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기적의 주인공이 되는 길 마가복음 1장 40-45절

by 【고동엽】 2022. 12. 8.

< 현대인의 문둥병 >

현대인에게는 수많은 질병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이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측불허의 시대에서 럭비공처럼 이리저리 튀고 있습니다. 기준과 공식이 무시되고, 모든 게 상대적이고, 자고 깨어나면 새로운 기술이 생깁니다. 유행도 금방 변하고, TV채널은 수십 개가 넘습니다. 길이 너무 많기 때문에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혼돈스러운 시대입니다.

외모 지상주의도 현대인의 질병입니다. 어느 날, 잘생긴 남자가 굉장한 미인과 결혼했습니다. 아내는 콧날은 오뚝하고, 눈은 쌍꺼풀이고, 보조개도 있었습니다. 그는 자식을 낳으면 굉장한 미인이 나올 줄 알았는데 딸을 낳아보니까 딸의 얼굴이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아이 때는 그럴 수 있어! 크면 달라져!”라고 해서 10년을 기다렸는데 딸의 코는 납작했고, 눈은 와이셔츠 단춧구멍이고, 보조개도 없고, 아내는 턱이 갸름했는데 딸의 턱은 사각 턱이었습니다.

이 남자는 아이가 병원에서 바뀌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전자 검사를 하고 병원을 고소하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 장모님이 와서 그냥 데라고 살라고 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장모님! 어떻게 그냥 데리고 삽니까? 아이가 바뀌었어요.” 그러자 장모님이 그에게 사진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거기에는 자기 딸과 너무 똑같은 한 여아가 있었습니다. “이게 누구입니까?”“어렸을 때 딸의 모습이네. 결혼 몇 년 전에 공사 좀 했네.”

요새 남편 중에 결혼 전의 아내 사진을 전혀 보지 못한 사람도 많습니다. 너무 공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공사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아름답게 보일 권리도 있습니다. 문제는 얼짱과 몸짱이 되는 데는 신경을 쓰면서 맘짱이 되는 데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모도 잘 가꾸어야 하지만 마음을 더 잘 가꾸어야 합니다.

그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게도 수많은 유사한 질병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복의 기초 원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면 복을 받고 하나님을 이용하면 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형제가 자매에게 말했습니다. “자매님! 몇 달 동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당신과 결혼하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정직하지 못하고 비겁한 프러포즈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지시하셨다!”고 하다가 결혼에 이르지 못하면 하나님은 완전히 엉터리기 됩니다. 그런 모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칭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영적 제비족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날 육체는 멀쩡하지만 영적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 많습니다. 죄를 지어도 죄의식이 사라지고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대표적인 영적 문둥병이고,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녀도 변화가 없는 것도 아주 심각한 영적 문둥병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런 영적 문둥병에 보균자인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그 병으로부터 치유 받을 수 있을까요?

< 기적의 주인공이 되는 사람 >

오늘 본문에는 문둥병자가 주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통해 병을 치유 받고 기적의 주인공이 되는 몇 가지 원리를 깨닫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요?

1.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

본문 40절 첫 부분을 한번 보십시오.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이 구절에서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왔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합니다.

문둥병은 오늘날 한센 병이라고 하는데 이 병은 고통을 감지하는 기능이 상실된 병입니다. 그래서 뜨거운 것에 손을 대고 어떤 상처가 생겨도 고통이 없으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몸의 말단 부분이나 연한 부분의 신경이 없어져서 그 부분이 함몰되고 문드러지게 됩니다. 그런 한센 병을 생각하면 사람에게 고통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릅니다. 사람에게 고통이 없으면 반드시 영적인 문둥병에 걸리게 됩니다.

구약시대에는 이 병에 걸린 사람은 길을 다닐 때 얼굴 아랫부분을 가린 채 “나는 부정하다!”고 외쳐야 했고 사람들과 떨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문둥병자와 인사만 해도 부정하게 여겼기 때문에 문둥병자가 사람들에게 접근하면 돌아 맞아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본문의 문둥병자는 죽기를 각오하고 주님께 다가왔습니다. 그처럼 죽기를 각오하고 주님께 나오는 것이 기적의 주인공이 되는 가장 기초 원리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본문의 문둥병자처럼 되면 대개 절망하고 포기합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처럼 힘들어도 교회에 나오고, 병들어도 교회에 나오고, 급한 일이 있어도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나오기 어려울 때는 더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어렵게 나온 만큼 하나님께서 더욱 큰 축복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내 책임일 수도 있고, 내 책임이 아닐 수도 잇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는데 주님께 나오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입니다. 세상살이가 고달픈 것은 내 책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달픈 모습 속에서 주님께 나오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입니다.

