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벨탑을 쌓는 현대인 >
현대인에게 몇 가지 바벨탑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신념입니다. 신념과 신앙은 다른 것입니다. 신념은 나를 믿고 내 생각을 신뢰하는 것이지만, 신앙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추구해야 할 것은 신앙이고,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신념입니다. 인간중심적인 신념은 꼭 인간 바벨탑을 쌓는 방향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단 교주들은 신념이 대단합니다. 대부분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일전에 TV에 나온 장면입니다. 한 이단 교주가 축구를 하는데 다른 신도들은 하는 척만 하니까 그 교주 혼자 몇 골을 쉽게 넣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신도들이 교주가 능력이 있어서 축구도 잘한다고 열렬히 박수를 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이단을 조심해야 합니다.
요새는 이단만큼 무서운 이단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본주의입니다. 인본주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불가능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격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입니다. 이 격언에 많은 사람들이 이끌립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축복의 주체로 여기고 자신이 하는 대로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격언이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는 현대인의 가장 무서운 바벨탑입니다.
그 외에 수많은 바벨탑이 있습니다. 염려가 많은 것도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염려와 교만은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염려가 많다는 것은 하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안중에 두지 않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지나친 걱정과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보려는 교만한 태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또한 상처를 잘 받고 절망을 잘하는 것도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사실 성도의 어려움에는 하나님의 크신 뜻이 있습니다. 그 크신 뜻을 무시하고 절망하는 것은 교만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니체도 처음에는 겸손하다가 나중에 교만해져서 하나님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45살에 미쳐서 정신 이상자처럼 되었고, 결국 누이하고 같이 근친상간하며 살다가 얼마 못 살고 불행하게 죽었습니다. 알렉산더도 처음에는 겸손해서 부하들의 신망을 받고 세계를 호령했지만 나중에는 교만해져서 밤낮 술 파티를 하다 33세에 요절했습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다 겸손하다가도 살만 하면 교만해집니다. 장희빈도 처음에는 겸손하고 온유했습니다. 네로도 17살에 황제가 된 후에 처음 5년 동안은 참 겸손했다고 합니다. 백성과 어울려 스포츠도 하고, 시도 논하고, 극장에서 비파를 연주하며 같이 노래도 불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권력을 잡고 교만해져서 아내와 어머니를 죽이고 자기 스승 세네카도 죽였습니다. 결국 자기도 31살에 죽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 바벨탑 사건이 주는 교훈 >
본문에는 우리가 잘 아는 바벨탑 사건이 나옵니다.
이 바벨탑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노아의 홍수 이후 언어가 아직 하나였던 때, 사람들이 시날 평지에 도달했습니다. 시날 평지는 오늘날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 위치한 바벨론 지역으로 물이 풍부하고 매우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대개 보면 시날 땅처럼 환경이 좋은 곳에 있을 때 사람은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시날 평지에서 사람들은 의기투합을 해서 말했습니다. 본문 3-4절 말씀을 보십시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그들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과학 기술인 벽돌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바벨탑을 쌓자고 결정하고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세 가지 다짐을 했습니다. 첫째,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고 다짐했습니다. 둘째, 우리 이름을 내자고 다짐했습니다. 셋째,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다짐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다짐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 제국을 세우려 한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을 알고 있었던 그들은 높은 탑을 쌓아야 홍수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인간이 쌓은 탑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바벨탑을 쌓으려는 태도가 아니라 겸손히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사실 홍수가 있게 된 이유는 죄 때문에 있게 된 것인데 죄를 회개하기보다 바벨탑을 쌓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니 얼마나 어리석인 일입니까?
창세기 9장 13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홍수 후에 다시는 물로 멸하지 않겠다고 무지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어야 했는데 그들은 믿지 못하고 바벨탑을 세워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을 치니까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지금도 사람들은 최신 과학기술로 지구를 지키겠다고 합니다. 요새는 이상한 소행성이 지구에 접근하면 미사일로 그 소행성을 부수겠다고 합니다. 또한 만약의 경우를 위해 달에 노아의 방주의 개념을 가진 우주정거장을 세워 지구의 모든 생물의 유전자를 그곳에 보관해놓겠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런 노력들과 과학기술로 과연 지구를 지킬 수 있을까요? 과학기술은 인간에게 편리함도 주지만 오히려 종말을 재촉하기도 합니다.
