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17일(토)■
(누가복음 11장)
33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묵상/눅 11:33-36)
◆ 눈은 몸의 등불
(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어떤 안경점에 이 성구가 붙어있었다. 정말 우리 육신의 눈을 언급하신 것이라면 해석이야 단순해지지만, 그렇다면 앞의 말씀과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 너무나 생뚱맞다.
주님께서 언급하신 눈은 영적인 의미다.
솔로몬보다, 요나보다 더 크신 이가 여기 있다고 하신 후에 이 말씀을 하심은 진리를 옳게 분별할 것을 요구하심이다.
등불은 비치라고 두는 것이다. 우리가 진리를 분별하기 싫어한다면 그것은 등불을 말(bowl)아래 감춘 셈이다. 진리를 분별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진리를 분별하기 싫어한다. 그냥 집단에서 인정받고 안전하게 살기만을 바랄 뿐이다. 사이비 집단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모두 장님들이다. 각종 비리와 악행이 자행되는 데도 아무런 판단을 못 한다. 그리고 집단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간다.
우리 눈은 타인의 등불이 아니라, 내 몸의 등불이다. 내가 온전히 보존되려면 내 눈이 밝아야 한다. 내가 제대로 걸으려면 눈이 온전히 작동되어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눈이 '성하면'으로 번역된 헬라어 '하플루스'는 신약성경에서 오로지 마태복음의 똑같은 본문(마 6:22)에서 다시 사용되어서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흥미로운 사실은 KJV성경은 이 단어를 'single'로 번역했는데 single이란 '하나'라는 의미를 가진다.
비록 우리 눈은 두 개이지만, 초점은 늘 한 개다. 만일 우리가 욕심을 내어서 초점을 두 개로 만들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오히려 흐려지고 넘어질 수밖에 없다. 마태복음에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두 주인을 섬기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쫓으면 안 된다는 교훈(마 6:24)을 남기신 것을 미루어볼 때 KJV성경이 single로 번역한 것이 매우 적절한 듯하다.
세상 사람들은 빛조차 없으니 눈뜬장님이지만, 적어도 성도는 이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빛 가운데서 제대로 걷기 위해서는 눈을 부릅떠야 한다. 그리고 초점을 하나로 해야 한다. 눈을 다른 데로 향하면서 배트를 휘두르는 사람이 홈런을 때릴 순 없다.
내 속에 빛이 어둡지 않은가 보자.
만일 어둡다면 둘 중의 하나다. 정말 내 안에 빛이 없던가, 아니면 내 눈에 문제가 있던가 이다.
어느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늘 잠만 자던 아이가 있었다. 어느 날 먹구름 속에 비가 오고 정전이 되는 바람에 교실이 캄캄해졌다. 천둥이 치자 잠자던 이 아이가 깜짝 놀라서 깼는데, 사방이 어두우니까 부르짖었다.
"선생님, 눈이 안 보여요"
눈이 안 보이는 것이 아니다. 빛이 어두운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에게는 빛이 없다. 그러니 천재라는 사람도 어리석은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어떤 교회에서 해변으로 수련회를 갔는데 텐트에서 안경 끼고 낮잠 자는 학생의 안경에 친구들이 먹칠을 해놨다. 깨우자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뭐야 밤이야?라고 말하자 사방에서 웃고 난리가 났다. 이번에는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의 눈이 어두운 것이다.
성도에게는 이미 빛이 비치었다. 이제 우리 눈이 밝아야 할 차례다. 오직 주님께만 초점을 맞추고,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자. 그래야 밝은 눈이 된다. 세속적 가르침을 받아서 장님으로 살지 말고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하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어서 그를 배우자. 그리고 감사하면서 살자.
한쪽 눈은 세상을, 한쪽 눈은 하나님을 보면서 양쪽의 비위를 맞추면서 살려면 인생은 더욱 고달파진다. 교회에서는 정말 주님만을 위해 살 듯하다가, 세상에 나가서는 바로 신분을 잊고 사는 자들은 눈이 성하지 못한 사람이다. 결국 어둠 속에서 넘어질 수밖에 없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초점을 제대로 맞추자.
마음은 세상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입술로만 신양 고백하지 말고,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믿자. 내 가치관, 내 인생관을 주님께 일치시키자.
