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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은.. 내 책임입니다. 하나님 탓 마십시오.--데릭 프린스

by 【고동엽】 2023.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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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은.. 내 책임입니다. 하나님 탓 마십시오.

 

 

제가 하나님께 응답 받는 기도의 비밀에 대하여 나누겠습니다.

그 중에서도 효과적인 기도를 위한 특별한 한 가지 요소를 다루겠습니다.

 

이 기도 응답의 열쇠는 무엇일까요?

 

구약부터 신약까지 계속 이 열쇠에 대해 말하지만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그 존재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효과가 없는 이유는, 오늘 나눌 이 열쇠(금식, 겸손)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궁금하시죠? 제가 답을 말해주어도 여러분들은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을 겁니다.

 

▲산상수훈으로 가겠습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6:5, 6절

“예수님께서 위선자들은 어떻게 기도하는가?”말씀하십니다.

 

처음에는 위선자들과 같이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고 하시고

나중에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6:16~17절에서 예수님은 다른 차원의 기도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위선자들처럼 금식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금식할 때 이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에 대해 가르쳐 주십니다.

 

이렇게 기도와 금식을 함께 가르치셨습니다.

 

금식할 때,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가르치실 때

예수님은 제자들인 우리가, 기도와 금식에 대해 묶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것이라는 전제를 깔아 놓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제자들이 당연히 기도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다는 사실에 동의하십니까?

‘너희가 기도하게 되거든’ 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기도할 때’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정기적으로 기도할 것을 기대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요?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금식하거든’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금식할 때’라고 하셨습니다.

기도와 같은 논리입니다. 논리적이지요? 받아들이실 수 있지요?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인정은 하실 수 있겠지요?

 

아직 금식에 대해서 하나님께 찬양 드리기 어려울 수 있지만

그 심오한 뜻을 알게 되면

하나님께 이러한 열쇠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와 금식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은 동일합니다.

기도할 때 이것은 하지 말고 저렇게 해라.

금식할 때 이것은 하지 말고 저렇게 해라.

 

이렇게 예수님은 기도와 금식을 동일 선상에 두셨습니다.

 

제 주장은 이렇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당연한 만큼 금식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이미 저보다 루터, 존 웨슬리가 동일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몇 년 전, 저는 존 웨슬리의 글을 읽었습니다.

저를 동요시키고 깨우는 글이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크리스천이 금식의 필요를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실족할 것이다.

이것은 기도의 필요를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오후 4시까지 금식하지 않는 사람은

감리교의 사역자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감리교의 최저 기준이었습니다.

 

▲“왜 금식해야 합니까?

그저 육체의 소욕을 죽이고 삶을 불편하게 만들려고 인가요?”

 

아닙니다. 당연히 금식에는 다양한 목적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만 말하겠습니다.

 

금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겸손케 하시는 방법입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보여드리겠습니다.

 

기도 응답을 막는 가장 큰 적은 교만입니다.

그 교만을 다루는 것이, 바로 기도 응답을 받는데 도움이 됩니다.

 

요즘 하나님께서 저에게 교만의 위험성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제 아내 룻은 이에 대한 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 Andrew Murray 의 책입니다.

그의 책은 지금까지도 많은 크리스천을 먹이고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책의 이름의 원래 제목은 “하나님의 겸손”입니다.

다시 출간된 제목은 “그저 겸손하라”입니다.

지난 몇 주 전에 읽었는데, 제 삶에 대하여 너무 많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교만을 싫어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다시 한 번 교만이 얼마나 악한 것인지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얼마나 가로막는가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 걸쳐서 분명한 우주적인 진리입니다.

 

▲교만이 처음 저질러진 장소는 이 땅이 아닙니다.

이 우주에서 처음으로 범해진 죄가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누가 범했습니까? 루시퍼, 하늘의 천사였습니다.

교만의 죄가 하늘의 천사를 추락시킨다면,

땅에 사는 죄인으로서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교만과 겸손에 대한 세 가지 구절을 드리겠습니다.

