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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뉴턴, 항해 중 폭풍우 속에서 회심 이후
▲선원들은 존 뉴턴이 예배시간에 낭독하는 성경말씀과 공동기도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존 뉴턴이 선장으로 일하는 이 배의 선원들은, 최악의 악당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잔인함, 저속한 말투, 싸움, 늘 듣게 되는 반란의 소문 때문에
존 뉴턴은 이런 선원들을 엄격하게 다루었습니다.
선장이면 누구나 겪는 많은 어려움을, 그도 겪게 되었습니다.
존 뉴턴은 여전히 자기가 고상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노예들이 학대를 당한다는 사실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는 배에 실린 노예들을 일일이 직접 검사해서,
병들고 늙고 허약한 노예는 육지로 돌려보냈습니다.
중간에 항해 중에 죽도록 하지 않기 위해서 였습니다.
노예를 선택할 때도, 긴 항해를 견딜만한 자들만 신중하게 선택했습니다.
노예 아이들은 더욱 신중하게 살펴보았습니다.
키가 4피트가 되지 않으면, 절대로 선택(구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선원들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노예들을 학대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주일이면 노예들을 위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노예들은,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뉴턴은, 다른 배와는 달리, 하갑판에 노예를 가득 채우지 않았습니다.
노예들을 갑판으로 데려와서 맑은 공기를 마시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이에 선창의 문을 열고, 선창에 물을 뿌려 청소를 하게 했습니다.
존 뉴턴은 이렇게 잘해 주는데도 반란을 일으키려거나,
반란 조짐이 있는 노예들이나 선원들에게는, 적절한 벌을 가했습니다.
▲영국으로 무사히 돌아온 그는, 자기 아버지가
캐나다에서 수영을 하다가 익사했다는 슬픈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의 아내가 굳건한 기도의 사람으로 변해있다는 기쁜 사실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들러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존 뉴턴은 새로운 배인, ‘아프리칸 호’ 선장이 되었습니다.
배는 저번 배에 비해서 좋은 편이었지만, 항해에 따르는 어려움은 똑 같았습니다.
지독한 날씨, 다루기 힘든 선원들, 음모를 일삼는 노예들, 선상 반란의 공포 등이 있었습니다.
존 뉴턴은 노예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가 점점 변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이전에도 노예들을 위한 주일예배를 드리기는 했지만
노예들을 위해 기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매일 밤, 그는 노예들의 영혼을 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한 번도, 노예들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많이 변한 것이죠.
서서히 뉴턴을 이렇게 하나님이 변화시키신 겁니다.
존 뉴턴은 함께 즐겁고 유망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던 선장 직에 대해서
점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질병, 악취, 적개심, 비협조적인 선원들,
상인들의 적대감, 언제나 따라다니는 파선의 공포 등이 그를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1754년 6월 20일 영국을 향해 출항한 아프리칸 호는
9개월이 지나서야 리버풀에 도착했습니다. 존 뉴턴은 배를 떠나면서
일지에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선장을 맡을 새 배가 아직 건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다리는 동안에,
존 뉴턴은 여러 날 현기증과 심한 두통에 시달렸고, 눈에 초점이 잘 잡히지 않아서 고통을 겪었습니다.
의사는 아프리칸 호의 더운 기후 때문에 생긴 병이라고 하면서,
다시는 항해를 하지 말라고 권했습니다.
이것을 일시적 간질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이제 배를 그만 타게 하시려고,
이렇게 간질을 일시적으로 주신 것 같습니다.
의사도 항해를 더 못한다고, 뉴턴에게 선장직을 그만 두라고 권했고요.
뉴턴이 노예무역을 시작한지 9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30세가 된 존 뉴턴은, 건강상 은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예무역하는 배의 선장직에서 은퇴하고,
자기가 은퇴하도록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직접 간섭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렸습니다.
존 뉴턴은, 아내의 정성스런 간호를 받으면서, 침대 곁에 앉아서
라틴어,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성경을 들고서 숲속에 가서 읽고 기도했습니다.
주일마다 교회 예배에 참석하지만, 설교에 은혜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런던에서 조지 휫필드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하여 신앙의 활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존 뉴턴은 선장직을 그만 두고, 병든 아내와 함께 살면서,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
세관의 감시망을 피해서 밀수품을 싣고 몰래 입항하는 선박을 검사하는,
새 직업을 얻어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세관 직원으로서, 배를 타고 항구에 정박한 배를 검사하는 일을 얻은 겁니다.
