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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성수의 축복 (누가복음 6장 1-11절)

by 【고동엽】 2022. 12. 27.

<주일성수의 축복 (누가복음 6장 1-11절) < 중요한 일에 집중하십시오 >

 복된 삶을 살려면 시간과 시선을 어디에 둘 것인지 잘 선택해야 합니다. 논쟁을 걸어오는 말은 지혜와 겸손을 바탕으로 잘 무시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모든 논쟁에 다 끼어들지 마십시오. 논쟁 중에는 인생의 목표와 사명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사명과 관련된 논쟁이 아니라면 지혜롭게 무시하십시오. 잘못된 말에 너무 신경 써서 그 말과의 투쟁에 나서면 복된 삶을 위해 써야 할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기 쉽습니다.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의 인정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정입니다. 무시해도 좋을 말은 지혜롭고 겸손하게 무시하십시오. 사람은 유명해지면 반대자도 생깁니다. 그때 반대자가 걸어오는 싸움에 말려들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됩니다. 바른 길에 서 있다면 비판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비판자들이 딱지 붙인 이름이 자기 이름은 아닙니다. 남의 말이 내 운명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성도에게는 위대함의 씨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복된 운명을 위한 필요를 이미 구비해 놓으셨습니다. 자신의 소중한 힘과 시간을 남과의 논쟁에서 이기려는 데 사용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논쟁에도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런 논쟁은 평생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잘해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늘 있기 때문입니다. 남이 인정하지 않아도 너무 심란해지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인정해주시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일도 반대합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그는 반드시 잘못된 것을 찾아냅니다. 그런 사람을 이기는 비결은 겸손한 마음을 바탕으로 한 무시입니다. 그가 칭찬해주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이미 지는 것입니다. 그가 비판해도 자신이 바른 길에 서 있으면 하나님이 대신 싸워주십니다. 그가 비판의 칼을 강하게 휘두르면 하나님의 축복도 더 커지고 그가 깔아뭉개려고 하면 하나님은 더욱 올려주십니다.

 모든 문제에서 모든 사람과 다 싸울 수는 없습니다. 마음을 집중하십시오. 소중한 사명을 향해 분초를 다투며 나아갈 때 논쟁을 일으키는 누군가의 공격에 대해 일일이 대응하지 마십시오. 그때는 지혜와 겸손을 바탕으로 무시하십시오. 비판자와 논쟁에 말려들어 그 논쟁에서 이긴다고 한들 어떤 복된 운명이 펼쳐지고 어떤 진보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힘과 에너지와 시간을 빼앗기고 축복된 운명을 향해 나가는 길만 분산될 뿐입니다.

 한 훌륭한 인물에게 누군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었나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사람이 혼자 훌륭한 일을 다 못합니다. 훌륭한 일을 다 하려고 하기보다 다른 일들을 무시하고 제게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했기에 좋은 결과가 생겼습니다.” 비판자와의 논쟁이나 그를 설득하는 데 시간을 다 쓰지 마십시오. 그가 내 심정과 처지를 이해해주는 방법을 찾는 데도 너무 몰두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일에 집중하고 다른 수많은 일들을 잘 무시할 줄 알아야 자기 사명에 합당한 복된 삶의 가능성이 커집니다.

 자신의 소중한 힘과 시간과 열정을 논쟁이나 변명을 위해 사용하지 마십시오. 자신이 중요한 사람임을 인정받으려고 너무 안달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힘과 에너지를 비판자를 이기려고 하는데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복된 운명을 향해 나가고 사명을 이루는데 사용하십시오. 어디서나 반대자들은 있습니다. 좋은 일에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좋은 일을 해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 안식일은 생명을 살리는 날 >

 어느 안식일 날, 예수님이 밀밭 사이로 지나갈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었습니다(1절). 마태복음 12장 1절을 보면 그때 제자들이 시장해서 그랬습니다. 남의 밭에서 낫으로 곡식을 베어가면 도둑질이지만 나그네가 배고파서 곡식을 따먹는 것은 율법이 허용했습니다(신 23:25). 기본 생명권을 율법 이상으로 중시한 것입니다.

