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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신학

by 【고동엽】 2022. 10. 18.

박경미교수 (이화여자대학교)

1. 요한의 독수리

오늘날 인간은 자본의 세계화와 기술의 도움에 의해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를 가깝게 느끼고 그야말로 인류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고독하다. 우리 동네 사람들, 우리나라 사람들과 공존 공생한다는 생각보다는 보이지 않고 알지 못하는 세계 시민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사람들의 어깨를 내리누른다. 기술적으로 그 어느 시대보다 발전되었지만, 그것은 내가 이용할 수 있고, 나를 위해 존재하는 기술이 아니라, 또 다시 힘겹게 습득하고 극복해야만 하는 하나의 숙제가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적 자유와 가능성이 확대된 오늘의 세계 속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개인은 자신을 더욱 왜소하고 무력하게 느낀다. 세계화 과정 속에서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내면적 위기에 봉착해 있으며, 삶의 의미 문제와 가치 문제에 깊은 절망을 느끼고 있다. 세계화는 경제적 측면에서의 국경허물기로 시작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성과 인간 내면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 된 것이다.
신기하게도 오늘날 세계화로 인해 인류가 겪는 위기상황은 초대 기독교가 형성된 후기 헬레니즘 시대 인간이 겪었던 내면적 위기와 비슷한 데가 있다. 알렉산더 대왕의 헬레니즘화, 세계화 정책 역시 오늘날의 세계화와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촉발된 측면이 강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을 정복한 이후 그리스 도시를 모델로 하여 형성된 도시들이 헬레니즘 세계의 경제와 문화생활의 중추가 되었다. 시리아의 안디옥, 소아시아의 에베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동방의 대도시들은 산업과 교역의 중심지였다. 동방과 서방은 경제적으로 개방되어 있었으며, 서로 교류하면서 경제적인 공동체로 성장했다. 동방과 서방을 가로지르는 물품의 교역은 필연적으로 인간과 사상의 교류로 이어졌고, 이러한 물적, 인적 자원의 교류로부터 제한 없는 사상 교류를 가능케 하는 세계 문명이 탄생하였다. 폴리스라는 좁은 우물이 아니라, 이른바 ''세계화''의 지평에서 사색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헬레니즘적 세계화에는 그늘이 있었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간의 첨예한 갈등과 대립이 도시와 농촌의 갈등 양상으로 뿐만 아니라 도시 안에서도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은 헬레니즘적 세계화의 혜택을 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대립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인과 이들이 흡수한 토착 지배세력이 소수의 지배계급을 형성하고 있었던 반면, 대다수의 노동 인구는 토착민들이었으며, 이들은 대개가 동방 지역의 후손들이었다. 이것은 특히 농촌 지역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대다수의 토착민들은 그리스 문화에 결코 흡수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헬라화 되지도 않았다. 그들은 전통적인 생활양식, 종교적, 사회적, 문화적 특성을 고수하였다. 이것은 표면적으로 하나의 통일체였던 헬레니즘 세계가 내적으로는 불평등한 두 부분, 그리스인과 그에 결탁한 세력, 그리고 토착민으로 분열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지배계급의 혁명과 항쟁의 분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66-70년의 유대전쟁은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로마제국에 대한 이러한 투쟁들은 정치 운동임과 동시에 종교 운동이었고, 계급적으로는 지배계급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저항적 성격을, 지역적으로는 서방에 대한 동방의 대항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다양한 민족과 문화의 결집으로 이루어진 제국 속에서 그 신민들이 로마의 전통 안에서 동질성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이해와 지배가 가능한 것 같았던 코스모스는 이제 무섭고 낯설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것으로까지 보였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근심이 잊혀진 또 다른 세계, 영원하고 영적인 세계에서의 구원을 갈망했다. 이들은 질서와 이성의 원리를 갈파하는 그리스 사상보다는 유대교의 유일신론, 바빌론의 점성학, 이란의 이원론 등과 같은 동방의 유산에서 위안을 얻었다. 이러한 후기 헬레니즘의 분위기 속에서 고대 동방의 종교들은 태생 지역의 강한 토착성에서 벗어나 대중 종교로 재탄생 하였다. 초대 기독교의 발생과 전파는 이러한 후기 헬레니즘 시대의 정치, 사회적, 영적 위기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 성공 역시 이러한 위기의식을 자양분으로 한 것이었다.
2000여 년 전 헬레니즘적 세계화 시대에는 동방 종교사상의 질적 변화가 이루어졌다. 억압받는 민중들의 사회정치적 저항의 에너지는 구원에 대한 종교적 열정과 연결되었고, 해방에 대한 민중들의 열망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비전으로 고양되었다. 이 시기의 종교들은 거대한 헬레니즘 세계에서 미아가 되어버린 개인들에게 귀속감과 안정감을 줄 뿐 아니라,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했다. 모순된 인간 삶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이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하는 동방의 종교들은 그리스의 이성 예찬에서 아무런 삶의 의미와 위안을 찾을 수 없었던 개인들의 종교적 열망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말하자면 헬레니즘적 세계화로 인해 촉발된 인간 정신에 대한 유례 없는 도전에 직면하여 인간 정신의 고양이 이루어진 것이다. 오늘날 인류도 이 유례 없는 기술의 발전과 경제적, 문화적 세계화에 직면해서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인간 정신의 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쇠락하고 말 것인가.
