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믿음을 가지십시오 (마태복음 14장 28-36절) < 믿음은 모험입니다 >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큰 무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할 때 예수님은 그들을 모아 세력을 키우기보다 오히려 흩어 보내셨습니다. 동시에 제자들도 즉시 재촉해 갈릴리 호수 건너편 게네사렛으로 가게 해서 제자들과 무리를 격리시켰습니다(22절). 몰려오는 큰 무리들을 보고 제자들이 헛된 야심을 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참된 제자가 되려면 기복주의와 기적주의와 대중주의와 외형주의를 멀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을 무리로부터 격리시킨 후 예수님도 무리들의 환호를 거부하고 스스로 격리되시려고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셨습니다(23절). 그처럼 예수님이 홀로 밤새 산 기도를 하실 때 제자들이 탄 배가 육지를 떠나 약 5킬로쯤 갔을 때부터 돌풍으로 밤새 시달렸습니다. 예수님의 뜻대로 군중을 멀리했어도 고난의 풍파가 닥쳤지만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을 산 위에서 예수님이 밤새 지켜보셨다는 점입니다. 결국 밤 사경에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 거의 10시간 동안 풍랑으로 시달렸던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25절).
제자들은 물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놀라서 “유령이다!”라고 무서워하며 소리쳤습니다(26절). 그때 예수님이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친근한 말씀으로 제자들의 두려움을 없애주셨습니다(27절). 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28절).” 베드로의 요청은 그가 물속에 빠져 죽을 수도 있기에 사실상 “죽어도 좋다!”는 고백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순간적으로 담대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사랑과 믿음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요청을 수락해서 예수님이 “오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29절). 죽음의 위험을 무릅쓴 것입니다. 믿음은 모험입니다. 즉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뜻을 따라가는 모험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당대와 후대의 축복을 예비합니다.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해서 미지의 위험한 세계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 고난 중에 기도하십시오 >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베드로의 신앙적인 모험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길에는 대개 고난의 바람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처음에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면서 물 위를 걸었지만 가는 도중에 바람을 보면서 믿음이 흔들리고 무서움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담대함이 생기지만 바람을 바라보면 무서움이 생깁니다. 바람은 어차피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바람이 잦아지기만 바라지 말고 바람을 극복할 믿음을 구하십시오.
바람을 보면서 자연적인 중력의 힘에 지배되어 물속으로 빠져 들어갈 때 다급하게 베드로가 소리쳤습니다. “주님! 저를 구원하소서!” 베드로가 바람을 바라본 것은 그의 믿음이 부족했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그는 기도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해야 하지만 믿음이 부족해도 기도해야 합니다. 다급할 때는 믿음이 부족해도 간단하게 ‘주저구(주님 저를 구하소서)’의 기도나 ‘주저도(주님 저를 도우소서)’의 기도만 진실하게 해도 하나님의 긴급 구호의 은혜를 입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그런 기도가 저절로 발설되었다면 그것도 큰 범주에서 일종의 방언기도입니다.
방언기도는 ‘알 수 없는 언어로 하는 기도’의 의미도 있지만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혀로부터 저절로 발설되는 기도’의 의미가 더 큽니다. 그래서 방언기도의 ‘방’자에 대해 한자로 ‘지방 방(方)’자가 아닌 ‘놓을 방(放)’자를 쓰는 것입니다. 영어에서도 방언기도를 ‘지방 말로 기도하는 것(praying in dialect)’이라고 하지 않고 ‘혀로 기도하는 것(praying in tongue)’이라고 합니다. 방언을 영어 전문용어로는 ‘글로서랠리어(glossolalia)’라고 합니다. ‘글로서랠리어’의 뜻은 네트영어로 ‘혀(gloss)를 굴리는 상태’란 뜻입니다.
방언기도는 ‘중국어 방언기도, 일본어 방언기도’ 등과 같은 다른 언어 방언을 의미하기보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입에서 발설되는 기도가 원래 방언기도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그렇게 발설되는 방언 중에 ‘중국어 방언, 일본어 방언’ 형태도 있는 것입니다. 고난으로 정신을 차리기 힘들 때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혀를 통해 베드로처럼 “주여! 저를 구하소서!”라는 말이 저절로 발설된다면 그 기도도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기도의 틀도 중요합니다.
