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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상징 (바람, 인, 기름부음, 비둘기) 행5:32

by 【고동엽】 2023.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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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상징 (바람, 인, 기름부음, 비둘기)         행5:32

 

로드만 윌리엄스 <Renewal Theology> 중에서 발췌, 정리

 

성령의 명칭은 성령, 또는 영Spirit이다.

그 외 진리의 영, 생명의 영, 양자의 영 등 모두 영Spirit 字가 들어간다.

그런데 ‘영’Spirit 字가 들어가지 않지만, 성령을 지칭하는 표현들이 있는데,

그것을 일컬어 <상징>symbol이라고 한다.

 

성령의 상징적 표현에는 바람, 비둘기, 인, 기름, 생수 등이 있다.

차례로 살펴보면,

 

◑1. 바람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바람

①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여기 하나님의 신은 Holy Spirit이시다.

원래 히브리어는 ‘루아흐’인데, 그것은 ‘바람’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바람이 수면 위에 불었다”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보통 산들바람이 아니다. 영광의 바람이요, 감동의 바람이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감동을 찾기 위해 운동 경기장을 찾는다.

수만의 인파가 혼연일체가 되어 태극기를 흔들며 한 목소리로 응원할 때

사람들은 뜨거운 감동을 느낀다. 그러나 거기엔 감동은 있지만 영광은 없다.

그 감동을 맛본 사람들은, 입장료를 지불하면서도 계속 경기장을 찾는다.

 

거기엔 감동이 있어도 인간적 감동이다.

그러나 성령의 바람이 부는 곳에는 신령한 영광과 거룩한 감동이 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 시간에 찬양을 통해, 기도를 통해, 설교 말씀을 통해

이런 영광과 감동의 바람이 불어야 한다.

 

옛말에, 어느 도사가 어느 집 대문에 척 들어서면서 삿갓을 약간 들고서

사방을 휘익 둘러보며 말한다.

“이 집에 서기(瑞氣 예사스럽지 않은, 상서로운 기운)가 서려 있다!”

그와 같은 예가 적절할지 모르지만,

성령의 바람이 불고, 기도를 많이 하는 교회에 사람이 발을 척 들여놓으면

그런 상서로운 기운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먼 길을 고사하고 다시 그 교회로 발걸음을 돌린다.

 

(그러나 교회당 높은 상공의 미풍, 습도의 차이, 바깥과 달리 약간 어두운

조명의 차이 등으로 그런 기운을 느낄 수도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②바람 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요 3:8)

여기서 바람은 헬라어로 ‘프뉴마’인데, 그것은 히브리어의 ‘루아흐’와 같다.

영어성경, 한글성경들은 요 3:8의 프뉴마를 ‘성령’Holy Spirit으로 번역하지

않고, 일제히 ‘바람’wind으로 번역했다.

 

무엇으로 번역할지는 전체 문맥context을 따라 결정할 일이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성령의 바람’으로 해석해도 전체 문맥상 큰 무리는

없을 듯 하다.

 

성령의 바람이 부는 곳에는 사람들이 거듭난다(요 3:8).

그 바람은 임의로(자유롭게) 부신다.

우리가 성령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노력만으로 되진 않는다.

바람이 우리 쪽으로 불어주셔야 된다.

 

같은 이치로, 성령을 받은 사람도 자고할 필요 없다.

내가 스스로 바람을 일으킨 것이 아니고,

주님이 바람을 임의로(주권적으로) 불어주셨기 때문이다.

 

③바람과 비슷한 ‘생기’breath도 있다

내가 생기breath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겔 37:5)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겔 37:9-10)

 

여기 나오는 생기는 성령임에 틀림없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숨breath을 내 쉬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요 20:22).

우리가 드리는 예배시간 마다 이런 성령의 생기의 바람이 꼭 불어야 한다.

바로 거기에 생명력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적인 현상

①벤니 힌은 성령 세례를 처음 체험할 때, 그는 자기 방에 있는데

창문으로부터 ‘뜨거운 바람’이 흘러 들어왔고,

그 자리에서 그는 성령의 권능을 받게 되었다고 자기 책에 소개한다.

비록 객관적이진 않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벤니 힌을 추종하지는 않는 사람도 많다.

