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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장46-56 / 누가 크냐?

by 【고동엽】 2022. 12. 17.
■2022년 12월3일(토)■
 
(누가복음 9장)
 
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47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48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묵상/눅 9:46-56)
 
◆ 누가 크냐
 
(48)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나의 과거에서 가장 부끄러웠던 기억은 잘 난 체하고 무엇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행세한 것이다. 그것이 믿음에서 나온 신분의 확신이면 좋으련만, 세속적이고 헛된 자랑에 불과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거들먹거리고, 선생 노릇 하면서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행세하고 그것으로 형제들을 함부로 비판했다.
 
이 모든 것은 오늘 제자들이 다투었던 '누가 크냐?'와 뿌리가 같다. 이런 다툼은 인간 원죄의 본질 곧 '자기 자랑'과 '교만'에 기원을 둔다.
 
마귀는 아무 것도 아니면서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사 14:13)라고 뻐겼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빌 2:5-11).
 
세상 법정에서는 교만을 처벌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교만은 모든 죄악 중에서 가장 역겨운 죄로 취급된다.
 
교만처럼 모순된 죄성이 없다.
가령 도둑놈들은 다른 도둑놈을 크게 나무라지 않는데, 교만한 사람은 타인이 교만한 것을 절대로 용납하는 법이 없다. 반드시 야단치고 지적하며 다툰다. 자기는 모든 사람을 무시하면서 남이 자신을 무시하면 불같이 화를 낸다. 모순 중의 모순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서로 비교하는 제자들에게 정신이 번쩍나는 교훈을 주신다.
 
어린아이를 곁에 세우시고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당시 문화에서 어린아이란 숫자에 들지도 못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 그 오천 명이란 숫자 속에 여자와 아이의 숫자는 없었다(마 14:21). 그런데 그런 어린아이를 섬기라니?
 
높은 사람을 섬겨야 그 대가가 쏠쏠한데,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긴다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지치고 힘들 뿐이다.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려면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섬길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아담의 죄성에 찌든 자가 어떻게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여기에 믿음의 비밀이 있다. 작은 자를 섬김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신다. 다시 말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분에게서 오는 칭찬과 영광을 구하는 자만이 이런 말씀을 받고 그러한 삶을 실천할 수 있다.
 
자기 자랑을 추구하던 옛사람은 절대로 이런 삶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오직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새사람으로 사는 자만이 이런 믿음의 삶을 살아낼 수 있다.
 
◆ 요한의 월권
 
(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요한은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함께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금지했다. 요한에게는 그런 권리가 주어진 적이 없건만, 이게 무슨 일인가? 일종의 특권의식이며 월권이다. 조금만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생각하면 즉시 이런 월권행위가 나오려고 하는 모습이 내게는 없는지 돌아보게 한다. 
 
오늘 본문에는 요한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또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셨다.
변화산 부근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은 직선거리로 100km이고 현대 도로로는 대략 150km쯤 되는데, 하루에 가기에는 좀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대부분 중간에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그런데 갈릴리와 예루살렘 사이에 사마리아가 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사이가 안 좋았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무시하니 사마리아인도 유대인들을 무시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동쪽 요단강 쪽으로 우회해서 가고 여리고를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회하지 않고 사마리아를 통과하려고 하셨다.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가자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족 감정상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감정이 상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만일 내가 일본에 갔는데, 어떤 호텔에서 한국 사람이라 받아줄 수 없다고 한다면 기분이 좋겠는가? 그 호텔 망하기를 빌지 않겠는가?
 
요한은 감히 자신들을 무시하는 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격분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54)
 
'우리가 불을 명하여' 참으로 기개가 하늘을 찌른다. 하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요한은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변화산에서 주님의 엄청난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으니 무서운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요한은 지금 주님을 위해서 분노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조금도 반가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요한을 꾸짖으셨다. 주님께서는 다른 마을로 가셨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거절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않으시고 양보하시고 기다릴 줄 아셨다. 후에 사마리아 사람들도 무수히 주님을 믿었다. 
 
주님보다는 요한을 더 닮은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요한은 모든 사도보다 더 오래 살았는데, 말년에는 몹시 사랑이 많아서 사람들에게 사랑의 사도로 불렸다. 그리고 100살이나 되어서 쓴 요한복음에는 자신의 이름을 감출 정도로 겸손의 사도였다. 그런 요한도 젊었을 때(아마도 이십 대?)는 이렇게 치기 어린 행동을 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람이 요한이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바뀐다와 절대로 안 바뀐다는 것으로 논쟁하지만, 우리는 과거에 어떤 행동 하나로 그 사람이 여전히 그러할 것이라고 판단하면 안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날마다 새롭게 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믿음 안에서 어떻게 주님을 닮아있을지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주 예수님,
나를 거절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않게 하시고,
어린아이를 섬길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해주십시오.
사람들의 칭찬을 갈망하지 않고,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칭찬만을 갈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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