어떤 학생은 몸이 힘들어도 학교는 갑니다. 그러나 교회는 빠집니다. 그런 학생을 볼 때마다 앞날이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몸이 힘들어도 직장은 갑니다. 그러나 교회는 빠집니다. 그런 사람도 결코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변명을 해도 하나님과 돈 중에서 돈을 더 귀하게 보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우리는 결코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힘든 일이 있어도 꾸준히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 모습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지금보다 예배에 더 자주 나와야 합니다. 주일만 나오는 분은 수요예배도 나올 수 있는 꿈을 꾸고, 더 나아가 매일 새벽마다 나올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현재의 처지가 어떻든 상관없이 주님 앞에 나오기를 힘쓰는 자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송명희 시인은 원래 뇌성마비로 태어나 자신의 인생을 저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녀의 집안은 너무도 가난했습니다. 아빠는 결핵에 걸려 매일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와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너무나 가난해서 분유 한 병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일곱 살 때까지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고, 열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밥숟가락을 스스로 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하나님과 부모님을 수없이 원망했습니다. 그녀는 욥처럼 자신의 탄생을 저주했고, 한때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태신앙이었던 그녀는 자살이 얼마나 큰 죄라는 것을 알고 자살을 포기하고, 17세 때부터 그녀는 죽더라도 하나님을 만나고 죽자는 생각으로 하루에 몇 시간씩 목숨을 거는 심정으로 절박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녀는 기도할 때 자신에게 뇌성마비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절규하며 물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 중에 환상을 보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그녀는 자신의 삶에도 하나님이 뜻이 있다고 생각했고, 어떤 절망적 상황에서도 “내가 너를 버리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간증을 합니다.

그녀는 외형적인 것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서 동시에 희망을 보았고 그때부터 더욱 시상이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만나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하나님께 힘써 나오면 하나님께서 편안함은 부족해도 반드시 평안함을 주실 것이고, 재미는 부족해도 의미는 주실 것이고, 항상 기쁨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2. 겸손하게 기도하는 사람

문둥병자가 주님 앞에 나와서 어떻게 했습니까? 본문 40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 장면을 마음속으로 한번 그려보십시오. 그 태도와 언어가 얼마나 겸손한 모습입니까? 이 구절에서 ‘꿇어 엎드렸다’는 주님을 최대한 높이고 감히 주님을 쳐다보지도 못하겠다는 자세입니다. 요새는 주님 앞에서도 눈 똑바로 뜨고 맞먹으려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의 지나친 편견인지는 모르지만 저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눈을 뜨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기도하면서 눈을 똑바로 뜨면 “하나님! 안 들어줄 거예요?”하고 따지는 것 같고 조금 거만하게 보입니다. 반면에 눈을 감으면 “하나님! 저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기도를 들어주세요. 그러나 하나님 뜻대로 하세요.”라고 자기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긴 겸손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기적의 주인공이 되려면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고 기도할 때마다 오늘 본문의 문둥병자처럼 먼저 무릎부터 잘 꿇어야 합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용서해주세요.”라는 표시입니다. 아무리 잘못해도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면 하나님은 용서해주시고 들었던 매를 내려놓으시고 사랑의 품으로 안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뻣뻣이 서서 잘못하지 않았다고 대들면 더 매를 맞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겠다고 신령한 분을 찾고, 신령한 산을 찾고, 신령한 방법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가장 기초 원리는 겸손하게 무릎 꿇고 기도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겸손한 자에게 반드시 흘러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반드시 있는 삶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본문 40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문둥병자가 주님 앞에 나와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주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할 수 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고백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주님은 원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둘째, 주님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철저한 복종의 자세가 담겨 있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예!”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기도할 때도 “내가 이것을 원합니다”라고 요구만 하지 말고, “주님! 무엇을 원하십니까?”라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요새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생각은 없고 받을 생각만 합니다. 어떤 분은 기복주의자처럼 가끔 자기 뜻대로 기도하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다고 쉽게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사실 그런 태도가 기도의 능력과 응답을 차단하는 제일 차단막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원하는지를 먼저 살피고, 내 요구를 관철시키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내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망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어련히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길을 예비하시지 않겠습니까? 기적은 요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내 뜻보다 앞세워서 사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늘 최고의 것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 확고한 믿음을 가지면 기도한 후에 반드시 생기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범사에 감사하면서 계속하면 반드시 최선의 열매가 맺혀지게 될 것입니다.