요한복음서는 헬레니즘 시대의 인간이 겪었던 위기를 무엇보다도 내성적인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위기상황의 외적이고 직접적인 계기들은 드러나 있지 않지만, 전제되어 있고, 그로 인해 인간 내면이 겪는 곤궁을 신약성서의 그 어떤 문서보다도 깊이 있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근거를 알 수 없는 세계의 적대성, 자신을 둘러싼 외적 세계의 억압을 뚫고 독수리처럼 하늘 높이 비상하고자 하는 초월에 대한 열망 같은 것들이 문학적 천재성과 신학적 독창성을 통해 사려 깊게 표현되었다. 이 글에서는 위에서 기술한 헬레니즘적 세계화 상황 속에서 인간 내면이 겪은 위기와 관련하여 요한복음서의 문학적 특징과 주요 신학적 주제들, 그리고 요한공동체의 사회적 상황을 기술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요한 신학을 이해함으로써 오늘날 세계화 속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의 문제상황을 이해하고, 이것이 오늘 우리의 신앙에 주는 도전의 의미를 성찰해볼 것이다.
요한복음서는 오랜 세월 신비롭고 영적인 분위기로 독자들을 매료해왔으며, 자주 영적인 복음서라고 일컬어졌다. 요한은 신약성서의 어떤 저자보다도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내면적으로,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해석해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와 그의 의미에 대한 장엄한 명상이라고 해도 좋다. 요한복음서는 그 어느 복음서보다도 영의 활동과 사물의 영적 의미에 몰두하며, 동시에 요한이 추구하는 영은 요한복음서 자체의 문서적 성격마저도 규정했다. 요한복음서 첫머리부터 등장하는 심오한 언어들은 그 의미가 잘 잡히지 않으며, 드디어 알았나 싶은 순간에는 이미 멀찌감치 날아가 버리고 만다. 그래서 결국 요한복음서 자체가 "불고 싶은 대로 불며....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3,8) 영처럼, 바람(ՐՍՅՕՌՁ)처럼 모호하면서도 묵직한 신비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요한복음서의 이러한 영적 경향은 흔히 공관복음서와 대조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공관복음서가 역사적 예수의 삶을 역사적으로 서술한 ''육의'' 복음서라면, 요한복음서는 말씀의 복음서, 영적이고 신학적인 복음서라는 것이다. 더욱이 요한복음서의 단순하면서도 추상적인 언어들로 인해 요한복음서의 영적인 성격은 쉽게 추상성으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요한복음서의 추상적 사유의 기원이 어디인지, 그러한 추상화의 기본 원리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을 요한 연구의 주요 주제로 삼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연구 경향이 요한적 사유의 한 측면을 밝혀준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은 요한복음서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다른 현실들, 즉 구체적인 사회, 역사적 측면에 대한 인식을 흐리게 하거나 더디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요한복음서 연구 분야에서 눈에 띠는 진전은 요한공동체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요한공동체가 연루되었던 당대 유대교와의 갈등과 회당축출이라는 뼈아픈 경험이 요한복음서의 예수 이야기들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요한이 예수 이야기를 하면서 사실은 자기 공동체의 이야기를 풀어나간 문학적 기법들은 어떤 것이었는지가 밝혀졌다. 요한복음서가 쓰여진 사회적, 역사적 상황, 그리고 요한공동체가 연루되었던 갈등들을 밝힘으로써 요한 해석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영적인 복음서로서의 요한복음서에 대한 이해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요한복음서 독자들이자 요한적 사유의 주체들이었을 요한공동체의 치열한 영적 경험과 고백의 과정을 보다 가까이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영적인 복음서로서 요한복음서에 피가 흐르고 살이 붙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요한복음서의 영적인 성격까지도 보다 구체적이고 몸적인 형태로 다가오게 할 것이며, 본문에 대한 통전적 이해로 인도할 것이다.
요한복음서에 대한 전통적 상징은 독수리였다. 브라운은 "요한의 독수리는 지상으로부터 높이 날아오르더라도 싸움을 위한 발톱을 드러내고 날아오른다"고 말했다. 이 말은 요한복음서의 영적 특성의 일면을 잘 드러내준다. 요한복음서가, 요한공동체가 영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고요한 반성을 즐기거나 영적 열광주의의 만족상태에 있다는 것인가? 요한복음서는 흔히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깊이 하나가 되는 관계로 이끌고, 그리스도의 의미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킨다. 우리가 이 복음서로부터 심오한 영적 통찰과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진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에게 힘을 주는 이 복음서의 깊은 영적 체험의 세계는 요한공동체의 삶과 투쟁을 통해 형성되었다. 요한공동체는 적대적인 세상 한가운데서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의 삶을 살았고, 이러한 증거의 삶을 통해 그들의 영적 체험은 구체적인 육의 형태를 얻었다. 요한의 독수리는 드높고 깊은 영적 하늘을 향해 까마득히 비상하지만, 이미 지상의 싸움에서 상처받은 독수리이며, 그 독수리는 지상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애정과 기대를 안고 또 한 번의 아름다운 착륙을 기대하며 하늘로 솟구친다.