교만하면 반드시 넘어집니다. 나이가 들면 천재도 치매에 걸릴 수 있습니다. 머리로 올라가는 혈관 하나만 막혀도 우리는 바보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과학기술로 핵무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전 세계에는 수만 기의 핵미사일이 있습니다. 핵미사일을 가진 국가의 대통령 중에 미친 사람 한 사람만 나와도 지구는 멸망합니다. 그처럼 인간의 과학기술이 어느 순간에는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타이타닉호가 처음 출항할 때, 선장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라도 이 배를 침몰시킬 수 없다(Even God can't sink this ship).” 하나님은 그 말을 듣고 하나님의 무서움을 알려주셨습니다. 교만하면 망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가 복을 받습니다. 잠언 22장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겸손한 자가 재물도 얻고 영광도 얻고 생명도 얻습니다.
왜 사람이 어려움을 당합니까? 가장 큰 이유는 교만 때문입니다. 문제는 대개 교만이 원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내 교만이 문제야!”라고 진단하고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최고의 지혜인 줄 믿습니다. 교만은 나라도 망치고, 가정도 망치고, 영혼도 망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결코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2.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서로 말하되 자...”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4절 말씀에도 “또 말하되, 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은 기도하지 않고 서로 의견을 내놓으면서 결국 잘못된 결정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한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그들에게 침묵을 가르치려고 한 하나님의 뜻도 있었을 것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너무 말이 앞섰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흩으셨습니다. 그처럼 기도하지 않고 말만 많으면 잘못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보다 침묵과 기도를 앞세워야 합니다. 때로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침묵하면 바로 거기에서 해답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요새는 말하려는 사람은 많고 들으려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다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3장 1절 말씀을 보면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너무 아는 체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요새는 정보화 시대입니다. 인터넷을 통하면 엄청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할 말도 많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아도 모른 척 때로는 침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이 없어야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책을 많이 읽고 많이 알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많아야 합니다. 지식을 쌓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지식을 쌓는 것이 때로는 이론의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많이 알아도 항상 겸손함을 잃지 말고 교만한 모습으로 남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말로나 행동으로 우리 자신은 감추고 주님만 높이려고 해야 합니다.
제가 신학교에 강의를 나갈 때 “강의가 좋았다!”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가끔 성도들 중에 격려하는 의미로 “말씀이 좋다”는 얘기를 해주시면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도 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못난 존재인지는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이 저의 부족함을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시련을 당해도 크게 실망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 같이 죄와 허물이 많이 있는 사람에게는 더 큰 시련이 주어져도 마땅한데 그만큼밖에 시련을 주지 않은 것이 너무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자신의 부족함을 생각하니까 항상 말을 조심하려고 하고, 특히 남 말은 더욱 조심하는 편입니다. 우리는 알아도 모르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고, 어떤 경험을 했어도 그 경험이 다 진리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특별히 대화 상대를 잘 선택하는 것도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왜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타락했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뱀과 대화를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대화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화 상대를 잘 선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항상 긍정적이고 희망이 넘치는 사람과 대화를 하면 자기도 희망이 넘치게 됩니다.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사람과 대화를 하면 자기도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처럼 기도를 생활화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재현하는 도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재현하셨고, 제자들은 주님이 하신 말씀을 재현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이 하신 말씀을 재현하고 잘못된 말은 주의해야 합니다.
교회의 아픔도 대부분 혀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혀를 잘 붙들어야 합니다. 항상 남을 욕하기 전에 나를 먼저 살펴서 회개하고, 남을 나무라려면 나를 먼저 나무라고, 남을 비판하려면 나를 먼저 비판하고 자신을 가꾸어나가야 합니다. 그런 겸손한 심령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내려주실 것입니다.
