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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요한계시록 녹취 6

by 【고동엽】 2022. 11. 29.
짧게 일곱 교회에게 주셨던 말씀을 살펴볼까요? 첫 번째가 에베소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목회했습니다. 특별히 에베소에서 바울이 3년 동안 목회했습니다. 그 가운데 2년 동안 두란노라는 서원을 세워서 열심히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사도 요한도 이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기라성 같은 위대한 사도들에게 말씀을 배웠던 교회가 에베소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는 뭐가 옳은 것인지, 뭐가 잘못된 것인지 진리에 대한 분별력이 탁월합니다. 그래서 이 거짓 선생들을 쫓아냅니다. 바른 진리를 붙잡았습니다. 이것은 에베소 교회가 칭찬받을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그 진리를 온전히 붙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진리가 아름다운 신앙으로 승화되지 못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의 분별을 갖추고 있었지만 이 참된 진리에 대한 붙잡음이 아름다운 신앙으로 승화되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참된 진리를 붙잡고 있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첫 사랑을 버린 교회가 에베소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책망받은 이유는 뭐죠?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겁니다. 이것이 참 두려운 일 아닙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진리에 있어서는 완벽합니다. 알아야 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다 알 뿐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배척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죠? 이런 진리에 대한 온전함을 붙잡고 있었지만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더 뜨거운 신앙으로 열매 맺지 못한 겁니다. 순수한 열정으로 승화되지 못한 겁니다. 이것 때문에 에베소 교회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2장 4절에 보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주님에 대한 사랑을 신실하게 지켜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2장 5절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라”는 겁니다. 회개의 출발점은 뭐죠? 어디에서 잘못된 것인가를 심사숙고하는 것이 바로 회개의 출발점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로 등장하는 교회가 바로 서머나 교회입니다. 서머나라는 지역은 로마가 제국으로 발전하기 전부터 로마와 운명을 함께하기로 로마에 대한 충성을 고백한 곳이 서머나입니다. 서머나가 로마에 대한 절대 충성을 고백한 것처럼, 로마와 운명을 함께하기로 결단한 것처럼 주님께서는 이 서머나 교회에게 죽도록 충성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는 책망받지 않았습니다. 칭찬만 받은 교회입니다. 중요한 특징이 뭐냐면 외적으로 보면 너무나 초라한 교회입니다. 가지고 있는 능력이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많은 핍박과 궁핍함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현대 신앙인들은 이런 서머나 교회 같은 곳에 안 다니고 싶죠. 여러분 왠지 사이즈도 있고 사회적으로 명망도 있고 담임 목사도 좀 유명하고 이런 교회를 다니고 싶죠. 그 교회 다니면 좀 세상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과 인맥도 쌓을 수 있는 그런 교회를 가고 싶어 하죠. 오늘날 너무나 많은 교회에서 뭐라고 얘기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면 어떤 고난과 핍박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면 이 땅에서 승승장구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잖아요. 이런 맥락에서 서머나 교회는 마치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한 교회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끊임없는 고난과 핍박이 있었고 능력이 없었고 외형적으로 너무나 초라한 교회였지만 이 서머나 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사탄이 가장 두려워 하는 성도는 은사와 능력을 많이 가진 성도가 아닙니다. 여러분, 사람들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달란트는 다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몇 달란트를 받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달란트 만큼을 남기고 있는가가 중요한 겁니다. 많은 능력과 많은 권능을 소유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순종보다 자기의 부귀영화와 자기의 잘남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사람이 사실은 사탄의 가장 첫 번째 먹잇감이 되는 겁니다. 나에게 얼마나 많은 은사와 능력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탐욕이 없는 성도가 가장 위대한 성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머나 교회를 보면서 신앙을 너무 단순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예수 제대로 믿으면 고난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는다, 예수 제대로 믿으면 세상적으로 승승장구하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 칭찬 받았던 서머나 교회는 외형적으로 너무나 초라한 교회였지만 하나님에 대한 절대 충성을 지켜낸 교회입니다. 이후에 보겠지만 가장 풍요로운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 아니였습니까?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을 한 번도 받지 못했습니다. 