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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 된 땅의 평안을 구하라(예레미야 29:7).

by 【고동엽】 2026. 1. 19.

포로 된 땅의 평안을 구하라(예레미야 29:7).

포로 된 땅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의 상식이 기대하는 방향과 자주 어긋납니다. 우리는 보통 “빨리 벗어나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예레미야 29장 7절에서, 포로로 끌려온 그 땅의 평안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빼앗긴 자리에서, 낯선 언어와 낯선 공기 속에서, 마음의 기둥이 무너진 곳에서, 그 땅의 평안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윤리적 권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언약의 깊은 결을 따라 흐르는 명령이며, 성도의 정체성과 사명, 그리고 복음의 빛이 어디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 주는 거룩한 길 안내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뿌리째 뽑혀 옮겨진 듯 보였습니다. 성전은 멀어졌고, 예루살렘의 노래는 목구멍에서 막혔으며, 하나님의 약속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성도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하나님의 손에서” 뽑혀 나간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손에 붙들린 것 같았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로 옮겨진 것이었습니다. 주께서 “내가 너희를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포로의 현실이 우연이 아니라, 죄에 대한 징계이자 회복을 위한 길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무대가 될 수 있음을 밝히십니다. 신자의 삶에도 비슷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자리, 내가 원하지 않은 환경,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관계, 내 마음의 예루살렘이 무너진 듯한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흔히 두 가지 유혹에 빠집니다. 하나는 냉소이며, 다른 하나는 헛된 낙관입니다. 냉소는 “여긴 망했다, 그저 버티자”라고 속삭이고, 헛된 낙관은 “곧 끝날 거야,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리자”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3의 길을 주십니다. 포로 된 땅에서 삶을 세우고, 그 땅의 평안을 구하며, 그 평안 가운데 너희도 평안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평안”은 단순히 전쟁이 없고 경제가 안정되는 정도의 얕은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안, 곧 샬롬은 하나님의 뜻이 질서 있게 이루어지고, 관계가 회복되며, 공동체가 생명을 향해 열리고, 무너진 것들이 치유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총체적 복을 가리킵니다. 샬롬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베푸시는 선물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그 선물을 위해 자신의 백성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땅의 평안을 구하라”는 말은 “세상에 동화되어 너희 정체성을 잃어버리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너희는 내 백성으로서, 그 땅에서 나의 뜻을 따라 살아가며, 너희의 기도가 그 땅을 향하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땅은 포로의 땅이지만, 또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땅입니다. 그 땅의 사람들은 우상숭배자일 수 있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들이며, 하나님의 긍휼이 미칠 대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포로 된 땅에서도 그 백성이 ‘닫힌 공동체’가 되지 않게 하십니다. 상처를 이유로 세상과 담을 쌓아 자기 보존만을 도모하지 않게 하십니다. 대신 하나님은 그들의 눈을 넓히셔서, 그 땅의 평안을 구하게 하시고, 기도의 지경을 확장하게 하십니다.

주께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에는 매우 구체적이고도 낯선 요구가 들어 있습니다. 포로 된 자들이 기도해야 할 대상은 자신들의 즉각적 탈출만이 아니라, 자신들을 사로잡은 제국의 도시입니다. 마음으로는 원망이 먼저 올라오지 않겠습니까. “저들을 심판하소서, 저들을 무너뜨리소서”라는 기도가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움의 언어로 공동체를 짓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정당한 분노를 품을 수 있으나, 그 분노가 영혼을 갉아먹는 복수의 의지가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백성의 심장을 다시 만지십니다. 포로 된 땅을 위한 기도는, 상황을 바꾸는 기도이기 전에 기도하는 자를 바꾸는 기도입니다. 그 땅의 평안을 구하는 기도는, 내 속의 편협함을 깨뜨리고, 나의 시선을 내 상처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옮겨 놓으며, 나의 마음을 다시 하나님의 긍휼로 적셔 줍니다.

