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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 명설교편◑/이정익목사 명설교(385편)

하나님의 관점 이해하기

by 【고동엽】 2023. 1. 12.

하나님의 관점 이해하기

 

 

 

 

 

 

 

 

                                        14:19-28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

 

 

 

                     고 이외로 끌어 내치니라.    

 

 

 

 

 

 

 

 

언젠가 단편을 묶어 펴낸 문학선 집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 단편들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기업체 사장이 젊고 유능하고 환경이 아주 좋고 부자였고 잘 생겼고 예쁜 아내와 딸을 두었습니다. 그 젊은이의 삶의 조건을 보면 아주 완벽했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의 어느 사원이 자기 자신과 비교해서 생각을 해 보니까 자신은 그중 한 가지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비교해 보니까 자신은 너무나 초라했고 빈약하고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할수록 속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이 젊은이가 사장 집을 점거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인질삼아 인질극을 벌입니다. 마침내 무장 경찰이 출동하여 대치하고 나중에 어머니까지 동원되어 자수하라고 눈물로 호소합니다. 그때 이 젊은이가 울부짖으며 이렇게 외칩니다. “왜 너는 혼자 세상에서 좋은 것은 다 가지고 있냐, 그런데 나는 뭐냐, 나는 왜 그 많은 것 중에 한 가지도 가진 것이 없냐? 이놈의 세상이 왜 이렇게 불공평하냐?” 하고 울부짖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편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참 많을 것입니다.

 

 

 

기왕에 조건들이 이렇게 완벽하게 주어졌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조건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있겠습니까. 혹 그런 사람이 있다 해도 반드시 그 조건들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장래에 꼭 성공하고 잘되고 인간답게 살고 신앙의 삶을 살도록 보장한다는 법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은 그런 조건들을 너무 선호하고 우상시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것들 보다 더 큰 은혜와 복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아 살아가는 길이고 또 인정받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사용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날 신뢰하셔서 나를 부르시고 사용하셔서 지금 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그것이 축복의 인생이고 그것이 성공의 인생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는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능력 있고 유능하고 잘 생기고 좋은 환경의 사람들만 골라서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우리들은 모두 외면당한 인생들일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사명을 수행한 사람들을 보면 어쩌면 이 세상 기준으로 보면 모두 약점 투성이인 사람들만 골라서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과 기준은 인간의 생각과 기준과 너무나 다르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생각과 관점은 이런 식입니다.

 

 

 

 

 

 

 

 

                                    I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으로 한 사람을 선택하여야 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조건 환경 학벌 외모를 보고 다 살펴보고 마침내 완벽한 사람을 골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고르신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젖과 꿀이 흐르는 넓은 땅을 주겠다, 그리고 자손을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많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얼마나 약속이 푸짐하고 풍성합니까. 그랬으면 우선 젊고 건장한 남자를 골라야 하고 부인은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는 여인을 골랐어야 합니다. 그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고르신 사람이 나이 75세인 아브라함이었고 그 아내는 이미 단산한 여인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단산이 아니고 그 여인은 애초부터 불임여인이었습니다. 그 약속을 이루려면 매년 두세 쌍둥이를 낳아야 하는데 이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 부부를 선택해서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관점과 너무나 다릅니다.  

 

 

 

또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는 위대한 일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모세를 생각할 때 우선 위대하고 완벽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출애굽 할 때 300만 명이 넘는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해서 가나안까지 인도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지도력이 특출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민족의 지도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모세는 결코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 아닙니다. 모세의 결정적인 하자가 말을 잘 못하는 결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애굽으로 가서 네 백성을 인도해 내라고 하셨을 때 모세는 한사코 나는 할 수 없다고 사양했습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말솜씨가 없었기 때문에 고집을 부렸던 것입니다. 애굽에 가서 바로와 중대한 협상을 벌여야 하는데 말솜씨가 없으니 무슨 협상을 제대로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못가겠다고 버티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말솜씨가 부족했던 사람입니다. 광야에서 백성들이 불평할 때 앞에 나서서 설득시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도 모세가 말솜씨가 없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말 잘하는 아론을 곁에 붙여주면서 굳이 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큰일을 시키시는데 왜 이런 사람을 사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말 잘하는 아론을 시키면 잘 할 텐데 하나님은 아론을 모세 곁에 두고 굳이 모세를 불러서 네가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점이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의 다른 점입니다.  

