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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하더라도 십자가의 길을 가라 / 빌1:1

by 【고동엽】 2023. 1. 17.

고독하더라도 십자가의 길을 가라                빌1:1             스크랩  

레너드 레이븐힐

『부흥의 세대여 통곡하라』중에서 (규장) 

 

체험의 승리

 

만일 사울이 다메섹(다마스커스)으로 가는 길에서 설교자를 만나 설교를 들었다면

그는 결코 변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변화된 것은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설교자만 만난 사람들, 설교만 들은 사람들은 변화되지 못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변화되지 않을 수 없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사울에게 나타나 그의 인생관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린 분은 바로

생명 자체이신 예수님이셨다.

 

과격한 종교적 열성주의자가 불로 침례를 주시는 분을 만난 것이다.

그 결과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고, 인류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틀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시여! 제2, 제3의 바울을 허락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소서”

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바울은 자기가 흠 없고 엄격하고 율법을 잘 지킨다고 믿었지만,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 중에 괴수임을 고백했다. ‘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그는 헤롯이 갓 태어난 아기 예수를 박해했던 것처럼

갓 태어난 초대교회를 무자비하게 박해했기 때문이다.

이런 박해는 어두운 지옥을 더욱 어둡게 만드는 절망적인 행위였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정교한 이론을 가지고 덤벼들어도 결코 설득당하지 않는다.

나름대로 대가를 지불하고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대가를 지불한 만큼 그에 상응하는 큰일도 이룬다.

바울의 변화는 실험실에서 한 번 해본 ‘실험’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체험’이었다.

 

자신이 겪은 것을 어떻게 스스로 부인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의 체험은 나름대로 대가를 요구하는 체험이었다.

그가 다마스커스에 가까이 갔을 때,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비추었다(행 9:3).

이 일 때문에 그는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모든 세상의 영광을 볼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은 바울이 그때까지 쌓아온 세계관과 종교관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그의 앞날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러나 그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아라비아 광야로 가서 호된 연단을 받았다.

이 점에 대해 그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는 많은 훈련과 고난을 받았을 것이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명문가 출신으로 깊은 학식의 소유자인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다 던져버리고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헌신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대속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

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나니”라고 고백했다(갈 2:20).

또한 그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다”라고 단언했다(빌 1:1).

우리도 이 진리를 두 손으로 꼭 붙들어야 한다.

 

우리가 바울처럼 말한다면 친구들이 입을 삐죽이며 조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조롱을 두려워하지 말라.

바울의 자아는 다 타버린 잿더미처럼 되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사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바울은 신약의 삼손이다.

그는 죄악과 거짓 종교의 빗장으로 굳게 잠긴 역사의 문을 돌쩌귀에서 떼어 집어던졌다!

정결케 하는 갈보리의 생명수를 미신으로 더러워진 이방의 마구간에 쏟아 부었다!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맺은 후 바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것들에 대항하여 싸우기 시작했다.

아덴(아테네)에서 그는 아름다운 복음의 수금(竪琴)으로 지식인들을 매료시켰다.

하지만 그가 갑자기 그의 노래를 끝내고 부활의 나팔을 불었을 때,

그들은 분개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간에 결코 굴하지 않았다.

그는 이방의 수많은 장애를 헤쳐 나가며 복음을 전했다.

험한 산과 높은 파도도 그를 막지 못했다.

그는 날마다 죽었다.

그는 고린도후서 11장에 기록된 온갖 고난을 이겨냈다.

 

그렇다면 그가 힘에 지나도록 고난을 당하면서도 결코 꺾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를 찾기 위해 터무니없는 억측이나 상상에 의존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그 답은 이제까지 잘 보존되어온 그의 영혼의 일기에서 발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이보다 더 확실한 답이 어디에 있겠는가?

여기서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것을 믿는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마라.

내 말은 바울이 이런 것들을 믿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바울은 이런 것들을 다 믿었다.

다만 여기에서 그의 관심의 초점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사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행하는 자가 더 이상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거주하는 죄니라”(롬 7:17)

라고 말할 정도로 인간성의 깊은 부패를 체험했던 그가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고 말할 정도로 영성(靈性)의 높은 반석 위에 올라서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바울은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이정표가 아니라 안내자였다.

“너희는 내 안에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그것들을 행하라”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모범적이었다(빌 4:9).

바울은 ‘살아있는 편지’였다. 또한 그는 비범한 삶을 살았다.

그는 자기를 이기고 절제하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절제, 극기, 고난으로 가득한 그의 삶을 본받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범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며 살지 않는가?

많은 편지를 쓰고 많은 교회를 세운 바울의 업적도 물론 비범하다.