책망만 받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될 지향이 어디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는 버가모 교회입니다. 아까 에베소 교회가 바른 진리는 붙잡았지만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 문제였다면 버가모 교회는 바른 진리를 상실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뭐가 하나님의 뜻이고 뭐가 사탄의 유혹인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별해내지 못했습니다. 바른 진리를 상실한 것이 바로 이 버가모 교회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런 버가모 교회 안에도 안디바라는 위대한 신앙인이 있었습니다. 이 안디바라는 사람은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을 지킨 것 때문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안디바 같은 사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버가모 교회 안에는 발람과 니골라의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여기 발람과 니골라의 교훈을 따랐다는 말은 뭐냐면 음행을 하게 했다는 것인데 여기 음행을 하게 했다는 말은 뭐냐면 하나님께만 충성을 바치지 않고 하나님과 황제 숭배를 겸하여 섬긴 것을 요한계시록은 음행을 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여기 발람과 니골라의 추종자라는 말은 뭐냐면 황제 숭배해도 된다, 이것은 그냥 국가에 대한 하나의 의례이다, 황제 숭배한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면서 황제도 숭배하게 만들고 하나님도 믿게 만든 겁니다. 이런 겸하여 섬김을 성경은 우상 숭배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버가모 교회는 바른 진리를 상실한 것 때문에 이 발람과 니골라의 교훈을 쫓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2장 13절을 보시면 내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다, 여기 사탄의 권좌가 있다는 말은 뭐냐면 황제 숭배의 중심지라는 말입니다. 2장 14절입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다음에 15절에 보면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니까 버가모교회는 안디바라는 위대한 순교자를 배출한 교회이지만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참과 진리에 대한 분별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교회 안에 다양한 수준의 신앙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정말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인들 전체 수준을 상향 평준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 관심이 없다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신앙인이 도리어 이상한 사람이 되버립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하향 평준화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성경 공부를 하는 이유도 여기 있는 겁니다. 그래서 참된 진리를 붙잡는 사람이 그 교회 안에서 인정을 받아야죠. 그리고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쫓는 사람이 있다면 그 교회 공동체 모두가 깨어서 그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그릇된 길을 걸어가려고 하면 책망해야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버가모 교회는 그런 진리를 온전히 붙잡지 못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 가장 긴 말씀이 나오는 교회가 두아디라 교회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나중 신앙생활이 처음보다 좋았습니다. 한 마디로 하자면 신앙이 조금씩 성장해가는 교회가 두아디라 교회입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을 용납했습니다. 여기 이세벨을 용납했다는 말도 우상의 제물을 먹었다는 말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게 만들었다는 말은 황제 숭배를 행했다는 말입니다. 이것 때문에 두아디라 교회도 책망을 받고 있는 겁니다. 2장 21절을 보면 이것이 두아디라 교회의 심각한 문제인데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여기 음행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성적인 순결 이런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 음행이라고 하는 것은 황제 숭배를 행함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과 황제 숭배를 겸함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이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했는데 두아디라 교회는 회개의 기회를 거부했다는 겁니다.


그다음 다섯 번째 나오는 교회가 사데 교회입니다. 사데 교회는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지만 실상은 죽은 교회였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면 스스로는 우리 교회는 살아 있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착각을 하게 된 거냐면 교회 공동체 안에 다양한 프로그램이 돌고 있는 겁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래서 교회가 굉장히 역동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교인들도 스스로 어떤 착각을 합니까? “우리 교회는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살아있는 교회야”라고 착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본질에 근거했을 때 사데 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이해, 하나님에 대한 절대 충성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다양한 프로그램들은 활발하게 돌리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없습니다. 하나님 백성다운 본질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스스로는 살아있는 것처럼 착각했지만 실상은 죽은 교회 이것이 사데 교회입니다.


