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자가 되라 (누가복음 20장 34-40절)< 진영 논리를 잘 극복하라 >
요즘 북한은 거의 저주받은 땅처럼 어렵게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북한 정권의 거친 말도 큰 원인이다. 북한의 성명서를 보면 “모략극을 날조한다. 역적패당이 살려면 당장 날조극을 반성하라. 아무개 역도가 부끄러운 행각을 벌이고 주제넘은 악담질을 한다.”라는 등의 표현이 많다. 국가 성명서가 거의 막말 수준이다. 저주가 담긴 거친 말은 자신의 축복부터 말살할 때가 많다.
왜 그런 저주스러운 말을 퍼붓는가? 인종이 다른가? 남북한의 인종 차이는 거의 없다. 실제로 지구상의 모든 사람의 DNA는 99%가 같다. DNA 1%의 차이가 70억 인류를 다르게 만든다면 99%가 같은 사람끼리 차별하는 것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왜 차별에서 더 나아가 저주까지 하는가? 사람이 서로를 가장 저주하게 만드는 것은 정치적 편견이나 사상적 편견으로 인한 진영 논리다.
사람마다 생각과 속성과 은사에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라. 교회에서 교우들이 생각이 달라 양 진영이 팽팽하게 대립하면 서로 다른 방법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되 최종 결정은 좋은 결정 방법과 공동체의 순리를 따라 하라. 그리고 내 의견과 다른 의견으로 결정되면 그 결과에 따르고 그 결정에 잘 협조하라. 의견의 패배가 인생의 패배는 아니다. 때로는 좋은 패배가 나쁜 승리보다 낫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전에 조금 더 아는 과정을 거치라. 그리고 약자를 잡아먹는 동물적인 본능을 위해 강자가 되지 말고 약자를 도우려고 강자가 되라. 남에게 지고 못사는 것은 약한 것이다. 시기와 원망과 불평은 약하기에 생기는 것이다. 열등감이 있으면 살짝 밟혀도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덤비지만 실력 있으면 뺨 한 대 맞아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자기 긍지에서 나오는 여유다. 그런 여유를 가진 강자가 되라.
약자와 강자는 서로의 축복 재료다. 약자를 위해 강자가 있고 강자를 위해 약자가 있다. 강자는 약자에게 축복의 지렛대이고 약자도 강자에게 축복의 지렛대이다. 의로운 약자를 보면 “와, 나의 복덩이다.”라고 생각하라. 약자를 멸시하는 것은 복을 걷어차는 것과 같다. 의로운 약자를 잘 찾아서 돕는 것이 복 받는 길이고 진리를 찾는 길이다. 약자를 더 코너로 몰아대는 진영 논리를 잘 극복해야 진리를 찾을 수 있다.
< 겸손하게 진리를 추구하라 >
어느 날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모세의 계대결혼 율법을 언급하며 예수님께 부활 교리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려는 이런 질문을 했다(29-33절).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했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그 둘째와 셋째가 그녀를 취하고 일곱이 다 그처럼 자식이 없이 죽고 그 후에 여자도 죽었습니다. 일곱 아들 모두의 아내로 취해졌던 그녀가 부활하면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
겉으로는 진리를 찾으려는 진지한 질문 같지만 실제로는 진영 논리에 빠져 부활의 진리를 은근히 때리려는 교만한 질문이었다. 가끔 그런 교만한 낌새가 있는 질문을 받는다. 그러면 대답하기 싫다. 대답을 받으려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주장을 내세우려고 질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만한 질문은 진리를 방해하고 교회도 어지럽힌다. 교만과 카리스마를 분별하지 못해서 교만한 교주를 잘못 따르면 인생길을 잃고 소모품 인생이 된다.
어떤 큰 교회 담임목사는 교회가 커도 여전히 겸손하다. 성도도 자기 담임목사가 성도 각자를 세세하게 살필 수 없음을 안다. 가까이하기에는 먼 당신처럼 멀리서만 지켜보지만 그래도 담임목사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것은 그가 기본적인 진실과 겸손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반면에 어떤 큰 교회 담임목사는 교회가 크다고 어투부터 반말로 변한다. 심지어는 자기보다 10살 이상 많은 장로에게도 반말을 툭툭 한다. 그런 교주는 속히 멀리하라. 영혼에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교만한 교주를 가까이 해서 피 보지 않은 인생이 없다.
교회가 크다고 눈빛과 언행이 교만한 것은 성경적인 카리스마가 아니라 “내가 칼 있어, 임마.”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조만간 추락한다. 패망적인 언행을 보이는 교주를 추종하면 같이 패망의 파도에 휩쓸린다. 카리스마를 너무 좋아하지 말라. 반말을 툭툭 던지고 강단에서도 반말과 욕 비슷한 말을 하고 남에게 상처 주는 농담을 하면서 잘 웃기는 것을 카리스마로 여기지 말고 분별력을 잘 길러서 내 영혼을 지키라.
화려하게 웃기는 말을 많이 하니까 최고 부흥사라고 여기면서 실체를 잘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진리란 겸손하게 추구할 때 허락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또한 진리는 희생을 요구한다. 교만한 낌새는 진리와 멀어진 표식이다. 사람을 가장 망치는 것이 교만이다. 예전에 “주님! 주님밖에 희망이 없습니다.”라고 했었다가 복 받고 목이 굳어지는 줄 모르는 것이 문제다. 참된 성공을 원하면 겸손한 언행 습관을 힘써 체질화시키라.