 

 

 

또 다윗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 41명중 다윗이 가장 탁월한 왕 중의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억하기를 다윗은 키가 크고 용모가 준수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것도 오해입니다. 삼상 16장에 보면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명령하시기를  “너는 가서 이새의 아들들 중 하나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가면서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왕을 삼으시겠다고 하시니 얼마나 준수할까”하고 생각하며 갑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주의를 주십니다. “너는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나는 중심을 보는 여호와니라“ 그 말은 너무 기대하지 말라는 말이다. 아주 보잘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새의 집에 도착해 보니 모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새의 첫 아들부터 일곱째 아들까지 살펴보니 모두 용모가 준수하고 다 왕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이 외에 또 없느냐 하고 물으니 말째 아들이 하나가 더 있는데 지금 들에서 양을 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그 아버지가 생각해도 다윗은 왕감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예 부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지 준수한 용모를 가진 많은 아들들 다 배제하고 가장 왜소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차이점입니다. 이정도면 하나님이 무엇을 추구하시고 무엇을 먼저 보시는지 아시겠지요. 사람들은 한결같이 키를 보고 생김새를 보고 학벌을 보고 환경을 보고 조건을 봅니다. 그래서 나중에 속임을 당하고 상처를 입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II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보십니까. 그것은 중심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좋은 예가 오늘 읽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사도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은 신구약 성경을 통 털어서 가장 위대한 신앙인 중 한사람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그만큼 완벽했다는 말입니까. 그도 역시 하자 투성이의 사람입니다. 우선 고후 10:10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평한 내용이 나옵니다. “바울이 쓴 글을 읽으면 무게가 있는데 그를 직접 만나보면 약한 체구에 말은 어눌했다”고 표현했습니다. 바울도 언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우선 말을 잘해야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전도자로 사람을 고르시는데 말을 잘 못하는 사도바울을 선택하셨습니다. 여러분, 말을 잘 못한다고 위축되지 마십시오. 말을 잘 못하는 것은 흉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말을 잘하는 것이 흉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말이 너무 느리다고 흉을 봅니다. 충청도 사람이니 느릴 수밖에 없지 않느냐, 갈매기도 경기도 갈매기는 빠르고 날쌘데 충청도 갈매기는 충청도 사람 닮아서 느리다고 흉을 봅니다. 그래도 나는 위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을 너무 잘하는 것이 흉일 수 있습니다. 모세도 바울도 말을 잘 못하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큰 역사를 이루어 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말을 못했는가 하면 행전 20장을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 일행이 전도여행을 마치고 귀로에 드로아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 그 밤에 집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밤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창틀에 까지 걸터앉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설교를 하는데 얼마나 재미없게 하는지 재미없는 설교가 또 한없이 깁니다. 그래서 재미없는 설교를 듣고 있던 유두고라는 젊은이가 창틀에 걸터앉아 졸다가 떨어져 죽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바울 자신도 자신이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무 말을 못한다고 흉을 보니까 고후 116절에서 응수하기를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거기다 생김새도 유별났습니다. “바울의 행적”이라는 책을 보면 사도바울의 생김새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바울은 작은 키에 대머리고 눈썹은 일자 눈썹에 시력이 좋지 않아 아주 두터운 돋보기안경을 썼다”고 했습니다. 외모는 볼품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전도 길에서 이런 사건도 벌어졌습니다.