퇴근한 후에 존 뉴턴은, 휫필드의 집회에 가서, 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존 뉴턴은 리버풀에서 휫필드를 만나서 교제하면서, 아주 더 영적으로 새롭게 되었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잘 만나야 됩니다.
살면서 좋은 설교자 만나고, 좋은 영적 지도자를 만나는 것은, 참 복입니다.
어릴 때, 아이작 왓츠를 만난 것도,
또한 신앙인 어머니를 만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복입니다.
그리고 이제 다 자라서 30세쯤 되어서는
부흥사 조지 휫필드를 만나서, 그의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당시 존 뉴턴은, 신자들을 위하여 책을 한 권 썼습니다.
휫필드와 존 웨슬리가 존 뉴턴하고 아주 가까이 교제하면서
자기들에게 와서 같이 일하자고 제안도 하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영국의 리버풀 사람들은,
국교만 정통이고,
휫필드나 웨슬리 등 다른 교파(비국교도, 감리교)는
이단 비슷하게 잘못된 파로 취급했습니다.
아마 이런 비국교도를 옹호하는 내용의 책을, 뉴턴이 쓴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몇 달 뒤에 두 번째 책을 써서 일반 사회에 배포했는데,
이 책은 자기 체험이 섞인 ‘신앙간증서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책이 다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존 뉴턴의 이름이 온 도시에 알려지면서, 그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주일 저녁이면 뉴턴의 집에 막 사람들이 몰려와서, 찬송도 함께 부르고, 기도도 함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기도회에 모인 사람들은, 가끔 신앙간증을 하기도 했습니다.
모임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존 뉴턴이 겪은 그 믿기 힘든 경험들을 얘기해 달라고 졸라댔습니다.
존 뉴턴의 간증 이야기가 무궁무진 했습니다.
그들은 평생 가보지도 않았고, 들어보지도 못한 여러 외국의 풍속이라든지,
그래서 뉴턴이 자기 경험도 이야기해 주면서 신앙간증도 하고 전도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뉴턴보고 설교자가 되라는 그런 권유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뉴턴 자신도 목회 사역에 대한 소원을 가지게 됩니다.
먼저 그는, 직장 생활, 세관에서 밀수선 단속하는 일,
또한 밀물과 썰물을 측량하는 기사로서 충실히 일을 하고,
또 교회에 적극적으로 봉사했습니다. 평신도로서 신앙생활을 아주 철저히 했습니다.
존 뉴턴은 목회자가 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이 일을 두고 기도했습니다.
영국 국교회의 성직자가 되려면, 3명의 성직자에게 추천서를 받아 제출해야 했습니다.
추천을 부탁받은 성직자들은, 존 뉴턴이 비국교도, 감리교도 친구가 있다는 것과,
그가 대학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추천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리버풀에서는 국교회 성직자가 되는 길이 여러 해 동안 열리지 않았습니다.
9년 동안 그래도 계속 소원을 접지 않고 나갔는데,
마침내 1764년 38세의 나이로, 뉴턴은 영국 국교회 성직자로 임명 받습니다.
그 전에 목사보조(평신도)로 수년간 일하다가, 드디어 정식 목사가 됩니다.
존 뉴턴은 복음사역자로 첫 발을 내딛게 된 그 해에,
전에 썼던 서신들을 수정 보완해서 <진정한 이야기>를 출판합니다.
자기 자서전을 출판 보급한 것인데,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올니 Olney 는 작은 마을이고, 교인들은 가난했고 대부분 이름뿐인 신자이고
신앙도 없는 사람들이고, 또 그 마을에는 불신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뉴턴 부부는, 그 올니 빈민들과 친해지는 일부터 먼저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성직 가운은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만 입고,
다른 날은 선원 생활 할 때 입었던 선원 옷과 장화를 신고,
그 동네 사람들처럼 나가서 어울려서 이 집 저 집 찾아가서 이야기도 하고,
이렇게 사귀었습니다.
