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께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은 예레미야 31장 33절입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율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이 한 절은 마치 긴 겨울 끝자락에 갑자기 트이는 봄빛처럼, 오래된 절망의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는 새 언약의 빛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돌판 위에만 두지 않으시고, 사람의 심장 깊은 곳에 새기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외부의 명령이 내부의 생명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종교가 아니라 구원이며, 규칙이 아니라 새 창조이며, 인간의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예레미야가 서 있던 시대를 떠올려 보십시오. 눈에 보이는 성전은 남아 있었지만, 마음의 성전은 무너져 있었습니다. 제사는 이어졌으나 순종은 말라 있었고, 입술은 경건했으나 영혼은 방황했습니다. 사람들은 율법을 손에 들었지만 율법이 그들을 들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읽었지만 말씀이 그들의 내면을 읽지 못했습니다. 왜입니까. 죄는 단지 행동의 오염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규칙을 몇 개 어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죄는 하나님을 향해야 할 사랑이 자기 자신을 향해 구부러진 상태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에 두어야 할 삶이 자기 의를 중심에 둔 채로 굳어 버린 상태입니다. 그러니 돌판의 글자가 아무리 선명해도, 그 글자를 읽는 눈이 어두우면 길을 잃습니다. 소리는 들리는데 마음이 닫혀 있으면, 말씀은 벽에 부딪혀 메아리로만 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선합니다. 거룩합니다. 의롭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을 비추는 빛이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보여 주는 거울이며, 인간의 참된 선을 안내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선한 율법이 죄인에게 닿을 때, 율법 자체가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 죄가 율법을 붙잡고 우리를 정죄합니다. 마치 맑은 햇빛이 먼지 낀 창을 통과할 때 빛이 더럽혀지는 것이 아니라, 빛이 오히려 먼지를 드러내듯이, 율법은 우리의 속을 폭로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율법은 우리를 하나님께 올려주는 사다리가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보여 주는 거울이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거울은 얼굴을 씻어 주지 못합니다. 거울은 오염을 알려 줄 뿐, 오염을 제거할 물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문턱에 섭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마음에 새기겠다”고 하시는 약속은, 인간이 “마음을 새롭게 하겠다”고 다짐하는 결심의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돌판을 더 단단히 붙잡아라”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가 붙잡을 손 자체를 새롭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자리를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받는 사람을 바꾸십니다. 행위의 조각을 다듬는 정도가 아니라, 존재의 뿌리를 갈아엎으십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더 쉬운 규정’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새 마음’을 주시는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무거운 짐을 덜어 주는 제도’가 아니라 ‘죽은 심장을 살리는 기적’입니다.
“내가 나의 율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라는 말씀 속에는 놀라운 방향 전환이 있습니다. 율법은 바깥에서 우리를 밀어붙이는 채찍이 아니라, 안에서 우리를 이끄는 생명의 법이 되려 합니다. 종이 위의 글자가 아니라, 심장 속의 맥박이 되려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은 억지로 끌려가는 노역이 아니라, 새 생명이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열매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높이기 위해 주어진 약속이 아니라, 죄로 묶인 인간을 참 자유로 풀어 내시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유”를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능력으로의 회복입니다. 죄는 마음을 쇠사슬로 묶어 하나님을 싫어하게 만듭니다. 은혜는 그 쇠사슬을 끊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은 사랑의 회복이며, 사랑의 회복은 곧 순종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하십니다. 이 언약의 핵심은 조항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이것이 구원의 중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가도 귀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사실은 더 깊습니다. 우리는 복을 원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지만, 복음은 “하나님이 복이다”라는 결론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새 언약은 법 조문을 마음에 적어 주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처를 삼으시는 은총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예레미야의 시대에는 씨앗처럼 땅에 묻혀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었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성취하러 오셨습니다. 율법의 참뜻을 몸으로 살아내셨고,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당신의 순종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율법이 우리를 향해 선고하던 정죄를 당신 자신에게로 옮기셨습니다. 우리가 지키지 못한 계명을 지키신 그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되고, 우리가 범한 불순종의 죄책이 그분에게 전가되었습니다. 여기서 복음의 찬란함이 터집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근거는 죄인의 성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취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율법을 새기시는 일은, 십자가에서 이미 정죄를 끝내신 후에야 가능해집니다. 죄책이 해결되지 않은 마음에 율법을 새기면 그것은 더 큰 절망이 되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씻긴 마음에 율법을 새기면 그것은 감사의 노래가 됩니다. 정죄가 끝난 자리에서 비로소 순종은 숨을 쉽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새 언약의 순종은 자기구원의 사다리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길입니다. 은혜는 순종을 없애지 않습니다. 은혜는 순종을 낳습니다. 복음은 율법을 무시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복음은 율법을 사랑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두 가지 벼랑을 조심해야 합니다. 한쪽은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려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결국 교만하거나 절망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의를 자랑하고, 절망한 사람은 기준을 맞추지 못해 주저앉습니다. 다른 한쪽은 방종입니다. 은혜를 핑계로 거룩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결국 은혜를 모독하고 영혼을 잠들게 합니다. 새 언약은 이 두 벼랑 사이에서 우리를 복음의 넓은 길로 이끄십니다. 그 길의 시작에는 “그리스도만”이 있고, 그 길의 열매에는 “성령의 거룩”이 있습니다.
