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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람의 4대 행동양식 (에베소서 4장 25-30절)

by 【고동엽】 2022. 12. 20.

새 사람의 4대 행동양식 (에베소서 4장 25-30절) < 새 사람의 4대 행동양식 >

 기독교의 가장 신비한 교리는 ‘삼위일체’의 교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신비를 풀려고 수많은 인간적인 해석을 등장시켰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자의 역할로 삼위일체를 설명했습니다. 여자가 자녀에게는 어머니이고, 남편에게는 아내이고, 부모에게는 딸입니다. 그처럼 한 사람이 다른 셋 역할을 하듯이 삼위일체도 그런 형태라는 것입니다. 그런 주장들은 교회사적으로 ‘양태론’이란 이단 사설로 여깁니다. 그런 주장은 그럴듯하지만 실제로는 삼위일체의 극히 일부분의 설명도 안 됩니다. 그만큼 삼위일체는 인간의 이성과 논리를 초월하는 신비한 진리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많은 오남용이 생깁니다. 특히 성령님과 관련된 오남용이 많습니다. 성령님은 성도가 성도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 근심하십니다. 왜 성경에는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나 “예수님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 대신에 본문 30절 말씀처럼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까? 아마 삼위 하나님 중에서 성령님이 특별히 감정적인 영향을 잘 받으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죄를 범하면 자신도 심적 고통을 당하지만 성령님도 고통을 당하십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도 성령님을 크게 근심시킵니다. 그러므로 수시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늘 잘 용서하게 하소서. 오늘도 사람을 만날 때 성령님께서 주신 마음을 가지고 그를 잘 받아들이게 하소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성령님을 괴롭히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는 사랑과 용서로 하나 되기를 힘쓰는 성령충만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크게 나타난 교회였지만(행 19:1-7) 동시에 거짓, 위선, 도둑질, 이간질, 비방의 죄도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완벽한 교회를 찾으면 그 교회에 절대 등록하지 마십시오. ‘문제 많은 자신’이 ‘문제없는 교회’를 망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잘못된 모습들이 보여도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부족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중요한 것은 늘 새롭게 되려는 마음입니다. 구원받은 새 사람으로서 성도답게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거짓을 버리십시오

 본문 25절에서 ‘그런즉’이란 말은 ‘새 사람이 되었은즉’이란 말입니다. 옛 사람의 특징은 거짓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첫째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진실하게 행동하려는 자세입니다. 새해가 되어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자기가 먼저 새롭게 될 때 세상은 조금이라도 달라지게 보입니다. 자기가 새롭게 되라는 말은 조금 더 진실하게 살라는 말입니다.

 시간 약속을 비롯해서 약속을 잘 지키십시오. 인간관계를 계산적인 관계로 만들거나 사람을 이용거리로 삼지 말고 진실한 언행을 위해 힘쓰십시오. 교인들 간에 ‘돈거래, 다단계, 청탁’이란 교회생활의 3대 해악이 없게 하십시오. 가급적이면 말보다 실천을 앞세우고 받기보다는 주기를 힘쓰고 섬김 받기보다는 섬겨주기를 힘쓰십시오. 십자가를 회피하기보다는 십자가를 지려고 하고 넓은 문보다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십시오. 그러면 조금 더 진실한 삶으로 향하게 됩니다. 작은 힘이라도 진실함이 뒷받침되면 큰 힘을 발휘합니다.

 작은 교회는 다양한 행사와 프로그램을 못합니다. 작은 교회가 큰 교회처럼 따라 하려고 하면 오히려 길을 잃고 작은 힘마저 잃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나갈 때 사울 왕이 투구와 갑옷과 칼을 주었지만 그 도구들이 다윗에게는 맞지 않아서 불편했습니다. 결국 그것들을 사양하고 자기 손에 익숙한 물매를 가지고 나가 골리앗을 무너뜨렸습니다. 뱁새가 황새를 따르려고 하면 가랑이가 찢어집니다. 큰 꿈을 가지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자기 주제와 모양과 현실에 맞게 자리를 펴고 거기서 최선을 다하며 인물의 꿈을 묵묵히 펼쳐가라는 말입니다.

 어느 날, 대형교회를 섬겼던 사람이 작은 교회에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전에 섬겼던 교회의 교회관을 가지고 작은 교회에서 “이것저것들을 했으면 좋겠다.”고 요구해서 그 요구에 따르면 결국 아무 것도 잘하지 못하게 됩니다. 반면에 작은 힘이라도 자기가 잘하는 분야에 집중하면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레이저광선이 나옵니다. 그 광선이 각종 장벽도 뚫고 세계와 우주를 향하고 먼 훗날까지 그 울림과 영향력이 전달되게 하는 것입니다.

