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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누가복음 13장10-17 / 자비하신 예수님과 무자비한 종교인

by 【고동엽】 2023. 1. 18.

누가복음 13장)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묵상/눅 13:10-17)

 

◆ 자비하신 예수님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8년 동안 귀신 들려 앓았던 여인이 있다. 마음만 눌린 것이 아니라 육체까지 눌려서 허리를 펴지 못하고 살았다. 아무리 귀신 들려 눌렸어도 그 사람이 귀신과 동일시되면 안 된다. 그는 희생자일 뿐이다.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날이 마침 안식일이어서 충분히 공격이 예상되었음에도 주님께서는 그녀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를 고쳐주셨다. 주님께서 편하시려면, 여자에게 하루만 더 참을 것을 요구하고 약속할 수 있었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이 여자의 고통이 단 하루도 연장되기를 원치 않으셨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자비하심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사람이 귀신 들려 앓으며, 고통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주님께서 고쳐주실 리가 없다.

 

인간의 고통에 무심한 사이코패스 같은 하나님이나, 마음 아파하면서도 고통을 없앨 수 없는 무능한 하나님은 모두 인간의 일차원적인 사고에서 나온 착각일 뿐이다. 인간의 고통과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역학관계는 훨씬 더 복잡하다. 내 작은 머리로 꼭 이해해야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겠다는 오만을 버리고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하자.

 

◆ 무자비한 종교인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8년 동안 고통을 당한 이 여자가 고침을 받는 것을 보고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분노한 자가 있다. 회당장이다. 그가 분노는 바리새인들이 볼 때 정당한 의분처럼 보인다.

 

회당장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충성하는 신실한 신앙인이 아닐까? 이런 신실하고 원칙을 양보하지 않는 신앙인을 보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예수님과 부딪힌 이유가 무엇일까?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명령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그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을 제멋대로 해석하며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 문제다. 하나님의 계명을 기뻐하며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좋으나, 외식하는 종교인들은 그것을 무거운 짐으로 만들고 인간을 메마른 심성으로 몰아간다. 

 

외식하는 종교인들은 안식일일지라도 자기 집 소나 나귀가 목마르면 끌고 나가서 물을 먹이는 수고는 전혀 문제 삼지 않으면서 예수께서 이 병자를 단지 말씀으로 고치시는 것을 '일'을 하였다고 트집 잡았다. 얼마나 모순인가?

 

종교인들은 노동으로 지친 사람들을 쉬게 하며 안식을 누리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는 외면하고 쉬는 것을 오히려 고통으로 느끼게 만드는 묘한 자들이다. 그들이 이렇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사상 때문이다.

 

종교인 생각 속의 하나님은 트집 잡는 분이시며, 융통성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고지식하며 까다로우신 분이시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엄하고,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시는 무모하신 분이시다(눅 19:21).

 

이들은 선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트집잡히지 않고 무사히 살 것인가에 골몰한다. 이들은 왜곡된 하나님을 섬기면서 인간의 심성을 비 종교인보다 더 메마르게 한다. 역사를 보면 종교인들에 의해서 억울하게 처형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데 우리는 이런 회당장에게 어리석은 종교인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도 막상 우리가 그런 자임을 눈치채지 못한다. 우리도 회당장처럼 엄청나게 종교적인 것을 알고 있는가?

 

오늘날 매우 열심 있는 성도를 아무나 붙잡고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리는 일과 '십일조' 안 바치는 일 중에 어떤 것에 더 죄책감을 느끼는가를 물어볼 때 대부분이 후자다.

 

놀랍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위배하는 일에는 너그럽게 용서하시는 하나님께서 십일조만큼은 추호도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믿는 이 믿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리 주님께서 약대같이 큰 죄로 지적하신 것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당신이 하루살이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죄에 대해서는 벌벌 떠는 이런 기현상은 당신이 바로 철저하게 종교적인 사람임을 알려주고 있다(마 23:23-24). 회담장 손가락질하지 말라. 당신이 바로 그와 같은 자다.

 

사실 많은 사람이 제대로 헌금 생활을 안 하고 있다. 생활고를 호소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드리는 것에는 무척 인색하다. 이런 분들은 다음의 글들을 읽지 말고 지나쳐라. 이들은 신약에 와서 율법적 십일조가 사라졌다는 주장을 단지 자신들이 헌금하지 않는 인색함을 변명하는데 사용하려고 할 뿐이다.

 

나는 율법적인 십일조와 각종 헌금 바치는 것에 너무 열심인 나머지 다른 곳에는 한 푼도 쓰지 않는 성도들에게 말하고자 한다.

 

십일조를 헐어서 담임목사 봉급의 오 분의 일도 못 받는 어려운 부목사나 전도사 가정에 익명으로 헌금해보라. 아니, 어려운 형제에게 그렇게 도와보라. 하나님께서 헌금을 그렇게 사용했다고 책망하실까? 초대교회 때는 오히려 그러한 것이 진정한 헌금으로 인정되었다(히 13:16). 구약교회를 모델로 삼지 말자. 우리는 신약교회에 속한 자다.

 

우리가 이런 헌금 생활을 실천하면 종교적인 교회는 위축될 지언정 하나님 나라는 절대로 위축되지 않는다. 오히려 건강한 교회, 더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이다. 

 

만일 우리나라 성도들이 모두 십일조 생활을 하며 그것의 절반만이라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교회는 새롭게 개혁될 것이다. 수입이 없어져서 교회가 위축될 것이라고? 아니다. 성도들이 헌금을 아까워하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종교적인 교회들은 이런 가르침에 펄쩍 뛰며 이단적인 사상이라고 정죄할 것이다. 그들은 성도들에게는 율법대로 내라고 가르치면서 자기들은 제멋대로 쓴다.

 

나는 이런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면서 내 헌금은 십일조를 넘어서기 시작했고, 하나님께서는 나와 형제들을 더욱 축복하시고 풍성하게 하셨다.

 

종교인이 되지 말고,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자.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표준이 되시는 삶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법이다. 모름지기 예수님을 믿는 자란,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붙어있는 가지로서 그의 품성을 진액처럼 받아들여서 열매 맺는 삶이다. 이것이 믿음의 비밀이고 신비의 역사다.

 

주님,

제가 외식하는 종교인이 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어리석은 편견과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고,

주님을 믿음으로써 주님을 닮아가게 해주십시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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