 일할 기회가 거의 박탈되고 일할 능력이 거의 소실된 상황이란 전제 하에서 며칠을 굶어서 죽게 된 사람이 슈퍼에서 빵을 훔쳐 먹었다면 그것은 백색 도둑질로서 유대 율법은 용납해주었습니다. 물론 그 율법을 내세워 사소한 도둑질이라도 죄의식 없이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남용하는 것입니다. 그 율법은 도둑질 당한 사람이 배고파서 그렇게 한 사람을 용납하라는 원리이지 도둑이 사소한 도둑질은 해도 좋다고 받아들이라는 원리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위가 위법인 아님을 바리새인들도 알고 비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침 비판거리가 생겼습니다. 안식일에 그런 행위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왜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고 비판했습니다(2절). 그들은 이삭을 잘라 비비는 것을 추수하고 타작하는 일처럼 여긴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는 안식일 준수와 관련된 수많은 세부 조항들을 만들어 종교적 형식주의자들에게 먹잇감을 제공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교훈하시려고 사무엘상 21장에 나오는 고사를 예로 들어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말씀했습니다(3절). 당시 다윗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었습니다(4절). 그 고사를 예수님이 인용하신 것은 문자적인 율법준수보다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과 공의의 실천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사랑과 생명 존중이란 본질이 망각된 형식적인 안식일 준수는 의미가 없습니다.

 다윗 예를 들고 난 후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5절).” 그 말씀은 예수님이 메시야란 말씀이고 안식일 율법에 매달리는 율법주의를 깨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수렁에 얽매여 사는 영혼이 율법의 본래 의미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처럼 안식일의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알려주기 위해 바로 이어서 누가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얼마 후 안식일에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실 때 거기에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6절). 그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았습니다(7절).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아시고 예수님이 아예 공개적인 치유를 위해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고 했습니다(8절).

 손 마른 사람이 일어나자 예수님이 교권주의자들에게 질문했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9절)” 율법적인 전통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생명이 위독할 때만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손 마른 병은 안식일에 치료하면 안 되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을 일을 안 하는 날로만 여기지 말고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날로도 인식하도록 그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세세한 율법조항을 따라 어떤 일을 안 하는 날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날입니다. 신실한 의사에게 주일에 위급한 환자 수술과 교회 예배 시간이 겹치는 일에 생기면 먼저 수술하고 그날만은 다른 교회에서 다른 시간에 예배드려도 됩니다. 생명을 존중하고 살리려는 태도는 어떤 태도보다 중요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법과 형식보다 우선적인 것입니다. 성도는 차가운 세상에 따뜻함을 주고 생명을 죽이고 짓밟는 세상에서 생명을 살리고 높여주는 사명을 부여받은 존재입니다.

< 진리의 길을 고수하십시오 >

 질문을 마치시고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했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자 바로 회복되었습니다(10절). 안식일에 예수님이 그의 병을 고치신 것은 칭송할 일이었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노기가 가득해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했습니다(11절). 왜 노기가 가득해졌습니까? 그들의 기득권을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득권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진리에 열린 존재가 된다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스스로 자기 기득권을 흔들고 진리와 나눔과 선교의 길에 나서면 성 프랜시스 같은 인물로서 역사가 오래 기억해줄 것입니다.

 진리를 따라 강고한 기득권 체제를 흔드는 용기도 가지십시오. 초대교회 때 전도자들의 별명은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행 17:6). 성도는 운명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생각도 깨뜨려 역사의 주체가 되도록 격려하고 반대로 기득권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생각도 깨뜨려 역사적인 인물이 되도록 도전해야 합니다. 운명에 사로잡히지도 말고 기득권에 사로잡히지도 마십시오. 오직 진리에 사로잡히십시오.

 기득권에 사로잡히면 진리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람이 귀찮고 싫습니다. 평온과 평화를 깨고 자기 지분을 잠식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본문 11절과 같은 병행 구절인 마가복음 3장 6절에는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함께 의논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날 개념으로 말하면 당시의 바리새인은 반 로마적인 유대사회의 진보 좌파와 같은 존재이고 헤롯당원은 친 로마적인 유대사회의 보수 우파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들이 함께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사상의 진’보다 ‘기득권의 진’이 그만큼 강고하다는 암시입니다.

 진보 좌파는 주로 사상과 명분 측면에서 기득권자의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고 보수 우파는 자리와 재물 측면에서 기득권자의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기득권을 진리로 잘 깨뜨리는 사람이 어떤 진영에 있든 역사적인 인물이 됩니다. 당시 예수님의 행위는 강고한 종교적 기득권 체제에 도전하는 행위였기에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이 단합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들 좌우 세력은 서로 적대하면서 세력을 키워가는 적대적 공생관계였습니다.

