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마틴의 생애를 들어보십시오
그는 검은 사마귀가 자기 손등을 덮고 있었습니다
얼굴 일부에도 눈썹에도 검은 사마귀가 있었고
그래서 속눈썹도 그슬러있었습니다
그는 환영받는 외모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는 캠브리지 장학생이었지만
그가 캠브리지에 다닐 때 모두가 크리켓 경기를 할 때
그는 나무 뒤 어딘가에 서서
가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아마도 자기 신체를 덮은 사마귀를
자기 얼굴도 비호감임을
너무 의식했나 봅니다
그렇지만 그는 머리가 좋았습니다
한 젊은 여성이 이 남자를 사랑했습니다
왜냐면 그의 마음이 따뜻했고 그의 행동이 품위가
있었거든요 그녀의 이름은 리디아였죠
헨리 마틴은 (20대 초반 경)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어느 설교자가 인도에 관해 말했습니다
거기에 선교사가, 복음이 필요하다고요
20대의 헨리 마틴은 마음이 동요되고 쿵쾅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인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필요성을 들으면서요
그는 예배당을 빠져나와서
그는 하늘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이 자기를 원하시면 (가겠습니다)
비록 자기는 그러기에는 부족한 종이나..’
여러분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그는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여성의 집으로
가서 노크했습니다
깊은 열정, 사랑, 연애감정, 헌신하고픈 마음으로
자기 가슴을 뛰게 한 여성 Lydia 말입니다
그는 말했죠
‘리디아, 하나님이 나를 인도로 선교사로 가라 하셨소
나는 그런 부름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가라 하시므로
우리가 결혼한 후에 나와 함께 가주시겠어요?
인도로 함께 가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십시다!’
그녀는 ‘헨리, 세상에서 내가 결코 가고 싶지 않은 곳이
있어요 나는 인도로 가고 싶지 않아요’
그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나요?’
그녀는 ‘나도 모르겠어요 그저 내 마음이 그래요
저는 가기 싫어요’
그는 그녀를 사랑했으므로 간청하고 애원했어요
아니면 단기간이라도 자기를 믿고 따라와 줄것을요
결국 그들은 이 문제로 다투게 되었는데
헨리 마틴은 말하길 ‘하루는 자기가 기도하는데
그는 이 문제로 갈등했다고 합니다
리디아인가, 인도인가
리디아인가, 인도인가
기도하다가 깨달아졌죠
리디아냐 인도냐의 문제가 아니다
리디아냐 하나님이냐의 문제다'
(리디아를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하겠다)
결국 그는 내 Ravi Zacharias 나라 인도로 왔고
인도에서 페르시아까지 사막을 사슬에 묶여져 건너갔고
거기서 그는 괴롭히는 자들의 손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오늘날 캘커타에는 그의 이름을 간직한 교회들이 있어요
그는 먼저 인도에 왔다가 페르시아(이란)로 갔으며
그는 31세에 죽었는데, 그가 죽기 전에 세상에
뭘 남겼는지 아십니까?
31세에 그는 힌두스탄어, 페르시아어, 아랍어로 번역된
신약성경을 남겼습니다
신약을 3개 언어로 한 사람이
31세에 죽은 사람이!
당신은 하나님의 뜻에 배고프고 목마르십니까?
바라기는 여러분이 기꺼이 제단에 올려드리기를!
오래동안 매달려(갈등해) 오던 것들을요
◑힌디어와 페르시아어 성경 번역 선교사 헨리 마틴 출처
내 (존 맥아더 목사)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선교사로 헨리 마틴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인도에서의 오랜 기간에 걸친 고난 많은 섬김의 삶을 산 뒤
그는 페르시아(오늘의 이란)로 가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신약 성경과 시편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인도에 머물러 있으면 더위 때문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페르시아는 인도보다 더 덥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페르시아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페르시아어를 배운 다음
9개월 만에 신약 성경 전체와 시편을 번역했습니다.
그 후 그는 페르시아 국왕의 재가를 받기 전에는
성경을 인쇄하거나 배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812년, 그는 인도에서 테헤란까지 960Km를 여행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는 왕을 만날 수 있도록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발길을 돌려 영국 대사를 찾기 위해 다시 640Km 를 여행했습니다.