성도님, 우리는 종종 “상황이 좋아지면 내가 선해지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반대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상황이 그대로여도 그 안에서 선을 행하게 하십니다. 포로 된 땅의 평안을 구하라는 명령은, “좋은 환경이 올 때까지 신앙을 미루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신앙은 조건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디에 있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예루살렘이 있어야만 예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포로의 땅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전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전 안에 갇히지 않으시고, 포로의 골목길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포로 된 자들에게 삶을 중단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밭을 일구어 그 열매를 먹고,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그 자녀가 다시 가정을 이루어 번성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정착하라”는 단순한 사회정책이 아니라, “절망의 언어로 생명을 끊지 말라”는 복음적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징계 가운데서도 생명을 보존하시고, 생명의 길을 열어 두십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파괴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의 징계는 회복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더욱 분명히 바라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바벨론의 군사력도, 제국의 전략도, 인간의 탐욕도, 하나님의 뜻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포로가 된 사건은, 하나님의 계획 밖에서 벌어진 비극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죄를 조장하셨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인간의 죄는 인간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제국의 폭력 속에서도, 그 모든 것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백성을 정결케 하시고, 더 큰 구속사의 길로 이끄십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포로의 땅에서 “평안을 구하라”는 말씀은 너무 잔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자에게는 이 명령이 방향을 줍니다. “나는 여기서 버려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로 보내셨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이것이 성도의 담대함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되, 세상으로부터 도망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과 동일해지지 않되, 세상을 위한 존재로 부름 받았습니다. 소금은 음식 밖으로 도망치지 않고 음식 속에 들어가며, 빛은 어둠을 미워하여 숨지 않고 어둠 속에서 드러납니다. 포로의 땅을 위한 기도와 평안을 구하는 삶은, 오늘날 성도의 공적 책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도시를 미워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도시는 죄의 흔적이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불의와 탐욕, 거짓과 폭력이 도시의 숨결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도시 한복판에 교회를 세우시고, 성도를 두시며, 기도하게 하시고, 선을 행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예배당의 벽을 넘어 거리로 흘러가야 합니다. 우리의 거룩은 개인의 도덕적 청결에만 머물지 않고, 이웃의 고통을 향해 손을 내미는 거룩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땅의 평안을 구하라”는 말씀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포함하겠습니까. 먼저,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삶입니다. 포로 된 자들이 바벨론의 불의에 불의로 맞서는 순간, 그들은 제국의 방식에 붙잡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이 그 방식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십니다. 악을 미워하되, 악의 도구가 되지 않게 하십니다. 둘째, 게으른 체념을 버리고, 성실하게 일하는 삶입니다. 포로의 땅에서 성실히 일한다는 것은 단지 생계를 위한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맡겨진 시간과 재능을 정직하게 사용하는 경건입니다. 셋째, 가정과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포로 된 땅에서도 언약의 씨앗을 끊지 않게 하십니다. 절망이 세대를 끊어버리지 못하게 하십니다. 넷째, 기도의 자리입니다. 기도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행위이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의 마음을 맞추는 거룩한 조율입니다. 그 땅을 위하여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은 미움에서 긍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자기연민에서 사명으로 옮겨 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그 땅의 평안을 구하되, 그 땅의 우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벨론의 번영을 위해 기도하되, 바벨론의 신들을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평안을 구하되, 세상의 방식으로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의 사명은 항상 “구별된 참여”입니다. 구별이 없는 참여는 동화이며, 참여 없는 구별은 도피입니다. 하나님은 둘 다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포로의 땅에 살게 하시되, 포로의 영을 품게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포로의 땅에서조차 하늘의 시민권을 잃지 않는 백성으로 살게 하십니다.

이 말씀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더 깊이 완성됩니다. 예레미야의 시대에 포로 된 이스라엘이 그 땅의 평안을 구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듯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더 근원적인 의미에서 “포로의 땅” 한가운데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하늘 영광을 떠나 죄와 죽음이 다스리는 세상에 오셨고,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으며, 이 땅의 눈물과 억울함을 친히 짊어지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에 동화되지 않으셨으나,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참된 샬롬을 위해 오셨습니다. 십자가는 단지 개인의 죄 사함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원수 됨을 깨뜨리고, 참된 평화를 세우는 하나님의 결정적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포로 된 땅의 평안을 구하라는 말씀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성취되는 평화를 미리 맛보게 하는 예표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평안을 구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구원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평의 열매를 이 땅에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교회가 이웃을 위해 기도할 때, 교회는 “십자가의 평화”를 세상 가운데 번역해 보여 주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성도의 고난 이해를 성숙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고난을 “내 신앙의 실패”로만 해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난이 때로는 징계일 수 있고, 때로는 연단일 수 있으며, 때로는 사명을 위한 배치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포로의 땅이 단지 벌의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정결케 되고, 우상의 뿌리를 뽑고, 말씀의 중심으로 돌아오는 자리였던 것처럼, 우리 삶의 낯선 자리들도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고난 속에서도 질문을 바꿉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에서 “주님, 이 자리에서 주님의 뜻은 무엇이며, 누구의 평안을 위해 내가 기도해야 합니까”로 바꿉니다. 이 질문이 바뀌는 순간, 고난은 우리를 삼키는 어둠이 아니라, 우리를 더 깊은 믿음으로 이끄는 통로가 됩니다.