2. 하나님의 언어, 인간의 언어

종교가 열어주는 깊은 체험과 감동의 세계 밑바탕에는 늘 심오한 만남의 사건이 자리하고 있다. 신비와 마주하는 두렵고도 떨리는 체험, 신적인 세계에 의해 자기 자신이 알려지는 체험이다. 요한복음서는 다른 어느 복음서들보다도 이 신비로운 체험의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요한복음서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의 대화상대자들은 이러한 신비의 세계와 마주하고자 하는 독자들을 대변한다. 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인,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신비인 예수를 알고자 하며, 그러한 신비의 세계에 의해 알려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와 나누는 대화를 보면 대화 상대자들 사이에 동일한 의사소통의 체계를 사용하는 정상적인 대화라기보다는 각기 언어의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불교의 선문답을 떠올린다. 하나님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를 뚫고 들어올 때 생기는 균열과 모순 같은 것들이 요한복음서의 언어와 신학적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의 대화를 읽을 때 독자들은 상호적인 의사소통의 부재, 단계적인 인식의 부재에 당황하게 된다. 요한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대화상대자들은 종국에는 예수라는 신비의 일단을 깨닫게 되지만, 그것은 결코 대화의 진전에 따른 단계적인 인식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신비를 알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에 비하면 그 깨달음의 내용은 지극히 불완전하고 속도는 더디다. 니고데모는 예수가 말하는 영적인 다시 태어남을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가는 것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며, 사마리아 여인은 "내가 바로 그이다"( )라는 예수의 결정적인 자기계시 앞에서도 "그가 내 과거를 다 알아맞히었으니 혹시 그가 메시아가 아닐런지요?"라고 참으로 답답한 반응을 보인다.
반면 요한의 예수는 사람을 안다. 요한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지만, 예수는 "사람의 속마음까지 다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을 의지하지 않았다고 한다.(2,23-4) 여기서는 예수가 표적을 보고 믿는 자들의 속마음을 알기 때문에, 그들 존재의 밑바탕에서 이루어지는 마음의 작용을 알기 때문에, 친밀한 관계 수립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요한의 예수는 오해들을 통해 자신의 가르침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만들며, 요한공동체만이 계시를 인식할 수 있게 한다. 유대인들과 세상은 의사소통 체계의 문밖으로 밀려나 있다. 요한은 믿음의 세계를 앎의 세계로 제시하지만, 그 ''앎''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되지 않는다. 예수와 세상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소리 없는 침묵의 벽이 가로놓여 있다.
요한의 독특하고 내성적인 언어들은 그가 안내하는 세계 안으로 일단 발을 들여놓지 않는 한 꽉 닫힌 채 오만하게 버티고 선 문처럼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이 손잡고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면 독자들은 그토록 불가사의하면서도 단순한 언어로 요한이 펼쳐주는 상징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문을 열어야 들어갈 테지만, 안에서 보면 문은 이미 열려 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요한 3, 8)는 영에 대한 요한의 말은 요한의 언어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몸으로 바람결을 느낄 수 있다. 바람을 손으로 붙잡을 수 없듯이 요한의 언어는 파악(把握)되지 않는다. 바람을 몸으로 느끼듯 요한의 언어도 몸으로, 삶으로 느껴야 한다.
그러므로 외적인 폐쇄성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서는 매력적인 목소리로 자신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라고 독자들을 초대하며, 독특한 자신의 사고의 흐름에 몸을 맡기라고 부른다. 여러 학자들이 요한 사고의 논리는 그의 계시이해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었으며, 요한의 사고유형을 원형적인 사고라고 했다. 말하자면 요한의 사고는 계시에 근거한 독특한 확신을 전달하는데, 그 안에서는 개념들이 서로 내적으로 관련되어 있어서, 어느 한 결론의 근거는 다시 다른 결론의 인식내용이 되고, 그것의 인식 근거는 다시 첫 번째 인식의 근거가 된다. 계속 이런 식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마치 하나의 원처럼 폐쇄적인 체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것은 원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분명하지 않고, 이미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이해되는 폐쇄적인 사고체계이다. 따라서 요한의 사고에서 계시에 대한 지식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석학적인 원 안에서 명시화될 수 있을 뿐이다. 일단 신앙이 있으면 원형적인 사고는 놀라운 설득력을 발휘하며,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자기폐쇄적인 언어와 사고유형은 그에 상응하는 현실을 전제한다. 요한의 원형적 사고의 폐쇄성은 요한복음서의 상징적 의미세계의 폐쇄성에 대한 표현으로, 요한공동체의 폐쇄성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폐쇄적인 체계 안에서 움직이는 요한의 사고를 요한공동체의 구체적인 삶의 영역 안에서 이해해볼 것이다.

3. 고통의 실상

요한복음서 3장에서 예수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요한은 세상으로부터는 실질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비극적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아마도 이 확신을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는 말로 표현했을 것이다. "위로부터 남, 거듭남"이라는 요한의 표현은 신적 세계와 인간적 세계 사이의 단절에 대한 요한의 과격한 신학적 인식을 드러내는 것인데, 사실 이러한 인식은 요한공동체의 뼈아픈 박해의 경험 속에 구체적인 삶의 자리를 가진다.