그런데 올니 사람들은 아마 존 뉴턴 이야기 듣는 것이, 설교 듣는 것보다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설교도 굉장히 짧고 쉬워서, 그 동네 사람들이 참 좋아했답니다.
그래서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몰려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유년주일학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뉴턴은 목요일에 어린아이들을 모아서 찬송도 가르치고, 성경도 가르치고 했고,
주일 이외에 화요일 밤에 모여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도 하고 했는데,
그 화요일 밤에 모여서 부를 찬송을 윌리엄 쿠퍼 William Cowper 라는 사람과 함께
존 뉴턴이 계속 몇 곡씩 매주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만든 찬송이 352곡으로 된 ‘올니 찬송가’입니다. Olney Hymns
▲16년이 지나서 뉴턴은 런던 중심부에 있는
세인트 메리 울로스 St Mary Woolnoth 교회의 목사로 부임하게 됩니다.
큰 교회였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54세였습니다.
머리카락은 백발이 되었고, 무릎 통증 때문에 걷기도 힘들고 시력도 많이 악화되어서
육신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뉴턴은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은퇴해서 조용히 여생을 지내겠다는 그에게,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런던 세인트 메리 울로스 교회에 목회자로 임명된 것입니다.
감독이 임명하면 순종해서 가야 했습니다.
뉴턴은 그 교회에 가서 27년간 목회를 합니다.
뉴턴의 눈과 귀는 점점 어두워져 갔습니다.
그의 전기를 쓴 절친한 친구 리처드 세실은,
(그의 전기가 가장 정확한 전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뉴턴의 전집 6권이 있습니다. 거기 1권에 리처드 세실이 쓴 전기가 있습니다.
세실은 뉴턴이 80대가 되자, '이제 설교하는 것이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 때 ‘나는 그만둘 수 없어!’ 라고 그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습니다.
‘뭐라고? 과거에 아프리카에서 신성모독을 일삼았던 자가,
말할 수 있는데도 설교를 그만두라고?’
▲존 뉴턴이 세인트 메리 강단에 마지막으로 섰을 때는
1806년 10월인데, 그는 81세였습니다.
뉴턴 부부는, 슬하에 자녀가 없어서 조카 딸 둘을 입양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17년 먼저 세상을 떠나서 뉴턴은 입양한 딸 중 한 명의 가족과 함께 살면서,
그 양녀에게 친아버지와 같은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뉴턴은 1807년 12월 21일 향년 82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눈을 감기 한 달 전에, 자신의 확고한 믿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살 때나 죽을 때에, 육체와 심장이 쇠할 때,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마음의 힘이요, 우리의 분깃으로 삼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는 내가 믿었던 분을 알며, 그 분은 그 큰 심판의 날에 내가 저지른 죄악을 가리워주실 수 있으시다.
이후로 내게는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고,
그 면류관은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묘비에 새길 글을 직접 이렇게 정했다고 합니다.
‘존 뉴턴, 목사, 한 때는 불신자요, 방탕자이며,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의 종이었으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자비로, 보전되고 회복되고 용서받아
오래도록 벗어나려 했던 그 믿음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다.
그 은혜가, 그를 주인 없이 자유롭게 살도록 놔 두지 않았고,
새 주인을 만나서 그 분을 섬기며 살게 하였다.’
John Newton, clerk, once an infidel and libertine, a servant of slaves in Africa,
was by the rich mercy of our Lord and Saviour Jesus Christ, preserved, restored,
pardoned, and appointed to preach the faith he had long labored to destroy.
Grace did not free him to serve no master, but a new Master.
‘벅스 올리에서 목사보조와 교구목사로 16년을 섬기고,
이 교구의 목사로 28년을 섬기다.’ (묘비 뒷면)
◑뉴턴에게 배울 점
첫째, 존 뉴턴은 평생동안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정규교육은 8~10세 사이에 2년 받은 것이 전부였지만,
그는 주로 독학으로 공부했고, 이런 사정은 그의 평생에 걸쳐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떤 정규 신학교육도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독학에 매진하여 헬라어, 히브리어, 아람어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그는 이미 라틴어와 프랑스어는 독학으로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고,
하나님께서 그를 복음사역자로 불러 쓰실지 모른다는 생각이 있어서, 열심히 원어성경을 연구했습니다.