이유는 말씀이 너무 약한 채 은사에만 치중하는 극단적 면을 보여주기 때문)

 

②빌리 그레함 목사님도 부흥 성회에 앞서 충분히 기도하신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로 강단에 서시면 자신이 스스로 공중에 붕 뜬 상태에서

(실제로 공중부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느낌이 취한 상태라는 것)

메시지를 전하신다고 한다. 이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누구든지 약 4시간 이상 간절히 기도하고 강단에 오르면,

평소 때와는 엄연히 다른 성령의 능력이 나온다.

(이것은 억지로 하는 기도가 아닌, 저절로 되는 기도 4시간을 뜻함)

그것이 바람일수도 있고, 불/생수/기름이 될 수도 있다.

 

③안타까운 것은, 나 스스로 이런 성령의 임재presence의 체험을 일상적으로

매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임재(바람이든지 뭐든지)가 1년에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큰 문제이다.

 

내가 성령을 못 느끼니 다른 사람은 당연히 못 느낀다.

그것은 한 겨울에 수도관이 얼어서 막히듯이 꽉 막힌 것과 같다.

그것을 녹이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④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 (행 5:32)

내 삶에 성령님이 소멸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항상 성령님께 불순종하기 때문이다.

그 분은 파라클레토스(보혜사)가 되신다.

파라는 ‘곁에, 둘레에’라는 뜻이고 (파라마운트 영화사 광고에 산에 별이 둘러져 있다)

클레토스는 ‘부름받은’이란 뜻이다.

 

즉,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 곁에 계시도록 부름받은 성령>이시다.

성령님의 소명이 ‘우리 곁에 계셔서 도우시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그 분의 존재를 잊고 살아간다.

그 분과 교제/대화하지 않음으로써 당연히 불순종한다.

 

그래서 성령님이 (삼손처럼) 떠나가시고 소멸되신다.

‘주여 파라클레토스 성령님을 항상 곁에 모시게 하옵소서!’

 

⑤‘성령의 바람’을 너무 신비주의적으로 설명한 것처럼 오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신비주의가 아니라, 우리의 지, 정, 의 작용 중에서 정emotion적인

관점에서 주로 설명한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신자가 성령을 받는 단계를 5단계로 세분했다고 한다;

1) 중생 -요 3:3

2) 성령의 기본 세례-고전 12:3, 13.

3) 성령의 생활 충만-엡 5:18.

4) 성령의 능력 세례-행 1:8, 2:1-4. ←보통 말하는 성령 세례

5) 성령의 능력 충만-행 4:8, 31, 7:55 ←성령 세례의 결과

<로이드 존스, 「성령의 주권적 사역」기독교문서선교회, pp.8-9.

 

 

◑2. 성령의 인 seal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인과 그 의미

① 구원의 보증 guarantee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seal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 guaranteeing 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13-14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 4:30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후 1:22

 

우리 구원에 대한 보증은 ‘성령의 인’이다.

 

중세 시대에는 ‘속죄표’라는 것을 만들어서, 누구든지 그것을 사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준다고 사람들을 미혹했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그토록 가지기 원하는 구원의 보증서, 천국행 차표가

속죄표가 아니라 바로 ‘성령의 인치심’이다.

 

성령의 인치심은 따로 특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세례 받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세례가 그 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예수를 지식적으로 믿는 것, 아무 감격이 없는 것은

구원의 보증이 되지 못 한다.

많은 교회들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 다고 가르치는데

거기 믿는데 만족하지 말고, 성령세례까지 받도록 목표를 상향 조정해야 한다.

그래야 구원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② 소유권 표시 belonging

예로부터 가축의 소유권을 표시할 때는 가축의 귀나 몸통에 인火印을 쳤다.

이와 같이 인침은 소유권 표시를 의미한다.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은=한편으론 성령의 인치심을 받는 것인데

=하나님의 소유로 등기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천국의 등기등본을 떼보면 우리의 소유주는 주님으로 등재되어 있고,

주민등록을 떼보면 국적이 천국시민권자로 표시되어있다.

 

계시록 7장에는 하나님의 인을 맞는 14만4천 명이 나온다. 7:14

이것은 셀 수 없는 많은 무리란 상징적 뜻이며,

동시에 12지파가 모두 구성되는 것처럼 구성원에 있어서도

결원이 없는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수를 의미한다.

 

그들이 인을 맞았다는 것은=성령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완전한 소유권이 표시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귀의 인침으로부터 보호받음protection을 뜻한다.

 

③ 인증의 표시 mark of confirmation

학교 교사를 하려면 교육대학을 나와서 교사임용시험에 합격한 후에

이제 교사를 해도 좋다는 교사<자격증>을 준다.