하지만 바울의 비범함은 그의 고난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고린도후서 11장에 기록된 그의 고난을 읽어보라.

그가 순교자들보다 더 큰 고난을 당하겠다는 종교적 영웅심 때문에 그런 고난을 당했는가?

그가 성자(聖者)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그런 고난을 자청했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9)

 

그리스도를 얻고 끊임없는 순종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 이것이 그의 목표였다.

이런 목표 의식으로 충만한 그에게 지위, 혈통, 특권 같은 것은 단지 배설물로 보였다.

바울은 기도에서도 비범함을 나타냈다.

고난이 다른 사람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것이었다면, 기도는 자발적으로 취한 것이었다.

하지만 기도에 강한 사람은 고난에도 강해지는 법이다.

기도는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몸도 건강하게 해준다.

또한 기도는 불을 받게 해줄 뿐만 아니라 용기도 길러준다.

 

뿌린대로 거둔다.

 

바울은 그의 육체에 따른 친족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고 말하면서,

이것이 자신의 진실임을 증거해 줄 분이 성령님이라고 말한다(롬 9:1-3).

귀용 부인의 기도에도 이런 바울의 마음과 비슷한 심정이 나타난다.

브레이너드와 존 녹스 또한 비슷하다.

형제들이여! 우리 주위에서 열리는 기도회에서 이들처럼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았는가?

콩알만한 사랑 밖에 없는 사람들이 모인 기도회에서 큰 열매 얻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기도의 법칙은 농사의 법칙과 같다.

적게 뿌린 사람은 조금 거둘 수밖에 없고, 많이 뿌린 사람은 많이 거둘 수 있다.

많이 기도할수록 많은 응답을 받을 수 있다.

 

바울의 삶은 발전하는 삶이었다.

딱하게도,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사역의 상(床)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줍는데 만족한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사람들의 기초 위에 세우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추상적 이론을 만들어내느라고 머리를 짜내지 않았다.

 

다니엘의 환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지루하게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

수도원에 틀어박혀서 책과 씨름하며 신학 연구에 몰두하지 않았다.

미래의 종교적 신조(信條)에 사용될 문구(文句)를 매끄럽게 다듬는 자신의 능력에 감탄하며

자화자찬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전기(傳記)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삶이 어떠했는지 자신의 삶으로 직접 보여주었다.

그는 자기가 ‘빚진 자’라고 고백했다(롬 1:14).

만일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는 이 빚을 갚기 위해서 자기 영혼을 담보로 넣었을 것이다.

이 빚을 갚는 방법이 감옥에 가는 것이라면

바울은 그의 동료들이 마귀의 포로가 되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당하는 것보다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어 몇 년 동안 감옥에 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울은 온전히 그리스도께 충성했다.

그는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렸다.

그의 심장 박동, 그의 생각, 그의 걸음걸음, 그의 영혼의 갈망,

그는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 인간의 구원을 위해 바쳤다.

 

바울이 가는 곳에서는 부흥이 일어나거나 아니면 소동이 일어났으며, 때로는 두 가지 모두 일어났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부흥도 소동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 통탄스러울 뿐이다.

바울과 함께 부흥을 위해 일했던 자들이 다 그를 버렸지만(딤후 4:16),

그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위로와 힘을 얻고 계속 전진했다.

그는 암살을 모면했지만 그래도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고백처럼 날마다 죽었다(고전 15:31).

 

혁명적 삶의 실천자 바울

 

성령의 열매가 바울에게 임했다. 성령의 은사가 그를 통해 역사했다.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텐트 수선을 하면서도 그가 방문하는 도시마다 부흥을 일으켰다.

나의 형제들이여!

우리는 바울처럼 하지 못하고 단지 그의 곁에서 벌벌 떨고 있는 겁쟁이들이 아닌가?

그는 때로는 굶어 죽을 뻔했다. 때로는 산해진미를 앞에 놓고도 금식했다.

그는 자신이 저주를 받아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사람들 앞에서 구경거리가 될 정도로 고난을 당했던 바울,

혁명적 삶을 실천했던 바울, 성령으로 충만했던 바울,

이런 사람이 우리 가운데 나타난다면, 정치적 종교의 광신자들의 착각을 깨뜨리고

그들을 진리로 돌이키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의 불로 가득한 사람은 인류를 한 순간에 날려버릴 수도 있는

핵무기의 불을 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성령님에 의해 변화된 사람 바울은 우리 모두가 자기처럼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바울이 아그립파 왕 앞에서 한 말을 들어보자.