 

눅14;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이 잔치에서 나오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도 잔치에 가죠? 예수님은 아주 쉽게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내가 너를 겸손케 하겠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너희 스스로 겸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수치 당하게 하실 수는 있지만

당신만이 스스로 당신을 겸손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주님, 나를 겸손케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성경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기도의 결과로 인해 곧 후회하게 될 겁니다.

기도한지 몇 달 후에, 곧 모욕적인 상황에 처한 후에야 하나님께 묻겠죠.

 

“하나님, 제가 왜 여기 있습니까?”

“네가 기도했잖니”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잔치에 초대되었거든 상석에 앉지 말아라.

그랬다가 너보다 높은 손님이 와서 주인이

너에게 구석진 곳으로 가라고 한다면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너는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아라.

 

아주 지혜롭죠. 가장 바닥에 있으면 점차 올라갈 수 있습니다.

 

▲존 번연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몇 년 동안이나 제게 기억이 나는 기도입니다.

 

‘겸손한 자는 두려움도 없고 적도 없다.

겸손한 자는 교만하지 않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바닥에 있을 때, 우리는 더 내려갈 데가 없습니다.

 

이렇게 큰 집회에서 저는 항상 주 앞에 무릎 꿇습니다.

이 모임 전에도 저와 룻은 오랫동안 기도했습니다. 이 바닥이 가장 안전합니다.

바닥에 엎드려 기도할 때가 가장 안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 하십니다.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면 높은 곳에 앉지 말고 낮은 곳에 앉아라.

그러면 올라가 수밖에 없다.’

 

▲누가복음 14;11에서 정리하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우주적인 진리입니다. 하늘과 이 땅의 진리입니다.

루시퍼와 예수님에게서 이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루시퍼는 자신을 높이다가 떨어졌고,

예수님은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기에, 하나님이 그를 높이셨습니다.

 

빌립보서 2;9 말씀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스스로를 낮추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면 높이십니다.

당신이 스스로를 낮추면 하나님이 반드시 높이십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저는 이것에 대하여 ‘올라가는 것이 추락하는 것이다.

더 낮은 곳으로 갈수록 더 높이신다.’라는 제목을 붙이겠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겸손이 바로 기도 응답의 길입니다.

이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야고보서 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께 낮춰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십시오. 스스로 낮추면 하나님은 높이는 일만 하십니다.

 

비슷한 말씀은 베드로전서 5;5~6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5절에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 교만하게 나가면 거부하십니다.

교만하면 결코 하나님께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시편 말씀에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모르신다고 하십니다.

교만에는 결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겸손케 하는 것은 즐겁지 않을 지라도 축복인 것입니다.

 

 

◑성경적인 겸손의 방법이 바로 금식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다윗은 시편 35;13에서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히브리어로는 나의 영혼을 겸손케 한다고 합니다.  KJV: I humbled myself with fasting

 

왜 영혼을 겸손케 해야 합니까?

영혼은 완고하고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영혼은 의지와 생각, 감정으로 구성됩니다.

나는 이것을 원한다, 내 생각은 이렇다, 나는 이렇게 느낀다.

이렇게 나의 것을 주장하는 것이 우리의 영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네가 원하는 것,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은 중요치 않다.

나의 의지와 다르다면 네가 바뀌어야 한다.’

 

자신을 다루어야 합니다. 금식으로 자신을 겸손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이 말씀을 나눌 때에

워싱턴에서 크리스천 변호사가 금식을 실천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나도 해봐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 변호사는 끔찍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음식점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그날 밤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장아, 너 때문에 무척이나 불편했단다. 너를 벌하기 위해 하루 더 금식 하겠어.”

이것이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고 싶군요. ‘위장(식욕)은 훌륭한 종이지만, 끔찍한 주인입니다.’

 

당신 삶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당신입니까? 위장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사역자가 위장과 싸웁니다. 저 역시 위장과 싸웠습니다.

제가 이길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축복은 즉각 올 수도 있고 나중에 올 수도 있지만, 어쨌든 축복받습니다.

다시 제가 교만해지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거두십니다.

 

‘하나님 왜 그러십니까?’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십니다.

‘네가 다시 교만하고 네가 주장하는구나.

네가 네 자신의 길을 가길 원하며 네 영혼이 주장하는구나.

나의 의지에 나의 길에 나의 말에 다시 복종하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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