그것이 없는 사람은 무자격자이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앞서 비둘기 같은 성령세례를 받으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공인된 종이라는 인준의 표시요,

장차 사역자로 나서도 좋다는 인증의 표시였다.

인자는 하나님의 인 치신 자였는데(요 6:27),

그것은 곧 요단강에서 성령세례 받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 사역에 뛰어드는 것은

무자격 사역자와 똑 같다.

사역자는 아카데믹 훈련을 받음과 동시에 성령의 인증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고전 12:3의 내주內住로 보기는 어렵고, 행 2장의 충만으로 본다.)

 

사역자는 신학교에서 석박사 학위도 받아야 되지만,

성령님이 주시는 인증서(성령의 인치심)도 꼭 받아야 할 것이다.

 

성령의 인증을 받은 사람은, 우스개 소리지만,

‘적도에서도 난로를 팔고, 남극대륙에서도 얼음과자를 판다.’

주변 사람들의 칭찬/비난에 관계없이

자기 부르심의 소명을 명확히 알고 고집스럽게 나간다.

 

같은 원리로 성령세례를 받으면, 자신이 멈출 때와 장소도 안다.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고 좋은 일이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충분한 힘도 있었지만,

다윗은 바로 직전에서 멈추었다.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웅장한 건축을 하는 것은 역사적 대 업적이요,

이름을 크게 남기는 일이었지만,

다윗은 자기가 멈추어야 할 시기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더 이상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과거에 우리는 주님이 시키지도 않으신 쓸데없는 일 하느라고

세월을 많이 낭비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주님이 오늘 내게 시키신 일을 하고 있다면,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하루를 알차고 의미 있게 보낸 것이다.

 

주님이 시키신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결코 작은 일이 아니며

결코 작은 사람이 아니다.

 

인간의 자발적인 계획은 대개 ‘큰 일’에 초점을 맞추지만

(누가 작은 계획을 세우겠는가?),

주님이 시키시는 일은 대개 ‘작은 일’인 경우가 많다

(작은 일에 충성하라 그리하면....).

 

♣성령세례란 무엇이며, 성령충만과 어떻게 다른가?

다 그게 그거지만, R. A. 토레이에 의하면

<처음 받는 성령의 경험>이란 의미에서 성령세례를 정의했다.

‘세례’라는 말 자체가 ‘처음’이라는 뜻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며

처음으로 공동체에 공식 가입한다는 뜻으로 물세례를 받지 않는가.

 

 

◑3. 기름부음

 

기름부음을 받는 다는 것은=성령(세례)을 받는다는 뜻의 상징적 표현이다.

‘세례’라는 말에는 ‘물에 잠근다’는 뜻도 있지만, ‘붓는다, 바른다’는

뜻도 있다.

 

▶‘기름부음’을 성령세례로 보는 의미

①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됨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 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18-19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삼상 16:13

 

다윗의 일생의 전환점turning point는 기름부음 받음이었다.

그 후 그는 골리앗을 물리치며, 천부장이 되며, 결혼을 하며,

고난의 질곡을 거쳐 결국 나중에는 왕이 된다.

이와 같이 우리 개개인의 일생의 전환점도 사실은 성령세례다.

거기서 내 인생의 BC와 AD(주전과 주후)가 나뉘어 진다.

 

과거에 한 때 성령세례를 받았으나, 후에 식거나 미지근해질 수 있다.

사울 왕이 그랬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예 그런 것을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사람과는 차원이 틀린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의 체험이 없으면

피상적인 종교생활이 된다.

 

중생(거듭남)이 언제인가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거의 한결같이

그 때가 바로 중생한 때라고 말한다. 경험적으로.

 

어떤 사람은 모태 신앙인으로서 교회를 다닌 지 30년 만에 그런 경험을 했다.

그 때 그는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사람 되고”

208장 찬송을 날마다 불렀다.

성령받기 전에는 5절까지나 되는 긴 찬송이라고 특별히 안 불렀는데,

성령받은 후에는 5절까지 한 번만 부르는 것으론 성이 차지 않아서

그 긴 찬송을 여러 번 연속으로 불렀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됐네”라는

쉬운 아이들 찬송에도 심오한 영감이 들어있다.

물같이 맹한 내 인생이 →포도주같이 맛이 나고 가치 있게 변화되었다.

