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은 교만이다
루이제 린저(Luise Rinser, 1911-2002)가 지은 <유리반지(Die Gläsernen Ringe, 잔잔한 가슴에 파문이 일 때)>는 맑은 예지와 비단결 같은 멋진 필체로 한 소녀의 성장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은 1차 대전으로 아버지가 전쟁터로 끌려가자 성 게오르크 수도원으로 들어간다. 어느 날, 그녀는 한 사내를 알게 되면서 바깥 생활을 동경하고 이성에 눈뜨게 된다. 수도원에서는 그녀의 행동을 잡아주려고 얌전한 테레제를 붙여주지만 그녀는 주문을 외워 귀찮은 테레제를 죽게 한다. 심한 자책감으로 그녀는 수도원 샘을 찾아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키지만 샘은 상처입지 않음을 깨닫고 돌담에 기대 흐느껴 운다.
그 뒤 그녀는 여러 사귐과 이별의 과정을 겪으며 불가능한 것에 마음 쓰지 않는 법을 배우고 전력을 다해 자기 앞에 펼쳐진 현재를 움켜잡는 법도 배우고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나게 내버려두는 법도 배운다. 성숙의 과정에서 그녀는 격정을 못 이긴 친구 코르넬리아의 자살을 겪고 어른들의 질투로 투명한 우정이 찢어지는 체험도 한다.
결국 혼자가 된 그녀는 다시 성 게오르크 수도원으로 돌아가 샘에 돌을 던질 때 생기는 파문을 보면서 그 파문의 무늬에도 어떤 법칙이 있음을 깨닫고 인생의 해답을 찾아 고백한다. “앞으로 내 생애를 이끌 것은 뒤엉키고 어두컴컴한 괴로움에 찬 격정이 아니라 맑고도 냉엄한 정신의 법칙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일상에 회의를 느껴 구속된 삶의 굴레에서 무작정 뛰쳐나갔지만 결국 두려움과 슬픔과 막막함을 한없이 느끼고 나서야 인생을 바로 이끄는 것은 격정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삶은 깨지기 쉬운 유리반지와 같다. 그래서 뜨거운 가슴과 함께 냉철한 머리도 필요하다. 때로는 돌진보다 중지가 낫고 웅변보다 침묵이 낫다. 계획을 잠깐 접고, 조급하고 초조한 손을 멈추고, 감정을 뒤편으로 돌리고, 뒤엉클어진 인생을 새롭게 하려고 중지와 침묵의 이중창을 부를 때 뿌리 깊은 성장이 있다.
성장은 고뇌와 아픔 후에 주어진다. 힘든 현실은 인간의 실존이고 통과 의례다. 성장이란 조금씩 잃어가며 조금씩 포기해나가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다. 하나를 버릴 때 하나를 얻는 원리를 알아가는 과정이 성장이다. 능동적인 포기는 갈등을 줄이고 평화를 키운다. 충동과 고집은 비겁자의 삶이다. 작은 의무라도 끝까지 수행하고 자기를 극복해야 높은 언덕으로 날아오를 수 있다.
삶에는 낙심과 깨짐과 상처가 있다. 그래도 삶은 불쌍한 것이 아니고 ‘상처 입은 삶’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삶은 모든 아픔을 용해시킬 수 있다. 절망적인 환경에도 곳곳에 무수한 희망의 뿌리들이 있다. 인간은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 희망으로 사는 존재)’로 살아야 한다. 절망은 교만이다. 절망적인 상황에도 바라고 따라갈 한 줄기의 희망은 반드시 존재한다. <상처는 인생의 보물지도> 희망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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