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간 건강하셨습니까. 오늘은 요한계시록 3번째 시간인데 이번 주와 다음 주는 요한계시록 본문을 보면서 요한계시록 이야기를 진행하겠습니다. 오늘은 1~3장까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책이 있으시면 옆에 펴 놓으시고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앞부분을 보시면 표제와 인사가 나오는데 특별히 1장 1절부터 4절이 중요합니다. 1~4절을 보시면 요한계시록의 성격이 무엇인가가 잘 나와 있습니다.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계시, 예언, 편지라는 겁니다. 1장 1절에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라는 말씀이 나오고 1장 3절에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 여기 예언의 말씀이라는 것이 나오죠. 그다음에 4절에 보면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한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계시의 책이고 예언의 책이고 편지의 책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인가 라고 했을 때 일단 계시, 계시라고 하는 것은 뭐죠? 그동안 숨겨져 있던 하나님의 뜻이 밝이 드러나는 것이 계시인 겁니다. 어떤 숨겨진 뜻이 밝히 드러났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의 로마 제국을 멸하시고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훼방하는 사탄을 멸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이루어 가실 것이다 이것을 강력하게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시면 두 개의 성이 대조됩니다. 하나가 바벨론이고 또 하나가 예루살렘 성입니다. 재밌는 것이 뭐냐면 바벨론이라는 성을 수식하는 단어는 큰 성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은 크고 거대하고 화려합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 성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된 우리들에게 그리고 이 땅 교회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는 바벨론은 큰 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선물로 허락하시는 그 예루살렘 성은 거룩한 성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뭐죠? 크고 거대하고 화려함이 아니라 거룩함입니다. 이 땅의 교회가 큰 교회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거대한 교회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화려한 교회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땅 교회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뭐죠? 거룩한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이 바벨론이라는 성과 예루살렘 성을 비교하면서 독자들에게 어느 성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인가 이런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계시,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악을 소멸시키시고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새 세상을 펼치실 것이다 이런 숨겨져 있던 하나님의 뜻을 밝히 보여주는 계시의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뭐였죠? 예언은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예언자들을 히브리어로 나비라고 하는데요. 이 나비의 정확한 의미는 대언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예언자의 입에 주신 겁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뭔가를 창작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예언에 보다 본질적인 의미는 대언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의 종을 통해서 전달해주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런데 이 기록을 어떤 형태로 한 겁니까? 편지라고 하는 형식으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요한계시록은 계시의 말씀이고 대언의 말씀이고 그다음 편지라고 하는 틀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중요한 특징입니다.
1장 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것이 원래 요한계시록의 표제이고 제목입니다. 천사를 요한에게 보내서 하나님께서 전달해주신 계시의 말씀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날 이것을 요한계시록 또는 계시록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름은 후대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원래 요한계시록의 제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1장 2~3절을 보시면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으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여 준 것처럼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아서 그의 백성들에게 참된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 이런 식의 주장을 하고 1장 3절에 보면 이 계시록의 말씀을 아는 사람이 없는데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가 그 예언의 말씀을 아는 자라는 겁니다. 그게 누구죠? 그래서 이 교주를 신격화하는 맥락에서 1장 2~3절의 말씀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이단은 요한계시록의 환상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가 환상 계시이고 또 하나가 실상 계시라는 겁니다. 환상 계시라는 것은 뭐냐면 마지막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서 알려준 것이 환상 계시이고 그 환상 계시가 성취되는 이야기가 바로 실상 계시라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많은 환상 계시가 오늘날 이단교주를 통해서 현실로 구현되고 있다 이것이 이단이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에 나와 있는 많은 내용들은 환상 계시인데 그 환상 계시가 오늘날 현실이 되고 있다 실상 계시가 되고 있다 누구를 통해서? 1장 3절에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 듣는 자 지키는 자 이런 식으로 개역개정은 되어 있는데 헬라어 원어를 보시면 읽는 자는 단수이고 듣는 자와 지키는 자는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른 성경은 이것을 제대로 번역을 잘 했습니다. 우리 이전에 개역 성경을 보면 읽는 자는 단수이고 듣는 자들, 지키는 자들 복수로 잘 되어 있었는데 도리어 개역 개정으로 번역하면서 이 읽는 자, 듣는 자, 지키는 자를 다 단수로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읽는 자는 단수이고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은 복수입니다. 왜 그러냐면 고대 사회에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5% 미만으로 봅니다. 