“마음에 기록한다”는 말은 단순히 기억력이 좋아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감정이 잠깐 뜨거워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마음은 인격의 중심이며, 생각과 욕망과 의지의 샘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마음에 기록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새로 조정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전에는 자기 영광이 중심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이 중심이 됩니다. 이전에는 죄가 끌어당기는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었는데, 이제는 거룩이 끌어당기는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 땅에서 우리는 여전히 싸웁니다. 옛 사람의 잔재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죄가 왕 노릇하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앉으셨습니다. 그 왕좌에 성령께서 바람처럼, 불처럼, 물처럼 임하셔서 우리 안에 새 소원을 일으키십니다. 죄를 미워하는 마음,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내가 억지로 만들어 낸 의지’라기보다 ‘내 안에 심어진 새 생명의 본능’으로 자라납니다.
이것을 설명해 주는 한 가지 예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오래전 한 장인이 낡고 부서진 바이올린을 하나 얻었습니다. 겉은 긁히고, 줄은 끊어졌고, 소리는 탁했습니다. 어떤 이는 겉을 조금 닦고 줄만 새로 갈아 끼우면 될 거라 했습니다. 그러나 장인은 조용히 악기를 분해했습니다.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안쪽의 구조를 다시 잡고, 울림통의 균형을 바로 세우고, 마지막에 새 줄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활을 긋는 순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은 음색이 울려 퍼졌습니다. 겉만 손보는 일은 잠시 괜찮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기의 속이 무너지면 소리는 살아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겉으로 착해 보이는 사람’으로 만들려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속에서부터 하나님께 울리는 사람’으로 빚으십니다. 그래서 율법을 돌판이 아니라 마음에 새기십니다. 우리의 내면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다시 조율될 때, 순종은 억지의 소음이 아니라 은혜의 선율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무엇을 붙들어야 합니까. 우리는 스스로 마음에 율법을 새길 수 없습니다. 인간의 결심은 종종 새벽의 안개처럼 금세 흩어집니다. 감동은 있으나 지속이 없고, 눈물은 있으나 변화가 더딘 이유는, 우리가 ‘마음의 주권’을 여전히 자신이 쥐고 있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의 은혜는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기쁘게 인정하는 자리에서 더 선명해집니다. “주님, 제 마음은 주님의 손이 아니면 새겨질 수 없습니다. 저를 새겨 주십시오.” 이것이 복음적 기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부르짖음을 멀리서 구경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친히 가까이 오셔서, 말씀으로 우리를 씻기시고, 성령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공동체로 우리를 붙들어 세우십니다.
