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6일(화)■
(누가복음 10장)
1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4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6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묵상/눅 10:1-7)
◆ 칠십 인을 파송하시다
(1)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예수님께서 이미 열두 제자를 파송하신 적이 있으시다. 그런데 다시 칠십 인의 전도자를 둘씩 보내셔서 전도하게 하셨다. 칠십 인의 파송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고, 오직 누가복음에만 있다.
칠십 명은 열두 명의 여섯 배다. 열두 명을 파송할 때와는 비교가 안 되는 큰 숫자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일꾼이 적다'라고 하신다. 주님의 비전은 온 세계를 향하셨음을 암시한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이런 주님의 비전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칠십 인 파송 장소가 어디일까?
9장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셨다고 하셨으니 누가복음의 순서대로라면 예루살렘이다. 서른다섯 팀이 예루살렘 및 인근에서 각종 기적을 나타내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으면 충분히 소동이 일어날 만하다. 이것은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눈에는 이단 종교의 폭동처럼 보였을 것이다.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이 시점을 기준으로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이 위험을 느껴서 교인들을 철저히 단속한 듯하다. 이 시기 즈음에 예수께서 실로암 소경을 고치셨는데 당시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는 자는 출교 당하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요 9:22).
◆ 목자의 마음
(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면 분명히 착해진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오만가지 논리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인하는 자들도 이 점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착한 사람들이 온갖 술수가 판치는 세상에서 어떻게 그들에게 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을까?
양이 이리를 이길 방도가 없다. 그러나 양에게는 아주 중요한 무기가 있다. 그것은 '목자'다. 양에게는 목자가 있다. 자기를 지켜보고, 모든 악한 무리로부터 보호하시는 목자가 있다. 더구나 그 목자가 자기 목숨까지 던져서 양을 보호하려는 선한 목자라면, 그야말로 무서울 것이 없다.
우리 주님께서 내게 선한 목자다.
매일 영적 열등감에 빠져서 과연 나 같은 자를 돌보실까 하는 생각은 믿음도 아니고 겸손도 아니다. 불신이며 악한 생각이다. 우리는 의심할 권리가 없다. '나는 선한 목자다'(요 10:11)라고 하실 때 감격하며 '아멘'으로 응답하는 것이 믿음이다.
◆ 전도자 지침 1
(4)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전대(허리나 어깨에 메는 자루-돈을 넣는 용도로 사용됨), 배낭, 여유분의 신발들을 가지지 말라고 하심은 오직 주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나아가라는 말씀이다.
오, 주님께서는 과연 이렇게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나는 지금까지 수십 년간 사역하는데 주님의 공급이 결핍됨을 보질 못했다. 가끔 우리 선교회에서 선교사들에게 보내는 후원금이 모자라게 되었을 때, 오랫동안 연락도 없던 형제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형제가 갑자기 연락이 와서 헌금이 채워진 적이 여러 번이다. 20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단 한 번도 후원금이 미루어진 적이 없다는 것은 돌이켜 보면 놀라운 경험이다.
또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하심은 목적을 잊지 말 것을 당부하심이다. 지금 주님께서 파송하는 사역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함이지, 아는 친척을 방문에서 친교를 다지라는 것이 아니다.
◆ 전도자 지침 2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이 한마디가 담은 의미가 크다. 이것은 단순히 평안을 비는 의례적인 인사를 넘어선다. 이것은 전도자의 위치를 말해준다.
주님께서는 이집 저집 전전하지 말고 한 집에 머물 것을 명령하셨다(7절). 모름지기 전도자는 구걸하는 자가 아니며 복과 평안을 빌어줄 수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종임을 일깨우신 말씀이다.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하라고 하심은, 전도자에게 절대로 비굴하지 말고, 눈치 보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이시다. 전도자는 빌붙어서 먹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복을 빌어주는 자이며 당당하게 대접받아야 마땅한 자임을 말씀하심이다.
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존귀하게 여기시는지! 비록 우리는 섬기는 자로 있지만, 주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비천하게 만들지 않으신다. 설사 세상이 우리를 그렇게 취급할지라도 우리는 당당해야 한다.
바울은 쇠사슬에 매여서 왕 앞에 섰을 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행 26:29)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받는다고 굽실대는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된다. 백성들은 제사장에게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린 것이며, 제사장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전도자가 후원자에게 감사하는 이유는 그가 나를 구제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사역에 동참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다. 전도자와 후원자가 진정으로 감사해야 할 대상은 받아주시고,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전도자가 된 당신이 할 일은 더욱 충성하는 것이다.
꼭 선교사나 목사만이 이런 전도자가 아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고 친구나 이웃이나 친척들에게 전할 때도 우리는 존귀한 전도자가 된다. 우리는 거듭난 후에는 좋든 싫든 모두가 예수의 증인들이다(행 1 : 8). 아무도 전도의 사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마 28:19-20).
주님,
전도하는 일은 참으로 복되고 보람된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이런 사역을 귀하게 여기겠습니다. 다만 세속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도록 저를 보호해주십시오.
