사람과 동류로 취급받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 어떻게 해서든 차별하고, 구별시켜서 자신이 다름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도 뒤집어보면 자신은 그렇지 않음을 자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당시에 비난받던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셨다. 비난받으시거나 오해받으실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을 받아주셨다.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그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가지셨다. 우리가 이러한 주님을 배워야 한다.

 

만일 그들에게 똑바로 사는 것을 증명한 후에나 내게 오라고 하셨다면 그들은 영원히 돌이킬 기회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가수 하덕규가 알코올 중독에 빠져서 폐인처럼 되었을 때, 절망 속에서 우연히 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교회당 뒷좌석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한참을 울고 난 뒤에 그에게 새 마음이 임했다. 그때 곡이 떠올라서 만든 노래가 '가시나무'다.

 

문제투성이고, 한참 부족한 자이지만, 그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와서 눈물을 쏟으며, 주님 이게 제 모습입니다. 어쩌시렵니까?하는 자를 내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이다.

 

◆ 양 한 마리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반문에 일부 사람들은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어떻게 겨우 한 마리를 위해서 양 아흔아홉 마리를 내버려 둔단 말인가?

 

이 비유를 숫자로만 접근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선한 목자의 마음과 그가 가지고 있는 양을 향한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

 

아이가 다섯인 집에서 아이 하나를 잃어버리자, 하루 종일 네 아이를 내팽개쳐둔 채 한 아이를 찾으러 다닌 이야기를 들을 때, 넷과 하나라는 숫자에 집착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 스토리에는 부모의 간절한 심정과 자식 사랑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위의 비유도 목자가 가진 양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어 있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다. 당시에 선한 목자들은 양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웠다. 양을 오로지 돈의 가치로만 따지는 자들은 그렇게 못한다.

 

홀로 남겨진 양의 입장에서는 설마 목자가 나 같은 존재를 찾기 위해서 그런 수고를 하겠냐고 생각할지 모르나 선한 목자는 그를 찾기 위해 온 들판을 헤매고 있었다. 그 수고와 간절함을 알 때 양이 어찌 그 목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 드라크마 비유

 

(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한 드라크마는 한 데나리온과 같은 가치라고 한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 이것을 잃어버렸을 때, 등불을 들고 집을 쓸며 "찾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반문하실 때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한 드라크마를 절대로 대수롭지 않게 취급할 수 없는 서민들임을 보여준다. 

 

이 비유도 열 개중에 하나다. 

그러나 열 개 중에 하나라고 해서 한 드라크마의 가치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자기 하나 정도는 별 볼 일 없으므로 무시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에게는 여럿 중에 하나라고 할지라도 절대로 가치가 약화되지 않는다. 

 

더구나 한 드라크마 찾아냈다고 밤 중에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함께 즐기자고 하는 것을 보면 이 주인은 일반 사람과 다르다는 느낌을 준다. 나는 주님께서 일반인들이 납득할 수준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기쁜 마음을 알리신 것이라고 본다. 

 

양의 비유나 드라크마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주님께서는 내가 여럿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고 절대로 가치가 약화되지 않으며, 잃어버린 자를 찾으셨을 때의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알기를 원하신다.

 

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이 기쁨을 깨닫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때 우리는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사실 우리는 이것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다. 마치 잃어버렸던 아이를 부모가 찾았을 때, 부모는 너무나 기쁘지만, 막상 그 아이는 그 기쁨을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부모가 얼마나 기뻐할지 한번 상상해보라고 하신다.

 

우리는 늘 부족함에 죄스러워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돌아온 것이 너무나 기쁘시단다. 넘어지고 깨져도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기뻐서 하나님의 사자들을 모아놓고 즐거워하신다고 하신다.

 

마귀가 공격할 때 이렇게 한번 말해보라.

이놈아, 내가 이래 봬도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 하늘에서 잔치까지 벌이면서 환영받은 자다.

 

주님,

돌아온 자를 기뻐하시는 이러한 하나님의 기쁨을 제대로 알게 해주십시오.

제가 기뻐함을 받는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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