여기 한 가지 예화를 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분이 직장 생활 중 억울한 일을 당하여 원하지 않는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마음이 무너지고, 밤마다 분노가 치밀었으며,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말씀을 묵상하다가 “그 땅의 평안을 구하라”는 구절이 마음에 걸렸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 말씀이 너무 밉고, 불공평하게 느껴졌답니다. “왜 내가 저들의 평안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라는 마음이었지요. 그러나 결국 그는 결단했습니다. 그 부서를 위해, 그 팀의 리더를 위해, 동료들의 가정을 위해, 그 공간의 평안을 위해 매일 짧게라도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상황이 즉시 바뀌진 않았지만, 기도하는 동안 그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 부서 사람들의 사정을 보게 되었고, 그들도 각자의 짐을 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어느새 그는 “미움의 사람”이 아니라 “중보의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그 부서 안에서 작은 갈등들이 줄어들고, 한 동료가 “당신이 오고 나서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말했답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벌하시려고 보내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다루시고, 누군가에게 평안의 통로가 되게 하시려고 보내셨구나.” 성도님, 이것이 포로의 땅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승리’의 모양과 다를지라도,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영혼을 살리시고, 공동체를 살리시며, 무엇보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어떤 결단을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나를 두신 자리를 “우연”으로 여기지 않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물론 세상에는 부당한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 부당함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놓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붙듭니다. 둘째로, 내 마음의 포로 상태를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환경이 아니라 내면이 포로일 수 있습니다. 두려움, 미움, 비교, 자책, 절망이 나를 사로잡아 끌고 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주께서는 “그 땅의 평안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그 어둠의 ‘땅’에 평안을 구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성령의 위로로, 그 땅에 하나님의 샬롬이 임하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막연히 “나라와 민족을 위해”만이 아니라, 내 가정이 속한 이웃과 도시, 내가 일하는 직장과 기관,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평안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로, 기도만 하고 손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는 행동을 낳습니다. 평안을 구하는 기도는, 정직한 노동과 친절한 말, 공정한 선택과 약자를 향한 관심, 진실을 말하되 사랑으로 말하는 태도로 열매 맺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포로의 땅에서 평안을 구하는 삶은 고상한 인간성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새 마음을 주실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씻으실 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이었고, 우리 마음에는 참된 평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평안을 구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평안을 받은 자로서 그 평안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샬롬은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하늘로부터 받은 평화가 우리의 가정으로, 우리의 공동체로, 우리의 도시로, 우리의 시대 가운데로 스며듭니다. 포로의 땅에서조차, 하나님의 백성은 샬롬의 씨앗을 심습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지만, 주께서 때가 되면 기쁨으로 거두게 하십니다. 지금은 낯선 땅일지라도, 하나님은 그 땅에서 당신의 백성을 통해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땅의 평안을 구하는 자들에게, 주께서는 약속하십니다. “그 성읍의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이라.” 이 평안은 환경의 완벽함에서 오지 않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 오늘도 낯선 자리에서, 이해되지 않는 자리에서, 그러나 결코 하나님이 떠나지 않으신 그 자리에서, 샬롬을 구하시고, 샬롬을 심으시고, 샬롬을 기다리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케 하셨으니, 우리도 이 땅에서 화평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설교요약
예레미야 29장 7절은 포로 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그 땅의 샬롬을 구하며, 그 성읍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자신들도 평안을 누리게 된다는 언약적 명령을 제시합니다. 샬롬은 단순한 안전을 넘어 하나님의 뜻과 관계 회복을 포함하는 총체적 평안이며, 하나님은 포로의 땅에서도 자신의 백성을 도피나 동화가 아닌 “구별된 참여”로 부르십니다. 이 명령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화평을 이루신 복음 안에서 완성되며, 성도는 기도와 성실한 삶으로 공동체의 평안을 섬기도록 부름 받습니다.

