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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만나는 준비 (아모스 4장 1-13절)

by 【고동엽】 2023. 1. 9.

하나님을 만나는 준비 (아모스 4장 1-13절) < 치우치지 않도록 주의하라 >

 한 집사가 고등학생 딸의 믿음을 빨리 키우려고 학생부 여름 영성 집회에 보냈다. 그 집회는 귀신을 쫓아내고 은사가 많이 나타난다고 소문난 집회였다. 성령충만도 받고 믿음이 뜨거워질 것을 기대하며 보냈는데 거기서 딸이 귀신 얘기를 듣고 이상한 비명 소리로 하는 기도를 받은 후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정신이 병든 채 돌아왔다. 그 후 딸은 학교도 안 가고 20여 년간 집에서 거의 나오지 않아 부부 중 한 명은 늘 집을 지켜야 했다. 가족여행을 갈 수도 없었다. 남편은 좋은 직장을 다녔지만 가정이 그러니까 늘 표정이 어두웠다.

 어느 날 그 집사가 목사에게 말했다. “목사님! 건강하게 잘 지내던 딸을 그 영성 집회에 보낸 것에 대해 늘 땅을 치고 후회합니다. 빨리 믿음을 키우려는 욕심이 화를 불렀습니다. 은사가 나타나고 성령충만을 준다는 말만 믿고 보냈는데 거기서 딸이 극복할 수 있는 두려움의 한계를 넘어 영혼과 정신이 붕괴된 것 같습니다. 딸이 그렇게 된 것은 저희 부부 때문입니다.” 딸을 정신병원에 맡기고 조금 편하게 지낼 수도 있었지만 딸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두 부부는 직접 딸을 돌보며 늘 우울하게 살았다.

 영성 집회도 잘 선택해서 보내라. 잘못 보내면 안 보냄만도 못하게 된다. 그런 집회를 통해 갑자기 뜨거워진 믿음을 성숙한 믿음으로 오해하지 말라. 갑자기 뜨거워진 믿음은 의지적인 믿음보다 감정적인 믿음인 경우가 많고 더 나아가 뜨거워진 것을 영성이 높아진 것처럼 여겨 교만해지면 더 안 좋게 된다. 믿음을 키우려고 인간적으로 너무 서두르지 말라. 하나님의 믿음 플랜을 어기고 너무 빨리 가려다가 진짜 빨리 가는 수가 있다.

 자녀의 신앙 교육에서 핵심 요소는 부모의 교육이다. 자녀 교육을 학교나 교회에만 맡기지 말라. 찬양집회나 영성집회에 맡겨도 안 된다. 가정이 1차 교회다. 가정에서 삶으로 보여주는 예배와 진실하고 꾸준한 믿음의 모델이 되라. 주일예배도 잘 드리고 삶으로 드리는 주중예배도 잘 드리라. 믿음을 키워준다는 단기 속성 코스를 너무 믿지 말라. 부모가 믿음의 모델로서 믿음의 코칭과 멘토링을 꾸준히 제공하고 주일예배와 삶 속의 예배를 꾸준히 드리도록 사려 깊게 인도해야 건강하고 복된 믿음이 생긴다.

 요즘 여름 수련회를 특별 집회 개념보다 가족 캠프 개념으로 가지는 교회가 많아지고 있다. 즉 여름 수련회를 생명력을 다시 일으키는 리바이벌(revival)의 부흥 집회 개념으로 하기보다 자정능력을 다시 회복하는 리트릿(retreat)의 안식과 쉼 개념으로 하는 것이다. 자연에서 하나님을 느끼게 해주는 리트릿 개념으로 수련회를 하면 단기간의 뜨거운 믿음의 성장은 없는 것 같아도 영적으로 교만해지거나 영적인 밸런스를 잃을 위험성은 막을 수 있다.

 레크리에이션(recreation)은 놀이와 여가활용을 통해 창조적인 삶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세상의 레크리에이션 개념이 교회의 리트릿 개념과 유사하다. 재창조(recreation)도 필요하지만 재조정(retreat)도 필요하다. 일과 활동에서 벗어나 여가를 즐기고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느끼면서 자기 성찰도 하고 은근과 끈기의 동력을 얻어 새롭게 일과 활동의 장으로 들어서게 하는 리트릿 개념으로 수련회를 가지는 것도 좋다.

