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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칼빈의 개혁신학

by 【고동엽】 2022. 10. 18.

김용일

칼빈의 신학은 쯔빙글리주의와 루터주의의 중재적 입장으로 볼 수 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개혁신학을 조직적으로 해석하며, 로마 카톨릭뿐만 아니라 루터파, 재세례파, 반-삼위일체파까지도 반대하고 있다. 개신교 신앙에 대한 해석을 이룬 이 책은 개혁전통의 근본문서로 칼빈신학의 주된 자료이기도 하다.

하나님 지식

칼빈은 「강요」의 첫머리에서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두 종류, 즉 신지식과 인간 자신에 관한 지식으로, 자아에 대한 참 지식은 우리의 절망과 불합당함을 발견케 해주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시켜 준다. 참된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시작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있는 창조와 세계 질서를 통해서는 올바른 하나님의 지식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의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불가능하므로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창조자와 피조자 사이의 현격한 거리 즉, 하나님은 무한하신 데 반해서 우리는 죄인이며 유한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본래의 모습으로 알려고 노력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대로, 주로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증언이고 성경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에 성경은 그 권위를 교회로부터 이끌어오지 않는다. 성경의 권위는 오직 성령의 내적 증거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하나님, 세상, 인간

창조를 아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창조의 기원과 현재적 기능에 관한 모든 내용을 아는 데 있지 않고 이 모든 것이 우리와 함께 마음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데 있다. 칼빈은 "형상"(image)과 "모습"(likeness)의 구별을 배격하면서 이것은 동일한 하나의 대상을 가리키는 병행적인 표현의 히브리 습관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칼빈은 인간의 타락을 매우 중요하게 보았는데, 그것은 타락에 근거해서 인간 본성의 부패를 말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스런 선함을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전 창조세계의 지배자로서 섭리 가운데 다스리시며, 섭리는 단순한 미리 아심(foreknowledge)이 아니고 현실적인 모든 사건을 실제적으로 생산하심을 뜻한다. 이러한 섭리로 인해서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어려울 때에 인내하며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다.

인간의 상태

타락의 개념은 우리의 실제적인 모습과 우리의 절망과 부족함을 보게 하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게 해주므로 매우 중요하다. 칼빈이 강조하는 자연인의 타락 이론은 타락으로 인해서 아담이 본래적으로 가졌던 초자연적인 은사는 상실되었고 자연적인 은사는 부패한 것이다. 이러한 상실은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서까지도 일어났다. (원죄)
인간 지성의 부패는 전적으로 파괴된 어떤 상태는 아니다. 타락한 인간의 지성도 여전히 진리를 추구하는 본래적인 욕망을 보전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본래적인 상태를 잃지 않고 간직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진리에 대한 추구마저도 교만과 환상으로 이끌어 줄뿐이다.
의지도 또한 부패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선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에 여전히 젖어 있지만, 그것은 모든 동물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는 "자연적인 취향"(natural appetite)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의 의지는 죄에 묶여 있으므로 하나님을 진실로 찾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우리는 죄의 속박에 매여 있기 때문에 의지도 또한 죄에 매여 있어서 선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선에 따라서 살수도 없다. 이렇게 선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로의 회심의 시작인데 성경에서는 이것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돌리고 있다.

율법의 기능

칼빈이 "율법"이라고 말하는 개념은 복음과 상반되는 어떤 것을 뜻하지 않고 하나님이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의 책"과 구약성경 전반을 통해서 나타내 주신 계시를 뜻한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변증법적인 관계를 떠나서 항상 지속적인 것이다. 칼빈은 율법이 3증적인 목적을 지닌다고 보았다. 율법의 첫번째 목적은 우리의 죄, 절망, 타락을 보여주는데 있다. 이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은총과 도우심을 추구하게 된다. 두번째 목적은 사악한 자를 제제하여 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율법의 세번째 용도(tertiumususlegis)는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 주는데 있다.
율법이 저주의 말씀으로서 자신을 하나님의 은총을 추구토록 계속적으로 부추겨 주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의 행동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결정해 주는 근거가 됨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의 근본적인 논점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는 깨뜨리셨으나 율법의 효용성은 버리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또한 칼빈은 율법과 복음이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에 더 근본적인 강조를 두었으며 두 성경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차이점은 약속과 성취라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