3.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바벨탑 사건의 징벌로 말이 통하지 않게 되면서 사람들 사이에는 거의 지옥과도 같은 환경이 펼쳐졌을 것입니다.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마음이 통하지 않는 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내가 사랑과 진심을 담아 얘기했는데 남이 그 말을 가지고 오해하고 상처를 받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말이 안 통하는 것은 지옥이고 말이 잘 통하는 것은 천국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단일 언어를 주신 것은 겸손히 서로 협력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라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축복을 악용해서 바벨탑을 쌓음으로 결국 그 축복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축복을 다시 회복해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과 마음이 통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무엇보다 성령 충만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 것으로 충만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어가 혼잡하게 되고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면 어떤 현상이 생깁니까?
첫째, 언어가 바르게 됩니다. 사람을 자세히 보십시오. 언어가 바르지 못한 사람은 대개 성령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둘째, 언어가 하나가 됩니다. 영어, 일본어, 한국어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는 다르지만 마음과 뜻의 소통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사건이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입니까?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하는데 그것이 자기나라 말로 들린 것입니다. 즉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온전한 의사소통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성령 충만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온전한 의사소통이 이루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면 상대방을 이해하는 탁월성을 가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면 은사를 보여주고, 기적을 행하고, 특이한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의 가장 위대한 특징은 위대한 영적 소화력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어떤 고난도 잘 소화시켜 에너지로 만들고, 어떤 말도 잘 소화시켜 자기 영혼을 살찌웁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서 탁월한 이해심과 겸손함으로 공동체에 기쁨을 주는 복된 심령들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4. 흩어질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장 28절에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9장 1절 말씀을 보면 노아의 홍수 후에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문화 명령을 망각하고 당시 사람들은 비옥한 시날 평지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편안하게 안주하려고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어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조금 살만 하면 하나님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안주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항상 복음 전파의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잘 벌고, 선교를 위해서 돈을 잘 풀 줄도 알아야 합니다. 선교하지 않고 집과 교회에만 돈을 쌓아놓는 것은 불행과 저주를 쌓아놓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가 선교하지 않고 건물 올리는 데만 열중하는 것은 현대판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성도들 사이에 언어가 혼잡하게 되고, 같은 한국말을 쓰지만 이미 마음은 나눠진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교회가 깨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가 바벨탑을 쌓으면 언젠가는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처럼 스스로 선교하려고 흩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강제로 흩으셔서 선교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바벨탑 주위로 모이지 말고 선교를 위해 잘 흩어질 줄 알아야 합니다. 선교는 선교사를 위해 돈만 내는 것이 선교가 아닙니다. 몸도 함께 가는 것이 선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직장을 당장 그만두고 해외에 선교하러 나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큰 교회로만 몰리지 말고 사명을 가지고 동네의 지역 교회로 가는 것도 선교입니다. 편안함을 희생하지 않으면 선교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실 교회가 지나치게 대형화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좋은 결말이 없었고,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고, 성경이 말하는 모습도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커지면서 선교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핍박을 통해 그 교회를 흩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그 주위로 모이는 것은 자기 이름을 내고, 모여서 자기 힘을 과시하려는 표시입니다. 그런 모습은 바벨탑을 쌓는 행위와 똑같습니다.