3. 주님의 사랑을 나눠주는 사람

본문 41-42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이 구절에서 “민망히 여기셨다”는 말은 “아픈 마음을 가지고 크게 불쌍히 여기셨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말씀으로 치유해주셨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그냥 말씀만으로 치유하시지 않고 이 문둥병자에게 특별히 손을 대셨을까요? 아마 사람들이 접촉을 꺼리는 문둥병자였기에 의도적으로 손을 대셨을 것입니다. 그 행위에는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를 귀하게 보고 있다! 너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 주님의 손길을 대하고 몇 년 만에 처음 대하는 사람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문둥병자는 감격으로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동시에 몸과 마음까지 한꺼번에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 사랑이 기적의 원천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말로만 사랑을 말하지 말고 문둥병자와 같은 낮고 비천한 사람에게도 기꺼이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와 구제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교와 구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마음과 기도와 물질로 동참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여기시고 큰 축복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는 책에 나오는 글입니다. 미국의 한 병원에 임종이 가까운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심장마비로 인한 강한 진통제 투여로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습니다. 그때 해병대 복장을 한 한 청년이 병실에 들어섰습니다. 간호사가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아드님이 오셨어요.” 노인은 쇠약해진 손을 내밀었습니다. 청년은 그 손을 두 손으로 꽉 붙들었습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꼬박 밤을 새웠습니다.

간간이 의사와 간호사가 그 병실로 들어와 상태를 체크했습니다. 간호사는 청년에게 눈 좀 붙이라고 했습니다. 그 청년은 괜찮다고 하면서 여전히 손을 내밀어 노인의 손을 꼭 쥐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새벽녘에 노인은 세상을 떴습니다. 간호사가 산소 호흡기와 모든 주사바늘을 뽑을 때 청년이 물었습니다. “간호사님! 저 노인 분은 누구세요?”

간호사가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아니, 이분 아드님이 아니세요.” 청년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러면 왜 이분과 함께 손을 잡고 밤을 새웠죠?” 청년이 말했습니다. “제가 병실 문을 여는 순간 잘못 찾아온 것을 알았어요. 그런데 그 노인의 불쌍한 눈빛을 보는 순간 ‘나는 당신의 아들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도저히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있다가 이분의 임종을 지켜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불쌍한 사람을 붙잡아주는 이런 사랑의 손길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요삼일육선교회가 더욱 그런 일을 잘 감당해서 선교와 구제의 지경을 넓혀가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십시오. 우리가 작은 예수의 손이 되어서 절망하고 힘들어하고 소외되고 냄새나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만져줄 때, 하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도 치유해주시고, 우리의 문제도 해결해주시고, 우리를 기적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4.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사람

