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교회의 문제가 많습니다. 그에 대한 비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비판이 너무 지나쳐서는 안됩니다. 혹시 비판을 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것은 자신을 비판의 주인공으로 놓고 비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가장 싫어했던 것은 교회를 지나치게 비난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학생들은 모이면 온통 교회의 부정적인 얘기들만 합니다. 대안을 찾는데 힘쓰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을 찾는데 너무 힘을 씁니다.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사람은 문제를 나열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그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최선의 준비를 하는 사람입니다. 문제를 못 찾고 비판이 없어서 나라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을 찾고 그것을 위해 땀을 흘리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의로운 것을 말로만 과시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 무실역행을 주장했습니다. 나라가 잘되려면 사람이 바로 되야 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책무 다하는 자로서(무), 실속 있게(실), 힘써서(역), 행하라(행)는 것이 무실역행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고 한을 품을 때, 즉 탁상공론에 가까운 모습을 보일 때 선생님은 무실역행을 주장했습니다. 적들은 욕하는 데에 시간을 쓰지 말고 힘써 나를 준비시키자는 것입니다. 누구나 문제를 보면 분노합니다. 그러나 문제를 풀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파헤치는 것보다 문제를 해결하는 실질적인 노력입니다. 가끔 우리 아이들 둘이 싸우는데, 그때 제가 중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려고 합니다. 둘째 한나가 말합니다. "은혜 언니가 먼저 그랬어요." 첫째 은혜가 말합니다. "한나가 약을 올렸어요." 서로 싸우니까 중재하는 것이지 사실 누가 그랬는지를 알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보고 싶은 것은 누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먼저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분명히 내가 싸우는 이유, 내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의감은 파멸시키는 정의가 아니라 사랑으로 세우는 정의가 되어야 합니다.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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