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크신 사랑 (이사야 65장 1-5절) < 사랑하면 사랑받는다 >
필자는 학생 때 싸움 실력이 강한 편이었다. 중학교 3학년부터는 쉐도우 복싱 주먹질을 매일 평균 1만 번씩 거의 2시간 동안 쉼 없이 연습하면서 더 강해졌다. 싸울 때는 약한 학생과는 보호본능이 발동해서 절대 싸우지 않았다. 늘 강하다는 학생, 논다는 학생, 입에 욕이 붙은 학생과만 주로 싸웠다. 그렇게 강한 척 했지만 제일 약해질 때가 있었다. 여자 앞에 섰을 때였다. 여자는 보호해야 한다는 본능이 강하게 작동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둘째 딸과 요즘의 미투 문제로 대화하면서 필자가 “어떻게 여자를 폭행해? 잘 보호해야지.”라고 했다. 그때 딸이 말했다. “아빠! 저는 아빠의 그런 모습이 맘에 들지만 요새는 ‘남자는 여자를 보호해야 돼.’라는 생각 자체를 싫어하는 여성도 있는 것 같아요.” 필자가 말했다. “그런 것 같다. 우월적인 태도로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그러나 우월적 태도가 없어도 아빠에게는 그런 본능이 강하게 있는 것 같아.”
필자는 아내에게 그다지 멋진 남편이 아니다. 낭만적인 세심함도 부족하다. 집안일도 잘 도와주지 않고 외모도 별로라서 큰 키와 가슴으로 아내를 품어주는 남성적인 매력도 없다. 그래도 아내를 동등한 존재로 존중해주고 철저히 보호해주는 편이다. 목회 성공을 위해 아내를 희생시키기보다 목회 성공은 못해도 늘 아내의 행복을 먼저 생각한다. 고난과 풍파 중에도 작은 키와 가슴으로 최대한 아내를 보호해주려는 마음만은 강하다.
그 마음이 읽고 아내는 필자의 말을 잘 따라준다. 아내에게 필자는 세파를 막아주는 큰 산이고 안전한 쉼터를 제공하는 큰 나무와 바위 그늘이다. 아내는 체격이 커서 안아들지도 못하고 등으로 업기도 힘들다. 앞에서 막아주어도 필자보다 키가 커서 잘 숨지도 못하고 머리가 비쭉 튀어나오지만 정신적으로는 늘 필자 뒤에 숨어 보호받는 것을 즐긴다. 그렇게 작은 키로도 힘써 보호해주니까 결정적인 때는 거꾸로 아내가 필자를 보호해준다.
약 10년 전에 한 스포츠 센터 매니저가 필자에게 사우나 비용만 내고 피트니스 센터 시설을 무단으로 이용했다고 누명을 씌웠다. 극구 부인해도 매니저는 복수의 목격자가 있다고 하면서 CCTV를 보면 다 드러나니까 솔직히 자백하라고 했다. 필자가 “이용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하자 그가 말했다. “그러면 제 손에 장을 지지고 5억 원을 물겠습니다.” 그때 목회자가 소리치고 싸울 수도 없어도 범죄자 취급을 당하며 크게 수세에 몰렸다.
그 상황을 알고 아내가 즉시 달려왔다. 그리고 남편을 위해 망가질 작정을 하고 매니저를 몰아붙이자 전세가 뒤집혔다. 그렇게 망가져도 좋다는 듯이 나오는 것까지는 좋은데 이런 말까지 했다. “내 남편이 누군지 알아요? 목사예요. 목사가 그런 일을 할 것 같아요?” 그때 필자는 속으로 “그 말은 빼지.”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듣고 매니저가 더 비꼬며 말했다. “목사가 그러니까 더 나빠요.” 그 말에 분노가 일었지만 목회자니까 가만히 있어야 했고 대신 아내가 교양도 버리고 철저히 망가지며 필자를 보호했다.
결국 CCTV를 정밀히 살펴도 필자가 피트니스 센터를 이용한 흔적이 없자 센터장이 무고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 그래도 그 매니저는 자기 손에 장을 지지지도 않았고 5억 원을 물지도 않았다. 그때 아내에게 정말 고마웠고 아내의 소중함을 새롭게 절실히 깨달았다. 아내를 늘 보호해주려고 하니까 결정적인 때에 아내는 자기를 던져 필자를 보호해준 것이다. 보호해주면 보호받고 사랑해주면 사랑받는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더 기막힌 무고 상황을 당했다. 평소에 가끔 교회에 나오던 한 40대 여성이 아침에 찾아와 얘기 좀 하자고 해서 목양실 문을 조금 열어놓고 얘기했다. 그때 그녀는 새벽기도회 때 필자가 설교하면서 자기를 흘겨봐 기분이 나빴다고 했다. 전혀 없는 말이었다. 어느 날은 자신이 새벽기도 후에 본당에서 나왔는데 거기서 필자가 자신을 보고도 무시했다고 했다. 필자는 새벽기도 후에 그녀와 본당 입구에서 마주친 일조차 없었다.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자 그녀는 자기가 분명히 그 일을 겪었는데 왜 발뺌하느냐고 했다. 필자는 속으로 겁이 덜컥 났다. 목회자이기에 마귀 대왕은 겁나지 않아도 없는 말을 지어내는 무고는 정말 겁났다. 그나마 필자가 무시했다고 해서 다행인지 만약 자신에게 얼굴이라도 들이밀었다고 하면 큰일 날 일이었다. 그때 필자가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고 강변하자 그녀는 마시던 차를 휙 제게 뿌리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교회를 떠났다.