대사는 그에게 소개장을 주며 다시 그를 640Km 떨어진 테헤란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마틴은 이 긴 여정 내내 노새를 타고 다녔습니다.
밤에는 길을 떠나고 낮에는 겨우 삼베 한 조각으로
찌는 듯한 사막의 태양 빛을 피하며 휴식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테헤란으로 다시 돌아와 왕을 알현했고
페르시아에서 성경을 인쇄하고 배포할 수 있도록 왕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열흘 뒤 숨을 거두었습니다.
숨을 거두기 직전에 그는 일기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과수원에 앉아 감미로운 위로와 평안을 누리며 나의 하나님에 대해 생각했다.
고독 속에서 나의 벗, 나의 친구, 나의 위로자이신 그분을 생각했다.”
제가 많이 사랑하는 John MacArthur (존 맥아더) 목사님의 책 『Hard to Believe』
(『값비싼 기독교』)에서 가져 왔습니다. 이 책의 일독을 강하게 권합니다.
헨리 마틴은 분명히 편안한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그의 삶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사용하신
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헨리 마틴의 영혼은 진정한 제자도의 핵심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목표 의식에 완전히 사로잡혀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름을 기억할 가치가 있는 사람 가운데
편안한 삶을 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님이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부르실 때는
분명히 우리를 편안한 삶으로 부르시지는 않습니다.
오늘부터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데, 고난 주간만이 아니라,
평생에 이 십자가 제자의 길을 기쁨으로 살아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10: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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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선교한국에서 가져왔습니다)
“인도를 위해 나 자신을 불태워 버리겠다.”
1812년, 겨우 31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던 헨리 마틴은
그 자신이 말한 그대로 인도를 위해 자신의 삶을 불태운 사람이었습니다.
동인도회사의 방해가 여전했지만, 인도에서의 선교사역에는 많은 자원자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아무런 말썽 없이 인도에 선교사로 들어오는 길은
동인도회사의 전속 목사가 되어 들어오는 것뿐이었는데,
이런 전속목사로서 커다란 선교적 업적을 이룬 사람이 바로 헨리 마틴입니다.
그는 1806년 인도에 도착하여 1812년 죽음에 이르기까지 매우 짧은 기간 동안만 사역했으나,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한 선교사 중 최고의 성경번역가로 여겨졌다.
헨리 마틴은 영국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캠브리지의 수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 누이의 끊임없는 기도, 목사님과의 영적 상담,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 등을 읽고 난 후의 감동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하나님께 헌신하게 됩니다.
그는 브레이너드의 희생적인 선교사역에 큰 자극을 받고
윌리엄 캐리의 인도사역자 모집에 적극 응하게 되어
해외선교를 인생의 유일한 목표로 삼게 되었습니다.
마틴은 매일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기도에 많은 시간을 쏟았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 힘쓰기 위하여 마틴은 먼저 자아를 깨뜨리는 일부터 하였는데,
독신생활 역시 자신을 깨뜨리는 한 가지 방편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결혼의 안락한 생활을 원하는 모든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에 감사를 드렸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더 많이 일할 수 있는 독신생활”을 선택하였습니다.
1805년 영국 국교회 성직자로 서품을 받고, 동인도회사의 전속목사로 임명받은 그는
1806년 인도에 도착하였습니다.
윌리암 캐리와 세람포르 선교사들은 마틴의 재능을 알고 성경번역 사역을 권유하였습니다.
동인도회사 직원과 그 가족 목회를 하면서도 마틴의 관심은 인도선교였습니다.
그는 신약성경을 수백만의 아시아인들이 읽게 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4년간 군대에 종군하여 복음을 전하면서 학교를 세우고,
동시에 신약성경을 힌디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1810년 중앙아시아의 열사의 기후를 이겨내지 못한 그는
힌디어 신약성경 출판을 앞두고 병이 나 치료를 하게 되었고,
이후 페르시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페르시아어 성경번역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1812년 건강이 다시 악화된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소아시아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쓴 그대로 인도를 위해 자신을 불태운 선교사로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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