요한복음서는 신약성서의 어떤 문서보다도 유대인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요한복음서에서 ''유대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앙의 대표자들로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어째서 요한은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상을 묘사하는 데 "유대인"이라는 표현을 선택했는가? 거기에는 요한공동체와 유대교 사이의 긴장관계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예수와 유대인들 사이의 대결에 대한 요한의 묘사는 복음서 집필 당시의 갈등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한 구절들에서 요한의 서술은-마틴의 용어를 사용하자면-두 차원의 드라마로 이루어진다. 요한은 예수 이야기를 하면서 사실은 자기 공동체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9장의 소경치유에 대한 이야기는 중요하다. 이 본문이 요한공동체의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9,22;12,42;16,2) 개념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22절) 이 말은 회당으로부터 축출되는 것을 의미하며, 예수 당시가 아니라, 70년 유대전쟁 이후 유대교 재건 과정에서 새롭게 형성된 것이다. 70년 예루살렘 파괴 이후에는 바리새파만이 유일한 유대인 집단으로 살아남았다. 이들 대부분이 다른 집단들과 달리 로마에 대한 저항운동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바리새파는 예루살렘 파멸 이후 얌니아에서 유대교 재건운동을 벌였고, 이들이 다시 세운 유대교가 규범적인 유대교로 자리잡았다. 이 바리새파의 눈에 요한 기독교인들은 이단이었고, 출교의 대상이 되었다. 이 조처는 70년 이후 강제적인 것이 되었다. 요한 9장;15,18-16,4에 의하면 요한공동체는 이 조처로 인해 심한 타격을 받았다. 회당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은 곧 민족공동체 자체로부터의 추방이기도 했으며, 법적인 불확실성과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 빠지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회당축출은 로마 점령세력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파급효과를 지녔다. 회당으로부터 쫓겨난 기독교인들은 로마 당국 아래서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 없었다. 그들은 회당에 의해 잠정적인 선동자로 고발당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처럼 요한공동체를 초기 랍비 유대교에 의해 추방당한 이단자들의 집단으로 규정할 수 있다면, 유대교와의 이러한 긴장관계는 요한공동체의 가장 일차적인 문제로 간주되어야 하며, 이 시대사적인 배경에 비추어 보아야 비로소 요한복음서가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요한공동체 자신의 문제와 그에 대한 해결방식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요한은 예수 이야기를 하면서 공동체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이 점에서 요한복음서의 많은 설화들은 두 차원의 드라마로 쓰여졌다. 그리고 이 두 차원의 드라마는 요한공동체의 현재적 상황에 더욱 주목하게 한다.
이러한 요한공동체의 뼈아픈 경험과 관련해서 보면 앞에서 말한 ''거듭남''은 요한적인 상징세계의 폐쇄성을 보여주며, 요한공동체의 자기이해가 지닌 한 가지 특이한 성격을 말해 준다. 외부인으로서는 이 공동체에 접근하고 그들의 확신에 찬 논리를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에게는 새로운 출생의 기적, 다시 말해 새로운 상징체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두 세계 즉,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신적 세계와 인간적 세계, 사회학적으로 말하자면 요한공동체와 외부세계 사이의 대립과 불연속성을 누구보다도 뼈아프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리는 신비와 상징들이 나직한 슬픔의 색조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둘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소리 없는 침묵의 벽이 가로놓여 있다. 요한은 아무리 아름다운 말을 전해주어도 쓰디쓴 비난의 메아리로 되돌아오는 이 침묵의 벽을 뼈저리게 의식하고 있다. 단순하면서도 불가사의한 요한의 언어들은 이러한 뼈아픈 의식의 단련 속에서 연마된 결정체이다.

4.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 파라클레토스(paraclete)

신약성서에 의하면 신자들은 영 체험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예수가 죽은 뒤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을 담대한 선교자로 만든 것은 성령이었고, 영 체험과 교회의 선교 사이에는 긴밀한 관련이 있다.(사도 1,8) 공관복음서의 예수는 추종자들의 운명에 대해 말할 때 늘 그들에 대한 박해를 예언한다. 열둘의 선교는 거부당하고 박해받을 것이며(마태 10,14이하), 박해는 재판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영은 제자들의 증거를 도울 것이다.(마태 10,20; 마가 13,11; 누가 21,12)
요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요한공동체는 유대회당으로부터 박해를 받았고, 15,26-27에 의하면 파라클레토스는 박해 가운데서 선교의 성공을 가져다주는 힘이었다.(15,26) 법정적 기원을 지닌 요한의 파라클레토스 칭호 역시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다. 요한은 헬레니즘 그리스어에서 일반적으로 재판상황의 피고측 "변호자"를 의미했던라는 말을 영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하여 영을 인격적 존재로 묘사함과 동시에 영과 그리스도를 동일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했으며, 나아가서 단순히 "변호자"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포괄적인 의미로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영이 지니는 다양한 측면들을 기술했다. 본래 신약성서 저자들은 라는 중성명사로 "영"을 기술했으며, 그것은 인간을 사로잡고 변화시키는 특정한 신적 힘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직접 관련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요한은 "변호자"를 뜻하는 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영을 인격적 존재로 묘사하고, 그리스도와 긴밀하게 관련시켰다. 요한에 의하면 는 십자가에서 영광 받은 후 영의 형태로 현존하는 그리스도, 즉 영/그리스도이다. 나아가서 요한은 본래 이 말이 지니고 있던 피고측 변호자라는 의미를 넘어서 고발하는 검사, 위로자, 권면자 등 다양한 기능을 포괄하는 독특한 언어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
또한 이렇게 재판과 관련된 파라클레토스라는 말로 영을 묘사함으로써 요한은 영, 또는 영 체험을 재판상황이라는 복음서의 문학적 장치 안으로 끌어들였다. 말하자면 본래 영 체험이 관련되어 있던 박해의 상황이 요한복음서 안에 자주 나타나는 재판 문맥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복음서 전체에 걸쳐 예수는 마치 재판을 받고 있는 것처럼 그려졌고, 요한은 지금 재판을 통해 요한공동체가 받고 있는 박해는 그의 소송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은 요한공동체이지만, 요한공동체의 재판상황은 예수의 재판상황과 동일시된다. 재판 받는 공동체를 위해 예수가 공동체의 자리에 서 있다. 그리스도가 파라클레토스를 통해 공동체의 박해와 재판상황 안으로 오셔서 공동체의 재판을 자신의 재판으로 삼는다. 박해와 고난의 상황에서 파라클레토스를 통해 공동체와 그리스도는 서로 통하며, 하나가 된다.
