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어떻게? 2 요일2:17, 행2:17, 약1:27, 눅21:26, P1 출처
데렉 프린스
▶계속해서 사도행전 2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하나님은 그의 영을 무슬림들에게도 부으십니다.
초자연적인 계시, 꿈, 환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부으십니다.
저는 초자연적 현상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주님도 좋아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행2:17~18
이것이 성령님이 깃발을 올리실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젊은이들, 여러분의 아들과 딸, 그리고 젊은 남종과 여종에 중점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인데,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일들을 행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도록 문을 여는 열쇠는
기도, 더 많은 기도, 더 많은 기도입니다.
오늘날 미국의 대다수 성도들이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기도라고 믿습니다.
▶저는 목사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목사는 어떻게 성도들을 움직이게 하는 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목사는 만약 자기 성도들이 무슨 일을 하기 원한다면
그 일에 대해 6개월 동안 설교한다고 했습니다.
그 기간이 끝날 때쯤이면 성도들은 자기들이 그 일을 생각해 냈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여기 계시는 목사님들과 리더들에게 드리는 하나의 제안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도들을 기도하게 하려면, 먼저 여러분이 기도를 시작한 다음,
기도에 대해 설교하고, 설교하고 또 설교 하십시오.
이 나라는 지금 가장 중요한 모임이, 바로 기도모임이 되어야 할 상황입니다.
주일 아침에 기도모임을 가져 보십시오.
▶제 머리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몇 년 전 우리가 선라이즈 키에 살 때, 우리 집에는 수영장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우리 대가족 중 한 가족이 놀러 왔습니다.
4살쯤 된 손자가 그 때 수영장 주위를 뛰어다니다 물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누군가 그 아이를 물에서 건져냈고, 우리 앞에 서서 물을 뚝뚝 흘리던 손자는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뭔가 좀 해요! 누군가!”
저는 그 말을 교회를 향해 하고 싶습니다. “뭔가 좀 하십시오! 누군가!”
그저 앉아만 있지 마십시오, 주일날 10시에 예배만 드리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이 나라의 위기는 심각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디모데후서 3:1-5절 말씀처럼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1.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근본적 문제인 자기애를 다루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말했던 것처럼, 이것이 경건의 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경건의 능력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을 이타적이고
다정하고 희생적인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저는 그 변화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저는 그 변화를 체험해야 합니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형태의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원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4-25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기독교인에 대한 가장 단순한 정의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려면 두 가지 전제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조건을 충족하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고 시도할 수는 있겠지만, 따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자들을 배제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바로 자기애를 다루는 것입니다.
자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원하는 건, 내가 좋아하는 건, 내 생각은, 날 도와줘,
날 위해 기도해줘, 날 치유해줘,”
그럼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십시오, “입 다물어! 난 네 말을 듣지 않아.
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만 들어, 난 성령님이 말씀하시는 것만 들어,”
▶사역을 하면서 저는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며칠 전에 삶이 완전히 망가진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재정과 건강과 인간관계 등 모든 것이 망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편지를 받고 저는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대개의 경우 자기중심적입니다. “나야, 내 문제야, 내 아픔이야.”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문제에 집중하는 것을 멈추고
주님께 집중하십시오. 당신이 문제에 집중하는 한 해결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 두 가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어떤 분이 이런 정의를 내려주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이 교차하는 곳이다.’
여러분이 자신의 뜻을 행한다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은 영광스러운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여기서 그는 마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피가 하는 일을 어떻게 증언하는지 여러 곳에서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그런 사람들만 사탄을 이겨냈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신학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헌신을 두려워합니다. 헌신된 기독교인은 사탄을 떨게 합니다.
헌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처형장입니다.
▶1950년대에, 저는 런던의 중심에 있는 스피커스 코너(Speakers' corner, 地名)
에서 말씀을 전하곤 했습니다.
그 곳에서는 누구든지 영국 왕실을 비난하지만 않는다면,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한 주에 3번씩, 8년 동안 설교를 했습니다.