 

“각하뿐 아니라 이날 내 말을 듣는 모든 자도 이렇게 결박당한 것 외에는

나와 같게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 26:29)

 

악한 영들도 알았던 바울

 

바울이 에베소에서 겪은 일을 생각해보자(행 19장).

유대의 한 제사장 스케바의 아들들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을 의지하여 우리가 너희에게 엄히 명하노라” 라고 말함으로써

악한 영을 쫓아내려고 시도했다(행 19:13).

그러나 믿음 없는 사람이 악한 영 들린 사람에게 신학 용어나 성경구절을 읊어댄다고 해서

악한 영이 쫓겨나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견고한 요새에 눈덩이를 던져서 그 요새를 무너뜨리려는 시도와 다를 바 없다.

물리적으로도 스케바의 아들들은 악한 영 들린 사람 하나를 당해내지 못했다.

악한 영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그들을 눌러 이기자 그들은 상처를 입고 벗은 채 도망쳤다.

이 일이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알려지자,

그들이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였다고 한다.

 

또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했으며,

진기한 술수들을 쓰던 많은 사람들이 은화 오만 개에 해당하는 자신들의 책들을 모아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불태웠다.

하나님은 스케바의 아들들의 어리석은 행동이 변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악한 영이 “내가 예수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라고 물었다는 사실이다(행 19:15).

이것은 지옥의 세력이 예수님을 알듯이 바울도 알았다는 뜻이다!

바울에게 이보다 더 큰 찬사가 어디에 있겠는가?

 

어떻게 바울은 이런 찬사를 얻게 되었을까?

어찌하여 악한 영들이 바울을 알게 되었을까?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계시를 허락하셨다.

천사들도 그를 위해 일했다. 그가 찬미하고 기도했을 때 큰 지진이 일어났다.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크는 악한 영 들려 점을 치던 소녀를 사로잡고 있던 어둠의 세력의 사슬을 끊었다.

고린도에서 그는 절망의 수렁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고,

사탄의 세력이 흥왕하던 곳에 교회를 세웠다.

또한 후에는 가이사(Caesar)의 권속(眷屬) 중에서도 영혼들을 구해내어 하나님께 되돌렸다.

 

바울은 왕들 앞에서도 당당했다.

예를 들면, 아그립파 왕 앞에서 “각하뿐 아니라 이날 내 말을 듣는 모든 자도

이렇게 결박당한 것 외에는 나와 같게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라고 말했다(행 26:29).

그는 당시 세상 지혜의 본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아테네 ‘군신(軍神)의 언덕’(Mars Hill)에서

부활의 진리를 전함으로써 지식인들을 놀라게 했다.

바울이 살아 있는 한, 지옥의 세력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 안에 사신 그리스도

 

그렇다면 바울의 무기는 무엇이었는가?

그는 어디에서 그의 칼날을 갈았는가?

그는 종종 “내가 확신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여기에 그의 승리의 비결이 있다.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가 그를 단단히 붙잡았던 것이다.

주님이 변치 않으시듯이, 주님의 말씀도 변하지 않는다.

바울의 닻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의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의 힘은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이었다.

말씀은 마귀의 전략에 대하여 그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었다.

바울은 지옥세력의 전술전략에 정통했고,

그 때문에 지옥세력은 전력(戰力)에 큰 손실을 입었다.

심지어 그를 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을 때에도

누군가 그것을 알려주어 지옥세력을 몹시 좌절시켰다.

 

바울의 승리의 비결은 무엇인가?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바울이 살지 않고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

이것이 바로 그의 승리의 비결이었다.

바울은 죽었다.

그러나 대신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셨다.

이 진리를 우리에게 적용하는 첫걸음은 우리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이다.

우리는 죽었는가?

남들의 칭찬과 비난에 대해 죽었는가?

사람들의 평가와 유행에 대해 죽었는가?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대해 죽었는가?

내가 이룬 일에 대해 다른 사람이 칭찬을 들을 때 분개하는 본능에 대해 죽었는가?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더불어 죽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라”라고 말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오셔서 인간 안에서 사시는 유일한 종교이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이든, 사람의 육체이든, 더 이상 육체를 상대로 싸우지 않았다.

그는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두움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에 대항하여 싸웠다(엡 6:12).

 

이제 당신은 어찌하여 악한 영이 “내가 바울도 알거니와” 라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악한 영의 세력과 싸웠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떠날 날을 얼마 남겨놓지 않았을 때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 라고 선언했다. 악한 영들은 이 말을 듣고 치를 떨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들에게 입힌 손실은 바울이 입은 손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기 때문이다.

