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오해 >
오늘 본문은 기독교에서 계시 문제를 다를 때 많이 인용하는 본문입니다. 철학의 방법은 ‘이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신학의 방법은 ‘계시’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라는 주제는 신학의 기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계시 문제와 관련해 수많은 문제점들이 야기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어떤 유명한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하고 그의 책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목사님이 부산 지역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던 기간에 하루의 집회를 마치고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새벽 4시에 그 목사님의 숙소로 전화가 왔습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전화를 받았는데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죄송한 줄 알면서 왜 이 시각에 전화했습니까?” 그러자 그 여자는 “성령님께서 강권적으로 전화하라고 해서 전화했다.”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용건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의 병을 위해서 안수해야 하겠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치료받을만한 병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 여자는 막무가내로 “그래도 성령님께서 그렇게 계시해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지금은 잠 잘 시간이니까 내일 아침 제가 한번 찾아가 뵙겠습니다.”고 한 후에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아침 일찍 그 여자의 집에 목사님이 들르니 그 여자가 “안수부터 받으라.”고 목사님을 잡아끌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침착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안수가 문제가 아니라 먼저 이야기 좀 나누어 봅시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 여자가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자는 두 달 전에 20일 금식기도를 하다가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즉 20일 금식기도를 하다가 몸이 뜨거워져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손을 얹었는데 그때 그 사람의 병이 완치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그 목사님이 부산에 온다는 광고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성령께서 “그 부흥가사의 병을 안수해서 고쳐라!”고 지시해서 그 사연을 본 교회 목사님에게 말했더니 본 교회 목사님이 “사탄아 물러가라!”고 소리쳐 깊은 상처를 받았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 여자의 얘기를 듣고 이 목사님은 자기가 알고 있었던 어떤 목사님의 경우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 목사님이 시무하던 교회의 한 여자 집사가 어느 날 갑자기 남자 음성을 내면서 “내가 예수니라. 내 말을 들을지니라!”라고하고 말하며 교회의 상황을 족집게처럼 지적해 내었습니다.
너무 정확하게 교회 상황을 집어내자 그 목사님은 틀림없이 주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해 말했습니다. “주님! 말씀하옵소서.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러자 여자로부터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를 강대상에 세우라.” 그러자 그 목사님은 다음 주일 예배 때 그 여자 집사를 강대상에 세우고 목사님은 강대상 밑에서 “말씀하옵소서!”라고 말하니 장로들이 그 상황을 탐탁치 않게 여겨 노회에 알리게 되었고 그 목사님은 일년간 자격정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기억을 떠올리고 그 여성에게 “그러면 안수해 주세요!”라고 하는 것은 결코 덕이 안 되고, 그 여성에게 분명한 영적 기준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여성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안수 기도를 받는 것은 다음 문제이고 우리가 말씀으로 판단하고 살아야 하니까 먼저 성경을 몇 구절을 보십시다.”
목사님은 먼저 요한복음 14장 26-27절 말씀을 읽자고 했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 구절을 읽고 그 여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자매님! 하나님의 영을 받으면 평안을 느끼게 되는데 지금 평안하십니까? 아니면 두렵고 겁이 납니까?” 그러자 그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왔다 갔다 합니다. 어떤 때는 평안한데 어떤 때는 불안합니다.”
그 다음으로 마태복음 28장 18-19절을 읽자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 말씀을 읽고 목사님은 병 고치는 권세나 말씀의 권세나 섬기는 권세가 모두 예수께 있음을 주지시키고 다음과 같은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날, 그 목사님이 오전에 담석증 수술하는 성도가 있어 수술 전에 기도해 주었는데 최종 검사 때에 담석이 보이지 않아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오후에 어떤 집사가 일하다 다리를 삐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얹고 또 기도했는데 그 집사는 점점 더 아프다고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투덜거렸습니다. “하나님! 오전에 한번 권세가 임했으면 오후까지 한 번 더 봐주시지 하루 동안에 되다 안 되다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 일로 목사님은 권세의 주인은 예수님이지 사람이 아님을 깊이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권세의 나타남에 대해 설명한 후 목사님은 누가복음 10장 20절을 읽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그 구절을 읽고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신앙의 삶이란 성령 안에서 평안하고 감사하며 상식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성령의 계시라고 새벽 네 시에 전화로 여러 집을 깨우는 것은 문제입니다.”
그때 당시 새벽 4시에 목사님께 전화할 때 그 여자는 목사님의 연락처를 알기 위해 여러 성도의 집에 전화를 했었던 것입니다. 그때 목사님의 얘기를 듣고 그 여자가 말했습니다. “저도 그런 태도가 좋지 않은 태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잘못된 영을 받은 것 같아요.”
그러자 목사님은 다시 덧붙여 말했습니다. “자매님!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행복하게 살고. 자기 심령과 가정에 기쁨이 있고, 때로는 은사의 표현도 절제할 줄 알고, 인내할 줄 아는 건전한 신앙생활이 필요합니다. 그런 생활은 제쳐놓고 병 고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순서가 바뀐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은 마태복음 7장 17-27절을 읽자고 했습니다. 그 구절에는 “신앙을 열매로 알 수 있다! 주님의 이름을 형식적으로 부르는 자가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천국에 간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해도 주님은 그들을 도무지 모른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구절을 읽고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귀한 것은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마지막에 인정하시는 바탕은 집을 지은 기초입니다. 그 기초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목사와 교인들이 집에 너무 신경을 쓰느라 기초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너무 일이나 사업을 중시하다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기초와 기준을 벗어나서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대화를 한 후 그 여자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되어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되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
오늘날 곳곳에서 수많은 ‘개인적인 계시’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한 계시로 여러 가지 아픔과 반목의 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전에 그런 잘못된 계시로 인해 엄청난 혼란이 야기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한부 종말론’에 관한 계시입니다. 성경에 근거가 없이 ‘1992년 10월 28일 휴거설’을 주장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타락하고 얼마나 많은 교회와 가정이 깨졌는지 모릅니다.
계시에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특별계시는 성경을 말하고, 일반계시는 성경과 같은 특별한 계시가 없이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통로를 말합니다. 흔히 일반 계시에는 3가지 통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연, 역사, 그리고 양심입니다. 그 3가지를 보면 인간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자연만물을 봐도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역사가 진행되는 상황을 봐도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우리 속에 하나님이 심어주신 양심을 보아도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부인함으로 하나님의 진노에 빠져도 결코 변명하거나 불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만물과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고 범사에 감사하며 어떤 경우에도 평강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일이 벌어져도 그 안에 하나님의 선한 섭리가 있음을 믿고 항상 주 안에서 승리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글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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