그 기간 중에 저는 매우 생생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에서 한 남자가, 스피커스 코너 같은 곳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설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의 설교 내용은 좋았는데, 그를 가까이서 보니 생김새는 싫었습니다.
웬일인지 그의 몸은 구부정했고, 한쪽 발이 만곡족 이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그것이 이상한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 정확히 같은 꿈을 또 꾸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나에게 무언가 말씀하시려는 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 사람의 설교는 좋지만 생김새는 싫습니다. 그 사람은 누구인가요?”
주님이 뭐라고 하신 줄 아십니까? “네가 그 사람이다.”
그 말씀은 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고, 신약을 조사하게 했습니다.
그때가 부활절 기간이었습니다. 저는 십자가형을 묵상하고 있었는데
제 마음 속에 이런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저는 세 십자가가 있는 갈보리 언덕 주위를 걷고 있습니다.
가운데 십자가는 다른 두 십자가보다 높았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저와 짧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성령님이 말씀하시길, “누구를 위해 가운데 십자가가 만들어졌는가?”
그리곤 “대답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해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십자가는 바라바를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렇지만 마지막 순간, 예수님이 그 자리를 대신 하셨습니다.”
그러자 성령님이 말씀하시길, “나는 예수님이 네 자리를 대신 한 줄로 생각했다.”
제가 대답했습니다. “네, 그랬습니다.”
그러자 성령님이 말씀하시길 “그럼, 네가 바로 바라바구나.”
저는 그 계시에 대해 한 번도 왈가왈부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갑자기 제 본성이 얼마나 부패했는지 보게 되었습니다.
제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정결함이나 선함이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유일한 해결책이 바로 처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해결책은 처형’이라는 짧은 문구를 만들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여러분과 제가 가야 할 곳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처형장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데렉 프린스는 너무 급진적 radical이야”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신약도 급진적입니다. 기독교는 급진적인 종교입니다.
우리가 급진적이지 않다면, 우리에게 가해지는 압박을 견뎌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상황을 맞설 수 있을 것인지 두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먼저, 환란은 어떤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몰아넣습니다.
환란은 어떤 사람들을 더 완악하고 반항적으로 만드는 반면
환란은 어떤 사람들의 마음을 열리게 합니다.
◑2. 백성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환란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환란을 기꺼이 통과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7:9절에 아름다운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장로 중 하나가 요한에게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인지 묻습니다.
요한이 “저는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아시나이다.”라고 하니
14절에서 그 장로가 대답합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
헬라어로는 ‘나오고 있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요한은 사실 그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장면을 본 것입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 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큰 환난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직 이곳에 당도하진 않았지만 오고 있습니다.
그 환난에 일어날 일 중 하나는, 아무도 셀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저의 예언적인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주님께로 돌아올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14만4천의 이스라엘 신자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열방으로 보내어 무수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환란이 그들에게 닥치기 전까진, 주님께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환란을 주시는 목적은, 사람들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들의 간절한 필요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가복은 21:26절에는 말세에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가 바로 우리가 진리를 말할 때입니다. 사람들이 무서워하며 기절할 때,
우리가 진리를 말해 주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늘과 땅을 모두 흔드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 때에 흔들리지 않는 나라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돌이키며 “나도 저 나라에 속하고 싶어”라고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흔들리지 않는 나라에 속해 있습니까?
흔들리지 않는 나라에 속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을 따른다면,
자기 목숨을 버려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기꺼이 자아를 내려놓을 수 있습니까? 기꺼이 자신의 혼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자기 본위적인 야심, 탐욕, 이기적인 혼에게
“너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 너는 더 이상 나에게 힘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련의 사건들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탄생하기 전에 일어날 산모의 진통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은 “주님, 숨을 곳을 보여주세요. 도망치고 싶어요.
안전한 곳에 있고 싶어요.” 일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재앙의 한 가운데 있을 때에, 압박이 가장 심할 때, 저항이 가장 강할 때,
하나님의 사람들은 천국 복음을 이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 선포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유형과는 다른 사람이 등장할 것입니다.
