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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앞세우십시오 (누가복음 4장 1-13절)

by 【고동엽】 2022. 12. 30.

십자가를 앞세우십시오 (누가복음 4장 1-13절) < 성령충만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

 성령충만해지면 자기 변화 및 자기 극복 가능성이 커집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충만하면 소매상이 도매상이 되고 과장이 부장이 되고 영성이 갑자기 높아지고 대박 은사나 대박 기적이 생기는 줄 압니다. 기독교는 무속주의 종교나 기복주의 종교가 아닙니다. 성령충만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령충만은 환경을 변화시키는 기적의 지렛대가 아닙니다. 성령충만 후에 기적이나 문제해결이 생기기보다 오히려 고통과 문제와 시험이 생길 때도 많습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님 위에 강림했습니다. 그렇게 성령충만을 받고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놀라운 기적과 신비한 은사가 나타났다는 얘기는 없고 오히려 광야 40일간의 고통의 나날을 맞이하셨습니다.

 성령충만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 중의 하나가 광야의 시험, 즉 십자가의 시험입니다. 그 시험이 수동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시험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능동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시험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성령충만할 때 나타나는 제일 뚜렷한 것은 화려하고 신비한 은사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희생하려는 마음과 태도입니다.

 아무리 입으로 성령충만을 외쳐도 희생의 십자가를 지려는 마음과 태도가 없다면 공허한 외침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희생할 줄 모르는 성령충만을 추구하지 않게 하소서!”   시험의 십자가가 주어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십시오. 예수님은 광야의 시험 후 공생애 기간에도 많은 시험을 당했지만 다 이기셨습니다. 이 땅에서 시험을 겪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중요한 과제는 시험이 주어질 때 잘 극복하는 것입니다.

< 예수님이 받으신 3가지 시험 >

 예수님은 죄는 없지만 사람과 똑같이 출생하고 성장하고 시험받았습니다(히 4:15). 누가 감히 예수님을 시험합니까? 예수님은 스스로 시험 당함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성령충만 후 성령님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 당했는데 어떤 시험입니까?

1. 돌을 떡이 되게 하는 시험

 예수님이 마귀에게 받으신 첫 번째 시험은 돌을 떡이 되게 하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런 기적을 보여주면 사람들로부터 ‘기적의 메시야’란 소리를 듣겠지만 예수님은 그런 기적을 외면하셨습니다. 신기한 기적을 추구하면 사탄에게 미혹될 가능성도 커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필요할 때는 기적을 베풀어주시기도 했지만 자신을 나타내려고 기적을 베푸시지는 않았습니다. 이단 교주가 능력을 보여주려고 기적을 구하는 것이나 그런 기적을 보고 이단 교주의 능력을 칭송하며 따라다니는 것은 일종의 우상숭배입니다.

 또한 돌을 떡이 되게 하는 연금술 기적을 추구하는 것은복과 성공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복주의를 상징합니다. 돈을 벌 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려고 하지 마십시오. 바른 목회자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적을 너무 추구하지 마십시오. 사탄도 기적을 줄 수 있습니다. 이단 교주는 사탄적인 나쁜 방법으로 기적을 일으키려고 하고 거짓 기적으로 사람을 미혹합니다. 기적적인 성공을 너무 추구하면 그런 교주에게 미혹되기 쉽습니다. 쉽게 올라가면 쉽게 추락합니다.

 서울에 귀신을 잘 쫓아낸다는 소문으로 크게 성장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 목사는 “귀신아! 나가!”라고 하면서 사람을 쓰러뜨리는 방법으로 초대형 교회를 만들었지만 정작 자기 욕심의 귀신은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지금 그 교회가 돈 문제, 세습 문제, 교인 성추행 문제로 난장판과 전쟁터처럼 되었습니다. 그 교회 개혁 측 교인들은 귀신을 쫓아낸다는 말에 현혹되어 한국교회의 바른 신앙과 신학을 공유하지 못한 점을 처절히 회개한다고 했습니다.