주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쳐주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본문 43-44절 말씀을 보십시오.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왜 주님은 문둥병자에게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주님의 기적이 알려지면 사람들은 복음보다 기적에 더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 예수님을 시기하는 사람들로 인해 복음사역에 지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문둥병자에게 ‘사랑의 영’보다는 ‘자랑의 영’이 틈타서 문둥병자가 잘못된 종교 영웅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가끔 보면 신앙생활을 하다가 큰 축복과 기적을 체험하면 여기저기 간증과 세미나를 다니며 자기 신앙과 축복을 자랑하는 경우를 봅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사례비를 노리고 간증을 다니기도 합니다. 본인은 간증이라고 하겠지만 하나님은 그런 자랑을 별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자랑을 하면 듣는 사람까지도 문제 해결과 세상 축복에만 관심을 가지고 진정 예수님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를 세상적인 축복이나 물질적인 축복과 바꾸는 헛된 기복주의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물질에 관심을 크게 두면 복음을 잘 모르게 되고 교회만 조금 다니다가 신앙을 포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느 날, 한 교회에 교회 근처에 있는 식당 주인이 나왔습니다. 그분은 교회도 등록하고 몇 달간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런데 몇 달 후부터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자기를 전도한 장로에게 돈을 꾸어달라고 했다가 장로가 “교인 간에 금전거래는 교회에서 금하고 있어요!”하고 정중하게 거절하자 “사업이 어려울 때 장로가 사랑도 없이 그렇게 매정하게 행동한다”고 험담을 하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이유가 있고 어떤 사정이 있든지 교회에서 교인 간에 돈 거래를 조심해야 하고, 그 문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우리는 꾸지 않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힘써 일해서 재화를 창출하고, 그래도 형편이 쪼들리면 힘써 절약해서 재화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은 문둥병자에게 자랑하지 말라고 명하시면서 동시에 제사장을 먼저 찾아서 치유의 은혜에 대해서 모세가 명한 소제와 번제를 드려 증거하라고 했습니다. 소제는 감사의 예물이고, 번제는 헌신의 예물입니다. 즉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물질을 드리고 하나님 앞에 헌신할 것을 다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항상 얻기보다는 드릴 생각을 하고 교회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생활에 시험 드는 일이 없습니다.

그 주님의 명을 듣고 치유 받은 문둥병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본문 45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그는 신앙과 기적을 자랑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받은 은혜가 감사해서 도저히 주님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오는 간증과 전도는 가장 순수한 간증과 전도입니다. 그처럼 순수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와 헌신과 전도와 선교로 되돌릴 줄 아는 사람이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적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 자기 변화를 이루십시오 >

우리는 기적을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기독교에서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될 과제는 기적과 능력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진짜 기적은 자기를 변화시키는 기적이고, 진짜 능력은 자기를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부단히 나를 바꾸려고 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도 “하나님! 시어머니를 바꿔주소서! 남편과 자녀를 바꿔주소서!”라고 기도하지 말고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바뀔 수 있게 힘주시고 능력주소서!”

내가 바뀌는 것이 진짜 기적이고 진짜 능력입니다. 요새 어떤 은사집회를 보면 능력 받았다는 분들이 사람을 빙글빙글 돌리고, 때리고, 밀어 넘어뜨리고, 최면술을 겁니다. 정말 그것이 능력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꽤 오래 전에 TV에 용한 개가 한 마리 나왔습니다. 그 개는 사람들에게 최면을 거는 개였습니다. 그 개를 보면 사람들이 픽픽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능력이 있어도 개는 개일 뿐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신기한 무엇’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예수님의 심성을 만드는 것입니다. 귀신이 나가고 병을 고치는데 그 심성이 마귀의 심성이라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진정한 기적의 주인공이 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닮은 모습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축복에 대한 오해도 버려야 합니다. 진정한 축복은 예수님 닮은 모습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이 많습니다. 옛날에는 그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저도 청년 때 “전 세계 20대 교회”라는 책에 우리나라 교회가 10개 가까이 있는 것을 보고 흥분해서 그런 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사실이 그리 자랑스럽지 않습니다. 그렇게 대형교회가 많은데 세상은 그대로이고, 일부 교회들은 바벨탑과 같은 건물 건축과 세습 등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면서 오히려 전도에 큰 지장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하는 것’과 ‘교회가 공룡화되는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 무언가 부족한 것이 느껴집니다. 결국 그 모든 원인은 ‘변화된 한 사람의 부족’이 원인인 것을 봅니다. 주님은 진정으로 자기를 변화시킨 기적의 주인공 한 사람을 지금 찾고 계십니다.

문제해결과 기도응답은 오히려 2차적인 문제입니다. 주님은 얼마든지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고, 기도에 응답해주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가장 큰 문제는 나를 변화시킴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기적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신 말씀처럼 항상 주님 앞에 열심히 나오고, 겸손히 기도하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은혜를 갚는 삶을 통해 자기 변화를 이루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적의 주인공들이 되길 바랍니다.

ⓒ 글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