그때 어떤 대응도 못했다. 또 어떤 말을 지어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언뜻 생각하자 그 일은 남자가 해결할 일이 아닌 것 같아 아내에게 전화했다. 아내가 급히 교회로 달려와 수호천사 역할을 해주며 필자를 위해 무섭게 망가지는 길을 택했다. 그 여자에게 전화해서 교회로 당장 나오라고 하면서 왜 없는 말을 지어냈느냐고 무섭게 야단쳤다.
아내가 무섭게 야단치자 그녀가 비꼬며 말했다. “흥, 사모라더니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사모가 더 무섭게 소리쳤다. “아직 본색이 다 드러나지 않았다. 없는 말 지어내지 말고 앞으로 목사님 앞에 얼씬거리지도 말라.” 그렇게 무섭게 나오자 그녀는 완전히 기가 죽었다. 평소에 여성적이고 내성적이고 잘 나서지 않는 아내가 철저히 망가지기로 작정하고 그렇게 무섭게 나온 이유는 없는 말을 또 지어내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가 성적인 무고를 하면 목회자로서 항변도 못하고 순식간에 매장될 수도 있다. 그런 일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필자를 위해 자기 이미지가 철저히 망가지는 길을 택한 것이었다. 그날 오후 그녀의 언니가 아내에게 깊이 사과했다. “사모님! 죄송합니다. 제 동생이 요새 잠도 못자고 신경쇠약에 걸려 정신과 병원을 다니는 중이니까 용서하세요.” 아내도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그렇게 무섭게 나온 것은 이상한 얘기를 또 지어낼까봐 그랬어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자기 이미지를 망가뜨리면서 용감하게 필자를 보호해준 수호천사 아내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잊지 못한다. 필자의 아내는 다른 것은 다 참아도 남편을 공격하는 것만은 참지 못하고 철저히 남편 옆에 서준다. 목사는 체면을 지켜야 하니까 체면 깎이는 일은 자기가 하겠다는 식으로 남편을 위해 철저히 십자가를 진다. 왜 그렇게 하는가? 필자가 평소에 작은 키로 힘써 아내를 보호해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남편이 아내를 지켜주면 아내도 남편을 지켜준다. 보호해주면 보호받고 사랑해주면 사랑받는다.
평소에 사랑의 씨를 심어놓으면 반드시 보상이 있다. 특히 이성문제와 관련된 무고를 막아줄 최고의 수호천사는 배우자다. 배우자에게 잘해주면 결코 손해가 없다. 세상에는 성공과 출세를 위해 접근했다가 뜻대로 안 되면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으로 나오는 사람이 많다. 그때 누가 내 편이 되어주는가? 평소에 나의 사랑과 보호를 많이 받은 사람이다. 사람도 그렇게 보상하는데 하나님은 얼마나 더욱 보상하시겠는가?
< 하나님의 크신 사랑 >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지켜드리라.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확실히 지켜주실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딴 마음을 품지 말라. 도덕적으로는 실수하거나 잘못할 수도 있다. 평생 이성 문제로 무너진 적이 없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지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다. 자신을 자신하지 말라. 자신의 삶을 동영상으로 생생하게 1년 내내 찍어 공개하면 가관이 아닐 것이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려는 대중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군중들이 다 사라졌다. 사람은 다 타락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다. 그런 죄인도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중심만 확실하면 늘 회개 기회를 주신다. 하나님은 도적덕인 완벽한 삶보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삶을 더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만큼 크시다. 본문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은 이방인에게도 찾아오셔서 종일 손을 펴고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다(2절). 그때 패역한 백성들은 동산에서 제사하고 벽돌 위에서 분향하는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분노하게 했다(3절). 또한 죽은 사람과의 교통을 위해 무덤을 찾았고 은밀한 처소에서 밤을 지내며 신상 앞에서 주문을 외웠고 가증한 음식을 먹는 우상숭배 행위를 했다(4절). 하나님은 우상숭배 행위를 가장 싫어하시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일편단심의 신앙을 기뻐하신다. 인간관계에서도 두 마음을 품지 않을 때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되고 은혜의 역사도 계속된다.