칼빈은 삼위일체를 논할 때와 똑같이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을 논하면서도 전통적인 정통 신학을 따른다. 칼빈의 기독론의 3가지 관심은 첫째로, 전통적인 교리를 손상시키려는 자들에 반대해서 전통교리를 옹호하려는 관심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3중적 직능(triple office)의 개념으로, 즉 왕, 선지자, 제사장으로 - 3중적 직능 (triplex munus) 묘사했으며, 셋째로, 본체적 연합 이해는 그리스도가 주의 만찬에 임재한다는 입장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칼빈의 기독론의 형성은 맨 먼저 성육신론으로 이 논쟁의 주된 대상은 오시안더(Osiander)와 세르베투스였다. 오시안더는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셨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된 쟁점은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 즉 그리스도를 모델로 하여 창조되었으므로 그리스도가 인간을 입으실 것을 미리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성육신의 목적은 인간의 구속에 있지 않고 창조의 완성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칼빈은 이것을 헛된 사유일 뿐이라고 배격하였다.
성경적인 증언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속을 위해서 성육신하신 분으로 육신은 인간의 구속 이외의 어떠한 다른 목적도 없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에 관한 부분에서는, 메노 시몬스(Menno Simons)와 재세례주의자들은 그리스도는 지상적인 육신을 갖지 않았으며, 그의 몸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동정녀의 자궁 안에서 형태를 갖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칼빈은 이들을 "새로운 마르시온주의자"라고 부르며, 이들에 반대해서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강조하였으며 아담으로 이어지는 신체적인 혈통계승을 강조하였다.
칼빈은 본체적 연합이론은 세르베투스에 반대해서 발전하였다. 쟁점이 된 주된 주제는 그리스도를 성육신 이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아니면 없는 지였다. 세르베투스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예수가 성령으로 마리아의 자궁 안에서 태어났음을 뜻한다고 강조하였다. 성육신 이전에는 "말씀"이라고 불렀으며, 성육신 이후에만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칼빈은 하나님과 인간의 현격한 거리감을 강조한 반면에 세르베투스는 이러한 강조가 과장된 것이라고 하며 그리스도안에서의 연합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칼빈은 그가 고대의 단성론을 다시 일으킨다고 비난하며, 위격의 통일성과 속성의 교류 (communicatio idiomatum)보다는 그리스도 안의 두 본성의 구별을 더 강조하는 경향을 유지하였다.

마지막으로 칼빈의 기독론 형성에 기여한 사람은, 그리스도는 오로지 인간성에 의해서만 중재자라고 주장했던 프란체스코 스탄카로(Francesgo Stancaro)였다.
그의 주장은 오시안더가 그리스도는 오로지 신성에 의해서만 중재자일뿐이라고 주장한 것을 반대하는 이론이었다. 칼빈은 이 두 사람을 다같이 반대하면서 구속의 사역이 본체적 연합에 의해서 이루어지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에 관계되는 모든 것은 위격의 연합에 기인하며, 한 본성이라든지 아니면 다른 본성에 기인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칼빈의 주된 특징은 신성과 인성의 혼돈을 피하려는 끊임없는 관심이다. 칼빈은 두 본성의 구별보다는 위격의 연합을 강조하는 루터가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를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의 편재로 이해해서 제단 위에서도 임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쯔빙글리처럼 신성의 편제는 그리스도의 몸에까지 연결될 수 없으므로 동시에 하늘과 여러 재단에 임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하강은 예수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하늘에도 있을 수 있는 그런 것이므로 동정녀의 자궁으로부터 탄생하시면서도 우주 전체에 가득 차 있을 수 있었다 - 칼빈주의적 초월 (extra calvinisticum) 칼빈의 기독론은 엄격한 정통성을 유지하면서 알렉산드리아 학파보다는 안디옥 학파에 좀더 기울였으며, 동시에 형이상학적인 면보다는 구원론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속과 의인

