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14일(수)■
(누가복음 11장)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묵상/눅 11:5-13)
◆ 기도 응답의 비결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주님께서는 일명 주기도문이라는 내용을 통해서 기도하는 법을 알려주시고, 바로 이어서 비유를 통해 기도를 응답받는 비결까지 가르쳐주신다.
한밤중에 친구가 와서 떡을 빌려달라고 한다. 이유는 자기에게 온 여행객을 대접할 떡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숙박업소가 거의 없었으므로 여행객들은 주로 소개받은 사람이나 아는 사람의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매우 귀한 선행이자, 의무였다.
이런 친구의 간청을 거절할 수 있을까? 적어도 친한 친구라면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친한 친구가 아니라면 어떨까?
한밤중에 아이들까지 모두 깨운 이 요청이 얼마나 무례하게 여겨질까? 요구를 들어주려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걸치고 주방에서 떡을 찾는 귀찮은 일을 해야 한다. 있는 떡도 없다고 둘러대면서 돌려보내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밖에서 이 친구가 너무 간절히 요청하고 있다. 마치 떡이 안에 있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식이다. 친분이 없어도 이런 간절한 요청은 거절하기가 어렵다.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아주 중요한 기도 응답의 비결을 말씀해주셨다.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즉 기도 응답의 비결은 '간청'이다.
간청이란 사전적인 의미가 '간절히 청함'이다. '간절히'라는 말에는 진정함과 끈기가 포함되어 있다.
어떤 분이 기도원 기도굴에 들어가서 기도하는데, 바로 옆 굴에서 크게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 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죽겠습니다."
그 각오가 감동이었다. 그런데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이 사람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응답받았단 말인가? 그럴리가? 이 사람의 끈기는 10분이 한계였다. 많은 사람의 기도에 진정성과 간절함이 없다.
참고로 '간청'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아나데이아'는 본래 '건방짐'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개역성경에는 '간청'이 아니라 '강청'으로 번역했다. 강청은 무리하게 억지로 청하는 것이다. '간청'보다는 '강청'이 더 원어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아나데이아'란 뻔뻔하게 간구하는 모습을 암시하는 단어다. 자식이 부모에게 무엇을 요구할 때 우리는 이런 뻔뻔한 모습을 본다. 그래도 부모가 들어주는 것을 보면 놀랍지 않은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부족함에도 뻔뻔하게 구하는 것을 개의치 않으시고 들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 '하물며'의 하나님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선하시고 좋으신 분이시다.
나를 가장 사랑하고 나를 가장 선하게 대해주는 어떤 사람을 상상해보라. 그 사람이 나의 어머니든, 누구든 상관없다. 하나님은 그들이 나를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랑하고 그들이 내게 선한 것보다 훨씬 더 선하신 분이시다.
사람들은 이것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을 자기보다 덜 선한 존재로, 자기보다 머리가 나쁜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이것저것 트집 잡지만, 사실은 자기의 무지함을 드러낼 뿐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단 한마디로 그러한 어리석음을 물리치신다.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오, 이 '하물며'라는 단어 속에는 어떤 토론도, 어떤 반론도 용납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전제가 설정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시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진리다. 그것은 이론적 증명의 결과가 아니라, 애초에 변개할 수 없는 공리임을 일깨우시는 말씀이다.
어머니도 나를 사랑하시는 데 하물며...
아버지도 내가 구하는 것을 들어주시는데 하물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하물며를 붙여보라.
오, 주님, 이 믿음이 제 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게 해주십시오.
◆ 성령을 주시는 분
마태복음에서는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라고 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3)라고 기록했다.
사복음서는 이렇게 조금씩 다르다.
어느 것이 진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일까?
어떤 것이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은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긴 것이고,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의역하여 옮긴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나는 누가복음의 이 의역이 매우 의미 있다고 본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쓴 사람이고, 성령 세례를 '위로부터의 능력'(눅 24:49)이라고 규정한 사람이다. 성령세례가 얼마나 대단한 능력이고 복인지를 체험한 사람이다. 따라서 누가(Luke)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성령'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성령을 주시는 분이시다. 무기력한 성도들이여! 성령을 구하라. 교리 속에 파묻혀서 이미 성령이 계시니 구할 필요가 없다는 등의 한가한 이야기를 하지 말고 성령의 능력을 구하고, 성령 충만을 간구하라.
그러면 성령을 충만하게 하시고 은사를 풍성하게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오늘 누가는 이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구하자. 우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번 구해서 안 되면 두 번, 세 번 응답될 때까지 간청하자.
간절하지도 않으면서 간절한 척하지 말고, 진정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청하자. 나 자신의 부족함에 위축되지 말고 뻔뻔스럽게 구하자. 원래 자식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 아버지는 육신의 부모보다 더 선하시고 자비하신 분이심을 의심하지 말자.
주님,
저를 성령을 충만하게 해주십시오.