뉴턴은 신학분야에 탁월한 저자들의 책도 읽었고, 주로 성경을 연구하는데 집중했습니다.
1760년대 초반에 이르러 그의 신학적 체계와 본질적 신앙이 형성되어, 그 후로 이것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뉴턴은 칼빈주의 5대교리를 신봉했습니다. 그는 부드럽고 온유한 정신을 지닌 칼빈주의자였습니다.
그는 헬라어 사전을 편찬할 정도로 실력이 있었으며,
구약의 히브리어 성경본문도 주해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었습니다.
그가 비록 독학으로 공부했지만,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철저히 목회준비를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존 뉴턴의 신학적 목회적 실력을 인정한 휫필드는, 그가 미국 아틀란타에 세운 대학에 학장으로 초빙을 했고,
그 유명한 프린스턴 신학교는 1779년 뉴턴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하고자 했으나,
그는 둘 다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목회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나, 이미 목회자가 된 사람들은, 뉴턴처럼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기 위해서 열심히 평생 공부해야 됩니다.
여기 세미나에 오신 목사님들은, 참 평생 공부하는 목사님들이니까 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더 성경을 열심히 읽고 또 더 영양가 있는 그런 설교로 양들을 먹이기 위해서,
좋은 참고서들을 가지고, 성경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기도도 많이 해야 됩니다.
둘째로, 존 뉴턴은 열악한 목회환경에서도 소망과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목회했습니다.
그는 대도시 리버풀에서 목회하기를 원했지만, 그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여러 해 후에 그의 나이 38세 때, 시골 마을인 올니 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곳 사람들과 교인들은 가난했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진리를 알지 못하는 명목상의 교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주민들 중에도 불신자들이 대부분이었고, 뉴턴은 올니 교회에 목사로 부임하여,
주일 낮 예배만 드린 것이 아니고, 주일 저녁과 화요일 저녁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교인들이 병들거나 죽었을 때 뿐만 아니라,
친구와 친척 집을 방문하듯이 할 수 있는대로 자주 심방했습니다.
목요일 저녁에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모임도 가졌습니다.
교인들의 모임에서 부를 찬송가를 윌리엄 쿠퍼와 함께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열악한 목회 환경, 조그만 시골에 가서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형식적으로 목회한 게 아니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불신자들은 믿어 구원얻도록 하고,
믿는 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바로 믿도록 하기 위해서,
없던 모임도 만들고, 열심히 심방도 하고, 그래서 교회가 잘 되고, 유명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뉴턴은 12년간 올니에서 사역하는 동안, 12년간은 담임목사로 (그 전에 목사 보조로 일한 기간도 있습니다.)
또한 그는 주중기도회와 어린이들을 위한 모임과 심방목회를 정착시켰습니다.
그는 교인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쉽고 은혜스런 설교를 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찬송가를 만들어 구원의 은혜와 진리를 알려하여, 진심으로 구원의 은혜와 영광을 찬송하게 했습니다.
뉴턴은 12년 동안 시골 교회에서 최선을 다해 목회를 했기 때문에
54세 때 사실 은퇴할 나이인데, 새로운 임지가 생겼습니다.
그는 런던에 가서 27년간, 여기서는 심방은 별로 안했습니다. 늙어서 거동이 불편 했겠지요.
여기서는 설교와 저술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열악한 목회 환경에서도,
얼마든지 주님이 귀하게 쓰시는 종으로 일할 수 있음을 알고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저 송용조 목사는 뉴턴을 통해서, 특히 이 점을 배웠습니다.
셋째로, 뉴턴은 혼자서만 열심히 일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을 도와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는 일에 더욱 헌신하도록, 사람들을 격려했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1759년 영국에서 태어나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상류층이었습니다.
그는 20대 초반에 젊은 나이로 의회에 진출했습니다.
그는 의회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독교인으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관습의 개혁과 극악무도한 노예무역의 폐지를 위한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습니다.
당시 영국은 노예무역을 통해서 국가수입의 1/3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국익이라는 명분 아래서, 노예매매 폐지를 주장하는 것을 반국가적인 매국 행위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노예매매를 폐지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여한 사명으로 확신했습니다.