그렇다. 바울은 지옥세력을 떨게 만든 사람이었다.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라

 

바울이 역경 앞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주었던 또 다른 닻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였다.

그는 “우리가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설득하거니와”라고 말한다 (고후 5:11).

그는 인간이 ‘타락한 존재’라고 말한다.

며칠 전에 나는 스크린 위에 투사된 화면을 보았다.

그런데 초점이 맞지 않아 무슨 모양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 손을 내밀어 슬라이드의 초점을 맞추자 거짓말처럼 깨끗한 화면이 나왔다.

잘못된 것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과 손을 대어 고치는 것은 이렇게 차이가 있다!

영적인 진리를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인 인간들이 자신들의 타락한 상태를 보려면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들의 눈을 뜨게 해주셔야 한다.

 

주님을 철저히 사랑한 바울은 죄를 철저히 미워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눈에는 인간들이 ‘탕자’로 보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반역자’로 보였다.

‘의(義)를 떠나 방황하는 자’로 보였을 뿐만 아니라 ‘악을 꾸미는 공모자’로 보였다.

악한 일을 꾸미는 자들은 용서를 받든지 아니면 징벌을 받게 된다.

죄를 언제까지나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향한 사랑이 불같이 타올랐던 바울도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서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들에게는 맹렬히 분노했다.

 

바울은 또 “내가 이 한 가지 일을 행한다.”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그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사람이었으며, 그 일은 곧 영혼구원이었다. 바울에게는 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는 야심이 없었기 때문에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었다.

명예가 없었기 때문에 명예를 잃어버릴까봐 노심초사할 필요도 없었다.

재산이 없었기 때문에 재산을 잃을까봐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깨어졌기 때문에 깨질까봐 불안해 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죽었기 때문에 누구도 그를 죽일 수 없었다.

가장 낮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었다.

이제 당신은 어찌하여 악한 영이 “내가 바울도 알거니와”라고 말했는지 이해할 것이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 때문에 지옥세력은 크게 골머리를 앓았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완전성

 

바울이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정신으로 싸울 수 있도록 붙들어준

또 다른 닻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완전성이다.

그가 선포한 대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롬 3:2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하실 수 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신 어린양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바울은 그리스도의 속죄에 제한이 없다고 믿었다.

그는 영혼구원의 열정으로 불타는 사람이었으며, 더욱 불타오르기를 원했다.

 

영원한 지옥이 버티고 있는데 썩어 없어질 이 세상의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사람들을 구해야 할 판에 지옥세력의 술책이 무엇이 두려운가?

사람들은 이미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에,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나면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지옥으로 연결된 ‘악(惡)의 하수구’ 속으로 지금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빨려 들어가고 있다.

이것이 사실인가? 바울은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었다.

“주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힘을 내소서.”라고 부르짖어야 한다(사 51:9). 내 귀에는 바울이 이렇게 부르짖는 소리가 들린다.

 

“저를 주님의 병기로 삼아주소서!”

 

내세의 소망과 그리스도의 심판

 

바울이 지옥의 세력을 떨게 만들 정도로 강력히 싸울 수 있도록 붙들어준 다른 닻은

 “몸에서 떠나 주님과 함께 있는 그것이다” 라는 확신이었다(고후 5:8).

사람이 죽으면 수면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이생의 생명을 떠나면 곧바로 내세의 생명으로 들어간다.

우리의 언어는 영원을 표현하지 못한다. 영원만 등장하면 우리의 상상력은 비틀거리다가 쓰러지고 만다.

 

바울이 채찍질, 투옥, 금식, 피로, 고통을 ‘가벼운 고난’ 으로 여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죽은 다음에는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소망 때문이었다.

지옥의 세력이 바울에게 총알과 포탄을 퍼부었지만, 이런 소망을 가진 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제 당신은 어찌하여 악한 영이 “내가 바울도 알거니와”라고 말했는지 이해하겠는가?

 

바울이 믿음의 경주를 온전히 끝낼 수 있도록 붙들어준 또 다른 닻은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자 선악간에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으로 이룬 것들을 받으려 함이라”는 확신이었다(고후 5:10).

영원한 가치를 늘 마음에 새기고 살면 시험을 당해도 그것이 큰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생에서 올바로 사는 것이 내세를 준비하는 길이다.

물론 여기서 올바로 산다는 것은 단지 정직하게 사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 올바로 사는 것이다!

 

바울은 “너희는 내 안에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그것들을 행하라.”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을 했다(빌 4:9).

그는 우리가 안심하고 본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완전히 헌신하고 완전히 감사하며 완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당신은 어찌하여 악한 영이 “내가 바울도 알거니와”라고 말했는지 궁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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