따라서 파라클레토스는 공동체로 하여금 지금 여기의 삶에 집중하게 하는 영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현재 그들이 당하고 있는 박해와 선교의 삶 한가운데 지나온 하나님의 역사와 앞으로 펼쳐질 하나님의 미래가 집약되어 있다. 과거와 미래가 지금 여기 공동체의 삶 속에 통전되어 있다. 그러므로 파라클레토스는 박해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는 공동체의 현재 시간을 하나님의 시간, 종말론적 시간으로 만드는 영이었다. 그것은 요한공동체가 자신의 삶을 엄격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선교를 계속했고(17,18; 20,21), 그리스도를 살았다. 요한공동체는 파라클레토스를 통해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존재를 지속시킨다. 즉 그리스도를 살려낸다.
파라클레토스는 박해 가운데서 선교와 증거를 통해 그리스도의 계시를 지속시키는 요한공동체의 현재적 삶 속에 그 자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영 체험 속에서 요한공동체는 완전한 하나됨, 완전한 사랑을 경험한다. 떠나는 예수가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주는 고별담론은 이러한 하나됨과 완전한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말들로 가득 차 있다. 파라클레토스는 예수가 떠난 후 슬픔 속에 있는 공동체 안에서 분열을 하나됨으로, 슬픔을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바꾸어주는 일치와 위로의 영이었다. 영은 물처럼 조용히 스며들고, 바람처럼 고요히 불어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만물을 하나로 엮어주었다.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그리스도와 공동체는 하나이고, 요한의 목자와 양은 서로를 완전하게 안다. 이러한 일치의 경험이 요한적인 사랑의 토대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없는 상황에서 예수와 함께 사는 일이 파라클레토스를 통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들 가운데 영으로 현존하고 있다. 그리고 영 그리스도인 파라클레토스는 끊임없이 먼저 있었던 사랑을 회상시킨다.(14,26; 15,26-27)
공동체는 먼저 있었던 사랑의 기억 속에 산다. 요한의 목자는 양들을 위해 죽는다. 이것은 실제 현실 속에서 목자의 행태와는 맞지 않는다. 목자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지도 않으며, 당위적이 될 수도 없다. 설령 양들이 목자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소유물에 불과한 양들을 위해 주인인 목자가 목숨을 버리기까지 해야 할까? 양들의 생명보다는 목자 자신의 생명이 더 귀중하지 않은가? 분명 여기에는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상황을 과격하고 극단적으로 이해하는 요한적인 사고의 경향이 나타난다.
양떼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요한의 목자는 그리스도이다. 어째서 요한의 목자는 죽음을 무릅써야만 양들을 지킬 수 있는가? 어째서 요한은 이렇게 비장한가? 요한이 그리는 상징들이 이처럼 저마다 낮은 슬픔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은 요한공동체가 직면했던 특수한 상황이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선한 목자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위험한 박해상황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공동체를 구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상징할 수 있다. 이러한 위기 상황과 관련된 경험이 예수를 선한 목자로 그리는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 그들은 아직 선한 목자 예수가 보여준 사랑의 기억 속에 산다. 목숨을 바친 사랑의 기억은 박해와 죽음의 위협 속에서 서로를 배신하지 않고 살아 있게 하는 보루였을 것이다. 위기 상황에서는 이리를 보고 달아나는 당연한 행동이 양들의 죽음을 초래하듯이 자기 목숨을 얻기 위한 작은 행동이 상대방의 죽음과 공동체의 해체라는 크나큰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을 넘어서는 비장함, 생명을 얻기 위해 생명을 버리는 결연함이 요한공동체와 그 지도자에게 요구된다. 선한 목자인 예수가 양들인 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버렸듯이, 그래서 공동체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듯이 지금 위기의 상황에서 요한공동체는 서로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가장 큰사랑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다.(15, 13) 예수는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목자의 모범이 되었다. 그리고 목숨을 버린 큰사랑, 이것은 서로 통함, 서로 꿰뚫림, 완전한 앎이다.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인간적인 사랑의 토대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다. 양들의 서로 사랑의 근저에는 목자의 사랑이 있고, 목자의 사랑의 근저에는 목자를 보낸 아버지의 사랑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그분의 사랑하는 관계에 동참한다. 그럼으로써 구원받은 자들 사이의 완전한 하나됨, 완전한 사랑의 관계가 가능해진다. 요한이 전제하는 교회는 바로 이러한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와 신자가, 그리고 신자들 서로 서로가 이처럼 친밀한 공동성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은 ''영''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존재하는 영이 이러한 일치와 공동성의 토대이다.
요한공동체의 영적 열정은 어떤 빛깔을 띠었을까? 신약성서에는 영을 나타내는 다양한 상징들이 있지만, 그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불과 물이라는 상반되는 상징이다. 불로서의 영은 방언, 격렬한 신비체험으로 나타나고, 물로서의 영은 조용하게 스며드는 영, 깨달음의 영으로 나타난다. 아무래도 요한공동체의 영성은 후자, 즉 물로서의 영성인 것 같다. 회당축출이라는 생존권박탈의 위기상황에서 요한공동체는 인간의 의식을 초월하는 뜨겁고 황홀한 집단적 체험에 몰두하기보다는 공동체 삶의 한가운데서, 세상 한가운데서 그리스도와 하나되고, 그리스도를 살고자 했다. 그들이 체험한 영/파라클레토스는 그리스도와 하나되고, 그리스도를 살게 하는 일치의 영, 하나됨의 영이었다.