또한 이 약속은 개인의 내면적 체험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하나님은 백성을 만드십니다. 새 언약은 개인의 경건을 넘어 교회의 정체성을 세웁니다. 마음에 새겨진 율법은 공동체 안에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용서가 쉬워지고, 섬김이 자연스러워지고, 진리가 부드럽게 증언되며, 거룩이 따뜻하게 피어납니다. 마음에 새겨진 말씀은 분열을 조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화평을 이루게 합니다. 진리를 희석하지 않으면서도, 진리를 품은 사랑으로 서로를 세워 갑니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이 꿈꾸는 교회입니다. 은혜로 구원받되, 은혜가 낳는 거룩으로 증거하는 교회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서되, 성령의 열매로 걸어가는 교회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마음속에 이런 탄식이 있습니까. “목사님, 저는 마음이 너무 굳었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잘 움직이지 않습니다.” 바로 그 탄식이 은혜의 문 앞에 서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죽은 마음은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손을 대기 시작하시면, 우리는 자기 굳음을 아파합니다. 또 이런 두려움이 있습니까. “저는 과거에 실패가 많습니다. 또 넘어질까 두렵습니다.” 새 언약은 우리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과거에 매이지 않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정면에서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니 실패의 기억이 우리를 주저앉히려 할 때, 우리는 그 기억을 십자가 앞으로 데리고 가야 합니다. “주님, 제 실패는 주님의 용서보다 크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걸어야 합니다. 새 언약은 완벽한 사람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주님을 약속합니다. 우리 마음에 율법을 새기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 마음에 새겨진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는 변화’입니다. 이전에는 죄의 달콤함이 더 크게 들렸지만, 이제는 거룩의 아름다움이 더 크게 들립니다. 이전에는 사람의 칭찬이 더 중요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미소가 더 소중해집니다. 이전에는 내 뜻이 꺾이면 분노했지만, 이제는 주의 뜻 앞에서 고개를 숙일 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율법의 내면화이며, 은혜의 승리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의 밑바닥에는 한 가지 고백이 흐릅니다. “주님, 제가 주님의 백성입니다. 주님, 주님이 제 하나님이십니다.” 이 고백이 단지 입술의 문장이 아니라, 심장의 언어가 될 때, 우리는 세상 한가운데서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끝으로 성도 여러분, 이 약속은 우리를 자기 확신으로 몰아가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하나님 확신으로 이끄는 말씀입니다. “내가… 기록하겠다.” 주어는 ‘나’입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손이 무엇을 더 쥐어야 하느냐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마음이 누구에게 붙들려야 하느냐가 핵심입니다. 그리스도께 붙드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서십시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십시오. 단번에 새겨지는 듯 보이지 않아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각가이십니다. 단숨에 대충 빚지 않으십니다. 깊고 정확하게 새기십니다. 때로는 아프게 파내시고, 때로는 부드럽게 어루만지시며, 마침내 당신의 형상을 우리 안에 새겨 넣으십니다. 그 과정이 길어 보여도, 하나님의 손은 결코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제 마음에 주의 말씀을 새겨 주십시오. 제 삶이 주의 뜻을 노래하게 하십시오.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걸어가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기쁘게 들으시고, 약속하신 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설교요약
- 예레미야 31:33은 새 언약의 중심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돌판이 아니라 “마음”에 기록하셔서, 관계(“나는 그들의 하나님… 그들은 내 백성”)로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 율법은 선하지만 죄인은 율법으로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는 거울이며, 복음은 그 죄책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해결합니다.
- 새 언약의 순종은 율법주의(자기 의)와 방종(거룩 경시)을 동시에 배격하며, 은혜가 낳는 거룩으로 나타납니다.
- “마음에 기록”은 기억/감정 수준이 아니라, 욕망과 의지의 중심이 성령으로 새롭게 되는 내적 변화(중생·성화)를 의미합니다.
묵상 포인트
- 저는 율법을 “사다리”로 삼아 하나님께 인정받으려 했던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거울”로서 죄를 보고 십자가로 나아갔습니까.
- 하나님이 제 마음에 새기시는 순종이 “억지의 소음”입니까, “은혜의 선율”입니까.
- 공동체 안에서 마음에 새겨진 율법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납니까(용서, 섬김, 화평, 정직, 절제).
- 회개가 단지 후회가 아니라 “마음의 방향 전환”이 되도록, 무엇을 내려놓아야 합니까.
강해
- “그 날 후에”: 심판과 포로의 어둠 이후에도 하나님은 회복의 역사를 여십니다. 새 언약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근거합니다.
- “내가… 맺을 언약”: 언약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인간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점입니다.
- “나의 율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마음에 기록”: 외적 규범의 부재가 아니라 내적 갱신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의 중심(생각·욕망·의지)을 새롭게 하셔서 기꺼운 순종을 낳게 하십니다.
- “나는 그들의 하나님… 그들은 내 백성”: 새 언약의 핵심은 조항보다 관계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언약적 연합(소속)입니다.
주석
- “율법”(토라)은 단지 법조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르침과 길을 포함합니다. 새 언약은 토라의 폐기가 아니라 토라의 목적(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을 성령의 새 마음으로 성취하게 하는 방향입니다.
- “마음”(레브/레바브)은 정서만이 아니라 인격의 중심, 결정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록하신다는 표현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주권적 새김’(하나님의 내적 통치)을 함축합니다.
