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가져다주는 능력 (요한복음 14장 10-12절) < 믿음이 가져다주는 능력 >
본문은 주님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과 권세와 관련해 2가지 중요한 교훈을 준다. 첫째, 체험보다 믿음이 중요하다는 교훈이다. 어떤 체험을 하면 믿음이 견고해질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체험이 주는 감격은 지속성이 짧다. 하나님은 감정을 따라 왔다 갔다 하는 체험 중심적인 신앙을 별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체험 중심적인 신앙은 외적인 것에 관심이 많기에 미혹되기도 쉽다. 체험 중심적인 신앙에 너무 치우치지 말라. 신비한 체험이 없어도 구원받은 성도는 이미 보이지 않은 많은 기적을 체험한 존재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하나님을 직접 뵈면 얼마나 믿음이 강해지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할까?” 그러나 체험이 믿음을 온전하게 한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도 소수만이 믿음을 가졌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제자훈련을 철저히 받은 12제자 중에도 1명이 배반했고 본문에서 빌립은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굳게 신뢰하며 작은 일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십자가가 최고의 능력이라는 교훈이다. 본문 12절을 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이 말씀을 체험 중심적인 교주는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보다 더 놀라운 기적적인 능력을 행할 수 있다.”고 곡해한다. 과연 그런 말씀인가? 상식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는 얘기다. 어떻게 전능하신 예수님보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가 더욱 큰 기적적인 능력을 행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 말씀은 무슨 말씀인가?
본문 12절에서 ‘그보다’란 말은 문맥에 의하면 ‘내가 하는 일보다’라는 뜻이다. 그때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시려고 했는가? 십자가를 지시려고 했다. 결국 본문 12절에 나오는 ‘내가 하는 일’은 ‘신기한 기적적인 능력’을 뜻하기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뜻한다. 예수님이 하신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일은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었다. 예수님의 관점 및 사역에서 ‘기적을 행하는 것’은 부분적인 일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근원적인 일이었다. 십자가의 대속의 피만이 구원의 길을 열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 십자가가 능력의 원천이다 >
사람들은 ‘능력’이라고 하면 ‘신기하고 기적적인 능력’을 연상하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능력은 기적이나 표적과 같은 것만은 아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성도에게 있는 진짜 위대한 능력은 십자가를 지는 능력이다. 결국 본문 12절에 나오는 ‘내가 하는 일’에 십자가를 대입하면 이런 말씀이 된다. “나를 믿는 자는 십자가를 그도 질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십자가도 지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달렸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본문 12절 말씀처럼 예수님이 하나님께 가신 후 보내주신 성령의 감동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베드로의 ‘거꾸로 매달린 십자가’가 진짜 능력이다. 믿음은 기적적인 축복을 선사하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 믿음이 주는 가장 위대한 능력은 ‘기적’이 아닌 ‘십자가’다. 물론 기적적인 능력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참된 믿음은 기적적인 능력의 가능성도 크게 높여준다.
말씀 중심적인 믿음을 인본적인 믿음이라고 하는 것도 문제지만 능력을 추구하는 믿음을 무조건 미신적으로 보는 것도 문제다. 치유와 기적은 지금도 일어날 수 있다. 사실상 모든 성도는 능력을 받아야 한다. 지금도 사탄은 성도를 넘어뜨리려고 때로는 극성스럽게 때로는 은밀하게 활동한다. 자기 힘만으로는 사탄을 이길 수 없다. 사탄의 힘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마르틴 루터가 말했다. “이 세상에 사탄과 비견될 자는 없다.”
사탄도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능력을 무력화시켰다는 사실이다(골 2:15). 그런데 사탄은 왜 아직도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신학적으로 신약시대는 ‘이미 그러나 아직’이란 과도기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이미 승리했지만 아직 완전히 승리한 것은 아니다. 사탄은 화살이 몸에 박혔지만 아직은 죽지 않은 사자와 같기에 오히려 더 흉포하고 파괴적이며 분노로 날뛰고 있다.
지금 세상이 크게 혼란한 사탄이 죽을 때가 가까워졌다는 신호다. 분노로 날뛰는 강력한 사탄을 이기려면 능력을 받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는 것이다. 무속적인 방법으로 능력을 추구하지 말라. 능력의 원천은 십자가에 있다. 능력을 신기한 기적으로만 여기지 말고 십자가로 여기는 성숙한 믿음을 가지라. 십자가의 능력을 가지면 어떤 현실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최고의 능력자가 된다. 십자가의 참된 능력을 가지고 문제 속에서도 행복을 노래하고 시련을 축복의 재료로 만들어가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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