2. 분노를 다스리십시오

 본문 26절 말씀은 성도도 분노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누군가의 분노를 무조건 정죄하지 마십시오. 어린아이가 자꾸 물을 엎지르면 사랑하는 엄마도 잠깐은 화가 납니다. 그것을 보고 믿는 부모가 왜 사랑과 인내가 없느냐고 정죄한다면 얼마나 높은 마음입니까? 그런 자기 의에 빠지지 마십시오. 잠깐 화를 낸 엄마지만 위기 때는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목숨도 바칩니다. 분노의 감정이 다 죄는 아닙니다.

 분노할 때 2가지 전제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 분노가 죄가 되지 않게 지혜롭게 표출해야 합니다. 분노의 표출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키울 때가 많기에 분노의 감정을 무조건 억누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분노를 억누르지만 말고 지혜롭게 표출할 방법과 기회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분노가 지혜롭게 표출될 최적의 기회도 주시고 상대방의 마음을 기경해 분노가 잘 수용되게도 해주실 것입니다.

 둘째, 분노해도 다음 날까지 그 감정을 끌고 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가 틈타지 않습니다(27절). 특히 순간적이고 충동적인 분노를 잘 조절해야 합니다. 누가 일처리를 못하면 전후 상황을 잘 살펴서 대처해야지 버럭 화를 내면 거의 유익이 없습니다. 분노할 때를 알아야 하고 분노의 명분도 분명해야 합니다. 그처럼 분노를 잘 다스리려면 마음관리를 잘하고 마음지수를 높여야 합니다.

 오늘날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많은 문제들은 어떤 환경이나 상황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지수가 낮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마음지수가 어떻게 측정됩니까? 마음지수는 헌신지수와 비례합니다. 받으려는 태도가 주려는 태도로 변화되면 마음지수가 높아집니다. 또한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상대방 중심적인 생각으로 변화되면 마음지수가 높아집니다. 그처럼 마음지수를 높이면 인간관계 중에 생기는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3. 땀 흘려 일하십시오

 본문 28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과 “제 손으로 수고하라!”는 말을 같은 맥락에서 사용합니다. 즉 땀 흘려 일하지 않는 것은 결국 도둑질하는 삶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왜 땀을 흘려야 합니까?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선한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선한 일도 땀이 수반되어 행해질 때 가치 있게 됩니다. 바른 헌신이 참된 헌신입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버는 사례도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단체에서 작가들이 쓴 좋은 글의 일부를 허락도 없이 발췌해 수십만 명의 회원에게 보내고 다른 명목을 앞세워 후원금을 거둔다면 어떤 결과가 생깁니까? 글을 쓴 작가들은 여전히 배고픈 상태로 있게 되고 남의 글을 유포한 중개인들은 넘치는 후원금으로 땅을 사고 건축하는 사례도 생깁니다. 그런 현실에 절필하고 싶다는 작가들이 많습니다.

 남의 글을 다량으로 무차별로 퍼뜨리는 단체가 “좋은 글을 나눠준다.”는 명목으로 유포시키는데 그 행사가 좋은 행사로 보이지 않고 더 나아가 그런 행사를 통해 후원금을 모금하면 그것도 일종의 도둑질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개인이 순수하게 글의 출처를 잘 밝히면서 취미 삼아 <좋은 글 사이트>를 운영하는 것은 충분히 용인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체가 조직적으로 남의 글을 가지고 <좋은 글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후원금을 모금하면 그 단체는 배가 불러져도 작가들이나 출판사들은 여전히 배고프게 됩니다. 그런 모습은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요새 우리나라도 점차 저작권 인정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저작권 침해도 도둑질이란 인식이 확산되고 그와 관련된 법 정비도 잘해놓아야 작가의 창작의욕과 출판사의 출판의욕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좋은 글을 써준 저자에 대한 작은 감사 표시로 책도 사서 보면 얼마나 좋은 모습입니까? 어떤 목사님들은 자신의 설교사역에 많은 참고를 하고 많은 도움을 준다고 매월 저희 문서선교를 위해 헌금까지 하십니다. 그처럼 남의 글을 존중하는 문화를 형성해나가야 작가와 출판사는 배고프고 글의 유통자가 배부르게 되는 불의한 현실이 사라집니다.

