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낼 때 채워진다 (창세기 26장 1-11절) <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대 흉년이 들어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잠시 내려갔었다(창 12:10). 그로부터 약 100년 후 이삭의 때 또 대 흉년이 들어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다(1절). 창세기 20장에서 아브라함이 만난 그랄 왕 아비멜렉은 본문에서 이삭이 만난 그랄 왕 아비멜렉과는 약 70년의 시차가 있기에 다른 왕이다. 당시 그랄 왕의 공식 명칭이 ‘아버지는 왕’이란 뜻을 가진 아비멜렉이었다.
대 흉년이 들자 하나님이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고 하셨다(2절). 당시 가나안 지역에 흉년이 들면 애굽으로 잠시 내려가 거류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하나님은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고 준비도 안 된 채 애굽으로 내려가면 애굽의 우상 문화에 젖어 선민 가문의 자격을 잃을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대 흉년 때 곡창지대인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명령은 지키기 힘든 명령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명령을 주시면서 큰 복을 약속하셨다(3-4절). 가나안 땅이 특별한 복의 기운이 있기에 그 땅에 거하라고 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기독교는 근거 없는 풍수지리설을 배격한다. 풍수지리설에서는 ‘땅에서 흐르는 기운’을 믿고 어느 곳에 조상의 무덤을 두면 자손이 번성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운명을 변화시키는 특별한 땅의 기운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비하신 복된 땅은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은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왠지 모르게 그 장소와 분야에 몸담으면 의욕과 기쁨이 생기는 곳인가? 그것은 주관적이다. 다만 하나님이 지시화지 않는 땅은 있다. 애굽 땅이다. 애굽 땅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유혹하는 땅이다. 하나님은 그곳으로 가지 말라고 권고하신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도 어려움을 만난다. 그러나 어려움 중에도 애굽으로 가지 않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복을 내려주실 것이다.
< 비워낼 때 채워진다 >
왜 하나님이 이삭 가정과 자녀를 축복하셨는가? 아브라함처럼 이삭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랄에 거주했기 때문이다(5-6절). 그랄에서의 이삭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해 묻자 이삭은 자기 누이라고 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리브가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들이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7절). 아브라함도 이복누이였다가 아내가 된 사라를 누이로 속인 적이 있었는데(창 20:2,12) 이삭도 위기 때 똑같이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였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아브라함의 동생인 나홀의 아들 브두엘은 사촌 간이었기에 브두엘의 딸인 리브가는 이삭에게 오촌 종질녀였다. 그러므로 이복누이였던 아내 사라를 누이로 속인 아브라함보다 오촌 종질녀였던 아내 리브가를 누이로 속인 이삭은 더욱 큰 거짓말을 한 셈이었다. 그렇게 비겁하고 기만적인 모습을 하면서까지 목숨을 부지하려는 모습이 매우 실망스럽다. 그랄에서의 그의 삶은 양심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삶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이삭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보고 이삭을 불러 말했다.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죽음이 두려워서 그렇게 했다고 솔직히 말했다(8-9절). 보통 같으면 시기심도 발동하고 기만당한 생각도 들어서 이삭을 죽일 수 있었지만 아비멜렉은 “왜 그렇게 행했느냐? 내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해 죄를 지었다면 어떻게 했느냐?”고 점잖게 질책한 후 자기 모든 백성에게 “이삭과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일 것이다.”라는 명령을 내렸다(10-11절).
그 일로 인해 이삭은 이방 땅에서 더욱 안전한 위치를 확보했다. 극적인 반전의 역사다. 왜 아비멜렉이 그런 은혜를 베풀었는가? 하나님이 전적으로 그의 마음을 움직이셨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힘써 순종하면 막다른 곳에서도 신비한 은혜의 문을 열어주신다. 여호수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여리고성을 물리쳤는가?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순종밖에 없었다. 그 순종한 일이 가장 큰 일이었다. 순종하는 일은 다른 어떤 일보다 소중한 일이다. 순종으로 자기를 비워낼 때 채워짐의 은혜가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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