그다음 나오는 곳이 바로 가장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이 빌라델비아 교회도 서머나 교회처럼 책망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직 칭찬만 받았습니다. 재밌는 것이 칭찬만 받았던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외형적으로 보면 너무나 약한 교회라는 겁니다. 어떤 유력자가 그 교회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능력이 많은 것도 아니고 재정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외형적으로 보면 너무나 능력이 없는 교회입니다. 약한 교회입니다. 너무나 궁핍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의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를 보면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 신앙의 승리라는 것이 환경에 지배받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에게 이것, 저것만 응답해주신다면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더 열심히 헌신하겠습니다, 이 기도만 들어주신다면 내가 한눈팔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절대 충성을 지켜내겠습니다, 우리 아이 좋은 대학만 보내주신다면 우리 아이 좋은 직장만 취직시켜 주신다면 우리 아이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만 하게 해주신다면 뭐뭐 하겠습니다,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그런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삶이 조금 더 편안해지고 가진 것들이 많아지고 지위가 높아지게 되면 정말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더 온전한 순종을 드리고 있나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기도 자체가 얼마나 위선적인가라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잖아요. 서머나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가진 능력은 없었지만 세상적으로 보자면 초라한 교회였지만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것 때문에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여기 3장 9절에 보면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하는 자들”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 사탄의 회당이라는 것이 뭐냐면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을 말합니다. 왜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을 사탄의 회당이라고 하냐면, 유대 전쟁 이후에 유대교와 초대 교회는 완전히 결별합니다. 심지어 이 유대교가 로마 제국에게 “저 초대 교회는 우리 유대교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로마 제국에 핍박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유대교 회당 안에 초대 교인들 출입 금지를 시켰습니다. 특별히 가말리엘 2세라고 하는 요하난 벤 자카이라고 하는 랍비는 여러 회당에다가 18 기도문이라는 것을 전달했는데 거기 12번째가 바로 이단자들을 위한 축복문입니다.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초대 교인들을 이단으로 규정합니다. 그래서 이 유대 전쟁 이후에 유대교와 초대 교회는 완전히 분리되면서 유대교는 로마 제국에 저 초대 교인들은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 아니다 라고 신고를 했고 이때부터 로마가 초대 교회를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박해를 한 겁니다. 여기 무신론자라는 것은 신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로마 제국이 인정하는 신을 믿으면 유신론, 로마 제국이 인정하지 않는 신을 믿으면 무신론인 겁니다. 그래서 왜 초대 교회가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은 거냐면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은 겁니다. 그리고 이후에 313년에 밀라노 칙령 때 콘스탄틴이라는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가 인정하는 하나의 종교로 승인한 겁니다. 이때부터는 무신론이라는 이유로는 박해를 받지 않게 된 겁니다. 그래서 유대 전쟁 이후에 유대교로부터 또 로마 제국으로부터 교회가 핍박을 많이 받았는데 여기 3장 9절에 보면 그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을 사탄의 회당 이렇게 얘기합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 마지막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가장 치명적 문제는 뭐냐면 거짓된 자기 만족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 정도면 좋은 신앙인 아닌가, 우리는 정말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하고 있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받고 있어 거짓된 자기 만족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런데 실상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3장 20절에 보면 예수님은 문 밖에 서서 지금도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노크를 하고 계십겁니다. 제발 그 교회 공동체 안에 나를 좀 영접해라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이 없는 예수 교회인 겁니다. 자기 딴에는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다고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받고 있다고 그래서 우리는 부유하다고 착각하고 있는데 이 풍요에 겨운 나머지 영적인 빈곤과 무력감에 빠져 있는 교회가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이런 라오디게아 교회가 온전히 회복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얼마나 지금 주님과 분리되어 있는지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야죠. 그리고 하나님께 온전히 회개해야죠. 이렇게 정직한 진단이 회개의 출발점입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등장했던 모든 교회는 여기 2장과 3장에 나와 있는 일곱 교회를 바라보면서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은 이 일곱 교회 가운데 어느 교회를 닮아있는가, 우리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책망을 받을 것인가 우리가 회개해야 할 모습은 무엇인가, 그리고 회개하는 자에게 그리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에게 우리 주님께서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그 약속을 붙잡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이런 질문과 묵상을 통해서 우리가 2~3장을 잘 해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주에는 요한계시록 4장부터 보면서 계시록 말씀을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한 주간도 건강하십시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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