칼빈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만족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죄의 용서를 공로로 안겨다 주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동시에 만족되었다. 칼빈은 신앙에 의한 의인론(의인론)을 강조하였다. 의인(의인)은 죄인을 의롭다고 선포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의는 의복과 같아서 죄인이 신앙을 입음으로써 의롭다고 선포되는 것이다. 여기에 행위에 의한 의인과 믿음에 의한 의인의 차이가 있다. 행위에 의한 의인은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긍정함으로써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로움을 만족시켜 보려는 시도라면, 믿음에 의한 의인은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고서,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가 아니고 의로운 사람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혜택을 베풀어서 받아들여 주심을 뜻한다. 그리고 의인은 죄의 사면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라고 덧붙여서 말한다.
그러므로 신앙의 역할은 신자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서 그리스도의 의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가되는 것을 말한다. 칼빈의 신앙에 의한 의인론에 대하여 오시안더는 의의 전가는 중재적인 하나님의 뜻(decree)이 아니며, 의인에서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이 신자들 안에 임재하는 것이며, 이 본질이 인간의 영혼과 너무 긴밀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견해에 칼빈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감을 지워 버리려는 경향이 있는 오시안더의 견해는 하나님과 신자의 "본질적인 혼돈"을 가져오기 때문에 결코 받아들 일 수 없었으며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고난을 제외시켜 버리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신앙에 의한 의인론이 중요한 것은 이것이 없으면 참된 종교가 이룩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신적 본성과 인간적 본성을 분리시키는 거리감, 인간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필요성 등에 대한 주장이 칼빈신학의 전반에 흐르는 주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에 의한 의인은 기독교인들이 의의 전가에 만족해서 또 다시 죄의 구덩이에서 헤매고 다녀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의롭게 된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여전히 죄인이며 이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계속적으로 죄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의롭게 된 기독교인은 그의 의인의 열매를 보여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의 「강요」의 「기독교인의 삶에 관한 논문」 (Treatise on the Christian Life)의 핵심으로 후기 칼빈주의와 청교도 전통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기독교인의 삶의 근본적인 규범은,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주인이 아니고 주님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따라야 할 원리는 무절제와 금욕주의의 두개의 극단 사이에서 모든 것을 창조의 본래적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에 입각해서 이 세상 사물을 사용하는 4개의 근본적인 규범은 첫째로, 자신이 사용하는 사물 안에서 창조자를 보면서 감사해야 한다. 둘째로, 이 세상 재화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가난을 극복하고 견디며 풍성할 때에 절제할 준비를 하면서 사용해야 한다. 셋째로, 자신이 사용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으로서 언젠가는 계산 할 때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부르심을 고려하면서, 즉 하나님이 자신의 삶 속에 맡겨 놓은 기능을 찾으며 사물의 올바른 이용은 그 기능에 맞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예정

칼빈은 예정론을 일반 하나님의 섭리론과 분리시킴으로써 예정을 하나님의 전능이나 전지로부터 증명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스런 계획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며 교만과 불경건의 탑을 높이 쌓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신의(신의 : decree)라고 부르며, 예정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장차 이루어진 것(선택과 유기)을 스스로 결정하셨다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예정론에 대하여
첫째로, 하나님은 참으로 어떤 사람을 구원으로 선택하시지만, 다른 사람들은 영벌로 예정하시지는 않으신다.
둘째로, 이 이론은 하나님이 아직 짓지도 않은 죄로 인해서 어떤 사람에게 정죄를 내리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불공정함을 나타낸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죄를 짓도록 미리 예정하신 후에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때에 가서 그 죄를 인해서 우리를 처벌하시는 듯하다며 반대가 있었다.
이러한 반대에 대해서 대답할 말은 없으나 하나님의 뜻은 헤아려 알 수 없고 신비스럽다고 주장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우리는 죄를 지었으며, 유기된 자는 자신의 죄 때문에 정죄받았음을 계시를 통해서 안다. 이러한 모든 사실이 어떻게 동시적으로 참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헤아려 알 수 없다.
칼빈의 예정론은 하나님의 전능이나 전지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성경의 증언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서 이성으로 판단한 논리적 결론을 근거로 해서 정립한 예정론은 인간의 교만을 밖으로 표출해 내려고 하는 좋은 예에 불과하므로 거절할 수밖에 없다. 성경적 예정은 이중적인 것으로서-(선택과 유기의 예정)-인간의 미래적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선지를 근거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중 예정은 커다란 신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결코 저버리지는 않는다.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예정론은 이중적인 기능을 갖는데, 하나님의 온전하신 은총에 의한 확실한 구원의 보장이며 동시에 교회론의 근거가 된다.