 특히 바리새인의 행위는 더욱 고약합니다. 경건을 내세우면서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와 기득권을 내세워 진리의 싹을 밟았기 때문입니다. 영성과 경건을 내세우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것이 얼마나 반 영성적이고 위선적입니까? 말로만 “영성! 영성!” 하면서 반 영성적이고 위선적이고 비인격적이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했기에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행위를 그토록 싫어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한 것은 예수님의 삶과 말씀에 비춰볼 때 자기들의 초라한 모습이 백일하게 드러난 수치심 때문입니다.

 사람이 상황에 맞지 않게 너무 분노하는 것은 숨기고 싶었던 초라한 모습이 드러난 수치심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진리를 따라 살다 보면 진리를 외면해서 수치심을 가진 사람들이 더 배척하고 공격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자기를 겸손하게 잘 성찰해서 그 공격이 부당하면 낙심하지 말고 진리의 길을 고수해야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리더나 인물이 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바른 길에서 이탈하지 않으려면 비교에 의한 즉흥적인 일처리를 주의해야 합니다.

 어느 날, 교인 감소로 고민하던 목사님이 다른 교회의 미국식 열린 찬양예배에 참석했다가 신선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기 교회로 돌아와 즉시 교회 성가대를 해체하고 찬양팀을 조직해 드럼과 기타를 주일 낮 예배 때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활기가 있다고 좋아하는 반응도 있었지만 다수가 처음에는 조용히 있다가 점차 불평했습니다. 한 성도는 노골적으로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와 미국은 아직 문화가 많이 다른데 왜 예배를 콘서트처럼 만드는지 모르겠어요.” 결국 그 교회는 정체성 혼란으로 더 어려워졌습니다.

 리더는 남의 것을 보고 즉흥적으로 일을 꾸미기보다 말없는 다수의 뜻을 살피며 자기 달란트에 맞춰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외형적 성장의 길보다 진리와 자기 사명을 앞세워야 팔로워도 생기면서 결국 승리합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쳐주자 교권주의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뒤따랐습니다(마 12:15). 소리가 큰 소수의 반대자에게 너무 마음을 빼앗기면 힘을 못 씁니다. 말없이 성원하는 다수를 살피고 기억하면서 진리의 길을 고수해야 인물 리더가 됩니다.

< 주일성수의 축복 >

 안식일의 본래 의미를 기억하고 안식일을 힘써 지키려고 하십시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아니라고 했습니다(막 2:27). 그 말씀은 안식일을 경시한 말씀이 아니라 안식일의 본래 의미를 알고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의 날짜’보다 ‘안식일의 의미’가 중요합니다. 안식일인 토요일에 일을 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일에 예배와 쉼과 교제를 통해 생명력이 넘치는 삶과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안식일의 참된 의미입니다. 주일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때에 맞춰 공급하실 것입니다.

 저는 요새 대학졸업을 앞둔 첫 딸에게 지금부터 수시로 교육합니다. “은혜야! 주일성수를 하지 못하는 직장은 아무리 좋은 직장도 가면 안 되는 것 알지? 정말 가고 싶은 직장에서 너를 오라고 해도 주일성수를 정기적으로 못하게 되는 곳이라면 꼭 포기해야 해.” 요즘 청년에게는 쉽지 않는 일이기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 것입니다.

 주일성수도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란 자기 잘못으로 고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의를 위해 고난과 손해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인물의 가능성을 키워줍니다. 딸이 주일성수 문제로 좋은 직장을 얻지 못하면 본인이 주일성수하는 좋은 뷰티회사를 만드는 여사장이 되든지 아니면 탁월한 능력과 지혜와 창조성과 뷰티 스타일링 분야의 당당한 실력을 갖추게 하심으로 주일성수를 보장하는 회사로부터 픽업되게 하실 것입니다. 주일성수를 보장받고 뽑힐 당당한 실력을 준비하십시오.

 주일을 지키려는 삶처럼 복된 삶은 없습니다. 주일성수를 통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상기하면 축복과 행복 가능성은 그만큼 커집니다. 저는 소유가 많지 않지만 매주 100만원 헌금하면서 가끔 주일을 빠지는 사람보다 매주 꾸준히 주일성수에 힘쓰는 사람이 더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우주만물의 소유자이신 하나님은 더욱 그렇게 여기실 것입니다. 늘 주일의 참된 의미를 기억하고 주일성수에 힘써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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