바디메오처럼 영안을 떴고,

거친 바다가 잔잔해지듯 환경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가사 내용)

그런데도 그는 과거에 그 중요한 의미를 거의 깨닫지 못한 채

수 년 동안 그런 찬송을 그저 앵무새 읊조리듯 재미없이 불러왔던 과거가

도리어 이상하게 여겨졌다.

 

그 전환점까지 오는데 30년이나 걸렸듯이,

그것(성령세례)은 결코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②성별consecration

아론과 같은 제사장들은 기름부음을 받았으며 출 29:7

또 관유를 취하여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그것과 그 모든 기구를 거룩하게 하라 그것이 거룩하리라 출 40:9, 29:21

 

모든 것에는 특권과 동시에 책임이 따른다.

책임이 없는 특권은 없다(노블리스 오블리제).

성령세례를 받는 것=기름부음을 받는 것은 놀라운 특권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그만큼 거룩함을 유지해야할 책임이 뒤따른다.

 

또한 이것은 오늘날의 ‘안수’와 일맥상통하다.

목사 및 장로 안수, 선교사 파송 안수 등, 안수를 받는 것은

일반 사람들과 달리 특별히 ‘성별’consecration되었다는 뜻이다.

 

▶기름부음이 임하는 때

① 고난당할 때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 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기름부음은 원수의 목전에서 고난을 당할 때 - 특별히 잘 받는다.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지라

저희의 재난 중에라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시 141:5

 

우리가 성도와 형제로부터 책망과 공격을 받을 때가 있다.

그것을 거절하지 않고 덤덤히 받아들일 때 우리 머리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신다.

 

② 형제와 연합할 때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 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시 133:1-2

 

형제가 연합해서 화목하게 사역할 때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신다.

한번 상상해 보시라! 기름이 머리에서 부어져서 수염으로,

다시 옷깃까지 타고 내리는 것은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다는 뜻이요,

흘러넘친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해서 형제가 서로 불화하면 기름부음이 사라진다는 뜻도 된다.

 

▶기름부음은 성경말씀을 깨닫게 함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요일 2:20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요일 2:27

 

성령은 진리의 영이 되시며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신다. 고전 2:10

 

▶기름부으심이 있는 사역자

사역을 할 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는 사람이 단에 서면

참 묘한 일이다. 그 사람이 찬양인도를 하면 전체 찬송이 막 살아난다.

노래를 잘 불러서....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 사람이 찬송 인도를 하면 전체가 뜨거워진다.

이것을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고 말한다.

그에게는 남다른 영적 권위가 있다.

 

설교를 들어봐도, 특별히 잘 하는(유창하고도 학식 있는) 설교는 아닌데

들어보면 은혜가 풍성한 설교가 있다.

 

“우리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모든 설교자들이 말하는... 평범한 설교 내용이다.

그런데 유독 그 목사님이 하시는 설교 말씀을 들을 때는

‘그래요, 진실하게 살아야죠..’라며 가슴이 뜨거워진다.

 

똑같은 말인데, 거기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으면

사람의 가슴 깊은 곳에 파고들고, 육신적 신앙을 깨뜨린다.

 

반대로 기름부으심이 없으면

마치 윤활유 없는 기계가 돌아가는 것처럼, 사역이 뻑뻑하고 힘들다.

바람을 타고, 물결을 타는 항해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억지로 노를 저어야 하는 힘든 항해가 된다.

 

이럴 때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좀 천천히 가도 된다....

하나님의 은혜의 강수에 우리 몸을 담궈야 한다.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고, 기름부으심을 사모하고 기다려서

그 후에 다시 사역에 임해야 한다.

 

 

◑4. 비둘기

 

성령을 받으면 외적으로 은사와 능력power으로 나타나지만(바람, 불)

내적으로 성령의 열매(갈 5:22), 즉 인격으로도 나타난다.(비둘기)

 

사복음서에는 예수님에게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신 사건을 모두 기록한다.

그만큼 그들은 그것을 중요시 여겼다는 뜻이다.

예수님도 성령세례 받으신 후에 사역에 임하셨다는 사실은 퍽 흥미롭다.

 

▶비둘기 같은 성령의 의미

①온유함gentleness

비둘기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평화를 상징한다.

온유함gentleness은 성령의 열매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했으며(마 11:29),

혈기 방자하던 모세도 호렙 산에서 불꽃을 체험한 후에

‘온유함이 온 지면에서 승한 자’로 180도 변화되었다(민 12:3).

