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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최야곱)누가복음 11장37-42/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by 【고동엽】 2023. 1. 18.
■2022년 12월19일(월)■
 
(누가복음 11장)
 
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묵상/눅 11:37-42)
 
◆ 겉치레 종교인
 
(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집에 초청받으셨다.
이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이 대립각이 세워진 마당에 이런 초청을 했다는 것은 이 바리새인이 제법 양심적이거나 아니면 시험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집에서 식사하실 때 손을 씻지 않으셨다. 유대인들은 소위 청결에 대한 율법(결례)에 따라 밖에서 혹시나 묻혀왔을 부정을 씻는다는 의미에서 손을 부지런히 씻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율법의 지시는 아니고, 자기들이 확대하여 해석하고 나름대로 응용한 결론일 뿐이다.
 
유대인들이 모두 알고 있는 이것을 예수님께서 몰라서 손을 안 씻으셨을 리는 없다. 무언가 교훈하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손을 씻지 않으신 것이리라.
 
초청한 바리새인이 이상히 여기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책망하셨다. 음식 대접하겠다고 초청한 사람에게 책망하기란 쉽지 않지만, 주님은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아부하지 않는 분이셨음이 분명하다. 나도 이런 당당함을 배우고 싶다.
 
주님께서는 본질적인 문제는 건드리지 않고 매번 비본질적인 것에 목숨 걸고 있는 이들의 어리석음과 위선을 깨우치셨다.
 
대부분의 사람이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문제에 봉착해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부분은 엄청나게 강조하고 치장하지만, 그 마음에는 온통 거짓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 공자, 맹자의 예절 가르침이 대단해 보이지만, 모두 겉치레다. 세상 교육도 온통 겉치레다.
 
우리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성경 말씀에 아멘은 잘 하지만, 정작 지키려는 마음은 없다. 우리의 신앙조차 보여주기식이다. 
 
나의 신앙은 진실한가? 요즘 내 마음을 잡고 있는 생각이다. 잠깐만 긴장을 풀면 곧바로 바리새인의 길을 걷는 이 습관적인 위선이란….사람들 속에는 바리새인 같은 율법적인 사상이 가득하고 진정한 복음의 사상이 없다.
 
주님, 제 신앙이 진실하게 해주십시오.  
 
◆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오늘날 사람들의 선행은 카메라에서 비롯된다.
그토록 탐욕스럽고 거짓으로 가득한 자가 카메라 앞에서는 한없이 자비롭고 사랑이 가득한 자선가로 변모한다. 세상은 위선을 예술적으로 포장하는 방법을 알려줄 뿐 진정한 자비와 사랑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41) 고 하신다. 그 안에 있는 것이란 무엇인가? 사랑과 자비심이다. 거기에서 비롯된 구제가 일어나야 정상적인 선행이고, 깨끗한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절대로 이 경지를 모른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함이고, 조금 더 나은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자부심을 갖기 위함일 뿐이다. 결국 자만심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다.
 
예수님에게서 배운 자비와 사랑은 그런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님의 칭찬만을 기대하고 행동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이 경지를 알 수 있겠는가?
 
복음은 사람의 마음을 다룬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법을 새기시는 방식이 바로 복음의 방식이다(히 8:10). 우리의 선한 행위가 마음에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 그게 성도의 바른 모습이다.
 
예수님은 진실한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분이다.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닮을 수 있을까? 예수, 오직 예수를 믿어야 한다. 믿어야 그분의 성품이 포도나무의 진액이 되어서 가지인 내게 흘러들어온다. 그냥 지식으로만 아는 예수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예수가 되어야 한다.
 
◆ 우선순위
 
(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바리새인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금식, 십일조, 구제 모두 칭찬할만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우선순위다. 사소한 것을 엄청나게 강조하고, 정작 중요한 것은 사소하게 취급했다. 율법에 없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율법에 모두 있지만 우선순위를 살짝 바꾼 것이다. 본래 마귀의 전략도 그렇다. 성경 말씀으로 접근하지만, 우선순위를 살짝 바꿈으로써 성도들을 미혹한다. 십일조를 가장 큰 의무라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십일조를 바치고 난 후 자신이 제법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한다.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하면, 정말 엉뚱한 것을 회개한다. 성경 안 읽은 것, 기도 생활 소홀한 것, 예배에 빠진 것, 십일조 안 낸 것 등에 대해서는 큰 자책감을 느끼지만 정작 자기 마음속에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이기심, 자만심, 시기와 질투로 형제를 모함한 것들에 대해서는 별 가책을 갖지 않는다.
 
종종 이 본문을 가지고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십일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교하는 사역자를 본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놀랍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의 엉터리 우선순위를 지적하시는데, 결국 바리새인의 우선순위가 맞다고 착각하게 하는 그 궤변에 대한 책임을 심판 때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오늘 주님께서는 우선순위를 바로 잡으신다.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우선이다(마 23:23). 그리고 십일조다. 아니 복음적인 입장에서는 율법적 십일조는 폐기되었다. 십일조는 구약시대 곧 레위 지파, 제사장이 존재했던 시절에 있었던 헌금이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는 여전히 그들이 존재했다.
 
오늘날 신약 성도들에게 구약의 시스템에서 행해진 십일조를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레위 지파가 아니었기에 생전에 성도들의 십일조를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신약시대에서는 레위 지파, 제사장은 목사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다(계 1:6). 이제 우리는 십일조라는 강제 규정이 아니라 각각 마음에 정한 대로 헌금할 것(고후 9:7)이다. 그리고 주변의 어려운 형제들을 돕자. 그게 신약의 시스템이다.
 
십일조라는 강제화된 율법에서 해방되라. 그러나 먹고살 만하다면 적어도 구약 성도들의 십분의 일 기준 이하로 내려가지는 말자. 아니 더 많이 해야 할 것이다.
 
주님,
나의 신앙이 진실하게 해주십시오.
머리에서만 맴도는 말씀이 되지 말게 하시고,
내 속을 변화시키며, 속에서부터 흘러나와서 언어가 되고 행동이 되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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