말세에 새로운 유형의 사람이 나타날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인류 역상에서 이전에도 존재했던 사람입니다.
새로운 유형의 남성과 여성, 주님께 완전히 사로잡혀
다른 목적이나 야망이 없는 젊은이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저는 1960, 70년대에 ‘Jesus' People' 이라는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그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이제 너무 점잖아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때는 몬태나에 가야 했다면, 무작정 차를 가지고 떠났습니다.
연료가 충분히 있는지 돈이 충분히 있는지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냥 떠났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너무 젊잖아 졌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가지만 하나님 말씀에 “네”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옳은 유형의 광신자를 찾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광신자를 이렇게 정의 했습니다. ’자신 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
◑3. 착한 행실, 특별히 구제에 힘써야 합니다.
▶마태복음 5:16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러분의 빛은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통해 빛납니다.
여러분이 행하지 않은 일을 통해서가 아니고,
여러분이 말한 것이나 우리의 설교를 통해서도 아니라
우리가 행한 일을 통해서 빛이 납니다.
그리고 저는 한 가지 특정한 착한 행실을 하도록 요청하고 싶습니다.
야고보서 1:27절은 신약에서 가장 무시되어 온 구절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 이니라”
정결한 경건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무엇일까요? 누구를 돌보는 것인가요?
오늘날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이 이 구절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저는 최근에 예언서를, 특별히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읽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고아를 향한 관심에 또 다시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당신 백성의 죄를 열거하실 때,
우상 숭배와 간음, 그리고 고아를 돌보지 않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고아를 돌보지 않는 것은
우상 숭배와 간음과 동일한 범주에 속합니다.
야고보가 이 구절을 신약에 적었을 때,
그는 구약의 모든 가르침을 옮겨 놓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구제와 우상숭배를 안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 놀랍고 무서운 통계를 한 가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3년 후인 2000년도를 기준으로 추산한 통계입니다.
아프리카 한 곳에서만 에이즈로 인한 고아 숫자가 1천만 명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시아가 궁극적으로 가장 심각한 곳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저 “안됐다”
“내가 아프리카에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라고만 말하면 될까요?
여러분이 꼭 아프리카로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아들은 여러분 가까이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고아들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되겠다는 책임감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자랑하고 싶지는 않지만,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룻과 저는 12명의 고아를 키웠습니다.
그 아이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여 키우는 과정이 항상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아이를 입양 할 땐, 다른 사람의 문제도 같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런 문제가 없다면, 그 아이는 입양 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나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저는 참 기쁩니다. 우리 아이들을 입양한 것이 참 기쁩니다.”
우리는 실망하기도 했고, 어려운 일도 많았습니다.
룻은 입양한 유대인 아들, 폴 때문에 베개를 눈물로 적셨습니다.
하지만 20년 동안 알콜 중독자로 거리에서 살던 폴은 4년 전에 하나님께로 돌아왔고
그런 생활을 청산했습니다.
룻이 자신의 슬픔을 저와 나누었을 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직 마지막 장이 씌어지지 않았소.”
여러분 가운데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가족과 남편과 아내와 깊은 문제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신실하고 정직하게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기억하십시오.
마지막 장은 아직 씌어지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마시고 나눠주십시오.
▶저는 미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이렇게 제안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고아를 돌보는 일에 대해서 훨씬 더 정직해야 합니다.
만약 미국의 모든 기독교 가정이 고아 한 명씩을 입양한다면,
바다처럼 큰 고통이 사라질 것입니다.
오늘날 낙태로 인해 아이들을 입양하는 것이 더 이상 쉽지만은 않습니다.
장애아나 혼혈아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은 고아를 위해 무언가 하실 것입니까?
자녀들이나 성도들에게 무엇인가 하도록 가르칠 것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정결한 경건의 첫 번째 표시는 고아를 돌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종교적 사고에서는 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성경에서는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자리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저를 포함한 종교인들은 항상 부정적인 측면에 쉽게 맞춥니다.