 공부할 때는 공부하고 쉴 때는 쉬는 것이 좋다. 공부할 때 공부시키고 특별 공부를 통해 더 공부시키면 좋을 것 같지만 그 인생은 통전적 시각과 밸런스를 잃기 쉽다. 그처럼 평소에 예배를 잘 드리는데 특별 예배를 통해 더 깊은 예배로 들어가게 하겠다는 것은 좋은 취지와는 달리 영혼이 밸런스를 잃고 치우친 신앙을 가지게 만들 수도 있다. 가나안의 축복과 행복을 얻으려면 치우치지 않는 믿음이 꼭 필요하다. ‘예배와 교제’를 겸비하고 ‘일과 휴식’을 겸비해 치우치지 않는 발걸음으로 나아가야 복된 삶을 잘 지속시킬 수 있다.

< 하나님을 만나는 준비 >

 본문 12절에는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는 말씀이 나온다. 성도의 제일 소원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단기간의 집회를 통해 사람 계획대로 만나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는 모습도 없이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은 오해와 착각일 수도 있고 마음만 높아지게 할 수도 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

1. 약자를 지혜롭게 도우라

 힘없는 자를 학대하고 가난한 자를 압제하면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결국 자신도 학대받고 압제받는다. 약자를 괴롭히면서 자비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다(1-3절). 약자를 선대하고 높여주려고 해야 하나님도 만날 수 있고 결국 자신도 선대 받고 높여진다. 사람을 분별은 하되 구분은 하지 말라. 즉 잘 분별해서 좋은 만남을 가지고 좋은 사람을 가까이하되 잘못된 기준이나 편견으로 사람을 구분하거나 차별하거나 판단하지 말라.

 얼마 전 한 학생이 하버드 대학에 합격되었다가 그 전에 했던 인종 차별적인 발언이 알려져 합격이 취소되었다. 그옛날에는 타인 감수성 문화가 약해 차별적인 발언을 쉽게 했지만 요즘 그렇게 발언하면 후대로부터 꼰대 취급을 받는다. 타인 감수성이 있어야 존중받는다. 사람됨이 중요하다. 사람됨을 갖추기 위해 치열한 자기 성찰을 통해 남을 조금 더 배려하려는 삶이 요즘의 시대정신이고 기독교정신이다.

 다만 약자를 도울 때는 지혜롭게 도우라. 때로는 나의 도움이 남의 영혼에는 도움이 안 될 수 있다. 나의 도움으로 남의 영혼이 굳건히 일어서기보다는 오히려 길을 잃고 의존적이 된다면 좋은 도움이 아니다. 남을 도울 때는 영혼과 정신까지 일으키고 건강하게 만드는 것까지 생각하고 도우라. 그래서 때로는 외면과 거절도 필요하다. 그처럼 남의 영혼을 일으키는 것까지 생각해서 지혜롭게 도우면 삶의 보람도 넘치고 하나님을 만날 가능성도 커진다.

2. 겸손한 믿음을 가지라

 본문 4절에 언급된 벧엘과 길갈은 유서 깊은 은혜의 장소였지만 당시에는 우상숭배의 중심지로 변해 거기서 백성들이 죄를 짓고 아침마다 희생을 드리고 3일마다 십일조를 드리면서 헛된 종교적 열심을 보였다. 또한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화목제의 일종인 수은제로 드렸고 낙헌제도 소리 내어 선포해 드렸지만 그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가 아닌 자기 기쁨을 위해 드리는 형식적인 제사였다(5절). 하나님은 형식적인 제사보다 순종하는 마음을 원하신다.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깊이 만난 후 신학대학원 들어갈 때까지 3년 반 동안 뜨겁게 말씀과 기도에 젖어 살았다. 말씀이 꿀맛처럼 느껴져 처음에는 성경을 1-2개월마다 한 번씩 여러 번 정독했다. 새벽기도도 거의 빠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아는 교인들은 그를 청년 평신도 챔피언처럼 여기며 그의 신앙이 부목사나 전도사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 청년도 무의식 속에 그런 생각을 스스로 동의하며 받아들였고 남들의 인정과 칭찬을 은근히 즐겼다. 그에게 말씀과 기도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있었지만 점차 순종하는 영성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그가 목사가 되고 교회와 영혼을 섬기면서 교인이 조금 뜨겁게 믿음생활을 하고 기도한다고 하면 자기의 옛날 청년 때 모습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점차 자기의 옛날 모습이 부끄럽게 여겨지면서 수시로 다짐했다. “한때의 뜨거운 신앙이 영성 교만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 정말 중요하구나. 앞으로 남 앞에서 영성이 깊다거나 기도 많이 한다는 모습이 가급적 드러나지 않도록 더 유의하자. 또한 힘이 생기면 더 낮아지려고 하고 개인적인 주장과 발언을 힘써 절제하자.” 그래서 평안하게 목회하며 내일의 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매일 예배를 드리고 사흘마다 십일조를 드리면 대단한 믿음 같다. 심지어는 게으른 목사보다 더 믿음이 좋은 것 같다. 다른 교인도 감탄하며 말할 것이다. “그 사람은 평신도 챔피언입니다.” 그때가 무서운 시험의 때다. 진짜 평신도 챔피언은 그런 말이 들리면 새롭게 다짐해야 한다. “내가 매일 예배를 드리고 사흘마다 십일조 드리는 것이 너무 드러났구나. 이런 신앙행위가 드러나지 않도록 더 조심하고 더 목사님께 순종적인 모습을 보여드리자.” 그런 경지에 도달한 성도가 진짜 하나님을 만나는 평신도 챔피언이다.