온갖 암살 위협과 중상모략과 비방에도 불구하고, 의회에서 싸운지 50년 만에,
노예무역 폐지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함께 윌버포스는 부정부패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정계의 현상을 견디기 힘들어서
의원직을 그만두고 수도원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그는 존 뉴턴 목사를 찾아가서 이 문제를 의논했습니다.
뉴턴은, 윌버포스에게 의회를 떠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의회에서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일이 있을 것이니, 정계를 떠나지 말라고 조언했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뉴턴의 목회 사역을 통해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때 노예상선의 선장이었으나, 회심 후 목사가 된 뉴턴은,
노예매매 폐지를 위해 의회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던 윌버포스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습니다.
뉴턴은 그로 하여금 매일 성경을 읽고, 성구를 암송하도록 했고,
기독교에 관해 더 많은 공부를 하게 했습니다.
특별히 뉴턴은 월버포스에게 노예매매는 마귀의 일이기 때문에
반드시 철폐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 결과 월버포스는 부폐한 사회를 개혁한 영국의 양심이라 불리우게 되었고,
월버포스는 기독교 신앙을 실천한 사람으로서,
노예매매 제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사회적 악습을 개혁하는 일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는 <진정한 기독교> 번역되어 있습니다. 라는 책을 저술해서, 참 읽어보니까 내용이 좋아요.
베스트 셀러가 된 이 책은, 1807년 노예 매매 완전폐지라는 쾌거를 이루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습니다.
1807년 5월 1일 노예매매를 전면 금지하는 법이 의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뉴턴은 이 기쁜 소식을 듣고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월버포스는 어릴 적부터 뉴턴을 알았습니다. 뉴턴이 잘 조언을 해서, 큰 일을 하게 했고요.
또 한 사람은, 토마스 스코트 인데, 이 사람은 자유주의 성직자인데
뉴턴의 복음주의 신앙을 아주 조롱하고, 뉴턴의 설교를 조롱하고
뉴턴이 지은 책을 혹평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스코트는 이웃교회 목사였습니다.
스코트가 목회하는 교회 교인인 여자 한 사람은 죽었고, 남자는 죽어가고 있는데
그때까지도 자기 교인이 죽었는지도 모르고, 죽어가고 있는지도 몰랐는데
존 뉴턴이 자기 교회 교인도 아닌데, 계속 심방을 갔습니다.
스코트는 그 소식을 듣고, 한 대 맞은 것이지요.
자기가 뉴턴의 신앙에 대해서는 멸시를 하더라도,
목회자로서 그 행한 그 뉴턴의 행실이 훨씬 목회자적 성품에 부합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후에 서로 교제를 하는 가운데, 편지도 주고 받았는데,
그 편지에도 항상 스코트는 뉴턴의 심기를 건드리는 그런 글을 썼고,
뉴턴은 온유하게 그 스코트에게 교훈이 될 만한 편지를 써서
결국 스코트는 자유주의자에서 복음주의자로 돌이키고,
뉴턴이 런던으로 옮겨가면서, 자기가 목회하던 올니 교회의 후임으로 스코트 목사가 부임했고,
스코트는 <진리의 힘>이라는 아주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결국 스코트도 윌버포스가 좋아했던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네 번째로, 온유한 성품으로 진리를 전했습니다.
존 뉴턴에게 배울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참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항상 진리를 말해주었습니다.
다섯째로, 뉴턴은 우리에게 완벽한 목회자는 없다는 사실을 또한 알려줍니다.
여섯째로, 존 뉴턴은 훌륭한 목회상담자 였습니다.
하도 젊은 나이에 별의별 사람들을 다 겪어봤기 때문에
뉴턴은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고 깊었습니다.
그는 만나는 사람들을 자기 기준에 맞추어서, 어떤 일반적인 규범으로 재단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각자가 다르다. 각자 다르지만 다 죄인들이다.
그러나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어떤 죄인이든지 은혜로 구원하실 수 있다’
하는 그런 관점을 가지고 사람들을 항상 대했고,
사람들을 대할 때는 신자인지 불신자인지 그걸 알아보고, 불신자이면 복음을 전했고,
신자이면 은혜의 교리를 잘 아는지, 즉 복음과 삶에 대한 관계를 잘 아는지
또 하나님의 구원의 큰 은혜에 대한 (회심의) 체험이 있는지
그런 것을 물어서, 하나님의 구원의 그 은혜에 대한
어떤 확신을 가지고 살도록 돕는 그런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사람을 자기 기준으로 항상 재서
자기 판단으로 길다, 짧다를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와 다르면 틀렸다고 쉽게 남을 판단합니다.