지금 큰 교회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큰 교회는 성도들이 내는 소중한 십일조가 너무 넘쳐서 본당, 교육관, 선교센터, 기도원, 수양관 등을 계속 세우며 몸집을 불립니다. 그렇게 몸집을 불리면 더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처럼 바벨탑을 쌓는 것과 방불한 모습은 지혜롭게 지양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거대한 교회를 계속 스스로 분리시켜서 새로운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 “십일조는 꼭 본 교회에 내야 한다!”고 가르친 개신교의 십일조 신학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원래 십일조는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성전 종사자들, 즉 레위인들의 생활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 제사 일을 담당한 레위인들을 위해 나머지 11지파에서 십일조를 내서 레위인에게 줌으로 레위인들이 백성들의 평균 생활을 하고 성전 사역을 하도록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의 영적인 양식을 책임지는 목회자의 기본 생활과 교회 운영을 돕기 위해 십일조를 본 교회에 내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문제는 어떤 교회는 십일조가 넘쳐서 건물들을 높이 짓거나 심지어는 세상 사업을 하는 데에 잘못 전용되고, 어떤 교회는 목회자의 기본생활조차 뒷받침하기 힘들 정도로 불균형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어떤 교회에 물질이 집중되도록 하는 것은 그 교회에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더 나눌까?”를 생각해야 됩니다. 교회도 “어떻게 하면 더 건물을 지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사심 없이 나눌까?”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교회가 크면 성공한 목회자다!”라는 의식을 버리고, 평신도들도 “교회가 크면 성공한 교회다!”라는 의식을 하루 빨리 버려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바벨탑 사상은 하루라도 빨리 제거하는 것이 복되게 사는 길입니다.
며칠 전에 대만의 황수 선교사님으로부터 중국 본토에 소천하신 김 사무엘 선교사님과 함께 추진하던 교회건축 프로그램이 재정 부족으로 진척되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작한 이영동 선교사님의 치과 기공 클리닉 운영에도 재정이 많이 필요합니다. 저희 요삼일육선교회 재정도 그분들의 요청을 감당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저희 선교회에서 선교사님의 필요에 넉넉히 응답할 수 있도록 더욱 기도해주십시오.
하나님은 흩어지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모여 있으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모여서 잘 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사명을 위해 흩어져서 잘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이기만 하고 흩어질 줄 모르면 어느 공동체든지 썩게 되고 죄도 더 많이 짓게 됩니다. 그래서 사명을 생각하지 않고 끼리끼리 모이기를 즐거워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흩어지게 하십니다.
초대 교회 때, 초대 교회 교인들은 모이는 것을 아주 잘했습니다. 끼리끼리 모여서 서로 위로하고 서로 불쌍히 여기는 것은 잘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모이는 것만 잘하니까 하나님께서 핍박을 통해서 그들을 각처로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모이는 것도 잘해야 하지만 선교마인드를 가지고 흩어지는 것도 잘해야 합니다.
< 겸손한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
오늘 우리는 바벨탑 사건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역시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겸손하면 말도 조심하게 되고, 마음도 통하게 되고, 선교사명을 가지고 흩어지기를 기뻐할 것입니다. 또한 사람이 마음에 나약함과 절망이 있고, 원망과 불평이 있다면 그 근본 원인도 대개 자신의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결국 모든 마음의 질병을 치유하는 길은 하나로 귀결됩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한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왜 부부간에 불행이 생깁니까? 근본 원인은 역시 교만에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한두 계단쯤 내려앉으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을 서로 내려앉을 줄 모르니까 누구 때문이라고 따지게 되고 결국 문제가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습니다. 서로 조금만 마음을 낮추면 되는데 쓸데없이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대하니까 자기도 괴롭고 남도 괴롭히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이웃 앞에서 겸손하고, 나 자신의 영혼과 양심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문제는 다 풀리고, 상처는 다 낫게 될 것입니다. 애모라는 유행가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유행가 가사이지만 의미 있는 가사입니다. 그대 앞에서 작아지고 작아지다가 없어져버리면 인간관계의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렇게 작아진 사람이 결국 하나님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심령을 회복해야 합니다. 요새 사람들은 다 높아져 있습니다. 물질이 있으면 벌써 마음이 높아집니다. 물질을 잘못 관리해서 영혼이 빈궁해지는 것을 모릅니다. 반대로 물질이 없어도 마음이 높은 사람이 있습니다. 마치 가난이 축복인 줄 압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난 자체를 축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그처럼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마음이 어떤 마음보다 복된 마음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는 죄인과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의인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의인의 길로 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존재임을 철저히 인정할 때 우리에게는 진짜 사는 길이 열리고,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항상 “나는 주님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라고 자인하며 사는 복된 심령들이 되길 바랍니다.
ⓒ 글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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