평소에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은 자기만의 최상의 기도의 틀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그 틀 안에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기도할 때 하나님과의 깊은 교감이 내적으로 이뤄지고 평안이 넘치면 그것은 성령님이 그 기도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위급하고 다급할 때 입에서 저절로 나오는 기도가 “주님! 저를 구하소서!”의 기도나 더 나아가 “하나님! 그래도 감사합니다.”의 기도나 “할렐루야! 감사합니다!”와 같은 기도가 된다면 그는 강력한 하늘의 동아줄을 가진 셈이 됩니다. 그 하늘의 동아줄이 위급한 때에는 매우 요긴하게 긴급 구호가 이뤄지게 합니다.
< 예수님께 온전히 붙들리십시오 >
베드로가 정신없이 “주여! 나를 구하소서!”라고 하자 예수님이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베드로를 구원하실 수 있었지만 친히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도우심이 실제적이고 생생한 도우심임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붙잡아주시고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했느냐?”라고 하신 것은 베드로에게 일시적이고 믿음 이상의 큰 믿음을 가지고 의심하지 않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그 어조는 믿음이 작은 것에 대해 책망하는 어조가 아니라 큰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반어법적으로 강조한 어조입니다. 일시적인 믿음의 모험을 통해 물 위를 잠깐 걸을 수는 있지만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큰 믿음입니다.
그렇게 베드로를 붙잡아주시고 배에 함께 오르자 바람이 그쳤습니다(32절).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떤 고난의 바람도 내적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점차 고난의 바람이 실제로 그칩니다. 그런 기적적인 장면을 보고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절하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33절).”
왜 제자들이 정치적 야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했는데 죽음의 고비를 겪어야 했습니까? 알고 보니까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고난과 문제는 예수를 진실로 만나고 하나님 앞에 항복하기 위한 통로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면 마음의 풍랑이 잦아들면서 환경의 풍랑도 잔잔해집니다. 그래서 인생의 방황과 고민은 예수님을 진실로 만나면 끝납니다.
의지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박대하고 친구나 가족조차 자신을 박대해도 하나님은 절대 박대하시지 않습니다. 두 손 들고 하나님께 나오면 하나님은 즉시 능력 있는 손으로 성도의 손을 붙들어주십니다. 사람이나 환경 때문에 쉽게 흔들리지 마십시오. 고난의 물에 빠졌을 때 발버둥 치면 더 빠져죽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품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십시오. 그러면 저절로 고난의 물 위로 뜨면서 사는 길이 열립니다.
왜 문제가 생깁니까?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라는 뜻으로 허용된 것이라고 믿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기면서 선한 결단을 하는 계기로 삼으면 문제는 오히려 축복의 도구가 됩니다. 공동체 생활을 할 때도 “여기의 문제가 뭘까?”라는 연구보다 “여기서 잘 섬기자!”라는 결단이 훨씬 더 복된 미래를 만들어냅니다. 이제 하나님을 붙들고 가정과 직장과 일터와 교회로 돌아가서 하나님 안에서 문제를 극복하며 사십시오. 아무리 큰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문제는 조만간 그칩니다.