(히브리어-구약) 원어 주석
- בְּקִרְבָּם (beqirbam, “그들의 속에”): 단순한 내부 위치가 아니라 존재의 중심부를 가리킵니다. 신앙이 외적 장식이 아니라 내적 실재가 됨을 강조합니다.
- לֵב (lev, “마음”): 생각·의지·욕망·양심을 포함하는 중심 개념입니다. 새 언약은 ‘행동 교정’ 이전에 ‘중심 교체’를 말합니다.
- כָּתַב (katav, “기록하다”): 문서적 기록 이상의 뉘앙스로, 하나님이 직접 새겨 넣으시는 주권적 행위를 드러냅니다. 인간이 스스로 새길 수 없음을 전제합니다.
- תּוֹרָה (torah, “율법/가르침”): 규정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 언약 백성의 삶의 방향을 뜻합니다. 마음에 기록된 토라는 사랑에서 우러나는 순종을 지향합니다.
(헬라어-신약) 원어 주석
- 본문은 구약 히브리어이지만, 새 언약 성취의 신약적 맥락에서 핵심 개념을 연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καινὴ διαθήκη (kainē diathēkē, “새 언약”): ‘새로움’은 시간적 최신이 아니라 질적으로 새 창조적 새로움입니다.
- καρδία (kardia, “마음”): 히브리어 ‘레브’와 유사하게 인격의 중심을 뜻합니다.
- νόμος (nomos, “율법”): 율법 자체의 선함과, 죄인에게는 정죄의 기능이 드러나는 긴장을 함께 갖습니다. 복음은 정죄를 제거하고 성령 안에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합니다.
- πνεῦμα (pneuma, “성령”): 마음에 새겨지는 변화의 주체적 사역을 가리키는 핵심 연결점입니다(거듭남·성화의 동력).
금언
- “돌판의 글자는 죄를 드러내지만, 마음의 글자는 은혜를 노래합니다.”
- “율법은 사다리가 아니라 거울이며, 십자가는 거울 앞에 놓인 샘입니다.”
- “은혜는 순종을 지우지 않고, 순종을 낳습니다.”
- “하나님이 주어이신 언약은, 하나님이 끝까지 완성하십니다.”
신학적 정리
- 언약신학: 예레미야 31:33은 구속사 속 새 언약의 약속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 칭의: 죄인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의(대속·순종)이며, 율법 준수의 성취가 아닙니다.
- 중생과 성화: 마음에 기록되는 율법은 성령의 중생 사역으로 시작되어, 성화의 과정 속에서 점점 더 선명해집니다.
- 율법의 자리: 구원 얻는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삶의 길로서 기능합니다(감사로 드리는 순종).
주제별 정리
- 새 마음: 죄의 지배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중심이 바뀌는 변화.
- 관계의 회복: “내 하나님—내 백성”의 언약적 소속이 구원의 핵심.
- 거룩의 아름다움: 억지 규정이 아니라 사랑의 본능으로 자라는 순종.
- 공동체적 열매: 마음에 기록된 말씀은 교회 안에서 화평·용서·섬김으로 나타남.
목회적 정리
- 말씀을 듣고도 무감한 성도에게: 탄식 자체가 은혜의 신호일 수 있음을 위로하며, “하나님이 새기신다”는 주권적 약속에 기대게 합니다.
- 실패를 반복하는 성도에게: 절망의 고리를 끊고 십자가로 돌아가게 하며, 성화의 과정은 느리더라도 하나님이 멈추지 않으심을 확신시킵니다.
- 율법주의/방종의 흔들림에: 복음의 중심(그리스도)과 성령의 열매(거룩)를 함께 붙들도록 균형 있게 지도합니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 매일의 적용: “주님, 제 마음에 말씀을 새겨 주십시오”라는 짧은 기도를 하루의 시작과 끝에 드리겠습니다.
- 복음적 회개: 죄책을 자기 벌로 갚으려 하지 않고, 십자가로 가져가 용서의 은혜를 붙들겠습니다.
- 말씀의 통로 세우기: 읽기·묵상·암송·예배 참여를 ‘의무’가 아니라 ‘은혜의 길’로 다시 정렬하겠습니다.
- 관계의 열매: 가정과 교회에서 용서와 화평을 선택하며, 말과 태도에서 거룩의 향기를 드러내겠습니다.
- 공동체적 책임: 새 언약 백성으로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섬김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겠습니다(기도, 돌봄, 나눔,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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