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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도 필요하면 심판하신다 (이사야 24장 14-23절)

by 【고동엽】 2022. 12. 30.

하나님도 필요하면 심판하신다 (이사야 24장 14-23절) < 심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

 본문 앞 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하셨느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심판은 이사야가 지어낸 상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미리 예고하신 것이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라는 뜻이다. 심판의 주체는 사람이나 자연이나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 사실을 깨닫고 심판 후에 남은 소수와 전 세계가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한다(14-15절). 왜 종말 심판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나님이 그 심판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면 가끔 이해가 안 되는 말씀들이 있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된 말씀이다. 사랑의 하나님이란 이미지 형성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관련된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 심판의 말씀들은 복음을 거부하는 인본주의자들과 불신자들의 좋은 비판거리가 되기도 한다. 사실 그런 말씀들은 많은 신실한 성도들조차 당황스럽게 하는 말씀이다.

 왜 사랑의 하나님께서 때로 무섭게 심판하시는가? 사랑만큼 공의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무조건 좋다고 하시는 무골호인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좋은 것을 좋다고 하시는 강단이 있는 하나님이시다. 사랑은 불의의 방조 및 조장 수단이 아니다. 가슴은 뜨거워도 머리는 냉철해야 하듯이 사랑으로 뜨겁기도 해야 하지만 공의로 차갑기도 해야 한다. 유연성이 넘치는 사랑과 함께 융통성이 부족한 공의도 있어야 더욱 신뢰받는 인간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심판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심판 후의 회복이 목적이다. 하나님은 더러운 곳을 깨끗하게 만들고 원칙이 무너진 예측 불가능한 세상을 원칙이 세워진 예측 가능한 세상으로 만들려고 심판을 거치게 하신다. 천년왕국 직전에는 대 환난의 심판이 있고 천국 직전에는 흰 보좌의 심판이 있다. 심판은 세상과 사람을 깨끗하게 만드는 거룩한 불이다. 심판을 통해 빛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고마움도 느끼면서 어둠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 인해 시원함도 느끼는 성도가 참된 성도다.

< 하나님도 필요하면 심판하신다 >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전 세계가 하나님을 찬양해도 일부 사람들은 계속 배신적인 행동을 한다(16절). 결국 하나님의 최후의 무서운 심판이 임한다(17-22절). 그 심판은 하나님이 친히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때 만천하에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의 빛과 비교할 때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할 정도로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할 것이다(23절).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 대해 인본주의자들과 불신자들은 이렇게 비판한다. “그처럼 무서운 심판을 내리는 하나님이 무슨 사랑의 하나님인가?” 그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외롭고 아프셨겠는가? 그래도 필요한 경우에는 심판의 의지를 꺾지 않으신다. 결국 심판은 하나님의 최종 영광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도 성도가 종말심판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다.

 A 목사가 신학교 때 이런 다짐을 했다. “나는 카리스마의 칼을 휘두르는 목회자가 되지 않으리라.” 그 다짐대로 남에게 싫은 소리나 싫은 조치를 잘 못했다. 한 전도사가 파트타임으로 사역할 때는 무난하게 해서 목사 안수도 받게 해준 후 풀타임으로 출근시켰다. 그때부터 부목사에게 문제가 발견되었다. 교회에 출근해 거의 매일 사무실에서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한 것이다. 그래도 잘라내지 못하고 기도만 했다. “내가 저 면을 못 보았구나. 저러면 자기 존재 의미가 약해질 텐데. 언젠가는 깨닫고 이 참아준 은혜를 알고 더 충성하겠지.”

 그 ‘언젠가’는 오지 않았다. 풀타임 사역을 한지 2년쯤 후 교회에서 자기 입지가 약해진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은근히 불평까지 했다. 공동체에서 자기 입지와 존재 의미가 약해졌을 때 표현해야 할 것은 ‘입술의 말’이 아닌 ‘머리의 땀’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결국 A 목사는 과감하게 그 부목사를 정리했다. 그때 깨달았다. “좋게 보이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구나.” 그때 그는 사랑의 하나님이 심판의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상황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게 되었다.

 안 좋은 상황이 계속되어도 “좋게 보이는 것이 좋은 거다.”라고 생각하고 그 상황을 방치하면 공동체가 점점 퇴락한다. 더 나아가 그런 상황을 방치하는 것은 하나님께 심판을 미루는 일종의 책임 회피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마저 멀어지게 한다. 공의 없는 사랑은 ‘무한한 자비’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 심판을 미루는 것이다. 심판자의 모습으로 보이기는 누구나 싫다. 하나님도 심판자의 모습으로 보이기 싫겠지만 필요하면 심판하신다. 사랑과 공의가 겸비될 때 하나님에게는 영광의 길이 열리고 사람에게는 은혜의 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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