소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떤 특정한 교회에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면 그 교회 교인 가운데 한두 사람 정도만 편지를 읽을 수 있는 겁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바울의 편지를 어떻게 접하게 되는 겁니까? 글을 아는 사람이 읽어주면 그것을 듣는 겁니다. 안식일에 회당일에 랍비가 성경을 읽어주게 되면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 랍비가 읽어주는 말씀을 들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겁니다. 오늘날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대부분 다 성경을 읽을 수 있죠. 그런데 고대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중세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가톨릭이 인정했던 유일한 성경은 제롬이 번역했던 벌게이트라는 라틴어 성경이었습니다. 그 라틴어를 일반 사람들이 읽을 수 있습니까?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세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을 어떻게 만나게 되는거죠? 누군가 읽어주게 되면 들음을 통하여서, 그래서 읽는 자는 단수이고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은 복수입니다. 1장 4절에 보시면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일곱 교회는 지역과 시대를 초월한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겁니다. 여러분 일곱이라는 숫자는 1~7 이런 물리적인 숫자가 아닙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온전함, 충만함, 완전함을 뜻하는 것이 일곱입니다. 일곱 교회에 보낸다는 말은 지역과 시대를 초월해서 땅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에게 이 말씀을 전한다는 겁니다. 1장 7절, 요한이 편지를 통해서 강조하는 것은 뭐냐면 고난 받으시고 승천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반드시 강림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강조점이고 그 예수를 뭐라고 얘기합니까? 8절에 보면 알파와 오메가라, 여러분 그리스어, 헬라어의 첫 번째 자음과 마지막 자음 그것이 바로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은 뭐냐면 처음과 끝, 시작과 나중 이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처음 시작부터 마지막 때까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무궁토록 계시고 이 땅을 다스리실 분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이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1장 9절에 보면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고 있던 요한 자신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붙잡는 것 때문에 환난을 받고 있는 겁니다. 1장 9절입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는 섬에 있었다.”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요한이 기독교 신앙을 견지한 것 때문에 밧모 섬에 유배를 떠났다고 설명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제가 요한계시록 첫 시간에 그런 말씀 드렸습니다. 일단 당시 밧모라고 하는 섬에 유배를 보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두 번째 요한이 밧모 섬으로 유배를 떠났다는 근거가 요한계시록 1장 9절의 말씀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후에 그 버가모 교회에 안디바라는 사람이 순교를 당하는데 그 사람이 순교 당한 이유가 뭐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끝까지 지킨 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디바는 처형을 당했는데 요한은 유배를 떠났다, 그다음에 밧모라는 섬에 유배를 떠나서 로마 군인들이 감시하는 가운데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수 있었다, 이것은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유배를 떠난 것이 아니라 이 박해의 때에 사도 요한이 밧모라는 섬에 피신을 갔다고 봅니다. 그래서 피신을 간 그 섬에서 그리스도의 계시를 만나게 되었고 이 계시의 말씀을 문자로 기록하여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이 계시의 말씀을 전해준 것이 요한계시록이다 라고 봅니다. 이 계시의 말씀을 전함을 통해서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강조점은 뭐죠? 지금은 로마 제국이 천하를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로마 제국을 심판하시고 사탄을 멸망시키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구현시켜 낼 것이라는 겁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온전히 받기 위해서라도 로마 제국의 핍박과 고난으로부터 인내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내라,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주제라고 보는 겁니다. 1장 12절에 보면 요한의 편지를 받았던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는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모든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1장 12절에 보면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다” 여기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러분 계시가 우리에게 온전히 전달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계시라고 하는 것은 그동안 숨겨져 있던 하나님의 뜻이 밝히 드러나는 것인데 그 계시가 우리에게 온전히 전달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개념과 세계관의 틀 안에서 말씀하실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날마다 말씀을 전해주시지만 라틴어로 말씀하시면 어떻게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계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먼저 선제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셔야 되고 그리고 계시를 받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개념을 사용하실 때만 계시가 성립됩니다. 그리고 1장 19절입니다. 그동안 세대주의자들이 1장 19절의 말씀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네가 본 것은 일장, 지금 있는 일은 2장과 3장, 장차 될 일은 4장 이하 이런 식으로 요한계시록을 이해했는데 그 영향으로 인해 과거, 현재, 미래 구조로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보다는 요한계시록은 천지 상호작용의 구조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 땅만 바라보게 되면 낙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고 우리 눈 바깥에 있는 초월의 세계를 보여줌을 통하여서 고난 가운데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낼 것을 촉구하는 이 천지 상호작용의 구조로 요한계시록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2장과 3장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진 말씀입니다. 