주님, 주의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시고, 주께서 가시는 그 길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주님은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가르쳐 주십시오. 나는 종일 주님만을 기다립니다. (다윗. 시 25:4-5)
(누가복음 11장)
33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묵상/눅 11:33-36)
◆ 눈은 몸의 등불
(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어떤 안경점에 이 성구가 붙어있었다. 정말 우리 육신의 눈을 언급하신 것이라면 해석이야 단순해지지만, 그렇다면 앞의 말씀과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 너무나 생뚱맞다.
주님께서 언급하신 눈은 영적인 의미다.
솔로몬보다, 요나보다 더 크신 이가 여기 있다고 하신 후에 이 말씀을 하심은 진리를 옳게 분별할 것을 요구하심이다.
등불은 비치라고 두는 것이다. 우리가 진리를 분별하기 싫어한다면 그것은 등불을 말(bowl)아래 감춘 셈이다. 진리를 분별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진리를 분별하기 싫어한다. 그냥 집단에서 인정받고 안전하게 살기만을 바랄 뿐이다. 사이비 집단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모두 장님들이다. 각종 비리와 악행이 자행되는 데도 아무런 판단을 못 한다. 그리고 집단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간다.
우리 눈은 타인의 등불이 아니라, 내 몸의 등불이다. 내가 온전히 보존되려면 내 눈이 밝아야 한다. 내가 제대로 걸으려면 눈이 온전히 작동되어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눈이 '성하면'으로 번역된 헬라어 '하플루스'는 신약성경에서 오로지 마태복음의 똑같은 본문(마 6:22)에서 다시 사용되어서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흥미로운 사실은 KJV성경은 이 단어를 'single'로 번역했는데 single이란 '하나'라는 의미를 가진다.
비록 우리 눈은 두 개이지만, 초점은 늘 한 개다. 만일 우리가 욕심을 내어서 초점을 두 개로 만들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오히려 흐려지고 넘어질 수밖에 없다. 마태복음에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두 주인을 섬기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쫓으면 안 된다는 교훈(마 6:24)을 남기신 것을 미루어볼 때 KJV성경이 single로 번역한 것이 매우 적절한 듯하다.
세상 사람들은 빛조차 없으니 눈뜬장님이지만, 적어도 성도는 이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빛 가운데서 제대로 걷기 위해서는 눈을 부릅떠야 한다. 그리고 초점을 하나로 해야 한다. 눈을 다른 데로 향하면서 배트를 휘두르는 사람이 홈런을 때릴 순 없다.
내 속에 빛이 어둡지 않은가 보자.
만일 어둡다면 둘 중의 하나다. 정말 내 안에 빛이 없던가, 아니면 내 눈에 문제가 있던가 이다.
어느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늘 잠만 자던 아이가 있었다. 어느 날 먹구름 속에 비가 오고 정전이 되는 바람에 교실이 캄캄해졌다. 천둥이 치자 잠자던 이 아이가 깜짝 놀라서 깼는데, 사방이 어두우니까 부르짖었다.
"선생님, 눈이 안 보여요"
눈이 안 보이는 것이 아니다. 빛이 어두운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에게는 빛이 없다. 그러니 천재라는 사람도 어리석은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어떤 교회에서 해변으로 수련회를 갔는데 텐트에서 안경 끼고 낮잠 자는 학생의 안경에 친구들이 먹칠을 해놨다. 깨우자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뭐야 밤이야?라고 말하자 사방에서 웃고 난리가 났다. 이번에는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의 눈이 어두운 것이다.
성도에게는 이미 빛이 비치었다. 이제 우리 눈이 밝아야 할 차례다. 오직 주님께만 초점을 맞추고,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자. 그래야 밝은 눈이 된다. 세속적 가르침을 받아서 장님으로 살지 말고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하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어서 그를 배우자. 그리고 감사하면서 살자.
한쪽 눈은 세상을, 한쪽 눈은 하나님을 보면서 양쪽의 비위를 맞추면서 살려면 인생은 더욱 고달파진다. 교회에서는 정말 주님만을 위해 살 듯하다가, 세상에 나가서는 바로 신분을 잊고 사는 자들은 눈이 성하지 못한 사람이다. 결국 어둠 속에서 넘어질 수밖에 없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초점을 제대로 맞추자.
마음은 세상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입술로만 신양 고백하지 말고,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믿자. 내 가치관, 내 인생관을 주님께 일치시키자.
주님, 주의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시고, 주께서 가시는 그 길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주님은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가르쳐 주십시오. 나는 종일 주님만을 기다립니다. (다윗. 시 2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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