또 일반적인 규범과 잣대로, 모든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거든요.
그런 것은 이 존 뉴턴에게 배울 점입니다.
또한 그는 편지를 평생에 얼마나 많이 썼는지 모릅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꼭 편지 내용이 똑같지 않았습니다.
다 사람마다 시의적절하게, 유익되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래서 그의 서신중에 일부가 <존 뉴턴의 서한집>으로 발간되어 있습니다.
한국어로도 번역되었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인 내면적인 신앙을 강조한 책입니다.
일곱째로, 이것은 우리 부모들, 우리 교사들, 우리 목회자들이 다 아는 내용입니다.
존 뉴턴의 생애를 통해서, 어릴 적 받는 신앙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우게 됩니다.
뉴턴의 어머니는 회중교회 교인으로서,
외아들인 뉴턴에게 웨스트민스트 소요리문답과 아이작 왓츠의 찬송가를 가르쳤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뉴턴이 6살 때인 1732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뉴턴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으며,
이웃에 사는 아이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어느 교육제도가 없었으므로 학교에 가서 아이들과 어울리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엘리자베스는 독학으로 교양을 갖춘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 즉 읽기, 쓰기, 수학, 라틴어, 그리고 시 같은 것을 아들에게 가르쳤습니다.
6살은 우리 나이로 8살 때였습니다.
그때까지 어머니가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아들에게 다 가르쳤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집에 있으면, 영국 국교회로 가족들을 데리고 가니까,
남편이 집을 비울 때면,
아들을 비국교도 예배당에 데리고 가서, 명망높은 데이빗 제닝스 박사의 설교를 듣게 했고,
제닝스 박사의 친구인 아이작 왓츠가 지은 찬송을 배우고 따라 부르게 했습니다.
왓츠는 어린이 요리문답도 집필했는데,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아들의 신앙교육 교재로 사용해서 가르쳤습니다.
왓츠는 제닝스 막사의 초청을 받아, 그 교회에 자주 와서 설교를 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까지 걸어가는 짧은 시간동안,
어머니와 아들은 그 날의 예배와 설교를 화제로 삼아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존 뉴턴은 왓츠의 찬송가에 감탄을 늘어놓으면서,
커서 훌륭한 성직자가 되겠노라고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그는 마치 성직자가 된 것처럼 제닝스 박사와 아이작 왓츠가
교인들 앞에서 설교하는 모습을 흉내 내었습니다.
그러나 뉴턴이 자라서 뱃사람이 되면서, 완전히 불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복음진리를 경멸하고 조롱하기까지 했습니다.
방탕한 선원생활과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2년간 노예보다 못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폭풍을 만나는 중에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을 구하는 중에
어릴 때 들은 말씀들이 생각났습니다.
뉴턴이 폭풍가운데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릴 적 받은 신앙교육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그가 서서히 변화되기는 했지만, 마침내 그가 어릴 때, 그의 어머니에게 말했던 것처럼
목사가 되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장황하지 않고, 간결하게 그리고 어렵지 않고 쉽게 설교할 수 있었던 것도,
어릴 때 그가 받았던 왓츠의 설교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가 찬송하기를 좋아하고, 많은 찬송시를 쓴 것도, 그가 어릴 때 아이작 왓츠가 지은 찬송가 때문입니다.
우리는 존 뉴턴의 생애를 통해서 어릴 적 신앙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우게 됩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많은 죄와 말할 수 없는 비참함 가운데서
존 뉴턴을 은혜로운 승리로 건지사,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찬송으로, 설교로, 책으로
81세까지 죽기 전 몇 개월 전까지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이 귀한 일에 쓰임을 받게 해 주시고,
뉴턴을 통해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귀한 교훈을 오늘 저녁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뉴턴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이 교훈들을 마음에 깊이 새겨서,
우리도 일평생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또 많은 사람들을 온유함으로 섬겨,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사람들에게 온유한 태도를 지니고,
언제나 사랑가운데 소망가운데 유익한 것을 말해주는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생활을
할 수 있는 저희들 다 되게 해 주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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