 비성경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즉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교회를 성장시키겠다는 태도가 얼마나 위험합니까? 한국 교회의 일부 초대형 교회 목사들도 당시 그에게 배웠습니다. 부끄러운 이력입니다. 그런 이력을 감추기에 급급하며 젊은 시절에 생각이 짧아 잠시 그곳을 다녔다고 변명합니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지만 그런 실수 자체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교회를 성장시키겠다는 욕심이 자초한 것입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성공하려는 욕심이 있으면 나중에 그 내면의 욕심이 표출되어 은퇴할 때가 되어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은퇴하지 않으려고 하고 권세와 영광과 영향력을 내려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대개 더 추해지면서 결말이 비참해집니다. 요새 한 초대형 교회가 그런 길로 가면서 세습 문제로 비판받고 과거에 너무 보수 정권에 치우친 것도 비판받고 귀신 쫓는 사람에게 배웠던 이력도 공개되면서 더 문제가 커지고 있습니다. 잘 내려놓으면 존경받을 수 있는데 그런 불행한 길로 가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지금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성공하라고 사탄은 계속 유혹합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성공하면 조만간 무섭게 추락합니다. 수단방법을 가려 성공하려고 하십시오. 혹시 성공하지 못해도 수단방법을 가려 바르게 살려고 하십시오. 바르게 살면서 성공하기가 쉽지 않기에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수단방법을 가리고도 성공할 수 있도록 지혜와 창조성과 신실함과 성실함을 주소서.” 그런 진실한 기도를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2. 마귀에게 절하는 시험

 마귀의 둘째 시험은 자기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는 정치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시험입니다(5-7절). 그 시험을 예수님이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라.”는 신명기 6장 13절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8절). 예수님도 구약 말씀들을 인용해 마귀를 물리치는 것을 보십시오. 말씀 중심적인 믿음은 가장 안전하고 복된 믿음입니다. 그 말씀 중에서도 가장 핵심 말씀 중의 하나가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권세와 영광과 물질을 추구하면 참된 능력을 잃습니다.

 어느 날, 교황 이노센트 4세가 대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와 교황청 발코니에서 대화할 때 각국에서 보내온 헌금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교황이 말했습니다. “선생! 보시오. 베드로 사도는 은과 금이 없다고 했는데 지금 교황청은 은과 금이 넘칩니다.” 그때 아퀴나스가 대답했습니다. “로마 교황청에 은금이 넘쳐도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말을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물질은 얻었지만 능력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교회에 물질이 넘치는 것은 자랑거리가 아닌 능력을 잃은 표시나 타락의 전조일 수 있습니다. 교회에 적립된 현금 비자금 재정이 너무 많으면 은퇴하기와 내려놓기가 더 힘들어집니다. 후임 목사에게 넘겨주기도 아깝고 과감히 넘겨주어도 후임 목사에 의해 비자금 재정의 용도와 출처가 밝혀지면 자신은 물론 측근 장로들까지 무슨 비난과 망신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사실을 감추고 싶어서 가장 믿을만한 아들 목사에게 세습을 시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분립이 없이 너무 켜져서 생긴 불행입니다.

 아들 목사에게 후임을 시키면 절대 안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절대’라는 말을 쓰는 것은 조심스럽습니다. 아들 목사가 후임이 되어 훌륭하게 세대교체를 이룬 교회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후임을 세우는 과정이 아름답지 못하고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의 축복 가운데 이뤄지지 못하면 목회자 자신이 감당해야 할 고난의 후폭풍이 얼마나 크겠으며 또한 한국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이미지의 추락도 얼마나 크겠습니까? 한국 교회가 다시 신뢰를 회복하려면 세상 권세와 영광과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헌신하려는 인물 리더가 많아져야 합니다.

3.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시험

 두 번의 시험에서 실패한 마귀는 세 번째로 예수님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여기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9절). 이 시험을 마태는 두 번째로 기록했지만 누가는 세 번째에 기록했습니다(마 4:5-7). 왜 누가는 이 시험을 세 번째에 기록했을까요? 누가는 권세와 영광을 얻으려는 두 번째 시험보다 영성과 능력을 자랑하는 세 번째 시험이 더 극복하기 어려운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세 번째 시험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많은 무리가 모인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서 땅에 가볍게 착지해 살아남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비한 능력을 과시하면 보는 무리들이 얼마나 찬탄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신비한 영성과 능력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가장 사탄적인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태초에 사탄도 자신의 영성과 능력이 하나님과 버금가는 것을 과시하고 싶어 반역을 꾀했다가 이 땅에 내쳐졌기 때문입니다.