 좋은 일도 바르고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제 홈페이지에 순전히 제 글만 게시하는 이유는 다른 글을 이용해 방문자수를 높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좋은 글도 맘대로 인용해 조직적으로 유통시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홈페이지 방문자 수와 회원 수를 늘려서 후원금까지 거두는 것은 더욱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땀이 없이 남의 것으로 수익을 얻으려는 모습이나 불의한 청탁으로 한 자리 차지하려는 모습 등도 일종의 도둑질입니다. 땀과 노력이 없이 금방 올라가면 금방 떨어집니다. 항상 땀 흘려 열매를 얻으려고 하십시오.

4. 은혜를 끼치십시오

 사도 바울이 새 사람의 행동원리로서 한 번 더 말과 관련된 언급을 하면서 더러운 말을 하지 말고 덕을 세우는 선한 말로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라고 권면했습니다(29절).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이란 엄청난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 축복의 도구를 잘 쓰면 많은 것을 세우지만 잘못 쓰면 많은 것을 무너뜨립니다. 자기 말을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하지 말고 하나님께 가까워지도록 하십시오.

 험담하고 비판하고 함부로 말하는 습관을 버리고 칭찬하고 격려하고 친절하게 말하는 습관을 힘써 기르십시오. 인생을 바꾸기를 원하면 말을 바꾸십시오. 지금보다 소리를 한 옥타브 낮추면 행복과 기쁨의 가능성은 한 옥타브 높아집니다. 좋은 말을 습관화시키면 타인은 물론 자신조차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합니다. 반대로 부정적인 말 습관은 자기도 위축시키고 성령님도 근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늘 좋은 말로 은혜를 끼치려고 하십시오.

 은혜를 끼치는 삶을 살려면 2가지를 특히 잘해야 합니다. 하나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와의 대화에 탁월한 것입니다. 자기와의 겸손한 대화는 마음지수를 높이는 기적적인 훈련 도구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무의식 세계에 사랑, 행복감, 아름다운 추억 등의 수많은 긍정적인 감정이 숨어 있습니다. 그런 감정들을 끌어내 자기와의 대화에 활용하면 마음지수가 현저하게 높아집니다.

 부부가 결혼 전에 사랑하던 때를 기억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그런 기억들을 자기와의 대화 배경으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감정이 누그러지면서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아마 무슨 일이 있었을 거야...” 잘못된 일의 원인에 대해 집요하게 분석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자기와의 대화를 통해 그런 상황을 감싸 안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특히 성경말씀이나 월새기를 묵상하면 자기와의 대화로 들어가 곧 마음이 평안해짐을 느낍니다. 말도 신비한 효력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신비한 효력이 있습니다.

< 말을 주의 깊게 하십시오 >

 이제 2017년이 되었습니다. 새해 첫 날이기에 마치 새 사람이 된 기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새 사람은 새 사람의 행동양식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령님이 근심하지 않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이 말에 대한 권면을 한 후 본문 30절에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한 것은 말을 은혜롭게 하지 못할 때 성령님이 가장 근심하신다는 암시도 됩니다. 결국 은혜롭게 말하는 것은 성령 충만한 가장 뚜렷한 징표입니다.

 오순절에 성령님이 처음 임하실 때 성령님이 혀와 입술을 붙잡아 친히 사용하셨습니다. 방언의 의미는 이상한 단어가 술술 입에서 발설되는 것 자체에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자기 입술이 붙잡힌다는 것에 있습니다. 자기 입술을 성령 충만하게 만들어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용서합니다.”라는 말들을 많이 나오게 하십시오. 말이 바뀌면 인생이 바뀌고 사라져가던 축복과 행복이 다시 찾아옵니다.

 살면서 가장 주의 깊게 사용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말입니다. 말은 영혼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말할 때 더러운 말을 하지 마십시오. 짜증내는 말이나 비판하는 말도 주의하십시오. 남에게 비판의 칼을 댈 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비판의 칼을 대십니다. 말로 서로 상처를 주면 성령님이 근심합니다. 하나님은 서로 잡아 뜯기보다 서로 세워주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이 왜 쉽게 비판합니까? 자기와 생각과 스타일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과 스타일이 다르면 더 아름답고 능력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비판보다 격려를 많이 하십시오. 격려는 인간관계를 살찌우는 영적인 자양분입니다. 비판과 격려는 메아리와 같습니다. 비판하면 비판이 돌아오고 격려하면 격려가 돌아옵니다. 더 나아가 비판하면 하나님의 비판이 주어지고 격려하면 하나님의 격려가 주어집니다. 항상 입술을 잘 붙들어 격려를 많이 해주십시오. “집사님! 힘내세요. 우리는 잘할 수 있어요.” 그처럼 비판보다 격려를 앞세워서 가는 곳마다 은혜를 끼치는 성령 충만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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