여기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오늘날로 이야기하자면 터키 지방에 있는 지역 교회들입니다. 일곱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을 뜻하는 상징수입니다. 그래서 모든 시대와 모든 지역을 포괄하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가 일곱 교회 안에 담겨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여기 일곱 교회 가운데 어느 교회와 유사한지, 이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무엇을 회개해야 되는지, 이것을 2장과 3장의 말씀을 통해서 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곱 교회에게 말씀을 하실 때 여기 중요한 특징이 계속 나오는데 예를 들어 “뭐뭐 하신 이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뭐뭐 하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뭐뭐 하신 이가 그것을 말씀하신다”라고 하는 구약의 사자 어투로 메시지가 시작됩니다. 그 교회에게 말씀하실 때 제일 먼저 나오는 단어가 뭐냐면 “나는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동안 교회가 걸어왔던 길, 지금 교회가 보이고 있는 걸음을 예수 그리스도는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교회가 보여왔던 모습 가운데 책망을 받을 것은 책망하시고 칭찬을 받을 것은 칭찬하십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고쳐내야 될 문제가 무엇인가를 또 알려주십니다. 그다음에 그 교회가 앞으로 어떤 일을 경험할지를 알려주십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믿음을 지켜낼 것을 촉구하십니다. 그리고 촉구 다음에는 끝까지 믿음을 지켜낸 자들에게 어떤 선물을 허락하실지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말씀을 마무리할 때는 “성령께서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라고 하면서 그 교회에 대한 메시지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1장 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것이 원래 요한계시록의 표제이고 제목입니다. 천사를 요한에게 보내서 하나님께서 전달해주신 계시의 말씀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날 이것을 요한계시록 또는 계시록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름은 후대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원래 요한계시록의 제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1장 2~3절을 보시면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으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여 준 것처럼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아서 그의 백성들에게 참된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 이런 식의 주장을 하고 1장 3절에 보면 이 계시록의 말씀을 아는 사람이 없는데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가 그 예언의 말씀을 아는 자라는 겁니다. 그게 누구죠? 그래서 이 교주를 신격화하는 맥락에서 1장 2~3절의 말씀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이단은 요한계시록의 환상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가 환상 계시이고 또 하나가 실상 계시라는 겁니다. 환상 계시라는 것은 뭐냐면 마지막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서 알려준 것이 환상 계시이고 그 환상 계시가 성취되는 이야기가 바로 실상 계시라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많은 환상 계시가 오늘날 이단교주를 통해서 현실로 구현되고 있다 이것이 이단이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에 나와 있는 많은 내용들은 환상 계시인데 그 환상 계시가 오늘날 현실이 되고 있다 실상 계시가 되고 있다 누구를 통해서? 1장 3절에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 듣는 자 지키는 자 이런 식으로 개역개정은 되어 있는데 헬라어 원어를 보시면 읽는 자는 단수이고 듣는 자와 지키는 자는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른 성경은 이것을 제대로 번역을 잘 했습니다. 우리 이전에 개역 성경을 보면 읽는 자는 단수이고 듣는 자들, 지키는 자들 복수로 잘 되어 있었는데 도리어 개역 개정으로 번역하면서 이 읽는 자, 듣는 자, 지키는 자를 다 단수로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읽는 자는 단수이고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은 복수입니다. 왜 그러냐면 고대 사회에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5% 미만으로 봅니다. 소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떤 특정한 교회에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면 그 교회 교인 가운데 한두 사람 정도만 편지를 읽을 수 있는 겁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바울의 편지를 어떻게 접하게 되는 겁니까? 글을 아는 사람이 읽어주면 그것을 듣는 겁니다. 안식일에 회당일에 랍비가 성경을 읽어주게 되면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 랍비가 읽어주는 말씀을 들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겁니다. 오늘날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대부분 다 성경을 읽을 수 있죠. 그런데 고대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중세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가톨릭이 인정했던 유일한 성경은 제롬이 번역했던 벌게이트라는 라틴어 성경이었습니다. 그 라틴어를 일반 사람들이 읽을 수 있습니까?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세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을 어떻게 만나게 되는거죠? 누군가 읽어주게 되면 들음을 통하여서, 그래서 읽는 자는 단수이고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은 복수입니다. 1장 4절에 보시면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일곱 교회는 지역과 시대를 초월한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겁니다. 여러분 일곱이라는 숫자는 1~7 이런 물리적인 숫자가 아닙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온전함, 충만함, 완전함을 뜻하는 것이 일곱입니다. 일곱 교회에 보낸다는 말은 지역과 시대를 초월해서 땅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에게 이 말씀을 전한다는 겁니다. 1장 7절, 요한이 편지를 통해서 강조하는 것은 뭐냐면 고난 받으시고 승천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반드시 강림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강조점이고 그 예수를 뭐라고 얘기합니까? 