제 믿음 속에 진실함과 정직함이 있게 하시고,
헛된 욕망과 세상 중독에 빠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누가복음 11장)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묵상/눅 11:5-13)
◆ 기도 응답의 비결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주님께서는 일명 주기도문이라는 내용을 통해서 기도하는 법을 알려주시고, 바로 이어서 비유를 통해 기도를 응답받는 비결까지 가르쳐주신다.
한밤중에 친구가 와서 떡을 빌려달라고 한다. 이유는 자기에게 온 여행객을 대접할 떡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숙박업소가 거의 없었으므로 여행객들은 주로 소개받은 사람이나 아는 사람의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매우 귀한 선행이자, 의무였다.
이런 친구의 간청을 거절할 수 있을까? 적어도 친한 친구라면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친한 친구가 아니라면 어떨까?
한밤중에 아이들까지 모두 깨운 이 요청이 얼마나 무례하게 여겨질까? 요구를 들어주려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걸치고 주방에서 떡을 찾는 귀찮은 일을 해야 한다. 있는 떡도 없다고 둘러대면서 돌려보내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밖에서 이 친구가 너무 간절히 요청하고 있다. 마치 떡이 안에 있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식이다. 친분이 없어도 이런 간절한 요청은 거절하기가 어렵다.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아주 중요한 기도 응답의 비결을 말씀해주셨다.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즉 기도 응답의 비결은 '간청'이다.
간청이란 사전적인 의미가 '간절히 청함'이다. '간절히'라는 말에는 진정함과 끈기가 포함되어 있다.
어떤 분이 기도원 기도굴에 들어가서 기도하는데, 바로 옆 굴에서 크게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 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죽겠습니다."
그 각오가 감동이었다. 그런데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이 사람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응답받았단 말인가? 그럴리가? 이 사람의 끈기는 10분이 한계였다. 많은 사람의 기도에 진정성과 간절함이 없다.
참고로 '간청'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아나데이아'는 본래 '건방짐'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개역성경에는 '간청'이 아니라 '강청'으로 번역했다. 강청은 무리하게 억지로 청하는 것이다. '간청'보다는 '강청'이 더 원어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아나데이아'란 뻔뻔하게 간구하는 모습을 암시하는 단어다. 자식이 부모에게 무엇을 요구할 때 우리는 이런 뻔뻔한 모습을 본다. 그래도 부모가 들어주는 것을 보면 놀랍지 않은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부족함에도 뻔뻔하게 구하는 것을 개의치 않으시고 들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 '하물며'의 하나님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선하시고 좋으신 분이시다.
나를 가장 사랑하고 나를 가장 선하게 대해주는 어떤 사람을 상상해보라. 그 사람이 나의 어머니든, 누구든 상관없다. 하나님은 그들이 나를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랑하고 그들이 내게 선한 것보다 훨씬 더 선하신 분이시다.
사람들은 이것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을 자기보다 덜 선한 존재로, 자기보다 머리가 나쁜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이것저것 트집 잡지만, 사실은 자기의 무지함을 드러낼 뿐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단 한마디로 그러한 어리석음을 물리치신다.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오, 이 '하물며'라는 단어 속에는 어떤 토론도, 어떤 반론도 용납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전제가 설정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시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진리다. 그것은 이론적 증명의 결과가 아니라, 애초에 변개할 수 없는 공리임을 일깨우시는 말씀이다.
어머니도 나를 사랑하시는 데 하물며...
아버지도 내가 구하는 것을 들어주시는데 하물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하물며를 붙여보라.
오, 주님, 이 믿음이 제 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게 해주십시오.
◆ 성령을 주시는 분
마태복음에서는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라고 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3)라고 기록했다.
사복음서는 이렇게 조금씩 다르다.
어느 것이 진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일까?
어떤 것이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은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긴 것이고,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의역하여 옮긴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나는 누가복음의 이 의역이 매우 의미 있다고 본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쓴 사람이고, 성령 세례를 '위로부터의 능력'(눅 24:49)이라고 규정한 사람이다. 성령세례가 얼마나 대단한 능력이고 복인지를 체험한 사람이다. 따라서 누가(Luke)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성령'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성령을 주시는 분이시다. 무기력한 성도들이여! 성령을 구하라. 교리 속에 파묻혀서 이미 성령이 계시니 구할 필요가 없다는 등의 한가한 이야기를 하지 말고 성령의 능력을 구하고, 성령 충만을 간구하라.
그러면 성령을 충만하게 하시고 은사를 풍성하게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오늘 누가는 이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구하자. 우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번 구해서 안 되면 두 번, 세 번 응답될 때까지 간청하자.
간절하지도 않으면서 간절한 척하지 말고, 진정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청하자. 나 자신의 부족함에 위축되지 말고 뻔뻔스럽게 구하자. 원래 자식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 아버지는 육신의 부모보다 더 선하시고 자비하신 분이심을 의심하지 말자.
주님,
저를 성령을 충만하게 해주십시오.
제 믿음 속에 진실함과 정직함이 있게 하시고,
헛된 욕망과 세상 중독에 빠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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