< 큰 믿음을 가지십시오 >
그런 기적을 체험하고 믿음이 충만한 상태에서 예수님의 일행은 게네사렛 땅에 이렀습니다(34절). 그곳에도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이미 널리 퍼진 상태에서 그곳 사람들이 예수님의 방문 소식을 근방에 두루 통지해 모든 병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겸손하게 간구했습니다. 그렇게 손을 댄 자는 다 나음을 얻었습니다(35-36절). 그때부터 예수님의 소문이 갈릴리 지역을 넘어 유대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큰 믿음이란 큰 것을 달라는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해주세요.”라고 하면서 겸손하게 작은 은혜를 주셔도 만족하겠다는 믿음이 큰 믿음입니다. 즉 큰 믿음이란 ‘큰 것을 얻게 하는 믿음’이 아니라 ‘작은 은혜도 크게 보는 믿음’입니다. 작은 은혜도 크게 감사하는 큰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런 큰 믿음을 가지고 고난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면 놀라운 치유의 역사와 회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구원이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만이 신앙생활의 전부는 아닙니다. 구원은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작업은 성도를 구원하신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성숙한 삶을 위해 고난도 허락하십니다. 고난은 ‘누르는 것’의 의미가 있습니다. 포도에 압력을 가하면 포도주가 나오고 올리브에 압력을 가하면 올리브유가 나옵니다. 석탄 덩어리가 오랫동안 강한 압력을 받으면 빛나는 다이아몬드로 변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환호하게(haily) 만드시기보다 거룩하게(holy) 만드시려고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고난과 갈등을 통해 인내와 꾸준함을 배웁니다. 그런 인내와 꾸준함이 있어야 작품이 이뤄집니다. 꾸준하게 인내해야 무엇을 하든지 프로가 됩니다. 기타를 칠 때 꾸준한 인내가 없으면 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언어를 배울 때도 꾸준함이 필요하고 몸무게를 관리할 때도 꾸준함이 필요합니다. 성격 건축에도 꾸준함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즉시 성숙해지지 않습니다. 즉시 ‘영적인 단계’로는 이르러도 즉시 ‘성숙의 단계’로는 이르지 못합니다. 고난은 성숙함을 위한 일종의 시험입니다. 시험되지 않은 믿음은 신뢰되기 힘듭니다.
어떤 사람이 성공했습니다. “어떻게 성공했느냐?”고 묻자 “좋은 결정으로 성공했다.”고 했습니다. “좋은 결정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좋은 경험을 통해 좋은 결정을 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좋은 경험을 얻었느냐?”고 묻자 “나쁜 결정을 통해 좋은 경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실패의 경험도 있어야 성공합니다.
요새 메인 뉴스 사회자를 아나운서(announce)라고 하기보다 앵커(anchor, 닻)라고 합니다. 아나운서란 단순히 ‘소식을 알리는 사람’이란 뜻이지만 앵커는 ‘토론의 중심을 잡아주는 사람, 뉴스의 핵심을 잡아주는 사람’이란 훨씬 고상한 뜻입니다. 사람은 실패해도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중심을 잡아주시는 영원한 앵커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꼭 붙잡고 살면 인생에 궁극적인 실패는 없습니다.
< 내일의 환상에 몰두하십시오 >
사람은 강한 척 해도 다 약한 존재입니다. 누구에게나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닻이신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십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면 이제부터는 안심하며 사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멸시하면 멸시를 받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이 멀리하심으로 주변인이 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하나님이 가까이하심으로 중심인이 됩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 중에 하나님의 돌아선 등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찾으면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아쉬운 때만 하나님을 찾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용만 당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이용만 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돌아선 등을 보게 되고 우주의 영원한 미아가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진실하게 추구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주일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다니다가 진심으로 주일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섬기면 인생의 대 반전의 역사가 반드시 나타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자기 문제를 아뢰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서 자기 혁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가끔 혼자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끝없이 흔들리며 살까? 내가 왜 이렇게 믿음이 없을까? 왜 이렇게 무기력하고 감동과 감격과 열정을 잃고 작은 문제에도 흔들리며 살까? 이 피곤한 삶에서 어떻게 탈출할까?” 아무리 고민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때는 하늘의 능력이 임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선의 길은 알지만 자꾸 마음이 흔들립니다. 수시로 상처가 부각되면서 저의 자존심이 앞날의 축복을 막습니다. 마음은 선을 원해도 육신이 약해 늘 작은 일에 무너집니다. 저를 하늘의 능력으로 붙들어주소서.” 좋은 교회나 좋은 목자에게도 붙잡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붙잡히십시오. 그러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탄식이 “나는 확신한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고백으로 변할 것입니다.
믿음이란 ‘어제의 상처’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환상’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앵커로 삼고 작은 일이나 작은 말에 흔들리지 않는 영적인 작은 앵커의 삶을 살면 지금보다 훨씬 멋진 삶이 앞으로 펼쳐질 것입니다. 성도는 고아와 같이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붙들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이 산다.”는 고백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꼭 붙잡고 고난의 바람을 이겨냄으로 예수 믿고 인물 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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