8절에 보면 알파와 오메가라, 여러분 그리스어, 헬라어의 첫 번째 자음과 마지막 자음 그것이 바로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은 뭐냐면 처음과 끝, 시작과 나중 이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처음 시작부터 마지막 때까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무궁토록 계시고 이 땅을 다스리실 분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이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1장 9절에 보면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고 있던 요한 자신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붙잡는 것 때문에 환난을 받고 있는 겁니다. 1장 9절입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는 섬에 있었다.”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요한이 기독교 신앙을 견지한 것 때문에 밧모 섬에 유배를 떠났다고 설명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제가 요한계시록 첫 시간에 그런 말씀 드렸습니다. 일단 당시 밧모라고 하는 섬에 유배를 보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두 번째 요한이 밧모 섬으로 유배를 떠났다는 근거가 요한계시록 1장 9절의 말씀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후에 그 버가모 교회에 안디바라는 사람이 순교를 당하는데 그 사람이 순교 당한 이유가 뭐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끝까지 지킨 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디바는 처형을 당했는데 요한은 유배를 떠났다, 그다음에 밧모라는 섬에 유배를 떠나서 로마 군인들이 감시하는 가운데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수 있었다, 이것은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유배를 떠난 것이 아니라 이 박해의 때에 사도 요한이 밧모라는 섬에 피신을 갔다고 봅니다. 그래서 피신을 간 그 섬에서 그리스도의 계시를 만나게 되었고 이 계시의 말씀을 문자로 기록하여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이 계시의 말씀을 전해준 것이 요한계시록이다 라고 봅니다. 이 계시의 말씀을 전함을 통해서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강조점은 뭐죠? 지금은 로마 제국이 천하를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로마 제국을 심판하시고 사탄을 멸망시키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구현시켜 낼 것이라는 겁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온전히 받기 위해서라도 로마 제국의 핍박과 고난으로부터 인내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내라,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주제라고 보는 겁니다. 1장 12절에 보면 요한의 편지를 받았던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는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모든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1장 12절에 보면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다” 여기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러분 계시가 우리에게 온전히 전달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계시라고 하는 것은 그동안 숨겨져 있던 하나님의 뜻이 밝히 드러나는 것인데 그 계시가 우리에게 온전히 전달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개념과 세계관의 틀 안에서 말씀하실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날마다 말씀을 전해주시지만 라틴어로 말씀하시면 어떻게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계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먼저 선제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셔야 되고 그리고 계시를 받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개념을 사용하실 때만 계시가 성립됩니다. 그리고 1장 19절입니다. 그동안 세대주의자들이 1장 19절의 말씀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네가 본 것은 일장, 지금 있는 일은 2장과 3장, 장차 될 일은 4장 이하 이런 식으로 요한계시록을 이해했는데 그 영향으로 인해 과거, 현재, 미래 구조로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보다는 요한계시록은 천지 상호작용의 구조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 땅만 바라보게 되면 낙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고 우리 눈 바깥에 있는 초월의 세계를 보여줌을 통하여서 고난 가운데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낼 것을 촉구하는 이 천지 상호작용의 구조로 요한계시록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2장과 3장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진 말씀입니다. 여기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오늘날로 이야기하자면 터키 지방에 있는 지역 교회들입니다. 일곱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을 뜻하는 상징수입니다. 그래서 모든 시대와 모든 지역을 포괄하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가 일곱 교회 안에 담겨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여기 일곱 교회 가운데 어느 교회와 유사한지, 이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무엇을 회개해야 되는지, 이것을 2장과 3장의 말씀을 통해서 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곱 교회에게 말씀을 하실 때 여기 중요한 특징이 계속 나오는데 예를 들어 “뭐뭐 하신 이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뭐뭐 하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뭐뭐 하신 이가 그것을 말씀하신다”라고 하는 구약의 사자 어투로 메시지가 시작됩니다. 그 교회에게 말씀하실 때 제일 먼저 나오는 단어가 뭐냐면 “나는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동안 교회가 걸어왔던 길, 지금 교회가 보이고 있는 걸음을 예수 그리스도는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교회가 보여왔던 모습 가운데 책망을 받을 것은 책망하시고 칭찬을 받을 것은 칭찬하십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고쳐내야 될 문제가 무엇인가를 또 알려주십니다. 그다음에 그 교회가 앞으로 어떤 일을 경험할지를 알려주십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믿음을 지켜낼 것을 촉구하십니다. 그리고 촉구 다음에는 끝까지 믿음을 지켜낸 자들에게 어떤 선물을 허락하실지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말씀을 마무리할 때는 “성령께서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라고 하면서 그 교회에 대한 메시지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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