영이란 무엇인가? 영은 하나님과 통하고 나 자신과 통하고 이웃과 통하고 자연과 통하는 것이다. 영성은 신적 초월에 대해 열린 자세와 품성, 초월을 경험하고 이해하고 실천하는 자세와 마음가짐이다. 영은 문자적으로는 바람과 숨(히브리어 , 희랍어 , 라틴어 spiritus)이다. 바람은 보이지 않고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힘이다. 숨은 약한 바람, 생명 안에 있는 바람으로서 생명의 본질이다. 모든 생명은 숨을 통해 타자와 연결되고, 숨을 쉼으로써 존재한다. 그러므로 숨을 영이라 함은 몸과 영의 통전, 나와 나 아닌 것의 통전을 말한다. 영은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과 자기 자신과 통하는 것이다. 숨을 고르게 편안히 깊게 잘 쉬면, 마음도 건강하고 편안해지며 영혼도 힘을 얻는다. 동양적인 선도에 따르면 정(精 신체)-기(氣 몸의 기운)-신(神 정신과 혼)이 하나로 통할 때 도(道)가 통한다. 영혼, 신령은 인간의 원동력으로 초월적, 신적 생명, 지극한 생명기운과 통하는 것이다. 그래서 안으로는 신령함이 있고(內有神靈), 밖으로는 기의 조화가 있다.(外有氣化)
파라클레토스는 요한공동체의 숨이자 생명 에너지였을 것이다. 그것은 요한공동체의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의 영이었을 것이다. 즉 내적으로는 파라클레토스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통하고, 그럼으로써 안으로 신령함을 보존하고, 외적으로는 "아무 까닭 없이" 자신들을 증오하는 세상 앞에서 절망과 증오의 나락에 빠지지 않고 그들과 공존공생하며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영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을 근원적 삶에로 해방시키는 자유와 일치의 영이었을 것이다.

5. 포도나무와 가지: 요한공동체

초대 기독교 시대에나 오늘의 시대에나 기독교 선교와 기독교적 삶의 밑바닥에는 공동체적 삶이라는 토대가 있다. 더욱이 요한공동체는 박해받았고, 그러한 박해 속에서도 선교와 증거의 임무에 대한 분명한 자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공동체적 정체성, 자기결속력은 무엇보다도 중요했을 것이다. 외견상 요한복음서는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고, 집단적이고 전체적인 사고를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요한복음서 안에도 신자들의 공동체성을 이야기하는 중요한 부분들이 있다. 10,1이하나 15,1이하와 같은 본문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본문들은 직접적으로 공동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 안에 존재하는 공동체의 의의, 그리고 어떻게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하느냐는 것이 요한복음서의 중요한 관심사 중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요한 15,1-16,4a에서는 공동체 내의 상호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15,1-17), 그리고 공동체 밖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15,18-16,4a)와 관련하여 중요한 언급들을 하고 있다. 1-17절에서는 포도나무에 속한 가지들은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한다(2.5.8절). 공동체는 포도나무인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 구원을 얻었고, 이제 그러한 구원받은 상태를 공동체의 삶 속에서 사랑의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지속시켜야 한다는 것이다(12-17절). 이러한 사랑을 통해 공동체는 그들의 삶 전체에서 예수의 제자임을 입증하고,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8절). 이 점에서 부활절 이후 공동체는 계시의 전달자이며, 공동체의 사랑의 삶 전체가 계시의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구원과 믿음에 대한 교리적 진술이나 선동적인 구호가 아니라, 공동체가 보여주는 사랑의 삶이 세상을 향한 계시와 선교의 기능을 한다.(10,37-38;14,10-11)
한 가지 주목할 점은 15,1-17에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공동체의 거주장소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수는 공동체를 위해 장소를 예비할 뿐만 아니라 그 장소로 들어가는 입구, 아니 장소 자체가 된다. 요한공동체가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발전시킨 것은 아마도 시대사적인 상황 때문일 것이다. 요한공동체는 유대회당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고립되었다고 느꼈을 것이며, 새로운 안전성을 발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러한 안전성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거주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요한복음서의 예수는 "확대된 예수"로서 공동체는 그의 인격 안에서 살 수 있게 된다. 10,9에 나타나는 "문"으로서의 그리스도나 15장의 포도나무로서의 그리스도는 공동체가 거주할 수 있는 확대된 예수를 나타낸다. 예수 자신이 바로 사람들이 들어가는 공간이다. 이것은 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전부, 즉 그들의 세계가 되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의 일치와 하나됨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신비주의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따라서 요한복음서의 공동체이해에서 특징적인 것은 공동체와 예수와의 긴밀한 관련성이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거하며", "살고", "그 안에서" 그와 공동체를 이루도록 초대받는다. 그리스도가 거하는 세계는 사랑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리고 이 사랑 안에 머물며, 서로 사랑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13.34-5;15,9-10;12,17;17,26) 즉 15,1-17에 의하면 공동체성의 핵심은 공동체의 지체들을 그리스도 안으로 끌어들이고 사랑의 계명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교회는 몇몇 사람들이 의기투합해서 만든 제도가 아니라,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예수라는 인격체와 공동체 구성원들이 신비로운 방식으로 하나가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15,1-17에서 공동체의 본질에 대해 다루었다면, 15,18-16,4a에서는 공동체와 세상의 문제를 다룬다. 15,18-16,4a에 의하면 요한공동체는 동시대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에 대해 증거를 했다. 그러나 유대 당국은 요한 기독교인들을 회당에서 축출하고 그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요한공동체는 어째서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증오하고 박해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야만 했다. 15,18-16,4a의 근저에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이 구절들에서 요한은 "공동체"와 "세상" 사이의 이원론에 근거해서 그러한 증오와 박해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한편에는 예수로부터 "선택받고",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요한공동체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자기사랑 안에 갇혀 있는(19절) 적대적인 세상이 있다. 