“주님, 저는 나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겠습니다.
저는 이런 영화들을 보러 가지 않겠습니다. 또 이런 잡지들을 읽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면서요.
그렇다면 긍정적인 측면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하십니까?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 중 몇 분이나 자녀가 축복이라고 믿습니까? (네)
그런데 여러분은 왜 아이들을 그렇게 적게 낳으십니까?
하나님은 한 가정에 3, 4명의 아이들 밖에 돌보시지 못할 거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계신가요?
제가 입양한 딸 중 하나는, 목사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 목사는 첫 부인에게서 6명의 아이를 낳았고
두 번째 부인에게서 5명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총 11명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부유했던 적은 없지만, 굶주린 적도 없었고 궁핍했던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6명의 아들 중 5명이 전임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누가 기독교인의 삶이 쉬울 것이라 말했습니까?
우리들은 문화에 의해 세뇌 당했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모든 것이 빠르고 쉽고 힘들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끔찍한 통계를 한 가지 읽었습니다.
이 통계는 미국인들이 애완동물의 먹이에 쓰는 금액과, 해외 선교에 쓰는 금액을 비교했는데
애완동물 먹이 값이, 해외 선교에 쓰인 금액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이것이 미국인들의 가치관의 그림입니까?
저도 애완동물을 좋아하고 개를 사랑하지만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사랑을 애완동물에게 쏟지 마십시오.
애완동물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자아의 연장입니다.
애완동물은 지나치게 성가시지 않으므로 편리합니다.
이 나라에는 두 가지 큰 우상이 있습니다. 편안함과 편리함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이 두 우상을 때려 부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하라고 하실 일은, 여러분의 편안함과 편리함과 조화를 이루지 않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 모든 죄악을 용인하십니까?
왜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이 지속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왜 우리는 이 모든 죄악을 인내하며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목적은 룻과 제가 맨 처음에 인용한 성경말씀에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선포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재림)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딛2:11~14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 역사하고 계십니까? 그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쉬지 않고 자기 백성을 얻으실 때까지 계속 역사하실 겁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의 모든 목적은 하나님의 목적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얻는 것이 인류 역사의 목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얻으실 것입니다.
요한1서 2:17절 말씀으로 설교를 마감하겠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불안정하고 악한 문화와 사회는 모두 지나갈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아멘.
◑마치는 말
이제 잠시 기도하길 원합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계시든지 지금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어떤 운동이 ‘회개’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진실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은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성령을 부어 우리가 회개하는 것을 도우십니다.
오늘 밤 저는 여러분이 듣기에 거북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응답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이기심과 자기중심적인 문제를 다루기 원합니다.
제 말씀을 듣는 동안 성령님이 여러분을 다루셨다면,
여러분은 이런 고백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저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입니다.
제 삶은 제 자신으로 시작해서 제 자신으로 끝납니다.
저의 종교는 제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제 이것이 너무나도 싫습니다.
하나님, 이것은 저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았고 성취감을 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변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저를 변화시켜 주십시오.
하나님, 제 이기심을 다루어 주십시오. 이기심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십시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만약 이것이 오늘 밤 여러분의 기도라면 손을 들어 주십시오.
제프, 올라와 주시고 룻도 올라와 주세요. 제가 제프를 부른 것은
그가 이 교회의 목사님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적어도 여기 계신 분의 80%가 손을 드신 것 같습니다.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자기애, 이기심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손을 든 성도들의 마음을 보시고
이들의 삶에 당신의 주권적인 은혜와 자비로 개입하시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은혜와 용기와 믿음을 주소서.
그리하여 이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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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혹당하는 그리스도인 신22:9-11 --데릭 프린스 (0) | 2023.01.16 |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어떻게? 1 딛2:11-14---데릭 프린스 (0) | 2023.01.16 |
금식은 겸손입니다 P2 레16:29, 행27:9 --데릭 프린스 (0) | 2023.01.16 |
겸손은.. 내 책임입니다. 하나님 탓 마십시오.--데릭 프린스 (0) | 2023.0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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