묵상 포인트
내가 원치 않았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기도의 대상’은 누구인지 살피며, 그들을 위한 중보가 내 마음을 어떻게 빚어 가는지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빨리 끝나야 한다”는 소원에만 갇혀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이 자리에서 이루실 뜻과 이웃의 평안을 함께 구하고 있는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언어와 태도, 선택과 습관이 샬롬을 세우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혹은 불평과 냉소로 공동체를 어둡게 하고 있는지 진실하게 대면하시기를 바랍니다.

강해
본문은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이라는 표현으로, 포로 사건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전제합니다. 이어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여호와께 기도하라”는 명령은, 포로 된 백성이 자신의 생존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선을 구하도록 시선을 확장시킵니다. 마지막으로 “그 성읍의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이라는 약속은, 하나님의 백성이 타자의 선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도 복을 흘려보내시는 언약적 구조를 보여 줍니다. 이 구조는 공로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통해 평안을 확산시키시는 섭리적 방식이며, 성도의 선행과 중보가 하나님의 구속사적 목적에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냅니다.

주석
포로기 상황에서 유다 백성은 회복에 대한 조급함과 거짓 예언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본문의 명령은 즉각적 탈출만을 꿈꾸는 신앙의 조급함을 다루며,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 속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도록 방향을 제시합니다. “평안을 구하라”는 요청은 제국에 대한 무비판적 협조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거룩한 중보와 선한 영향력을 요구하는 말씀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사회의 선을 위해 기도하고 일하는 것이 곧 하나님 경외의 한 방식임을 시사합니다.

원어 주석(히브리어-구약)
“평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שָׁלוֹם(샬롬)으로, 안전·번영·온전함·관계의 회복을 포함하는 폭넓은 의미를 지닙니다. “구하라”에 해당하는 동사는 דָּרַשׁ(다라쉬) 계열로 이해될 수 있으며, 단순한 소망 표현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찾고 추구하는 태도를 함축합니다. “기도하라”는 פלל(팔랄) 계열의 의미 영역과 연결되어, 하나님께 간구하며 중보하는 신앙 행위를 가리킵니다. 또한 “너희도 평안하리라”라는 구조는 샬롬이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며, 하나님의 백성이 이웃의 선을 구할 때 그 선이 다시 그들에게도 미치는 언약적 흐름을 암시합니다.

금언
낯선 땅에서 샬롬을 구하는 기도는, 상황을 바꾸기 전에 기도하는 자를 먼저 바꾸는 은혜입니다.
포로의 자리에서조차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통해 평안의 길을 여십니다.
그리스도의 화평을 받은 자는, 어디에서든 화평의 씨앗을 심는 사람으로 부름 받습니다.

신학적 정리
본 말씀은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전제하며, 역사 속 사건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동시에 성도의 책임을 무효화하지 않고, 포로의 현실 속에서도 기도와 선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도록 부르십니다. 이는 개혁주의 전통이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의 조화를 드러내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화평이 성도의 삶을 통해 세상에 증거되는 선교적·공적 의미를 갖게 됨을 시사합니다.

주제별 정리
샬롬은 단지 개인의 내적 안정이 아니라 공동체적 온전함을 포함하며, 신자는 자기 보호에만 매이지 않고 이웃의 유익을 구하도록 부름 받습니다. 기도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맞추는 영적 행위이며, 그 결과로 삶의 태도와 행동이 변합니다. “구별된 참여”는 세상과 동일해지지 않되 세상 속에서 선을 추구하는 성도의 균형이며, 본문은 그 균형을 포로기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요구합니다.

목회적 정리
성도는 원치 않는 자리에서도 신앙을 유보하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이 주신 자리에서 성실과 중보를 통해 샬롬의 통로가 되도록 격려받아야 합니다. 상처와 분노를 부정하기보다, 그 감정이 복수와 냉소로 굳어지지 않도록 기도와 말씀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공동체는 도시와 사회를 향한 기도의 지경을 확장하며, 일상의 작은 정직과 친절, 공정한 선택으로 샬롬을 실천하도록 서로를 세워야 합니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오늘부터 내가 속한 가정과 이웃, 직장과 도시의 구체적인 평안을 위해 기도 제목을 정하여 중보하겠습니다. 불평과 냉소의 언어를 줄이고, 샬롬을 세우는 말과 태도로 하루를 살겠습니다. 내가 맡은 일에서 정직과 성실을 지키며, 약한 이웃을 향한 작은 섬김을 실천하겠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루신 화평을 깊이 붙들고, 내 마음의 포로 상태가 풀리도록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겠습니다.

Full Source : Artificial Intellig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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