교회

칼빈은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를 구별하였으며, 불가시적 교회만이 모든 선택된 자들에 의해서 산 자와 죽은 자를 막론하고 세워졌기 때문에 참된 교회이며 우주적인 교회로 보았으며, 가시적 교회는 우리가 이 지상생활에서 알아 볼 수 있도록 주어진 유일한 교회이며, 불가시적인 선택된 자들과 교제 (연합)를 나누고 있다는 징표로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가시적인 교회를 "외적인 수단"으로 두셔서 말씀의 선포와 신자들의 성화를 담당케 하셨다. 칼빈의 교회론은 가시적 교회에 관심을 가지며, 참된 교회의 두 가지 특성을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의 집행으로 보았다. 재세례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교인들의 개인적인 거룩성으로는 참된 교회를
가름하는 지표로 삼을 수 없으며 교회의 거룩성은 교회 교인들의 도덕적 순수성에 있지 않고 교회의 머리되신 분의 거룩성과 선택된 자들이 장차 받게 될 약속에 있다.
칼빈은 루터보다도 교회의 조직 면에 훨씬 더 많은 강조를 두었으며 루터는 성경에 위배되는 요소만 교회의 전통에서 배제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반면에, 칼빈과 개혁파 신학자들은 종교개혁을 좀더 철저하게 전개해서 신약성경 유형의 원시기독교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칼빈의 교회의 질서에 관한 가르침은 신약성경시대의 행습을 문자적으로 회복해서 그대로 따르자는 뜻이 아니고, 신약성경이 교회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을 되살려서 교회 질서의 모범으로 삼아 보려는 노력이었다.
칼빈의 교회론의 2가지 중요한 요소는 목회자의 선택과 훈련의 집행이다.
목회자의 선택은 교회와 목사가 연합으로 정해야 한다.
여기에서 칼빈의 주장이 갖는 의의는 개교회의 유일한 교회로 삼았다는 점이다.
둘째로, 치리가 교회에서 필요한 것은 교회의 거룩성을 보증해 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이 교회의 뜻에 의해서 공개적으로 짓밟히는 것을 방지하고 그리스도의 영예를 보전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훈련의 목적은 3중적이다. 그리스도의 몸과 주의 만찬이 황폐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교회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마저 부패되는 것을 방지하고, 죄인들을 회개로 이끌기 위함이다. 칼빈은 로마카톨릭의 행습을 반대하면서 훈련은 목회자와 교회가 연합해서 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례전

