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설교자의 길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24세가 될 때까지 남 앞에만 서면 말을 심하게 더듬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몸으로 섬기는 선교사의 길은 갈 것 같았습니다. 1987년 나는 선교사의 비전을 가지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신학교 2년 때는 직접 선교사로 나가기보다는 후방에서 선교사를 지원하는 길로 비전을 수정했습니다. 1991년, 나는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C&MA) 소속으로 ‘선교사 양성과 후원의 비전’을 가지고 귀국했습니다. 미국 선교본부는 한국이 선교지(Mission Field)가 아니라는 이유로 한국에 관심이 없었지만 나는 선교자원국가(Mission Resource Field)로서 한국의 잠재력을 생각했습니다. 그때 가진 것은 비전밖에 없었습니다. 동역자도 없었고, 재정과 교단배경도 없어서 한국에서 생짜 개척사역은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시련 중에 국내외 여러 교회에서 담임목사 청빙제의도 있었습니다. 좋은 조건을 제시받고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조건 때문에 교회를 옮기는 것은 큰 죄예요.”라는 아내의 말이 비전유지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만약 조건에 따라 비전을 수정한다면 그때는 비전이 야심임을 드러내는 때가 될 것입니다. 야심(野心)을 가지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덕도 아닙니다. 비전은 ‘자기’를 포기하면서 가지는 찬란한 꿈입니다. 안정된 교회 담임목사 자리보다 선교비전을 붙드는 모습이 어리석게 보여도 원래 선교란 어리석은 사람이 있어야 이루어집니다. 어떤 분은 “현실을 너무 모른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너무 현실(現實)만 보면 진실(眞實)은 모습을 감출 것입니다. 2002년 C&MA 선교사 후원단체의 명칭을 성경 ‘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딴 요삼일육선교회(John316 Mission)라고 붙였습니다. 점차 비전의 열매가 생겼습니다. 인터넷 말씀 사역에 은혜가 넘쳤고, 비전의 동역자도 생겼습니다. 문서선교를 담당한 미션퍼블릭 사역도 풍성해졌고, 사랑칼럼 독자도 많아졌습니다. 신기루 같은 비전이 신기하게 현실이 되는 모습을 보면 비전이 있는 곳에 반전(反轉)도 있음을 실감합니다. 비전의 길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동행자입니다. 선교는 혼자 못합니다. 한국에서 선교사 후원사역을 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동역자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가끔 미국 총회에 참석하면 동료 목사님들의 얼굴만 봐도 힘이 나고, 60이 넘은 선배 목사님들이 “이 목사님! 힘들지요?”라고 하면 그 한 마디만 들어도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마음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어집니다. 가끔 한국을 방문하는 선교사님들에게“선교사님! 힘들지요?”라고 하면 그 한 마디에 눈물짓는 선교사님들이 많습니다. 사람에게는 서로의 눈물을 씻어주는 좋은 비전 친구가 필요합니다. 기술과 의욕과 실력과 자본보다 ‘나를 일으키는 당신’이 더 소중합니다. 비전 친구는 희망의 예표입니다. 목자와 성도가 좋은 비전 친구가 되어 목자는 말씀으로 좋은 성도를 길러내고 성도는 기도로 좋은 목자를 길러내는 은혜의 순환이 있을 때 꽃봉오리의 비전은 만개할 것입니다. 사랑칼럼이 ‘나를 일으키는 칼럼’이 되어 사랑칼럼을 통해 새벽이슬과도 같은 좋은 비전 친구가 많이 일어나길 꿈꾸어봅니다. (060818) ⓒ 글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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