 그때 마귀는 세 번째 시험이 더 파괴력이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그럴듯하게 미혹했습니다(10-11절). 지금도 ‘능력의 종’이나 ‘기적의 종’이나 ‘말세의 신 사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집회에서 기적으로만 미혹하지 않고 그럴듯하게 성경 말씀도 전하면서 미혹합니다. 즉 성경 말씀을 인용해 전한 후 기적을 덧붙여 내세워서 자신을 능력자라고 과시하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인용해 전한다고 해서 무조건 믿지 마십시오. 이단 교주들은 자신의 거짓된 주장을 합리화하고 자기 왕국 건설을 위해 성경 말씀을 자기 뜻대로 짜 맞춰 미혹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이단의 행태를 누가는 더 나쁘게 생각했기에 신기한 능력과 영성을 자랑하는 미혹을 정치적인 권세를 내세우는 미혹보다 더 강력하게 보고 세 번째 시험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즉 누가는 히틀러나 독재자의 행태보다 이단 교주의 행태를 더 나쁘게 본 것입니다.

 그 세 번째 시험을 예수님이 어떻게 이겼습니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신명기 6장 16절 말씀을 인용해 물리치셨습니다(12절). 이 세 번째 말씀은 간단한 말씀이지만 하나님의 뜻만 순종하려는 예수님의 굳은 결의를 보여줌으로 더 이상 사탄이 미혹하러 달려들지 못하도록 승리의 도장을 찍는 말씀입니다. 결국 마귀는 모든 시험을 다 마친 후 얼마 동안 떠났습니다(13절). 그 ‘얼마 동안’이란 표현은 늘 시험을 대비하며 살라는 암시를 주는 표현입니다.

< 십자가를 앞세우십시오 >

 사탄은 지금도 끊임없이 성도를 시험하고 공격합니다. 그 시험과 공격에 무너지지 않도록 영혼을 말씀으로 힘써 지키십시오. 그러나 말씀을 많이 보기만 해도 안 됩니다. 사탄도 말씀을 인용하기에 말씀을 바르게 체계화시킨 바른 신학을 통한 가르침도 잘 수용해야 합니다. 또한 십자가의 삶을 체질화시켜야 합니다. 왜 성도가 가끔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시험합니까? 욕심을 절제하지 못하고 십자가를 회피하면서 영광만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영광 받을 생각만 하지 말고 십자가를 질 생각만 하십시오. 영광 받을 생각만 하고 십자가를 회피하면 오히려 영광이 없고 영광이 주어져도 곧 추락합니다. 그러나 영광 받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십자가를 질 생각만 하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영광스런 위치로 올려주십니다. 어디서든지 먼저 십자가를 지려고 하십시오. 그때 비로소 성도다운 성도와 제자다운 제자가 되면서 사람을 얻는 역사를 통해 영향력이 생기고 그가 속한 공동체도 힘을 얻습니다.

 최근에 한 목사님이 미국에서 은퇴하고 귀국해서 저희 선교연맹이 이전보다 많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부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힘써 자기 것을 드리고 헌신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자기 것을 드리는 사람이 있어야 공동체도 살아납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면 하나님도 감동하지만 사람도 감동하면서 따르는 사람도 생겨나게 되고 사람들의 인정과 존중도 받고 좋은 만남도 얻습니다.

 한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의 배우자를 찾았습니다. 어떤 신랑감은 상당한 위치에 오른 신랑감이지만 그 아버지는 그 신랑감에 호감이 없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 신랑감의 부모가 자기 것을 드릴 줄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떤 신랑감은 사회적인 위치가 조금 부족해도 큰 호감을 가졌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 신랑감의 부모가 자기 것을 드릴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십자가를 질 줄 아는 사람에게 최고의 매력을 느낍니다. 하나님도 십자가를 질 줄 아는 성도에게 최고로 마음을 주십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앞세우며 자기 비전과 사명을 따라 가면 그 후에 어떤 삶이 펼쳐지든지 그는 이미 성공자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자기 비전과 사명을 따라 살아도 칭찬과 보상과 열매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걱정하거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성도에게 칭찬과 보상과 열매는 덤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을 기쁘게 감당하는 것 자체가 이미 성공한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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