성례전의 정의를 칼빈은 성례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인데, 외적인 징표로 확증되며 또한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 향한 경건을 상호간에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례전 이론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칼빈은 로마 카톨릭의 입장과 또한 쯔빙글리파와 재세례주의자들의 이론도 다같이 피하려고 했다. 칼빈은 성령이 곧바로 성례전을 효과 있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성례전은 일차적인 것에 대한 상징으로서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과, 성례전은 의롭게 하는 능력과 은총을 부여하는 능력을 갖는다는 주장을 배격하며 성례전을 예수그리스도를 제공해 주고 나타내주는 말씀의 목적이외 다른 목적을 가질 수 없다고 하며 "주어서는 안될 것은 하나도 주어지지 않았으며, 역으로 거기에 주어진 것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고 하였다.
성례전은 세례와 주의 만찬 뿐으로서 세례의 목적은 신앙을 북돋아 주고 다른 사람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신앙에 대한 도움으로서 세례는 죄의 사면과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죽고 부활하며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참된 징표이다. 칼빈은 세례가 집전 순간에만 효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서 효력을 갖는다고 보았다.
또한 재세례주의자에 대해서 칼빈은 어린이들도 세례를 받아야 하며, 이 의식은 집전하는 사람에 관계없이 효력이 있다고 하였다.
세례를 집행하는 방법에 대해서 침례와 물뿌리기(sprinkling)를 다같이 받아들일 수 있으나 이 가운데서 어느 쪽을 택하든지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의 만찬은 신약성경에 있는 하나의 성례전으로서, 성찬식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가시적인 징표로서 성찬행위 그 자체가 이러한 연합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앙의 결과이며, 따라서 성령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성찬행위 그 자체가 이러한 연합에 효력을 어느 정도 미친다고 보는 생각은 마술적인 것으로 배제되어야 한다. 더우기 "징표"와 "본질"은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칼빈이 징표와 본질을 구별하는 것은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혼돈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며, 또한 먹고 마시는 행위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와의 영적 연합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칼빈은 만찬을 단순한 기념행사, 혹은 성물(elements)의 기능을 영적상징주의로 전락시키려 하지는 않았다.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대신한다는 단순한 뜻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성령의 활동을 통해서 참여자에게 유효함을 보여 준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의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징표를 너무 소홀히 한 나머지, 징표와 징표가 나타내는 비밀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나누어서는 안 된다. 둘재, 우리는 빵과 포도주를 과도하게 높임으로써 신비 그 자체를 어느 정도 흐리게 해서는 안된다"
만찬에서 가시적인 징표와 영적인 실체를 구별한 다음에도 그 실체에는 명확하게 밝혀야 할 3가지 사항, 즉 의의(the signification), 질료(the matter)와 효과(the effect)가 있다. 의의는 신체적인 징표가 말하는 약속에 있다. 성찬의 질료는 그리스도 자신이지만 신자들이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영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효과는 신자들에게 있는데 신자들은 구속, 의, 성화와 영원한 삶을 부여받는다. 따라서 성찬의 중심은, 그 내용은 그리스도 자신이며, 그리스도는 성찬 안에서 제사장의 직임을 계속한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신자들은 그 몸과 연합되며 또한 그 연합의 이익을 받게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게 된다. (생적 활력주의 : virtualism)
이렇게 해서 칼빈은 쯔빙글리, 재세례주의자 뿐만 아니라, 카톨릭과 루터파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성만찬적 임재를 배격하였다.

교회와 국가

칼빈은 교회와 국가 사이에는 관할 영역이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의 관심은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국가를 어떻게 보며 국가와 어떠한 관계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재세례주의자들이 국가는 불결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국가와는 어떠한 접촉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을 배척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국가는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며 하나님이 국가의 공직자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공의를 받들어 섬기는 기능을 부여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통치자들이 연약하거나 악독할지라도 그들의 권위에 개별적으로 항거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두 가지 예외가 있는데 이 두 가지 요소는 후대의 칼빈주의자들이 폭정이라고 간주하는 체제에 항거하였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첫 번째 예외는 백성의 이익을 옹호해야 할 의무를 가진 하위직 공직자들이 만일 폭군의 폭정을 중지시키지 못하면 그들의 책임을 기피하는 것으로 본다. 두 번째 예외는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왕권에 근거해서, 우리는 인간 통치자보다도 하나님께 더욱 복종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에 위배되는 시민법이나 요구를 할 경우에는 복종을 거부해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신학의 의의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기독교 교리의 끊임없는 조직화가 되기보다는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기독교인으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안내서가 되기를 바랬으며 이러한 그의 목회적 관심에 의하여 신학사상을 전개하였다.
또한 칼빈은 구원론 이외의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보임으로써 개신교신학에 괄목할만한 기여를 하였다. 그의 신학의 출발점은 성경이라기보다는 은총의 경험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이었으며 그의 목표는 정확한 교리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에 있었다.
칼빈의 교회론은 후대의 장로회 정치의 골격이 되었으며 많은 점에서 루터와 후기 칼빈주의자의 중간에 서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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