 

주의 종은 마땅히must 다투지 않고 온유해야 한다고 했으며(딤후 2:24),

그래서인지 성도들은 교역자와 다투면 절대로 지지 않는다.

혹시 한 번 교역자에게 지게 되면 나중에 꼭 복수를 가한다.

그래서 아예 혈기를 죽이고 무참히 짓밟히는 교역자는 후에

“예수님을 닮았다”는 존경을 받는다.

어쨌든 혈기는 성령님의 역사와는 거리가 멀다.

 

②신사적임gentleness

거저 성격이 천부적으로 온순함을 타고난 사람은 모두 성령의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 그 중에 오직 신사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만 성령의 사람이다.

 

③순결함 purity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마 10:16)에서 보듯이 비둘기는 순결을 상징한다.

그래서 비둘기는 새 중에서 특별히 번제물로 채택되었다(눅 2:24, 레 12:8).

 

아가서에 특별히 비둘기가 자주 나오는데,

그것은 신랑이 신부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어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무척 사랑해서 ‘나의 강아지’로 부르는데,

‘나의 비둘기’로 부르는 것이 더욱 성경적일 듯싶다.

 

특히 아가서에는 비둘기의 눈이 순결하다고 세 번 말한다.

그래서 한 번은 공원에 가서 비둘기 눈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정말 청아하고 맑고 순결한 눈이었다.

 

어떤 분은 며느리 감을 구할 때 항상 자매들의 눈망울을 심사기준으로

삼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천성적으로 눈매가 험하게 타고나서 억울한 사람도 있겠지만,

보통 그의 눈을 보면 그의 순결성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겠다.

 

베드로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을 언급했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벧전 1:2)

바울도 “성결의 영”(롬 1:4)을 말했는데,

이는 성령을 받으면 성결해 진다는 뜻이다.

 

♣미국에서 오순절 운동이 주류 교회 속에 인정받게 된 계기

원래 미국의 오순절 교회는 20세기 초에 캔자스의 토피카 와

L.A.의 아주사 거리에서 방언운동과 더불어 출발했다.

그러나 1950년대 말까지 반세기 동안, 오순절 운동은

미국의 주류교회에 인정을 받지 못하던 소장파였다.

 

이렇던 오순절 운동이 인정받게 된 때는 1960년대 히피 운동과 관련 있다.

미국의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히피 운동이 일어나자 주류교회들은

청년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충격을 겪게 되었다.

 

그런데 성령운동 한다는 이유(시끄럽고 혼란스럽다)로 평소에 무시했던

오순절 교회들은 히피 운동 때에도 청년들이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고

오히려 더 부흥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이후 오순절 교회도 주류 교회로 인정받게 되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주류 교단들이 오순절 운동을 자기 교회 내에

적극 수용하는 chrismatic movement (은사주의 운동)도 연이어 일어났다.

이와 같이 성령이 임하시면 성도들은 더욱 순결하게 변화되어 세상을 이긴다.

히피 운동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 성령운동 하는 교회들이었다.

 

④품는다 hovering / brooding

창 1:2에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운행은 - hover, 공중에서 빙빙 돌다, 또는 공중에서 정지상태로 있다

또는 brood, 새가 알을 품다의 뜻이 있다.

그러므로 공중을 높이 훨훨 날아다닌다는 뜻이 아니라,

낮게 근처를 선회하거나 품는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암탉이 병아리 품듯 예루살렘을 품으려 하셨다(마 23:37).

 

이와 같이 품으시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시다.

그것은 보혜사(파라클레토스: 우리 주변에서 도우시는)의 사역과도 일치한다.

내 주변을 낮게 선회하며 빙빙 돌기도 하시고, 나를 품어주기도 하신다.

특히 온유함으로 품으심으로써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신다(마 12:20).

이와 같이 성령의 사람은 상대방을 품어주지만,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보통 비신사적이 되어서 도리어 상대방을 해코지한다.

 

마치는 말

음악이나 미술하는 예술가들 중에 간혹 신들린 듯한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남다르게 사람들의 혼을 매료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렇다면 하물며 크리스천들은 ‘성령세례’를 필히 받아야 할 것이다.

모세처럼, 바울처럼, 베드로처럼(행 2장).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비둘기 같은 성령세례를 받으시고 난 후에

비로소 사역에 임하신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바람은 임의로 불지만, 일단은 사모하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사모하지조차 않고 있다면 내 책임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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