 

 

 

1차전도 여행 때 바나바와 함께 루스드라에 가서 전도하다가 앉은뱅이를 고칩니다. 그랬더니 원주민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라고 그 앞에서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원주민들이 바나바를 쓰스신이라고 불렀고 바울은 허메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쓰스신은 신중의 신인 제우스신입니다. 바나바가 잘 생겼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제우스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바울을 허메신이라고 불렀습니다. 허메신은 제우스신을 위해서 심부름 하는 신입니다.  거기다 바울은 몸에 병까지 있었고 심한 안질에 간질까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중에 자랑할 것이 없어서 나는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런 사도바울을 선택하여 사도로 삼으십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사도바울의 중심과 충성심과 그의 진실함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참 진실한 인간이었습니다. 참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건장하고 잘생긴 사람들 다 놓아두고 그런 약한 사도바울을 불러내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얼마나 진실하고 충성스럽고 중심 있는 사람이었는가 하면 오늘 읽은 사도행전 14:19절 말씀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여행 중 루스드라에 들러서 전도를 합니다. 그때 그곳에 바울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 몰려와서 온갖 방법으로 방해를 합니다. 그래도 바울은 까딱도 하지 않고 전도하고 가르치니까 유대인들이 악에 바쳐서 마침내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동구 밖에 내다 버리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한참 후 돌무더기 속에서 정신이 돌아온 사도바울은 그 돌무더기 헤치고 나와 부러진 다리를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14:20을 보면 성안에서 하루를 쉬고 그 이튿날 바울은 그 몸으로 더베로 떠납니다. 더베는 그곳에서 250리 길인데 부러진 다리를 이끌고 그 길을 걸어서 갑니다. 바울이 이런 사람입니다.

 

 

 

 

하루 더 쉰다고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그 몸으로 떠나는 바울을 모두 말렸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고집스럽게 저는 다리로 길을 떠났습니다. 왜냐하면 복음 전파를 위하여 입니다. 복음 전하는 일에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바울은 2 km 나 되는 길을 걸어서 1차 전도여행을 마쳤고 또 3 km 나 되는 길을 걸어서 2차 전도여행도 마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끝내 순교해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저는 성경의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참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저는 사도바울의 이 모습을 생각하면 참 송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일어나 또 전도의 길을 떠났습니다. 아마 바울의 마음속에는 오직 주님, 오직 십자가, 오직 복음만 가득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온갖 약점이 있고 쇠약하고 왜소하고 말이 어눌한 사람인데도 그런 바울을 택해서 사용하신 것일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충성스러운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런 위인들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 사도바울처럼 행복하게 살아간 사람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이렇게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마음에는 갈등도 없고 할까 말까하는 주저함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노예의 행복입니다. 오직 충성과 순종만 있을 뿐입니다. 정말 행복한 신앙인은 이렇게 예수께 사로잡혀 살아가는 신앙인입니다. 말하자면 사도바울은 주님으로부터 그렇게 붙잡혀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할까 말까하는 여백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말 때에 가서 고백하기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믿음을 지켰다” 하고 만족스럽게 고백했습니다.    

 

 

 

참 기쁨, 참 감격이 어디서 오는가 하면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때에 나옵니다. 데이비스 핀크(David Fink)라는 의사가 “신경불안으로부터의 해방”(Release from nervous tension) 이라는 책에서 “안정을 위한 4박자 균형”(Four tranquility balance)라는 것을 발표했습니다. 사람이 지극히 안정된 균형을 이루어 살아가는 조건이 네 가지로 일, 놀이, 사랑, 예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이 4가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돈을 벌 때, 취미를 가꿀 때, 음식을 먹을 때 모두 내 건강을 위해서 하자하고 목적을 두면 그것이 결국 나의 건강과 평화와 연결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병이 나고 평화가 안 옵니다. 그때는 내 몸을 건강하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 하고 뜻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모두 나에게 두지 말고 높은 뜻과 높은 사명과 연결될 때 진정 평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그렇게 만족하게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능력이나 외모나 조건을 너무 따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자꾸만 속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것을 그렇게 중시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과 충성심과 진실함을 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점 투성이인데도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모세를 부르셨고 바울을 불러서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신앙인가. 나는 어떤 중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얼마나 충성스럽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고 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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