(누가복음 10장)
1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4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6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묵상/눅 10:1-7)
◆ 칠십 인을 파송하시다
(1)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예수님께서 이미 열두 제자를 파송하신 적이 있으시다. 그런데 다시 칠십 인의 전도자를 둘씩 보내셔서 전도하게 하셨다. 칠십 인의 파송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고, 오직 누가복음에만 있다.
칠십 명은 열두 명의 여섯 배다. 열두 명을 파송할 때와는 비교가 안 되는 큰 숫자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일꾼이 적다'라고 하신다. 주님의 비전은 온 세계를 향하셨음을 암시한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이런 주님의 비전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칠십 인 파송 장소가 어디일까?
9장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셨다고 하셨으니 누가복음의 순서대로라면 예루살렘이다. 서른다섯 팀이 예루살렘 및 인근에서 각종 기적을 나타내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으면 충분히 소동이 일어날 만하다. 이것은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눈에는 이단 종교의 폭동처럼 보였을 것이다.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이 시점을 기준으로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이 위험을 느껴서 교인들을 철저히 단속한 듯하다. 이 시기 즈음에 예수께서 실로암 소경을 고치셨는데 당시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는 자는 출교 당하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요 9:22).
◆ 목자의 마음
(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면 분명히 착해진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오만가지 논리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인하는 자들도 이 점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착한 사람들이 온갖 술수가 판치는 세상에서 어떻게 그들에게 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을까?
양이 이리를 이길 방도가 없다. 그러나 양에게는 아주 중요한 무기가 있다. 그것은 '목자'다. 양에게는 목자가 있다. 자기를 지켜보고, 모든 악한 무리로부터 보호하시는 목자가 있다. 더구나 그 목자가 자기 목숨까지 던져서 양을 보호하려는 선한 목자라면, 그야말로 무서울 것이 없다.
우리 주님께서 내게 선한 목자다.
매일 영적 열등감에 빠져서 과연 나 같은 자를 돌보실까 하는 생각은 믿음도 아니고 겸손도 아니다. 불신이며 악한 생각이다. 우리는 의심할 권리가 없다. '나는 선한 목자다'(요 10:11)라고 하실 때 감격하며 '아멘'으로 응답하는 것이 믿음이다.
◆ 전도자 지침 1
(4)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전대(허리나 어깨에 메는 자루-돈을 넣는 용도로 사용됨), 배낭, 여유분의 신발들을 가지지 말라고 하심은 오직 주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나아가라는 말씀이다.
오, 주님께서는 과연 이렇게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나는 지금까지 수십 년간 사역하는데 주님의 공급이 결핍됨을 보질 못했다. 가끔 우리 선교회에서 선교사들에게 보내는 후원금이 모자라게 되었을 때, 오랫동안 연락도 없던 형제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형제가 갑자기 연락이 와서 헌금이 채워진 적이 여러 번이다. 20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단 한 번도 후원금이 미루어진 적이 없다는 것은 돌이켜 보면 놀라운 경험이다.
또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하심은 목적을 잊지 말 것을 당부하심이다. 지금 주님께서 파송하는 사역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함이지, 아는 친척을 방문에서 친교를 다지라는 것이 아니다.
◆ 전도자 지침 2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이 한마디가 담은 의미가 크다. 이것은 단순히 평안을 비는 의례적인 인사를 넘어선다. 이것은 전도자의 위치를 말해준다.
주님께서는 이집 저집 전전하지 말고 한 집에 머물 것을 명령하셨다(7절). 모름지기 전도자는 구걸하는 자가 아니며 복과 평안을 빌어줄 수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종임을 일깨우신 말씀이다.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하라고 하심은, 전도자에게 절대로 비굴하지 말고, 눈치 보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이시다. 전도자는 빌붙어서 먹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복을 빌어주는 자이며 당당하게 대접받아야 마땅한 자임을 말씀하심이다.
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존귀하게 여기시는지! 비록 우리는 섬기는 자로 있지만, 주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비천하게 만들지 않으신다. 설사 세상이 우리를 그렇게 취급할지라도 우리는 당당해야 한다.
바울은 쇠사슬에 매여서 왕 앞에 섰을 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행 26:29)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받는다고 굽실대는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된다. 백성들은 제사장에게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린 것이며, 제사장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전도자가 후원자에게 감사하는 이유는 그가 나를 구제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사역에 동참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다. 전도자와 후원자가 진정으로 감사해야 할 대상은 받아주시고,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전도자가 된 당신이 할 일은 더욱 충성하는 것이다.
꼭 선교사나 목사만이 이런 전도자가 아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고 친구나 이웃이나 친척들에게 전할 때도 우리는 존귀한 전도자가 된다. 우리는 거듭난 후에는 좋든 싫든 모두가 예수의 증인들이다(행 1 : 8). 아무도 전도의 사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마 28:19-20).
주님,
전도하는 일은 참으로 복되고 보람된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이런 사역을 귀하게 여기겠습니다. 다만 세속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도록 저를 보호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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