세상은 요한공동체를 미워한다.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는 요한공동체의 운명은 예수 자신의 운명과 동일하다. 요한은 예수와 요한공동체에 대한 세상의 증오는 "아무 이유 없다"(25절)고 말한다. 26-27절에서 요한은 이러한 박해의 상황 한가운데서 공동체는 이제 새롭게 증거를 재개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말하자면 요한은 고난에 처한 요한공동체에게 공동체의 정체성을 재확인시켜주고, 그럼으로써 공동체가 힘을 얻어 다시 박해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요한 15,18-16,4a는 공동체와 세상 사이의 이원론을 말하는데, 이 이원론은 공동체가 세상과 분리된 존재로서 고고하게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하여금 세상 안으로 다시 들어가게 하는 기능을 한다. 이원론적인 인식이 일원적인 통합의 행위로 인도한다. 말하자면 요한공동체는 스스로가 탈세상화 된 공동체이며, 본질적으로 세상과는 다르다는 인식을 재확인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다시 세상을 향한 선포의 상황 속으로 들어갈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서는 신약성서 문헌들 중 교회에 대한 관심을 그다지 드러내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왔지만, 사실은 특이하게 내성적이고도 신비로운 언어들을 통해 견고한 공동체의식을 보여주며, 권장하고 있다. 바울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이 몸에 속한 각 지체들은 하나라고 강조했던 것처럼, 요한 역시 한 포도나무에 속한 가지들로 공동체 구성원들을 정의하며, 나아가서 공동체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이어나가야 한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이것은 흔히 생각되어왔던 것처럼 요한복음서가 구원의 내적 고요 안에 안주할 것을 권하는 정태적 신비주의 문서가 아니라, 공동체를 거부하고 증오하는 세상 속으로 다시 뛰어들어 세상과 씨름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는 적극적이고 행동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준다. 또한 요한공동체가 자기폐쇄적인 집단인 것만이 아니라, 내적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구심력을 지니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엄청난 탄력을 받은 원심력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확장되어 가고자 했던 열린 공동체였음을 확인시켜준다. 요한공동체가 견지했던 그리스도 중심적 내적 응집성은 세상을 부정하고 멀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돌진하고 세상을 끌어안기 위한 것이었다. 아마도 이러한 역동성과 활력이 헬레니즘 시대 고통과 박해의 상황 속에서 초대 기독교, 그리고 요한 기독교가 놀라운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던 하나의 이유였을 것이다.

6. 맺음말: 생명 신학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구원의 현실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썼다면, 요한은 "생명"이라는 말을 쓰기를 좋아했다. 예수의 선포의 핵심적 내용인 "하나님 나라" 개념이 구원 경험의 역사적이고 사회적, 집단적인 차원을 잘 드러낸다면, 요한이 즐겨 사용한 "생명"은 구원 경험의 내면적이고도 개인적인 측면을 잘 드러내준다. ''생명''은 요한 신학에서 종말론적 구원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은 각기 구원경험의 상이한 측면들을 표현한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자신의 선포의 중심 개념으로 사용한 것은 아마도 신중심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관계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요한이 구원을 나타내기 위해 ''영원한 생명'', 또는 종말론적 ''영의 기름부음''과 관련된 표상을 사용한 것은 구원 사건에서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참된 자아라는 사실을 이 표상을 통해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 개념에 비해 구원의 사회학적 측면은 상실되는 측면이 있지만, 대신 생명이나 영이라는 말은 인격적인 사로잡힘을 잘 표현해낸다.
요한복음서에서 구원, 또는 종말론적 기대 실현의 내용이 "하나님 나라"보다는 생명과 영의 수여에 대한 표상으로 표현되었다면, 그 실현 시점에 대한 언급은 그리스도가 "영광받는" 때와 관련되었다. 주지하듯이 요한복음서에서 그리스도의 "영광받음"은 십자가 사건과 관련된다. 요한복음서에서 "영광받음"이라는 말은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요한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승천, 영의 기름부음 등 복합적인 사건들을 지칭할 때 ("영광스럽게 하다")이라는 단어를 썼다. 이 말은 결정적인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가리키며(2,4; 7,30; 8,20; 12,23.27; 13,1; 17,1),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아니라 그의 부활과 승천까지도 포함한다. 엄격히 말해 예수의 죽음과 부활, 승천 등은 시차를 가지고 진행되는 각각의 사건들이다.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 틀 안에서 설화의 단계적 전개를 통해 그러한 시차를 인정하고 드러내면서도 그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영광받음")를 사용함으로써 부활, 승천뿐만 아니라 십자가와 죽음까지도 "영광받음"이라는 단일한 종말론적 과정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서술하고 있다.
요한이 사용하는 "올려졌다"()라는 말도 비슷하게 복합적 의미를 지닌다. 요한복음서에서 이 동사는 십자가로 올려지는 것과 하늘로 올려지는 것 둘 다를 의미한다. 누가(사도 2,33; 5,31)는 승천이라는 의미로만 Օ՘ՏՕՍ이라는 말을 사용한 데 반해 요한은 하늘로 올리움, 즉 승천과 십자가에 올리움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 예수가 십자가 위로 올려지는 것은 그가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누렸던 영광에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따라서 실은 하늘을 향한 움직임, 즉 승천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요한은 십자가로 올려지는 것과 하늘로 올려지는 것의 시간적인 선후관계를 구별할 수는 있었지만, 신학적으로 이 둘이 뗄 수 없는 하나임을 알고 있었고, 이러한 인식을 ("올려졌다")이라는 독특한 이중의미를 지닌 말로 표현했다. 이중의미를 지닌 한 단어( )로 두 사건이 묘사됨으로써 시간적인 선후관계는 뒤로 밀려나는 대신 요한적인 신학적 인식이 전면에 부각된다. 다시 말해 참혹한 십자가가 곧 영광에로 올려지는 길이라는 그의 신학적 인식이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이 점에서 요한의 신학적 천재성뿐만 아니라 문학적 재능까지도 감지할 수 있다.