A 목사와 B 선교사는 한때 의형제처럼 지내다가 나중에 원수처럼 되었다. B 선교사가 A 목사 교인들과 개인적으로 문자를 주고받으며 몰래 후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A 목사는 자기를 패싱하고 교인들에게 직접 기도제목을 알린 것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고 선교후원을 끊었다. 교단의 다른 교회들도 안 좋게 보고 같이 선교후원을 끊었다. 결국 B 선교사는 교단을 떠났다. 담임목사 몰래 교인들과 직접 접촉해 후원받으려는 것은 선교사의 기본 윤리를 어긴 소탐대실이다. 담임목사에게 그런 태도는 두 마음을 품은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교회가 약간만 커도 담임목사는 여러 선교사로부터 후원 기도제목을 받는다. 그때 누구에게만 후원이 집중되게 할 수 없다. 선교사들의 필요와 사정과 사역에 따라 적절히 배분하려면 개인적으로 몰래 교인들에게 직접 접촉해서 지원받으려면 안 된다. 교회 당국이 이중, 삼중으로 지원받는지도 모르고 또 지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른 선교사는 더 결핍 상태가 된다. 그래서 담임목사를 패싱하고 교인들로부터 개별적으로 직접 후원을 받으려고 접촉한 사실이 알려지면 대개 기존의 후원까지 끊길 때가 많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몰래 이중 삼중으로 지원받으려는 것은 진실하지 못한 삶이다. 하나님도 신자가 이중 삼중으로 여러 신과의 관계를 맺으려는 것을 제일 싫어하신다. 하나님도 믿고 우상도 숭배하려는 모습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속이 좁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두 마음을 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하나님만 바라볼 때 충분한 복이 넘쳐흐른다는 것을 잊지 말라. 다른 우상도 보험용으로 믿음 대상으로 삼겠다는 태도는 결국 더 많은 것을 잃게 만드는 소탐대실의 행위다.
< 영성을 과시하지 말라 >
우상숭배만큼 나쁜 것이 거룩성과 영성을 과시하는 교만이다(5절). 우상숭배와 영성 과시는 한 통속이다. 우상숭배자는 영성 자랑도 심하다. 길에서 돈을 주우면 주인을 찾아주려고 경찰서에 갖다 주지는 않고 어떤 영성주의자는 생각한다. “하나님이 어려운 내 사정을 아시고 내게 쓰라고 주셨구나.” 양심 불량을 신의 은총으로 여기면 안 된다. 꽃밭에서 금붙이가 떨어진 것을 보면 ‘인 마이 포켓’을 하고 하나님이 어려운 자기를 위해 기적적으로 주신 것이라고 하면서 간증하면 하나님께 얼마나 수치가 되겠는가?
도둑질을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처럼 간증하는 식의 간증도 많다. 말씀을 바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기한 삶보다 바른 삶을 앞세우고 신기한 음성보다 바른 음성을 앞세우라. 영성을 과시하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높이려고 하지 말라. 자기 수준보다 너무 높아지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높아지면 나중에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가려지는 존재가 되면서 추락한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면 말년이 대개 비참해진다.
빨리 올라가려고 하면 빨리 떨어진다. 많이 헌신해도 공로의식이 없게 하고 마음이 높아지지 않게 하라. 성도가 “목사님! 제가 건축헌금 할게요.”라고 할 때 헌금하고도 마음이 낮아지는 사람의 헌금은 받아도 편하지만 헌금하고 마음이 높아질 것 같은 사람의 헌금은 받아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헌금 많이 하는 것을 목회자가 무조건 좋아하지는 않는다. 어떤 목회자는 많이 헌금함으로 성도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높아질 것 같으면 가급적 그 헌금을 사양한다. 헌금하고도 마음이 높아지지 않은 사람의 헌금을 받을 때 참된 평안과 기쁨이 넘치게 된다.
헌금한 후 공로의식이 없게 하라. 이단 교주는 무조건 돈을 빼낼 목적으로 기적과 치유를 약속한 후 헌금 받은 후 나 몰라라 한다. 그는 먹고 튀는 선수다. 그렇게 헌금을 받은 후 약속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당신 믿음이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라고 한다. 그런 태도는 세상에서는 사기이고 기독교에서도 믿음의 남용이다. 하나님은 믿음의 남용과 우상숭배와 영성 과시를 보시면 즉시 심판 모드로 들어가신다.
성도답게 살려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고백했다. 그런 고백을 가지고 기도하라. “하나님! 제 언어에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제 호흡에 예수님의 숨결이 뿜어나고 제 심장에 예수님의 고동이 맥박치고 제 눈동자에 예수님의 연민이 넘치고 제 걸음이 예수님의 걸음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 제 몸에도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흔적이 나타나게 하소서!”
어느 날 성 프랜시스가 산에서 조용히 성경을 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할 때 영광스런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나면서 온몸에 십자가의 강렬한 아픔이 느껴졌다. 그 체험은 “제게 주님의 흔적을 주소서.”란 그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 후 그는 더욱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면서 성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주님을 사랑한 상처의 흔적을 가진 삶처럼 복된 삶은 없다. 영성이란 특별하고 신기한 어떤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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