< 지혜로운 말씀을 구하라 >
서기관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직접 대답하지 않고 부활 후 상태에 관해 말씀하면서 부활한 성도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고 다시 죽을 수도 없고 기능적으로는 천사처럼 되고 내적 속성으로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셨다(34-36절). 또한 하나님은 또한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고 말씀하셨다(37-38절). 그 말씀은 하나님을 믿으면 현세에서도 생명력 있게 살고 죽은 후에도 부활해서 영원히 산다는 암시다.
결국 사두개인들의 질문 자체가 오류임을 나타내고 바른 진리로 이끄는 예수님의 지혜로우신 대답으로 바리새파 서기관들은 “선생님 잘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했고 사두개인들은 말문이 막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게 되었다(39-40절). 이 장면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운 지혜로운 말과 대답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는다. 때로는 말 한 마디가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인생을 살리기도 한다.
어떤 성도는 인간관계를 참 잘한다. 그의 언어 습관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남의 말을 들으면 일단 긍정적인 반응부터 한다. 물론 아주 틀린 말도 무조건 맞는다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람마다 의견 차이가 있거나 가치 판단을 요하는 말을 들으면 약간의 정정을 요하는 부분이 있어도 일단은 영접하는 언어로 긍정해서 받아들인다. 그래서 호감을 주고 함께 있고 싶어 하고 대화하고 싶어 하니까 점차 그 주변으로 사람이 몰린다. 그런 인간관계 실력도 키워보라. 지혜롭게 사소한 언어 습관을 잘 깨뜨리면 된다.
인관관계를 못하는 것도 천성이나 달란트가 없어서가 아니라 잘못된 습관 때문인 경우가 많다. 특히 나의 언어생활을 잘 점검해보라. 인간관계를 잘하고 누군가에게 호감을 주기를 원하면 대화할 때 어떤 말을 듣고 처음 반응하는 나의 말이 긍정적인 말인지 혹은 부정적인 말인지를 살피라. 그래서 처음의 반응 언어가 긍정적이 되도록 신경 써서 노력해보라.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면 부정적인 언어 습관도 어느 정도는 끊어낼 수 있다.
어떤 말에 부정적으로 반응부터 하고 대화를 풀어 가기보다 긍정적으로 반응부터 하고 대화를 풀어 가라. 긍정과 낙관을 삶의 기본 틀로 삼고 거기서부터 문제와 대화를 풀어 가는 것이 좋다. 물론 무조건 긍정하고 낙관하면 문제가 펑펑 터지지만 잘 절제되면 긍정과 낙관이 부정과 비관보다 낫다. 지혜로운 말과 대답을 훈련하라. 충고도 지혜롭게 하는 기술을 훈련하라. 사랑은 예술이다. 잘 다듬어 말하는 훈련을 통해 입에서부터 덕을 세우라.
< 살아있는 자가 되라 >
예수님은 하나님을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닌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38절). 영생의 목표도 가지면서 현재 생명력 있게 사는 목표도 가지라는 암시가 담긴 말씀이다. 어떻게 살아있는 자가 되는가?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용서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점차 죽어가다가 진짜 죽고 누군가를 용서하면 점차 살아나다가 진짜 산다. 현재 삶에서 부활을 체험하며 살라. 어떤 성도는 원수를 비교적 잘 용서한다. 자기를 힘들게 한 원수가 하나님께 당할 무서운 징계를 생각하니까 오히려 불쌍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특히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면 용서가 비교적 쉬워진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자신감을 가지라. 그 자신감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의 자신감이다. 과거의 한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 예수님 안에서는 현재형이다. 과거는 지나갔다. 과거의 잘못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잘못된 과거에 매이지 말라. 현재 살아있다는 것에 감격하고 힘들어도 살아있는 자로 사는 것이 성령충만이다.
신실한 성도도 너무 힘들면 잠깐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도 사랑하신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있나요?”라고 원망해도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나님은 한 길을 막으시면 다른 길을 열어주시고 슬픈 일 후에는 더 좋은 일을 예비하신다. 하나님도 살아계시고 성도도 살아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영생을 바탕으로 삼아 현재 살아있는 자로서 살면 어떤 절망도 이겨낼 수 있다.
성도에게 주어진 부활의 능력을 잘 활용하며 살라. 부활의 소망이 확실하면 어떤 십자가도 능히 질 수 있다. 십자가를 지면 부활이 따른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늘 갈등은 있다. 중요한 것은 갈등 후에 잘 봉합하는 것이다. 가끔 선거가 있으면 엄청난 국론 분열이 생기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하나가 된다. 역사가 바뀔 무렵은 대개 가장 힘든 시기다. 그러나 깊은 새벽 후에는 곧 아침이 온다.
몇 년 전에 4년 임기의 교단 감독 선거가 너무 치열해 정신적인 큰 교단 분열이 있었다. 비록 소리치는 싸움은 없었지만 목회자들의 마음이 완전히 둘로 갈라져 있었다. 선거 후 그 분열도 1년 안에 대략 치유되었다. 선거 직전의 분열은 어쩔 수 없지만 성숙한 시민의식이 있다면 선거 후의 봉합에도 탁월해야 한다. 성도는 갈등 극복의 초석이 얼마든지 될 수 있다. 성도의 믿음은 죽음을 꿰뚫는 부활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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