요한은 "영광받음", "올리움"이라는 말을 통해 종말론적인 "그 때"의 여러 사건들을 하나로 합쳤다. 따라서 영광에 찬 승천 역시 고통스러운 십자가와 연결되었다. 사도행전 1장에서 누가는 승천을 예수가 지상에서 사라지는 극적인 공중 승천으로 묘사했지만, 요한은 자신의 이야기에서 이 부분을 기술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은 예수가 지상에 있는 신자들의 공동체와 함께 하고 있다는 데 대한 암시일 수 있다. 요한의 경우는 영/파라클레토스를 그리스도로 체험하는 요한공동체의 삶의 현재에 초점이 놓이다 보니-시간적 선후관계라든가 그리스도와 파라클레토스의 구분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그러한 현재적 경험의 지평에서 상호 구분과 시간적 선후관계의 경계가 융합되어 서로 넘나들게 된다.
결국 요한은 종말론적인 "그 때"의 상이한 역사적 사건들을 알고는 있지만, "영광 받음"이라든가 "올리움"이라는 말을 통해 그것들을 신학적으로 통전된 하나로 그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이 과정을 통해 승천과 영의 수여라는 빛나고 영광스러운 사건들이 고통스러운 십자가와 연결되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십자가, 죽음, 부활이 있고 난 다음 이어지는 각각의 분리된 사건들이 아니다. 아니 각기 구분은 되지만 전체가 통합된 하나로서 기능한다. 십자가 없이 승천과 영의 수여는 없다. 이 점에서 십자가는 이미 그 안에 승천과 영의 수여라는 종말론적 기대의 실현을 내포하고 있다.
위와 같은 요한 신학의 전체 틀을 받아들인다면, 삶과 고통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 요한은 고통 뒤에 축복된 미래가 있으리라는 허황된 약속을 하지 않는다. 현재의 삶은 괴롭지만 죽고 난 다음에 천당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리라는 식의 판에 박힌 약속도 하지 않는다. 요한은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삶의 냉혹함으로부터 도피하거나 거짓된 미사여구로 삶을 미화하지 않으면서 심리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며,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시간의 무한성 한가운데서 영원한 하나님의 손짓을 발견하라고 한다. 수치스러운 십자가가 곧 영광받음이고, 하나님께로 올리움이듯이, 현재의 고통스러운 삶 자체를 축복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요한이 제시하는 삶의 방식은 영웅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결방식은 사실은 오래 전부터 인류가 지녀온 위대한 종교적 통찰들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던 것이기도 하다.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깔린 개인에게 시간의 주인인 하나님은 무자비하고 냉혹하게 느껴진다.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집어삼키고 파괴시키는 시간의 수레바퀴는 그 아래 깔린 개인의 감정이나 선악관념 같은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위대한 종교적 통찰은 인간의 고뇌와 시련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는 그러한 고뇌와 시련이 본질적으로 평화와 궁극적 생명에 이르는 길임을, 아니 자체 안에 평화와 생명을 품고 있음을 깨달으라고 한다. 신과 인간의 하나됨이란 선과 악, 차안과 피안, 남성과 여성, 나와 너의 온갖 대립을 포기하고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가능해진다. 대립 자체를 포기할 때 마음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으며, 믿음의 중심이 이동하면 신의 무섭고 잔인한 측면은 사라진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시간이 지니는 무섭고 잔인한 측면을 나타내며, 먹고 먹힘으로써 생명을 이어가는 삶의 현장을 상징한다. 그러나 요한의 예수는 십자가를 통해 공포를 극복하고, 광대하고 무자비한 우주의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을 자기 존재의 존엄성 속에서 해소시킨다.
종교적 통찰의 놀라운 신비는 삶의 비극과 처참함을 생명에 대한 찬미로 바꾸어 놓는 데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위대한 종교적 가르침들은 역설과 아이러니를 포함하고 있다. 요한복음서에서 자기 모순적인 하나님의 신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고 조촐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거한다는 성육신의 신비와도 통한다. 생명의 본질은 시간 안의 존재라는 데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이란 바로 이 시간이라는 양식에 대한 그의 애정이다. 그래서 성육신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은 생멸 하는 시간의 흐름 속으로 몸소 자기를 낮추어 들어온다.
요한은 고난을 당하는 하나님,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친 하나님에 대해 말함으로써 생명의 역설적인 진리를 웅변적으로 설파했다. 하나님인 그리스도의 육체는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에 못 박힌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다름 아닌 생명나무이다. 요한은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에 이미 부활의 생명 꽃이 핀 것을 보고 있다. 이러한 인식이 가능할 때 비로소 인간은 진정으로 생명, 즉 살라는 명령에 충실해질 수 있다. 이 살라는 명령 앞에서는 어떠한 개체의 불안도, 두려움도, 고통도 이차적이다. 이름 없는 한 송이 들꽃처럼 보아주는 사람 하나 없어도,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덧없는 생명일지라도 숨이 붙어 있는 한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있는 힘껏 살아낼 수 있다. 아마도 요한은 고통스러운 박해와 시련 가운데서 이러한 생명의 본질을 깨달았을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시련 속에 있더라도 개체적인 나의 생명이 보다 큰 대자연과 우주, 하나님의 생명과 맞닿아 있음을 깨닫고, 우주와 대자연, 시간의 주인인 신의 지엄한 명령인 생명, 즉 살라는 명령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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