3.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라

 본문 6-11절에는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씀이 5번 나온다. 하나님이 수많은 시련을 통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했는데 그들이 계속 거부했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재앙과 재해를 반복해 말씀한 것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계속 문제와 고통이 생기니까 속히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는 뜻이다(12절). 그런 하나님의 호소가 지금도 수시로 들려지는데 왜 어떤 사람이 계속 회개하지 않는가? 높은 마음 때문이다. 결국 겸손과 회개는 깊은 관련이 있다.

 살면서 가장 멀리해야 할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다. 교만한 사람을 가까이하면 똑같이 교만한 사람으로 찍혀서 같이 불행해진다. 연약해서 소외될 때 힘써 붙잡아주는 것은 사랑이지만 교만해서 소외될 때 붙잡아주는 것이 그의 사람됨을 막는 거짓된 사랑이다. 만약 약자가 교만하다면 무조건 붙잡아주지 말라. 잘못 붙잡아주면 영혼이 더 잘못된다. 부모가 자녀를 힘써 붙잡아주어야 하지만 자녀가 지켜야 할 선을 넘으면 그때는 쩔쩔 매지 말고 엄한 훈육에 들어가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해야 자녀가 바르게 된다. 자녀가 버릇없으면 백해무익이기 때문이다.

 기업 사장이 목회자 앞에서 발을 꼬고 팔짱을 끼고 있으면 그것은 목회자를 우습게 보는 태도로 보일 수 있다.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다. 그때 목회자가 그의 재정적 기여를 염두에 두고 쩔쩔 매는 모습을 보이면 그 사장의 하나님 만나는 길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목회자도 사장 앞에서 팔짱을 끼지 않고 사장도 목회자 앞에서 팔짱을 끼지 않아야 한다. 예의도 차릴 줄 알아야 사람답게 되고 성도답게 된다. 어른 앞에서 예의를 차리듯이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회개와 겸양의 자세로 영적인 예의를 차려야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날 수 있다.

4. 자연에서 하나님을 찾으라

 웅장한 산과 바람을 통해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고 자연 현상을 통해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도 찾을 수 있다(13절). 또한 하나님의 음성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고 문제와 시련의 환경이나 주변인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다. 더 나아가 희미하나마 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느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느끼는 시간을 수시로 가지라. 그것을 위해 가끔 하늘도 보고 여행도 떠나라. 인생 기어를 가끔 저단으로 늦추면 욕심도 절제할 수 있고 인생의 추락과 사고 가능성도 크게 낮출 수 있다.

 눈앞에 펼쳐진 자연을 통해 천국을 보고 영원을 느끼면 내가 꽤 많은 것을 소유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너무 현실에 매여 살지 말고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숨결과 손길을 느끼라. 자연을 저절로 생긴 우연으로 아는 것은 모든 불안의 뿌리이고 자연을 하나님의 손길이 담긴 필연으로 아는 것은 모든 평안의 뿌리다. 어떤 사물도 우연의 산물은 없고 어떤 상황도 우연적인 상황은 없다. 만물과 만사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는 마음이 성령충만한 마음이다.

 만물과 만사에 깃든 기적을 외면한 채 기적 집회를 찾아다니지 말라. 너무 서두르거나 조급해하지 않으면서 만물과 조화를 이루며 살려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다. 자연을 잘못 대하면 자연의 역습을 부른다. 왜 사람이 자연을 파괴하는가? 너무 많이 가지고 누리려는 탐욕 때문이다. 참된 복은 ‘더 가진 것’보다 ‘덜 가지고도 더 누리는 것’이고 ‘신비한 은사를 많이 받는 것’보다 ‘만물과 만사에 깃든 하나님의 신비에 눈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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